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삼킨 여자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김재희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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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희연은 픽업아티스트입니다. 목표로 삼은 남자가 자신의 성적 매력과 따뜻한 미소에 넘어오면 두어 번의 짧은 만남을 통해 그를 완전히 사로잡습니다. 그리곤 소액의 돈을 빌린뒤 연락을 차단하고 종적을 감춥니다. 그녀는 1년에 단 두 달, 성적 매력을 자연스레 드러낼 수 있는 여름에만 활동합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피스텔의 1년 치 월세가 전부. 10여 명의 남자에게 각각 1백만 원 안팎만 받아낼 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한참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그녀는 살인사건 용의자로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피살자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그녀이기 때문입니다. 특채로 프로파일러가 된 후 현장실습 차 송파서에 파견돼있던 강아람이 10년 선배 서선익과 함께 설희연을 쫓기 시작합니다.

 

픽업아티스트의 세계를 그렸다는 소개글을 보고 새로 생긴 직업인가, 싶었는데, 검색해보니 특정 상대를 목표로 섹스나 금전적인 이득 혹은 그에 준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사기꾼들을 통틀어 지칭하는 단어.”라고 나옵니다. 20세기의 제비족과 꽃뱀의 활동무대가 오프라인밖에 없었다면 21세기의 픽업아티스트는 온라인에까지 진출하여 이른바 로맨스 스캠이라는 신종 사업(?)을 벌이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설희연은 고전적인 오프라인 플레이만 고집합니다. 왁싱클럽, 워터파크, 카페 등 장소를 불문하고 자신의 촉으로 선택한 목표물에게 접근하여 호감을 얻은 뒤 잘 해야 1~2백만 원의 소소한 사기를 친 뒤 종적을 감춥니다. 미스터리 속 주연급 악녀치곤 잡범에 가까운 소박한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희연의 도피 과정과 과거사를 그린 챕터들은 이 작품이 단순히 범인 찾기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강조합니다. 어린 시절, 개차반인 부모로부터 도망친 뒤 가출팸과 보도방을 전전하며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끝에 누군가와 길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희연이 왜, 어떤 식으로 픽업아티스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1년에 달랑 두 달, 그것도 큰돈도 아니고 낡은 오피스텔의 1년 치 월세만 손에 쥐고 물러나는 건지 그 내밀한 사연들을 조금씩 풀어놓습니다.

희연은 언뜻 생계형 범죄자처럼 보이는데, 그 문제를 놓고 경찰 주인공인 서선익과 강아람이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범행에서 악의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며, 오로지 먹고 사는 것 이상의 목표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족에게 학대당하고 성()을 파는 것 외엔 달리 자신을 지킬 방법이 없었던 희연의 과거사는 단순히 그녀를 생계형 범죄자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착잡함을 불러일으킵니다.

 

희연이 사람의 감정을 제멋대로 갖고 놀다가 야비하게 큰돈을 뜯어내는 악녀 캐릭터였다면 이야기는 훨씬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겠지만, 평생 막다른 궁지에 몰린 채 살아온 그녀의 처지와 그녀가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픽업아티스트 사이의 모순 아닌 모순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할 여지를 남겨줬습니다. 명백한 범죄자지만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랄까요?

