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의 창자 명탐정 시리즈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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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에는 출판사가 공개하지 않은 초반 내용이 약간 포함돼있습니다.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라와타(はらわた, 창자)라는 별명을 가진 21세의 하라다 와타루는 명탐정 우라노 큐의 조수입니다. 전국 경찰로부터 지원요청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우라노는 오카야마 현의 작은 마을 기지타니의 절 간노지에서 일어난 방화 및 집단사망사건 조사를 부탁받습니다. 하지만 우라노가 급히 오사카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와타루는 홀로 사건을 조사하는 처지가 됩니다. 며칠간 추리와 탐문을 거듭한 와타루는 나름 살인사건이라는 확신을 갖고 범인을 지목하지만 오사카에서 돌아온 우라노에 의해 그의 추리는 부정당합니다. 문제는 우라노의 관심이 범인의 정체보다 그가 벌인 전대미문의 행위와 그것이 야기할 끔찍한 사건들이란 점입니다. 우라노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되고 일본 전역에서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알겠지만 이 작품의 줄거리에 관해선 극히 일부만, 그것도 무슨 얘긴지 짐작하기 힘들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 설정을 언급하지 않으면 두루뭉술하고 모호한 인상비평밖에 할 수 없는데, 문제는 독자에 따라 그 부분을 스포일러로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그러면서 이 작품에 대해 구미가 당길 정도로만 초반 설정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인공 와타루가 다루는 네 개의 사건이 단편 형식으로 수록돼있는데, 위에 정리한 줄거리는 그중 첫 번째 작품인 간노지 사건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믿기 힘든 상황과 연이은 대량 살인사건들을 해결하는 게 나머지 세 작품의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와타루를 충격에 빠지게 한 건 그 사건들이 과거 20세기의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던 최악의 사건들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는 점, 그리고 범인들 역시 짧게는 20년 전, 길게는 80년 전에 사건을 일으켰던 바로 그 범인들이란 점입니다. 믿을 수 없지만 결국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와타루 앞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합니다.

 

본격 미스터리로 출발했다가 순식간에 (출판사의 소개글대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호러 판타지로 급변하지만 그 해법과 마무리는 다시 본격 미스터리를 통해 이뤄지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통해 이미 시라이 도모유키의 특수설정 미스터리를 충분히 맛봤지만 명탐정의 창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 특수설정 하에 본격과 호러가 기괴하게 얽힌 복합 미스터리라는 흥미로운 서사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실 속 최고의 명탐정이 비현실 속 최악의 살인마와 대결하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호러 판타지도 흥미롭지만 명탐정과 조수가 벌이는 추리 대결은 본격 미스터리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직 미숙하긴 해도 명탐정의 조수 3년차인 와타루는 번번이 추리를 부정당하면서도 꿋꿋이 자신의 갈 길을 갑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진짜 명탐정으로 거듭나는 희열을 맛보기도 합니다.

시라이 도모유키의 전작들이 특수설정은 빛나지만 다소 작위적이고 개연성이 부족하다.”라는 느낌을 줬다면 명탐정의 창자는 와타루의 성장과 활약, 그리고 복잡하긴 해도 정교하게 짜인 본격 미스터리의 서사 때문에 별 거부감 없이 술술 읽힌 작품입니다. 물론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호러 판타지야말로 이 작품의 특수설정의 백미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읽은 뒤 특수설정 자체도 그리 끌리지 않았고 저와는 합이 잘 안 맞는 작가라고 생각해서 직전 작품인 명탐정의 제물은 출간소식을 듣고도 독서목록에서 제외시켰는데, 이 작품을 읽고 나니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볼까, 싶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여전히 시라이 도모유키가 제 취향과 조금은 거리가 있는 작가이긴 하지만 명탐정의 창자같은 작품이라면 특별한 간식처럼 가끔은 읽어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이지만, 최애 작가 중 한 명인 요코미조 세이시와 그가 창조한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그리고 본격 추리가 가미된 일본 공포의 원점이라는 평을 들은 팔묘촌이 자주 언급된 건 무척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아직 팔묘촌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명탐정의 창자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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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자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유혜인 옮김 / 북플라자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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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우샘프턴의 외진 곳에서 연이어 잔혹하게 훼손된 시신들이 발견됩니다. 범인은 피해자들의 가슴을 열고 무자비하게 심장을 뜯어낸 뒤 그것을 택배상자에 담아 가족이나 직장으로 보냅니다. 사우샘프턴 중앙경찰서의 헬렌 그레이스 반장은 첫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연쇄살인의 가능성을 제기했고 그 예상은 적중합니다. 언론에선 피해자들이 성매매 도중 살해된 사실을 지적하며 잭 더 리퍼에 대한 역습’, 즉 매춘부가 성매매 남성들을 단죄하는 사건이라고 보도하는 가운데 헬렌과 수사진은 좀처럼 단서를 찾아내지 못해 애를 먹습니다. 한편 1년 전 해결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헬렌은 수사 외에도 경찰 내부와 언론 등 사방에서 가해지는 공격 때문에 큰 위기에 봉착하고 맙니다.

