선물 주려고 샀다가 슬쩍 넘겼다ㅋ

앙증맞은 사이즈와 센스 넘치는 sns문구들
가볍게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물, 그것이 사람을 ‘만지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고, 그것을 다시 제자리에 둔다. 사람은 사물에 에워싸여 살고 있다. 그것은 유용하다.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그것들이 나를 만지는 것이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사물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마치 그것들이 살아 있는 동물인 것처럼.
이제 생각났다. 얼마 전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느꼈던 것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어떤 들쩍지근하고 메슥거리는기분이었다. 얼마나 불쾌한 기분이던지! 
그것은 그 조약돌 때문이었다. 틀림없다. 그 불쾌함은 조약돌에서 내 손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래, 그거다,
- P27

바로 그거야. 손안에서 느끼는 어떠한 구토증.
- P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한 공간에서 한 시대를 살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난 시간을 사는 사람, 즉 존은 '시간 밖에서 사는 사람'이다. 유한한 우리의 시간에 비해 존의 시간은 우리와 달리 넉넉했다. 4천 년을 살아온 주인공 존은, 구석기 후반에 걸쳐 현재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살고 있다.



<맨 프럼 어스>는 현생 인류가 현재를 사는, 아주 아주 오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다소 획기적인 영화다.

 

 

2021년 나의 첫 영화다. 나는 또 이렇게 SF 장르를 벗어나지 못했다. 책 보다 영화의 편식이 유난히 심한 나를 질책하며 새해 첫 영화를 시청한다. 그리고 황당하게 <맨 프럼 어스> 2편을 먼저 보고 다시 1편을 찾아서 보고 있다.

 


<맨 프럼 어스> 1편은 SF 장르지만, 화려한 CG도 스펙터클한 장면도 없는 영화다. 소박하지만 아주 탄탄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반전의 재미로 이야기는 끝을 낸다. 먼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존과 그 이야기를 게임처럼 흥미롭게 토론하고 경청하는 사람들만 있다. 장소의 변화도 거의 없고 역동적인 사건도 없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다. 보는 나도 이미 존의 이야기에 빠져 두 눈을 반짝이는 호기심으로 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겨울 따뜻한 난로를 끼고 도란도란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정다운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존의 이야기는 누구나 놀랄 만한 이야기고, 누군가에게는 분노를 누군가에게는 억지 같은 이야기다. 난로 옆에 앉아 덤덤히 이야기하는 존이 만 4천 년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할 때, 이들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편과 속편에도 등장하는 고흐의 그림은 그가 오랜 시간을 살았음을 증명한다. 한때 고흐의 친구였던 존은 오래된 우정을 간직하듯 고흐의 그림을 늘 소중히 지니고 다닌다.


존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모두 권위 있는 학자다. 인류학자, 고고학자, 심리학자, 절실한 기독교 신자 등 학문을 연구하는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존의 이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그들을 놀랍게도 했지만,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존은 교수로 아주 능력도 있고 인간성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편의 <맨 프럼 어스>는 그를 아는 동료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떠남을 아쉬워하며, 마지막으로 존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만난 자리였다. 진지하게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료들의 정을 느낀 존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고 만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죽지 않는 존의 시간은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과 연결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역사적인 사건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든 반박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그의 이야기는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가 한참 흘러 종교적인 인물에 관한 존의 이야기는 이들을 모두 충격에 빠뜨렸다. 그동안 자신들이 알던 사실을 모두 부정하는 획기적인 이야기는 영화 속 인물뿐만 아니라 영화를 감상하는 이들도 아주 불편하게 만들 소지가 있었다. 반기독교적인 영화로 반감을 살 수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에서도 절실한 기독교 신자의 분노가 표출된다. 그들은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다. 그렇게 이들의 질문과 이야기는 쉽게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듣는 동료들의 힘듦을 느낀 존은 모든 것이 그저 상상을 가미한 이야기라고 마무리 짓는다. 풍선에 바람 빠지듯 뭔가 허탈하지만,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안도하고 동료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떠난다.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까지 나의 차분한 마음은 숨겨 둔 이 영화의 대반전에서 탄식을 내뱉었다,


 