다만, 그런 희연의 캐릭터 때문에 다 읽은 뒤 “So What?”이라는 조금은 맥 빠진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부분은 독자마다 생각이 조금씩 다를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작가가 희연에게서 악녀의 향기가 일체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든 그녀에게 구원의 여지를 남겨주려고 일부러 애썼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경찰 주인공인 송파경찰서 서선익과 강아람은 실은 수사보다는 젠더 이슈를 위해 투입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름 베테랑이라는 서선익은 전혀 베테랑처럼 보이지 않았고, 강아람 역시 프로파일러나 형사로서의 장점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두 사람은 밥을 먹을 때나, 잠복을 할 때나 시도 때도 없이 남자와 여자이야기를 꺼내는데, 딱히 새로울 것 없는 상투적인 논쟁이라 그리 눈길을 끌지 못했습니다. (작가의 전작 봄날의 바다에서 만났던 뼛속까지 속물 프로파일러감건호와 생계형 프로파일러여현정은 본의 아니게 살인사건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긴 하지만 그들 역시 주된 역할은 서선익-강아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색다른 범죄와 범죄자를 만날 수 있었던 건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여성의 성 상품화와 섹슈얼리티, 그리고 젠더 이슈를 다룬 작품이란 소개글이 던진 기대감에 다소 못 미친 점, 그리고 독한 양념이 살짝 추가됐더라면, 또 서선익과 강아람이 조금만 더 진지한 태도로 사건 자체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은 끝내 피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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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바다
김재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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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2살에 서울을 떠나 엄마와 동생과 제주도 애월에 삶의 터전을 잡았던 희영은 불과 10년 만에 쫓기듯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동생 준수가 잔혹한 살인범으로 체포된 뒤 구치소에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10년간 희영의 삶은 두려움과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가해자의 가족이란 사실이 드러날까 봐 세상과 담을 쌓았고,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자괴감 때문에 소소하게 웃는 것조차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준수의 무죄를 주장하던 엄마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뒤 희영은 인터넷에 올라온 글 하나 때문에 충격에 빠집니다. 제주도 애월에서 10년 전과 꼭 닮은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어쩌면 두 사건의 범인이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며 유력한 용의자 후보까지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준수의 무고함을 밝힐 수 있다고 믿은 희영은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가해자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고통받아온 희영이 동생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진범을 찾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영이 탐정처럼 활약하는 이야기 혹은 반전을 거듭하는 팽팽한 미스터리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러니까 장르물과 장르물의 경계선에 있다고 볼 수 있는 미묘한 작품입니다.

그런 점에서 죽은 자와 감옥에 갇힌 자, 그리고 고통의 심연에서 웅크리고 숨죽인,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출판사의 소개글은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드러냅니다. 가해자와 그 가족, 피해자의 유족, 그들의 친구와 이웃, 그리고 담당 형사와 프로파일러 등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10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는다기보다는 그 비극들을 각자의 처지에 따라 극과 극의 형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역할에 더 충실합니다. , 회한에 잠기거나 고통스러워하거나 사악하게 이용하거나 또는 완벽하게 은폐하려 하는 등 비극에 대처하는 다양한 군상들의 이야기가 진범 찾기못잖게 묵직하게 그려집니다.

 

애월에 내려온 희영은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오로지 그 범인이 10년 전 (준수가 범인으로 지목됐던) 사건의 범인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근 벌어진 여대생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려 애씁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 10년 만에 만난 학창시절의 절친과 가족, 당시 사건을 맡았던 형사와 프로파일러, 그리고 10년 전 살해된 피해자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희영은 평범한 일반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과 사건 관련자들의 사연에 놀라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학교폭력, 왕따, 가정폭력, 충동조절장애, 시기와 질투, 누명과 복수와 용서 등 예상치도 못한 코드들이 희영의 진실 찾기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애월의 오름과 바다는 희영에게 두 개의 살인사건은 물론 거기에서 파생된 비극까지 떠안긴 것입니다.

 

마지막에 두 살인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긴 하지만, 독자는 누가 범인?”보다는 희영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몸과 마음에 새로 새겨진 상처들, 그리고 그 상처들이 앞으로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더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한 종장은 그래서 더 길고 짙은 여운을 독자의 기억 속에 남겨놓습니다.

 

사실, 김재희의 작품은 저와는 코드가 잘 안 맞는 편입니다. 서평을 남긴 건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의 초기작인 , 짓하다이웃이 같은 사람들뿐이고, 대표작인 경성 시리즈는 첫 편 초반까지밖에 못 읽었기 때문입니다. ‘봄날의 바다곳곳에서도 저와 잘 안 맞는 신호들이 발견됐는데, 의도와 다르게 역효과가 난 인용들(영화나 책이나 제주의 전설), 희영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됐지만 작위적으로 보인 조연들의 사연들(게스트하우스 사람들, 희영의 절친 등), 상식적이지 않았던 몇몇 장면(특히 프로파일러 관련) 등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와 캐릭터, 이야기의 묵직함이 잘 어우러진 덕분에 이번에도 안 맞으면 더는 읽지 않겠다.”던 저의 오만한 예단은 일단은 꼬리를 내려야만 했습니다. 특히 독자의 기대를 배신한(?) 막판의 진실과 엔딩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는데, 이야기에 걸맞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비극성을 도드라지게 만든 봄날의 바다라는 제목과 함께 이 작품을 인상 깊게 만든 1등 공신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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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고 싶다 케이스릴러
노효두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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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이던 딸 진경이 실종된 건 16년 전인 2003. 정상훈은 2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을 돌며 전단지를 돌렸지만 아내마저 세상을 뜨자 자포자기하듯 살아왔습니다. 그런 그에게 고탐정이라는 수상한 인물이 찾아옵니다. 6개월에 6천만 원을 요구하며 자신이 납치살인범을 잡아 딸의 시신을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같은 처지였던 실종아동협회원으로부터 고탐정 덕분에 아들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정상훈은 마지막 도박이란 심정으로 고탐정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용의자를 잡았다는 연락에 흥분과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그런 정상훈 앞에 부산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장 박진희가 나타나 고탐정은 실종자 가족을 이용하는 사기꾼이거나 가공할 살인범이라며 그에 관한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고 압박합니다.