 

이니미니에 이은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헬렌 그레이스는 영국의 여형사이자 심각한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으며 광적인 오토바이 마니아라는 점에서 안젤라 마슨즈가 창조한 걸 크러쉬 형사킴 스톤과 무척 닮은꼴입니다. 캐릭터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시리즈 첫 편인 이니미니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을 큰 상처를 입은 탓에 그 후 헬렌이 어떤 삶을 살게 됐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매매 남성 연쇄살인을 해결하는 게 헬렌의 가장 큰 미션이며 이 작품의 중심 줄거리이긴 하지만 그에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헬렌을 향한 유무형의 날선 공격들입니다. 새로 부임한 총경 세리 하우드는 헬렌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그녀의 공을 빼앗는 짓도 서슴지 않는 전형적인 관료 빌런입니다. ‘이니미니에서 헬렌 못잖게 큰 트라우마를 얻은 찰리 브룩스는 1년 만에 경찰에 복직하지만 한때 롤 모델로 삼을 정도로 추앙했던 헬렌과의 관계가 서먹해진 것은 물론 그녀가 자신의 복직을 반대했다는 말을 듣곤 어떻게든 공을 세워 그녀에게 한 방 먹일 각오를 다집니다. 또한 특종과 명성을 위해서라면 좀더 많은 살인이 벌어져도 좋다고 여기는 악질 기자 에밀리아 개라니타는 전작에 이어 헬렌과 수차례 충돌을 거듭하는데 이번에는 그녀를 완전히 망쳐놓을 작정으로 넘어선 안 될 선을 수시로 넘습니다.

 

40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무려 121개의 챕터로 나뉘어져있는데 그만큼 빠른 템포와 속도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연이어 희생자가 발생하는 가운데 수사는 지지부진하고 자신을 향한 악의에 찬 공격들까지 방어해야 하는 헬렌의 위기가 더욱 숨가쁘게 느껴지는 건 이런 짧고 빠른 호흡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인물의 심리나 배경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영미권 스릴러의 특징이지만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는 독자를 조급하게 만들 정도로 딱 필요한 요소들만 언급하며 이야기를 빠르게 전개시킵니다.

 