영화의 2편을 먼저 본 나는 허무한 결과를 보며 멍을 때렸다. 그때 쿠키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의미심장한 영화의 반전 수수께끼를 알기 위해 나는 2편을 접하고 1편을 더 유심히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 1편이 논리적인 이야기로 지식의 향연을 펼쳐나간다면, 2<맨 프럼 어스 2: 홀로신>은 약간의 스릴러 적인 면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1편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


 2편에서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정체가 드러나자 떠나려고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1편의 움직임 없던 공간은 2편에서는 조금 확장된다. 학교와 집, 그리고 1편의 연관된 인물의 장소의 공간 확장은 이야기의 범위가 더 다양하고 복잡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리고 존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존이 늙어 간다는 것이다. 홀로세 마지막을 산 존도 이제 최후를 맞이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야기의 맥락이 약간 끊어지는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1편보다는 이야기의 짜임새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다.



1편의 조용한 전개를 생각하면 속편은 긴장감을 자극하지만, 그 긴장감이 주는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를 따르는 학생들의 등장은 무모하기 그지없다.

그를 따르는 젊은 제자들의 활동과 존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구조도 뭔가 어설프다. 존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또 그렇게 흥미롭지도 않다. 후반부로 갈수록 존이 곤경에 빠지는 장면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존의 실체를 알자 기독교적 광신도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구세주가 나타난 것처럼 그에게 질문하며 흥분한다. 조금은 지나친 설정에 영화를 보면서 이건 뭐지라는 싶은 장면이 몇몇 있었다. 존의 정체를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범법 행위가 결코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먼 행동들은 점점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그들의 행동은 영화를 보면서 심지어 분노를 일으켰다. 영화의 설정이 이런 의도였다면 성공이다. 2편의 다소 산만한 설정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나의 부족으로 영화의 충분한 감상은 떨어졌지만,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영화는 틀림없다. 무언가를 끄적거리는 나, 그저 이 감정을 놓치고 싶진 않으니 말이다.

 

 

근래 접하는 책이며 영화며 종교와 관련된 것이 많다. 비종교인으로 나름 종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중립적인 편이라 생각했다. 종교가 우리의 삶을 더 윤택하게 할 수 있지만, 근래에 부정적인 면을 너무 많이 접한지라 종교에 대해 자꾸만 편견이 생기고 있다. 본질이 흐려지는 종교의 순기능이 점점 더 왜곡되는 현상을 지켜보는 것이 많이 불편하다. 주인공 존은 그저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내고 싶다. 하지만 주변은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존에게서 사람들은 비범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을 끄는 묘한 힘도 느꼈다. 그의 탁월한 능력은 존이 말했듯이 많은 경험에 대한 깨달음의 축적이라고 말한다.

 


아주 오랜 시간을 죽지 않는 존은 우리에게 선지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불멸의 힘은 마치 전지전능함으로 과대 포장된다. 그래서 그에게 특별함을 부여하고 위대함을 발견하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존이 말했듯이 그저 자신은 한 공간에서 한 시대를 살아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 또한 지나온 시간을 공부했다고, 단지 오랜 경험의 축적은 우리가 몰랐던 진실에 대해 조금 더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존에게 경험의 축적은 그가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서도 느긋한 여유를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존의 여유가 사람들에게는 마치 성인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나에게 던져준 질문이 제법 많은데,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에, 한숨 짓게 된다. 영화를 보고 이렇게 긴 시간 끄적거려 본 적은 처음 같다. 정리되지 않는 머리도 영화처럼 계속 불편하다.

 


마침, 묘하게도 넘긴 책이 샤르트르의 <구토>


그의 글이 강하게 눈길을 끄는 건지금 나의 기분을 대변한 듯한 반가움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 나에게 일어났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늘 있는 어떤 확신이나 뻔한 일과는 달리, 마치 질병에 걸리듯 닥쳐왔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나는 기분이 좀 이상하고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그뿐이다. 그것이 일단 자리를 잡고는 꼼짝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기에,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고 쓸데없는 걱정이었다고,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라디오 2021-01-2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프롬 어스> 인생 SF죠. 2편은 평이 좋지 않아서 걸렀는데, 궁금하긴하네요ㅎㅎ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1월 가을

