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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무녀전 ㅣ 조선의 여탐정들
김이삭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1월
평점 :
감찰궁녀였지만 절친의 참혹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궁을 나와 무당골에 은신한 뒤 탐관오리에게 사기를 치며 살아가는 ‘신기 없는 무녀’ 무산, 서자라는 처지에 신내림까지 받아 남들이 듣거나 보지 못하는 것을 듣고 보는 능력을 갖게 된 설랑, 앞 못 보는 무당이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손에 넣는 돌멩 등 범상치 않은 세 사람이 이끌어가는 역사추리소설입니다. 도성과 경기 일대에서 발생한 괴력난신, 즉 복수와 저주를 대신해준다는 두박신의 정체를 알아내라는 밀명을 받은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진실에 다가갈 기회를 잡지만 그때부터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나가는 등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합니다.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우선 이 작품의 미덕부터 소개해보겠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인물들의 캐릭터입니다. 신기 없는 무녀, 신내림 받은 서자, 앞 못 보는 무당 등 세 명의 주인공은 과거의 이력은 물론 현재의 처지나 성격, 그리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재능 등 모든 면에서 매력적으로 설정된 인물들입니다. 특히 감찰궁녀였다가 자진해서 궁을 나온 뒤 ‘사이비 무녀’가 된 무산은 시리즈물 주인공에 어울리는 매력과 카리스마로 중무장하고 하고 있어서 반강제로 떠맡게 된 두박신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지 사뭇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인공들을 돕는 조연들 역시 다양한 계층과 신분을 갖고 있는데다 개성도 강해서 흥미를 유발하는데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여러 번 놀랄 만큼 꼼꼼하고 세세했던 고증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무당 혹은 무격에 관한 폭넓고 깊은 자료조사의 흔적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고, 방대한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조선시대 초기 여러 공간에 대한 묘사 역시 감탄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와 디테일한 고증 등 화려한 재료들에도 불구하고 야박한 평점을 준 가장 큰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그 재료들의 맛을 살려내지 못할 만큼 산만하고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470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 속에서 무산 일행은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조사를 벌이고, 때론 살인사건과 마주치기도 하고, 심지어 살해될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겪은 우여곡절 중 선명하게 읽힌 대목은 별로 없습니다. 두박신 조사가 살인사건 수사로 비화하더니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다가 맥이 툭 끊어지고 맙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무산과 그 일행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애초 그들의 목표가 무엇이었던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활인원 한증소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활인원은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데, 저는 활인원에서 벌어진 일들 가운데 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의 인물들은 너무 단편적으로만 소개됐고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퇴장하거나 죽어버리곤 합니다. 사건 역시 뜬금없이 벌어졌다가 흐지부지됐고 범행동기도 방법도 불분명하게 마무리됩니다. 그 와중에 무산 일행은 그저 이리저리 휩쓸려만 다닐 뿐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뭘 얻어낸 건지, 뭘 해결한 건지도 알 수 없으니 사건이 마무리 된 후 무산 일행이 품은 짙은 회한과 분노에 공감하기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평을 보니 대체로 호평 일색이었는데, 그렇다면 제가 오독의 우를 범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서평을 쓴 뒤 별도로 대략의 줄거리를 정리해놓곤 하는 제가 무산의 행보만이라도 정리해보려다가 포기한 걸 보면 100% 오독이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독의 우를 확인하기 위해 ‘감찰무녀전’을 다시 읽는 건 어려울 것 같지만,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저의 야박한 평점보다는 다른 분들의 호평에 귀를 기울여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