개인적으론 연쇄살인사건보다 헬렌이 겪는 시련들이 더 재미있게 읽혔는데, 바꿔 말하면 그만큼 사건 자체가 덜 흥미로웠다는 뜻입니다. 연이어 희생자가 발생하면 그만큼 독자가 느끼는 위기감도 함께 고조돼야 하는데, 이 작품 속의 연쇄살인은 동어반복 같은 지루한 인상이 더 강했습니다. 마지막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동기는 나름 반전의 맛을 전해주긴 하지만 무게감이나 진정성 면에서는 약해 보인 게 사실입니다. 어쩌면 전작인 이니미니가 워낙 세고 독했기에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게 아쉬움의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엔 이니미니에 대한 스포일러가 굉장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또한 이니미니를 읽지 않으면 여러 가지 팩트와 인물들의 심리 등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이 많기도 합니다. 헬렌은 말할 것도 없고 주요인물 대부분이 이니미니속 사건의 여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급적이면 이니미니를 먼저 읽은 뒤에 이 작품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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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워닝 잭 매커보이 시리즈
마이클 코넬리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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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살인사건 전문기자로 활약하며 두 개의 큰 사건(‘시인’, ‘허수아비’)에 관여한 것은 물론 그 과정을 책으로 펴내 부와 명예를 누렸던 잭 맥커보이. 하지만 50대가 된 지금 그는 페어 워닝(Fair Warning)이라는 소비자 보호를 위한 뉴스 사이트에서 소시민의 경비견을 자칭하며 평범한 기자 생활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그런 그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연쇄살인의 단서를 발견하곤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사고나 자살로 위장한 듯한 엽기적인 살해방법도 특이해 보였고 피해자들이 특정업체에 DNA 조사를 의뢰했던 공통점까지 알아낸 잭은 전직 FBI 요원이자 연인이었던 레이철 월링을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시인’, ‘허수아비’, ‘페어 워닝으로 이어지는 잭 매커보이 시리즈는 단 세 편뿐이지만 무려 24년에 걸친 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1996시인에서 콜로라도의 중소신문사 기자였던 잭은 2009허수아비에서는 LA타임스의 잘 나가는 고액 연봉자였고,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20페어 워닝에서는 소비자 보호를 기치로 내건 인터넷 매체의 기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팔팔하던 20~30대의 잭이 어느 새 50대가 된 건 서글픈 일이지만 살인사건 전문기자라는 그의 본능은 여전히 날카로움과 집요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리즈는 잭과 레이철 시리즈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레이철 월링의 비중과 활약이 압도적입니다. 두 사람은 기자와 FBI 요원이라는 관계를 넘어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굴곡을 겪어왔습니다. “그녀와의 관계는 뜨겁고도 차가웠고 강렬하면서도 소원했으며 친밀하면서도 엄격하게 직업적이었다. 궁극적으로는 마음이 찢어질 듯한 관계였다. 처음부터 레이철은 내 가슴에 거의 낫지 않을 구멍을 남겼다.”라는 잭의 고백대로 애정과 증오를 수없이 주고받으며 25년에 가까운 관계를 이어온 셈입니다. 그리고 허수아비이후 달콤한 미래까지 꿈꿨다가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맞이했던 두 사람이 오랜만에 또 다시 희대의 연쇄살인마를 잡기 위해 손을 맞잡습니다. 이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진실 찾기 또는 진범 잡기 못잖게 잭과 레이철이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 무척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1년 전 우연히 만나 딱 한 번 관계를 가졌던 여자가 살해된 사건 때문에 잭은 경찰에게 심문을 당합니다. 그녀의 사인이 고리뒤통수 관절 탈구, 즉 목을 180도 비틀어 죽인 특이한 케이스라는 점에 주목한 잭은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똑같은 사인으로 죽은 여자가 전국적으로 여러 명이라는 점을 알아냅니다. 또 그녀들이 모두 같은 업체에 자신의 DNA 조사를 의뢰했다는 사실까지 알아낸 잭은 본격적인 조사를 위해 레이철 월링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페어 워닝의 동료기자 에밀리까지 가세하여 의심스러운 부분들을 조사하던 잭과 레이철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는 DNA 산업이 현실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일으킬 수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유전학 연구의 상업화에 따른 실제적 위험에 장르적 관습을 영리하게 적용한 놀라운 작품이라는 뉴욕 타임스의 북 리뷰처럼 페어 워닝은 제대로 된 규제도 없이 무분별하게 일반상품처럼 취급되는 DNA의 위험성을 적시한 작품입니다. 여기에다 여성혐오, 개인정보, 다크웹, 사이버 스토킹, 연쇄살인 등 다양한 코드들이 믹스되면서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지는 사회파 스릴러의 서사를 선보입니다. 2023년에 읽은 유명 작가의 스릴러에서도 페어 워닝과 비슷한 방식으로 DNA 문제를 다룬 적이 있는데, 아직 한국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지만 언제라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묵직하면서도 서늘한 경고처럼 읽혔습니다.

 

50대에 이른 잭과 레이철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특종에 목을 매는 통속적인 기자지만 잭은 정의를 구현하는 일에 매정하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과거 조연으로 등장한 작품에서 얄미운 3류 기자로 묘사된 적도 있지만 나름 나이만큼 성숙해졌다고 할까요? 레이철을 향한 꺼지지 않는 지고지순한(?) 감정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불미스러운 일로 FBI를 그만두고 지금은 사람들 뒷조사로 먹고살지만 레이철의 프로파일러로서의 본능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잭의 요청으로 오랜만에 사건에 뛰어든 레이철은 그녀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며 과거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독자에게 선보입니다.