통도사를 찾았다
산사로 들어서는 진입로부터

길은 마지막 가을 빛을 태우고 있었다

‘산사 순례‘

늘 푸근하고 여유로움을 선사한다
조용히 사색의 길로 들어선다

자연과 어울림이 조화를 이룬
세계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불교 유산




‘‘인도와 중국엔 석굴사원이 있고,
일본엔 사찰정원이 있고,
우리나라엔 산사가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 [초특가판]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1
피터 웨버 감독, 스칼렛 요한슨 외 출연 / 기타 (DVD)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요하네스 베르메르, 1665년 작품

출연/콜린 퍼스, 스칼렛 요한슨
감독/ 피터 웨버



요며칠 가을비와 바람이 가져다주는 차가움은 어느새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는 안타까움을 던져 주었다. 이 가을이 가기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 시간에 대한 미련에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찾은 영화 한 편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네덜란드의 황금기 17세기는 경제적 부흥과 동시에 문화도 황금 꽃을 피웠다. 특히 부유층의 예술가의 후원은 그들의 활발한 작품 활동을 도왔다. 작품 제작을 의뢰하고 주문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영화 속 인물 또한 당시 화가 렘브란트와 함께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요하네스 베르메르‘다.

네덜란드의 황금기 1665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영화는 그의 작품 <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탄생하는 과정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주인공 소녀의 실존 여부는 아직도 논란이 많지만, 오묘한 그녀의 표정과 분위기는 명화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작품이다. (참고로 책에서 소녀는 실제 인물이 아니라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명한 ‘트로니(Tronie)라는 회화 연구 기법으로 특정한 얼굴 타입을 상상하여 만든 모습‘이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경을 유심히 보면 베르메르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소품과 배경들이 얼핏얼핏 눈에 들어온다. 연출의 디테일함이 보이는 장면이 꽤 많다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작품 <와인잔을 들고 있는 소녀> 에서 붉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는 젊은 여인과 그녀를 아주 음침한 눈길로 술잔을 거들고 있는 남성이 보인다. 영화 속 등장 인물이 이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보이는 아주 간사한 눈빛과 함께 후원자의 간교함이 드러나는 감독의 연출은 정말 흥미있는 장면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작품 속 테이블 위 은쟁반에 있는 노란 레몬의 의미를 안다면 더 재미지다. 당시 레몬은 와인의 풍미를 더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했지만, 회화에서 ‘레몬‘의 의미는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경고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다.

이 영화가 흥미진진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정말 조용하고 잔잔하다. 그래서 지루하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이런 잔잔함과 여운을 즐기는 나로서는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
영화는 당시 예술가와 후원가의 관계를 이야기 하기도 한다. 생계를 위해서 작품 활동을 해야만 하는 예술가로서의 고뇌가 담겨 있다. 그리고 하인과 주인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도 담고 있다. 물론 영화적 상상력으로 만든 이야기일지라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탄생 배경이 될 수 있는 스토리가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략하게 이야기 하자면,
집안의 몰락으로 인해 하녀로 일하게 되는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집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하녀라는 직분으로 ‘순응‘하면서 살지만, 결코 자신을 놓지 않는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작품에 작지만 영향력을 미치기도 한다. 베르메르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자신의 느낌대로 ‘의자‘를 치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트의 과감한 행동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묘한 쾌감과 희열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리트‘의 느낌을 읽고 작품에 담아내는 베르메르는 그의 그림에서도 의자를 치웠다.

조용하지만 둘의 관계는 시간이 갈 수록 애잔하게 다가온다. 어느새 서로의 마음에 들어선 감정들은 그들의 눈빛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소리없는 애원, 선을 넘지 않는 서로의 절제에서 그들의 간절함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은 더 관능적이었다. 그래서 더 설레임을 자극했다. 자극적인 장면과 대사 한 마디 없지만, 온몸의 세포가 반응하는 시간이었다. 책이 주는 베르메르의 우울함이 영화에서 로맨틱한 감성을 던져 주고 상상력의 무한한 창을 열게 하는 힘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또 한 권의 책과 영화 한 편으로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과 그의 이야기로 감성 풍만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 하루도 감사해야 될 것 같다.

이 지나가는 가을 감성을 정확하게 자극하고 적중한 영화를 만나게 해 준 것에 대해서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0-11-04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밤에 맥주마시면서 이 영화를 보고 싶어 지네요! 좋은 소개 감사합니다!ㅎ

이뿐호빵 2020-11-04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딱 좋은데요ㅎㅎ
즐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