 

살아있든 죽어있든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고통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족의 실종은 살인이나 사고보다 더 끔찍한 상처를 남기는 일입니다. 그것이 자발적인 가출이나 잠적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에 의한 것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납치범을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그래서 이미 죽었더라도 납치당한 자의 시신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면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탐정의 본명은 고남준. 20대 중반인 그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한 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는 이른바 슈퍼 리코그나이저(Super Recogniser)인 그는 사진으로든 방송으로든 한 번 본 용의자의 얼굴을 머릿속에 저장해놓았다가 실제로 그와 마주치는 순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초인식자입니다. 후천적인 계기로 그 능력을 갖게 된 남준이 가장 먼저 시도한 건 유년기에 갑자기 사라진 어머니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학대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실종됐지만 경찰은 불륜+가출이라는 결론만 내리며 등을 돌렸고, 이후 남준은 경찰에 대한 지독한 불신과 증오심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능력을 실종자 가족을 위해 쓰기로 결심한 건 바로 그런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 때문입니다.

 

남준의 또 하나의 캐릭터는 사적 복수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범인을 찾는 것뿐 아니라 남준이 실종자 가족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엔 이런 것도 포함됩니다. “아버님이 생각하시는 거 도와드릴게요. 그놈을 그냥 살려둘 순 없죠.”

말하자면 남준은 괴물과 싸우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 괴물이 된 인간입니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마다하지 않으며, 필요한 정보를 얻어낸 뒤에는 흔적도 없이 처리합니다. 거기엔 일말의 고민도 주저함도 없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결국 부산경찰청 미제사건수사팀장 박진희에게 꼬리를 잡히고 맙니다.

 

세컨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박진희는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경찰에 투신했고, 남성중심의 조직에서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어낸 인물입니다. 하지만 박진희는 좀더 큰 야망을 품고 있었고, 그런 그녀에게 고탐정은 승진과 명예를 한꺼번에 안겨줄 더없이 좋은 먹잇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애초 고탐정을 실종자 가족에게 돈이나 뜯어내는 사기꾼 혹은 제멋대로 점찍은 용의자를 살해하는 살인범으로 치부하던 박진희는 수사를 진행할수록 혼란에 빠집니다. 그의 진지한 태도와 능력을 직접 목격한데다 박진희 스스로 간절히 해결하고 싶어 하는 사건의 범인까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에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탐정을 손아귀에 넣기로 한 박진희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요?

 

노효두는 2021년에 출간된 면식범을 통해 먼저 알게 됐습니다. 역시 납치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좀더 복잡한 미스터리와 페이스오프 액션 스릴러를 겸비하여 개인적으로 꼽은 ‘2021년 미스터리&스릴러 베스트11’에도 포함시킨 작품인데, 덕분에 1년 먼저 출간된 찾고 싶다를 찾아 읽게 된 것입니다. ‘면식범때문에 기대치가 굉장히 높았던 탓에 살짝 싱겁게 느껴진 건 사실이지만, 캐릭터를 창조하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만큼은 앞으로 나올 노효두의 작품에 큰 기대를 걸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만들어줬습니다. 납치나 실종도 좋고 그 어떤 소재라도 좋으니 연말쯤 노효두의 신작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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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버린 이번 생을 애도하며 -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지혜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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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진 않은데 살고 싶지도 않은 순간이 찾아오면 잠시 삶을 멈추고 싶어집니다.”

 

작가는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든 냉동인간이라는 제안에 혹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동안 영화나 소설 등 여러 매체에서 SF라는 장르를 통해 묘사된 냉동인간 뚜렷한 목표 혹은 주어진 임무를 위해 주인공이 비장한 표정으로 냉동실에 들어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무척이나 현실적이고 공감이 되는 상황임에 분명합니다.