 

페어 워닝의 엔딩은 두 사람의 미래에 관해 꽤 눈길을 끄는 떡밥을 남겨놓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출간된 2020년 이후 새로운 잭 매커보이 시리즈가 나오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잭과 레이철의 멋진 활약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라면 그 시기가 너무 늦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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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 살인사건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박진범 북디자이너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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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락객들로 붐비는 긴자 거리에 난데없이 나비 떼가 나타난 직후 성경 구절을 새긴 팔찌를 찬 청년이 독극물로 자살한 채 발견됩니다. 청년의 신원을 알 수 없어 답답해하던 경찰은 1주일 후 또 다른 자살 사체와 마주치는데 이번에는 1주일 후의 자살을 예고하는 메시지 - “우리 동지가 항의하기 위해 분신자살을 할 것이다.” - 가 남겨져있어 초긴장상태에 빠집니다. 서로를 동지라 부르는 자들의 정체는 물론 누구에게 무엇을 항의하겠다는 건지도 알 수 없어 경시청 수사1과의 도쓰가와 경부를 포함한 경찰은 당혹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던 중 자살한 자들의 동료로 보이는 한 남자를 찾아내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지만 그들 배후에 사이비 종교단체가 자리하고 있는 걸 알게 된 도쓰가와 경부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묵시록 살인사건202292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무려 70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겨 일본의 국민 미스터리 작가로 불렸던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으로 1980년에 출간됐습니다. 한국에선 80~90년대에 소개된 작품까지 포함해도 출간작 자체가 10편도 되지 않아 미지의 작가나 다름없었는데, 요 몇 년 사이 살인의 쌍곡선’, ‘화려한 유괴에 이어 묵시록 살인사건까지 출간되면서 한국 독자들에게도 더는 낯선 이름의 작가로 여겨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

 

연이은 자살 사체가 발견되는 와중에 도쓰가와 경부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 중 하나는 죽은 자들이 남긴 미소입니다. 독극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어떻게 웃으며 숨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타살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건가? 이런 의문에 사로잡혀 고민을 거듭하던 도쓰가와 경부는 세 번째 자살 사체에서부터 사건성을 감지하기 시작했고, 운 좋게 포착한 자살자들의 동료 한 명을 조사하면서 조금씩 사건의 실체에 다가갑니다. 유일한 심증은 자살한 자들의 팔찌에 새겨진 여러 가지 성경 구절들입니다. 분명 특정 종교단체가 개입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들이 무슨 이유로 자살하는지, 누구에게 항의하는 것인지는 좀처럼 밝혀지지 않습니다.

 

사이비 종교단체를 다룬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여러 편 읽었지만 묵시록 살인사건처럼 거의 돌직구 스타일로 서사를 전개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의 정신을 장악하고 자신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서슴지 않고 죽음을 조종하는 사이비 교주의 행태라든지 교주와 교리에 세뇌된 채 세상의 상식과 등을 저버린, 그래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겁니까?”라는 말을 태연히 내뱉는 신도들의 언행은 그야말로 사이비 종교 서사의 교과서처럼 읽힐 정도입니다. 성경을 인용한 대목이나 교리를 설파하는 장면이 적지 않아서 가끔 머리가 무거워지곤 했지만 큰 무리 없이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단서 하나 없는 막막한 상태에서 사소한 조각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수사를 벌이는 도쓰가와 경부와 그의 동료들 역시 아날로그 시대의 경찰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막다른 벽에 수없이 부딪히면서도 그들의 탐문은 거듭되고, 상상에 불과한 추리라도 기어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밤낮없이 매진합니다. 물론 이런 수사 과정은 요즘의 독자에겐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198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며 읽다보면 각종 문명의 이기에 의지하며 수사를 벌이는 현대의 경찰이나 탐정에게선 느낄 수 없는 제대로 된 진정성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클래식 미스터리만의 정수라고 할까요?

