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버린 이번 생을 애도하며 -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 케이 미스터리 k_mystery
정지혜 지음 / 몽실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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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진 않은데 살고 싶지도 않은 순간이 찾아오면 잠시 삶을 멈추고 싶어집니다.”

 

작가는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든 냉동인간이라는 제안에 혹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동안 영화나 소설 등 여러 매체에서 SF라는 장르를 통해 묘사된 냉동인간 뚜렷한 목표 혹은 주어진 임무를 위해 주인공이 비장한 표정으로 냉동실에 들어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무척이나 현실적이고 공감이 되는 상황임에 분명합니다.

시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먼 미래가 배경이지만 인간의 냉동과 해동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작품 속 세상은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불치병으로 사람들이 죽고, 프로포즈를 위해 꽃다발을 건네며, 사춘기 자녀와 부모는 변치 않는 갈등을 벌입니다. 하지만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간 냉동됐다가 해동된 인간들을 구성원으로 지닌 사회는 구석구석에서 심상치 않은 균열을 보입니다. 그 균열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때론 모두에게 충격을 안길만한 심각한 이슈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264페이지의 분량에 비해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적잖은 비중과 이름을 가진 인물만 10여 명에 달해서 벽돌 책을 보면서도 어지간해선 그리지 않던 인물관계도까지 그리며 책장을 넘겨야만 했는데, 뒤로 갈수록 미리 그려놓은 인물관계도가 꽤 도움이 됐던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냉동인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힌 인연과 악연을 주고받습니다.

그중에서도 중심에 서있는 인물은 냉동인간 기업의 유능한 팀장 차규선과 그의 약혼녀 이가은, 그리고 꿈속에서 만난 여인과의 재회를 위해 50년간 냉동됐던 김기한입니다. 규선은 냉동기업에 근무하지만 정작 냉동인간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애초 냉동을 선택한 의도 자체가 의심스러웠고, 해동된 인간은 제대로 된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약혼녀 가은은 차마 털어놓지 못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 결혼을 앞두고 전전긍긍합니다. 더구나 그 과거를 까발릴 존재가 자기 앞에 나타나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한편 서류상으론 한 여인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위해서라고 돼있지만 실상은 비열한 이유로 냉동인간을 선택했던 기한은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치자 예의 그 비열함을 드러내며 위기를 일으킵니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기둥 역할을 하지만, 그들과 인연과 악연으로 얽힌 그 외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분량이나 비중 면에서 더 독자의 눈길을 끕니다. 만산(晩産) 이후 자식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냉동을 택한 엄마의 비극, 냉동인간 기업의 만행을 보도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선과 악의 경계에서 혼란을 겪는 기자, 20여 년 전 악연으로 만났던 여자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자 충격에 빠지는 남자 등 냉동인간이라는 소재가 탄생시킬 수 있는 다채로운 인물들이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임팩트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습니다.

 

‘SF와 로맨스, 그리고 사회파 미스터리의 종합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개인적으론 냉동인간에 관한 암울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SF도 로맨스도 미스터리도 아닌, 냉동인간 그 자체 혹은 그것을 자유롭게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낳은 비극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냉동인간은 은밀하거나 비겁하거나 비열하거나(가령, “감출 게 많고 가진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피처”) 아니면 망해버린 이번 생의 종장을 어떻게든 유보해보려고 벼랑 끝 선택을 한 경우들(가령, “미래에는 지금보다는 취업이 잘 되지 않을까요?”)입니다. 때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족에 의해 냉동되는 경우도 등장합니다. 비밀리에 태어난 아이돌의 아기, 위기를 감지한 부모에 의해 강제로 냉동된 자식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냉동인간의 비극은 별 대책도 없이 해동되는 경우 더 극명해집니다. 물려받은 집이나 재산도 없는 상태에서 두 개의 나이(주민증의 나이와 냉동 당시의 나이)를 가진 그들은 다시 얻은 삶을 막막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민증의 나이 때문에 취업도 쉽지 않으며 너무 많이 달라진 사회에 적응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범죄의 60%가 냉동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참사가 빚어집니다. 심지어 보호자가 먼저 죽었거나 사라진 경우 은밀한 절차에 의해 삶을 마감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표지에 새겨진 너 잠깐 냉동되지 않을래? 나중에 꼭 깨워줄게!”라는 카피만 보면 자칫 코믹한 톤의 SF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실은 이 작품은 최근에 읽은 그 어떤 디스토피아 콘텐츠보다도 암울하고 우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깔끔하고 개운한 결말도, 충격적인 반전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사실적이고 현실감 높은 SF물로 읽힐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아직까지 그 사례가 없는 해동 기술이 언젠가 발명된다면 이 작품에서 묘사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비극들은 그 즉시 현실에서 쉽사리 목격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SF물에 큰 관심도 없었고 냉동인간이라는 소재 자체도 구미가 당기진 않았지만, 냉동인간으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다양한 비극들과 그에 어울리는 캐릭터들을 정교하고 빈틈없는 설계로 그려낸 작가의 필력 덕분에 기대 이상의 인상과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후속작으로 들고 나올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임엔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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