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7
안치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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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다 읽고 나서 안치우 작가의 이력이 궁금해져 찾아보니

2010년에 발간된 ZA 문학 공모전 수상 작품집에 실린 도도 사피엔스가 전부였습니다.

단편 한 편이 경력의 전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안치우 작가는 재림을 통해 뛰어난 필력과 캐릭터 플레이를 선보였는데,

앞으로 주목해야 할 또 한 명의 우리 장르물 작가를 만났다는 점이 무엇보다 반가웠습니다.

 

변호사지만 오래 전부터 키워온 탐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민간조사원으로 나선 독고잉걸,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탐정의 길을 걷게 된 미학 전공 시간강사 강승주,

180cm의 키에 가공할 무력과 뛰어난 추리력, 심지어 해커의 능력까지 겸비한 홍일점 권민,

그리고 전직 경찰로 거미줄 같은 정보원을 확보한 사무장 등

공포의 외인구단을 연상시키는 네 명의 괴짜가 재림의 주인공들입니다.

 

독 소장으로 불리는 독고잉걸과 강승주가 사건 현장에서조차 한시도 수다를 그칠 줄 모르는,

그것도 수시로 샛길로 빠져 사건과는 무관한 엉뚱한 논쟁을 펼치는 캐릭터인 반면,

권민은 여자이면서도 무채색처럼 음산하고 낮은 목소리를 지닌데다

그마저도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묵직한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물과 기름을 섞어놓은 것처럼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독 소장의 멤버들은

사립탐정이 허용되지 않는 한국에서 민간조사원이라는 애매한 타이틀밖에 지닐 수 없었지만

그 열정만큼은 CSI나 크리미널 마인드의 멤버들 못잖게 뜨겁습니다.

 

표제작인 재림과 프리퀄 격인 만남, 그리고 시작등 두 편의 중편으로 구성됐는데,

재림이 종교의 광기가 불러온 끔찍한 연쇄살인을 다루고 있는 반면,

만남, 그리고 시작은 영국을 무대로 펼쳐진 여대생 실종사건 수사를 통해

독 소장과 강승주, 그리고 권민이 한 팀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 사건 모두 결정적인 키 플레이어는 하드보일드 여탐정 권민의 몫이었지만,

엉뚱한 발상과 예리한 관찰력을 자랑하는 독 소장과 강승주의 콤비 플레이 역시

사건 해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두 콤비를 지켜보고 있으면 미드 NCIS의 바람둥이 수다꾼 토니 디노조가 생각나는데,

한없이 무거울 수도 있는 잔혹한 이야기에 만담 형 유머를 가미함으로써

책읽기의 재미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재림에서 기독교 내부의 논쟁과 교리를 여러 장에 걸쳐 강의하듯 서술한 것처럼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장황한 설명을 동원한 점은 눈에 거슬렸고,

독 소장과 강승주, 권민의 캐릭터를 각인시키기 위해 묘사된

약간은 썰렁하거나 작위적인 에피소드들은 동어반복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 가끔씩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현학적인(?) 문장들이 등장하곤 했는데,

작가의 필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지만, 균형감을 잃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이 작품이 지닌 장점과 미덕에 비하면 사소한 아쉬움에 불과할 뿐입니다.

마치 매력적인 시리즈의 첫 편을 본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 덕분에

외인구단멤버들의 좌충우돌 해프닝과 환상적인 팀워크가 단발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시리즈로 이어졌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까지 갖게 됐습니다.

다음 행보를 눈여겨봐야 할 새로운 우리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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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개정판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7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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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 가든으로부터 시작한 편혜영 읽기에 이어

비슷한 이유로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한강의 작품을 출간순서대로 읽기로 했습니다.

이른바 한강 읽기입니다.

한강의 첫 작품집 여수의 사랑1995년에 초판이 나왔고 2012년에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초판과 개정판의 차이라면 작가가 조금씩 문장을 수정했다는 점(개정판 작가 후기 참조),

초판에는 있던 단편 저녁 빛이 빠져서 6편의 작품만 수록됐다는 점입니다.

 

비슷한 이유로 한강과 편혜영이라는 두 작가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불편한 이야기에 대한 끌림입니다.