시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먼 미래가 배경이지만 인간의 냉동과 해동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작품 속 세상은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불치병으로 사람들이 죽고, 프로포즈를 위해 꽃다발을 건네며, 사춘기 자녀와 부모는 변치 않는 갈등을 벌입니다. 하지만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간 냉동됐다가 해동된 인간들을 구성원으로 지닌 사회는 구석구석에서 심상치 않은 균열을 보입니다. 그 균열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때론 모두에게 충격을 안길만한 심각한 이슈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264페이지의 분량에 비해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적잖은 비중과 이름을 가진 인물만 10여 명에 달해서 벽돌 책을 보면서도 어지간해선 그리지 않던 인물관계도까지 그리며 책장을 넘겨야만 했는데, 뒤로 갈수록 미리 그려놓은 인물관계도가 꽤 도움이 됐던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냉동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힌 인연과 악연을 주고받습니다.

그중에서도 중심에 서있는 인물은 냉동인간 기업의 유능한 팀장 차규선과 그의 약혼녀 이가은, 그리고 꿈속에서 만난 여인과의 재회를 위해 50년간 냉동됐던 김기한입니다. 규선은 냉동기업에 근무하지만 정작 냉동인간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애초 냉동을 선택한 의도 자체가 의심스러웠고, 해동된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약혼녀 가은은 차마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 결혼을 앞두고 전전긍긍합니다. 더구나 그 과거를 까발릴 존재가 자기 앞에 나타나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한편 서류상으론 한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서라고 돼있지만 실상은 비열한 이유로 냉동인간을 선택했던 기한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치자 예의 그 비열함을 드러내며 위기를 일으킵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기둥 역할을 하지만, 그들과 인연과 악연으로 얽힌 그 외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더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만산(晩産) 이후 자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냉동을 택한 엄마의 비극, 냉동인간 기업의 만행을 보도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선과 악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는 기자, 20여 년 전 악연으로 만났던 여자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자 충격에 빠지는 남자 등 냉동인간이라는 소재가 탄생시킬 수 있는 다채로운 인물들이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임팩트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개인적으론 냉동인간에 관한 암울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SF도 로맨스도 미스터리도 아닌, 냉동인간 그 자체 혹은 그것을 자유롭게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낳은 비극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냉동인간은 은밀하거나 비겁하거나 비열하거나(가령, “감출 게 많고 가진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피처”) 아니면 망해버린 이번 생의 종장을 어떻게든 유보해보려고 벼랑 끝 선택을 한 경우들(가령, “미래에는 지금보다는 취업이 잘 되지 않을까요?”)입니다. 때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족에 의해 냉동되는 경우도 등장합니다. 비밀리에 태어난 아이돌의 아기, 위기를 감지한 부모에 의해 강제로 냉동된 자식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냉동인간의 비극은 별 대책도 없이 해동되는 경우 더 극명해집니다. 물려받은 집이나 재산도 없는 상태에서 두 개의 나이(주민증의 나이와 냉동 당시의 나이)를 가진 그들은 다시 얻은 삶을 막막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민증의 나이 때문에 취업도 쉽지 않으며 너무 많이 달라진 사회에 적응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범죄의 60%가 냉동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참사가 빚어집니다. 심지어 보호자가 먼저 죽었거나 사라진 경우 은밀한 절차에 의해 삶을 마감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표지에 새겨진 너 잠깐 냉동되지 않을래? 나중에 꼭 깨워줄게!”라는 카피만 보면 자칫 코믹한 톤의 SF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실은 이 작품은 최근에 읽은 그 어떤 디스토피아 콘텐츠보다도 암울하고 우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깔끔하고 개운한 결말도, 충격적인 반전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적이고 현실감 높은 SF물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아직까지 그 사례가 없는 해동 기술이 언젠가 발명된다면 이 작품에서 묘사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비극들은 그 즉시 현실에서 쉽사리 목격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SF물에 큰 관심도 없었고 냉동인간이라는 소재 자체도 구미가 당기진 않았지만, 냉동인간으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다양한 비극들과 그에 어울리는 캐릭터들을 정교하고 빈틈없는 설계로 그려낸 작가의 필력 덕분에 기대 이상의 인상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후속작으로 들고 나올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임엔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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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 세트 - 전2권 왼팔
방진호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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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 따르면 방진호는 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 분야에서 전설적 마니아층을 거느린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2018년이었는데, 엄청난 살상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소심한 공처가이기도 한 살인청부업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방의강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 죽어도 되는 아이를 통해서입니다. 이후 앞서 발표된 세 작품을 연이어 읽었고, 그 뒤론 신작 소식을 궁금해 하며 기다리게 될 정도로 홀딱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왼팔을 비롯하여 적잖은 작품이 있는 걸 알게 됐고, 이미 절판되어 중고서점에서밖에 구할 수 없는 (그를 전설적 마니아층을 거느린 작가로 만든) ‘왼팔을 읽게 됐습니다. 더 놀랐던 건 처음 접했을 때 생소한 이름이라 대략 데뷔 5년 안팎의 신인과 중견 사이라고 여겼던 방진호가 왼팔을 처음 출간한 게 2001년이란 점입니다. ‘한국이라는 무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액션 스릴러와 피와 뼈가 난무하는 하드보일드 누아르를 구축해온 방진호의 저력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할까요?