 

사이비 종교문제를 다룬 정통 사회파 미스터리이자 진한 땀 냄새가 진동하는 경찰소설이면서 동시에 본격 미스터리의 향기까지 품고 있는 묵시록 살인사건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혹 고전만의 독특한 맛을 맛보려는 독자에게 잘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소재 자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지만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달리게 만드는 서사의 힘이 워낙 묵직해서 일단 읽기 시작하면 소재에 대한 우려나 비호감은 금세 잊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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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치백 - 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카와 사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허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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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기관절개 호스를 꽂고 등뼈는 S자로 심하게 휜 미오튜뷸러 미오퍼시(근세관성 근병증)’, 흔히들 꼽추라 부르는 중증 척추 장애인으로 살아온 지 30년이 된 40대의 이자와 샤카. 부모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과 함께 중증 장애인 그룹홈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 그녀는 남들 앞에선 성실하며 과묵한 장애여성으로 지내지만 동시에 필명으로 포르노에 가까운 소설과 기사를 쓰는 익명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간절한 두 가지 소망은 다시 태어나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임신과 중절을 하고 싶다.”입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는 간병인 다나카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

 

2023년 상반기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헌치백은 두 가지 면에서 화제가 됐습니다. 하나는 최초로 일반적인 글쓰기가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 수상자가 나온 점이고 또 하나는 작품 자체의 파격성입니다. 1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장애인 당사자가 쓴 충격적이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장애인 서사의 묵직함과 애틋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이 쓴 장애인 서사라고 하면 대부분의 독자는 차별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지레짐작하겠지만, ‘헌치백은 그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물론 작가가 어째서 2023년에 이르러서야 중증 장애인이 최초로 수상하게 됐는지 모두가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라는 수상소감과 함께 종이책 중심의 출판계를 비판하면서 전자책과 오디오북 추가 보급 등 독서 배리어 프리를 호소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장애인 차별을 고발하는 사회소설 혹은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성이 짙은 작품으로 읽히진 않았습니다.

 

고급 창부가 되고 싶고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는 건 장애인인 자신의 처지를 자학하거나 비관해서도 아니고 일부러 꾸며낸 위악도 아니며, 오히려 평범한 여자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샤카가 당연히 꿈꿀 수 있는 바람으로 보였습니다. 임신, 중절, 매춘 등 자신의 몸이 절대 이뤄낼 수 없는 일들에 집중된 주인공 샤카의 욕망은 부도덕하거나 음탕하다는 식의 잣대로 판단해선 안 되며 오히려 평생 인공호흡기와 담을 빼내는 흡인기를 끼고 살아야 하고 식사와 목욕도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며 섹스 자체는 아예 불가능한 그녀만의 소중하고 절실한 욕망으로 봐야합니다. 간병인에게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라고 제안하는 장면에선 누구나 놀랄 수밖에 없겠지만 그와 함께 한없는 애잔함을,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절실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쉽지 않은 혼자만의 내밀한 욕망,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그런 욕망을 작가 역시 오랫동안 품어왔던 게 분명하고, 그것들을 파격적인 설정과 문장, 그리고 샤카라는 인물을 통해 풀어낸 것뿐이라는 생각입니다. 책머리에 실린 이 작은 목소리, 삐딱한 주인공에 부디 큭큭큭 웃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공개석상에서라면 듣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게 분명한 작가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일 겁니다. 이 작품이 장애인 차별을 고발하는 사회소설로 읽히진 않은 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독자에 따라 헌치백은 무척이나 파괴적이고 공격적이며 상대의 마음에 확실히 꽂히기를 바라고 쏘아댄 작가의 화살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금까지 비장애인이 창조했던 장애인 서사에만 익숙했던 탓에 정작 장애인인 당사자가 지나치게 솔직할 정도로 털어놓은 고백에 깜짝 놀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당사자성이야말로 헌치백이 품은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면서 중증 장애여성의 임신과 중절을 다룬 작품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된 작품이지만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특별한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아 그 여운이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사실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언젠가 지금 느끼고 있는 여운이 희미해질 때쯤 다시 한 번 읽는다면 조금은 더 샤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치카와 사오가 비슷한 아류작을 낼 리는 없겠지만 언젠가 당사자성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는 작품을 내놓는다면 꼭 찾아서 읽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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