이문열의 진지함과 묵직함, 신경숙-은희경의 애틋하거나 비틀어진 사랑,

김영하의 발칙함과 도발, 윤대녕의 아스라한 서정성에 차례로 이끌렸던 기호가

왜 느닷없이 불편함 쪽으로 기울었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주기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변덕 외에는 딱히 댈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여수의 사랑은 제목만으로도 눈길이 끌렸던 작품입니다.

일 때문에 짧은 출장으로 한번, 한때 빠졌던 바다낚시 때문에 두어 번 정도 가본 게 전부지만

여수는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지명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판이 출간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야 직접 만난 여수의 사랑

기대했던 대로(?) 무척이나 불편하고, 아프고, 뒤끝이 아린 작품이었습니다.

수록된 나머지 다섯 작품 역시 비슷한 정서와 모양새를 지녔고,

그래서인지 연달아 읽기가 부담스러워서 1주일에 한 편씩만 소화하기로 했습니다.

편혜영 읽기의 첫 작품이었던 아오이 가든때와 똑같은 방식의 책읽기가 된 셈입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남에게 내보일 수 없는 깊은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와 살은 젊지만, 정신은 늙고 병들고 찌들어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년의 끔찍한 일들이 그들을 망가뜨렸지만

나이를 먹은 후 평범하게 살면서 겪게 된 치 떨리는 일들이 원인일 때도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아프거나 타인을 아프게 하거나,

어딘가에서(누군가로부터) 도망치거나 어딘가로 무작정 향하거나,

그러다가 사라지거나 죽거나, 아니면 포기해버리는 선택을 합니다.

 

여섯 작품 모두를 관통하는 설정 중 하나는 가족의 상실입니다.

부모에 의해 기차에 버려진 자흔, 아버지와 여동생의 자살을 겪은 정선 (여수의 사랑),

아버지는 농약으로, 동생은 또래에게 맞아 죽었던 기억을 가진 인규 (질주),

과속 차량에게 임신 5개월의 아내를 잃고 자신은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명환 (어둠의 사육제),

자신의 몫까지 우유 배달을 하다가 사고로 식물인간인 된 쌍둥이 동생을 둔 동걸 (야간열차),

부모의 폭력과 냉담함에 가출하면서 백치 여동생과 헤어져야 했던 정환과

아내와 아들이 가출하고 딸마저 심장병으로 떠난 뒤 저택에 홀로 남은 황씨 (진달래 능선),

사람 좋은 딴따라로 살다가 술에 취해 죽은 아버지를 둔 동식과 동영 형제 (붉은 닻)

하나같이 주인공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출발점을 가족의 상실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에는 정신의 피폐함이 넘쳐흘러 기어이 몸으로 전이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정선은 고질병인 위경련과 안두통 외에 치명적인 결벽증을 앓고 있고 (여수의 사랑),

동걸은 수시로 기차바퀴 소리가 들리는 이명에 시달리고 (야간열차),

정환은 가짜 약임에 분명한 위장약을 몇 봉씩 한꺼번에 복용하기도 하며 (진달래 능선),

동식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폭음과 폭연을 일삼다가 간 경변에 걸립니다. (붉은 닻)

 

그런가 하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또는 그동안 피해왔던 어떤 것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구체적인, 그리고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인물들도 있는데,

의식적으로 외면해왔던 고향 여수를 향해 밤기차를 탄 정선 (여수의 사랑),

식물인간이던 동생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야간열차를 타고 동해로 떠나는 동걸 (야간열차),

이를 악 문 채 온 힘을 다해 주먹을 쥐고 끝없이 달리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인규 (질주),

지금까지의 삶과는 반대로 가장 비인간적이고 비정하게 살기로 결심한 영진 (어둠의 사육제),

그리고 자살을 통해 모든 것에게 종지부를 찍는 명환 (어둠의 사육제)이 그들입니다.

 

여섯 작품 모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한 가지 요소는 이라는 시간적 배경입니다.