 

왼팔은 독자에 따라 ‘SF 액션 스릴러로 규정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1960년대부터 비밀리에 존재해온 국방부 산하의 기관은 각종 실험체를 통해 가공할 인간 살상병기를 만들어왔고, 거기엔 인간과 맹수의 유전자를 조합한 괴수, 좀비처럼 피를 필요로 하며 극강의 재생력까지 지닌 존재, 그리고 흥분이 임계점을 넘으면 온몸이 금속으로 변이하는 괴물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뛰어넘는 피조물들이 포함돼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슬로터라 불리는 그들은 중무장 시 1개 대대와 맞먹을 정도의 살상력을 지니고 있는데, ‘왼팔의 주인공 장도검은 그 슬로터 중에서도 최강의 능력을 지녔던 남자로, 터미네이터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각종 무기가 장착된 기계 팔과 기계 눈을 가진 인물입니다.

 

기관과 그 산하의 연구소가 첨예하게 갈등을 벌이던 10년 전, 장도검은 목숨을 걸고 기관과 대결을 벌인 뒤 그곳을 뛰쳐나왔고, 지금은 연구소출신 주장서가 운영하는 레드아이라는 피자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거구의 몸집에 (기계 눈을 가리기 위해) 늘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데다 성대가 망가진 탓인지 스피커 소리와도 같은 음성을 내뱉는 등 겉으론 꽤나 위협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 그의 직업은 절반쯤은 피자집 종업원이고, 절반쯤은 심부름센터 수준의 의뢰를 받는 소소한 청부업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장도검 주위에선 끊임없이 대형 사건들이 터집니다. ‘기관이 파견한 슬로터가 장도검을 제거하기 위해 달려들기도 하고, 봉인해둔 실험체가 탈출하여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킨 탓에 장도검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합니다. 그때마다 방진호 특유의 잔혹한 액션 스릴러와 하드보일드 누아르가 펼쳐지고, 독자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장면들이 내뿜는 쾌감을 만끽하게 됩니다.

 

이런 살벌한 서사를 중화시켜주는 건 피자집 레드아이에서 벌어지는 막간극 같은 코미디입니다. 개인적으론 방의강 시리즈에서 맛봤던 영국식 블랙유머 혹은 촌철살인 같은 독설만큼 짜릿하진 않았지만, ‘기관과 얽힌 쓰라린 과거를 지녔거나 큰 사건에 휘말려 상처를 입었던 인물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가며 소박한 코미디를 펼치는 장면들은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힘이 들어갔던 두 어깨를 잠시나마 쉬게 해주는 맛깔난 양념입니다.

또 사방팔방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사건이 벌어지다 보니 경찰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서울 중앙서 강력범죄수사팀의 막내형사 이명희(남자형사입니다)는 신경질적인 팀장 주인환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출하면서도 날카로운 관찰력과 행동력을 갖춘데다 장도검 및 레드아이멤버들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 인물이라 등장할 때마다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냅니다.

 

1~2권 합쳐 9개의 챕터로 구성돼있고, 각 챕터마다 사건이 설정돼있어서 연작단편의 형식이긴 하지만 실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진 장편이나 다름없습니다. 두 권을 합치면 748페이지의 적잖은 분량이지만 워낙 페이지 넘기는 속도가 빨라서 하루 안에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저런 설정이 가능하다고?”라고 반문할 독자도 있겠지만, 그런 반감만 지워낸다면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오락성 강한 액션 스릴러+하드보일드 누아르라서 그쪽으로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강렬한 여운과 함께 뒷이야기를 위한 대형 떡밥만 남긴 채 막을 내린 건 무척 아쉬웠지만, 찾아보니 3부작으로 출간된 적경왼팔의 후속작인 것 같아 오늘부터 부지런히 중고서점을 다시 뒤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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