가장 극적인 상황들은 모두 밤에 벌어지는데,

밤기차 (여수의 사랑, 야간열차), 밤의 달리기 (질주), 밤의 투신자살 (어둠의 사육제),

밤의 나무 태우기 (진달래 능선), 그리고 밤의 외출 (붉은 닻)이 그것입니다.

밤과 새벽의 어둠은 인물들의 극단적인 행동을 더욱 고립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포장합니다.

그래서인지 여섯 작품의 비주얼은 대체로 흑백 영화나 변색된 컬러에 가깝습니다.

밤기차의 전등, 밤거리의 가로등, 밤의 아파트 불빛, 밤에 불타는 나뭇가지,

그리고 오롯이 밤하늘에 떠있는 달은 어둠을 더욱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요소들로,

등장인물에 동화되고 이입된 독자들에게는 무척이나 서글픈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점심을 먹기 위해 거리로 나서 인파 속에 휩쓸렸을 때

문득 이들 중에도 정선이나 자흔, 동걸, 인규 같은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한두 가지 정도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기 마련이겠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힘든 삶을 살아갈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 기억들을 봉인한 채 무의식 속에 처박아 뒀을 수도 있습니다.

여섯 작품을 읽은 독자 가운데 주인공들의 삶을 지켜보며 치유 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새삼 봉인해놓았던 오래 전의 기억을 끄집어내 다시 한 번 지켜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수의 사랑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책읽기를 피해갈 수 없는 작품집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한번쯤 자신의 기억과 마주할 수 있게끔 해주는,

또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삶을 한발 더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의미에서 존재의 가치가 충분한 작품집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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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 돼지가면 놀이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6
장은호 외 8인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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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의 포스터를 연상시키는 튼실한 돼지 한 마리와

조금은 과장된 크기의 제목을 둘러싼 음산한 붉은 색조의 표지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공포물, 특히 영상으로 만들어진 공포물은 거의 보지 않는 편입니다.

솔직히 무섭고, 기억 속에 남아 수시로 떠오르는 일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

어쩌면 영상보다 활자로 기록된 공포 이야기가 더 오랜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지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책으로 된 공포물에는 자꾸 관심이 가게 됩니다.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오랜만에 만난 다양한 한국 작가들의 단편들이라 더 호기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표제작 돼지가면 놀이를 비롯해 모두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광기와 식인, 꿈과 환각, 육체를 지닌 귀신,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존재들,

시공간의 점프, 소시오패스, 구원(舊怨)과 복수 등

각각의 작품마다 독특한 설정과 기괴한 엔딩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돼지가면 놀이’(유재중), ‘숫자꿈’(김재은), ‘구토’(김유라)가 좋았는데,

세 작품 모두 뛰어난 비주얼 요소를 갖추고 있어 단편영화나 단막극으로 만들어지면

원작의 섬뜩한 느낌이 훨씬 더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무섭다기보다는 안쓰럽고 애틋함까지 불러일으키는 여자 귀신 (여관바리),

평범한 인물에게 닥친 끔찍하고 비현실적인 상황들 (며느리의 관문, 파리지옥),

공포 분위기와 복수극을 잘 접목시킨 이야기 (무당아들, 고양이를 찾습니다),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신과 종교, 혹은 환상에 관한 이야기 (낚시터, 헤븐)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작품들을 맛볼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다만, 소름이 돋을 정도의 공포감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양념이 덜 된 심심함과 아쉬움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공포물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는 저의 경우에도 2~3 작품 정도 외에는

정말 무섭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작품은 없었습니다.

물론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몇몇 상황들이 순간적인 공포심을 자극하기도 하고,

읽을 때는 잘 몰랐던 기괴함이 뒤늦게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작품도 있었지만,

짜릿한 공포를 즐기는 마니아들에게는 2% 정도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한국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단편집이라 좋았고,

저 같은 독자가 소화할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공포물이라 더 좋았습니다.

이 작품이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의 여섯 번째 시리즈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동안 딱히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은 게 사실이지만,

눈여겨 본 몇몇 작가의 작품이 실린 여타 시리즈도 한번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다음에 나올 일곱 번째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도 마찬가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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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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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은 있었지만 계속 미뤄두고 있던 편혜영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첫 단편집 아오이 가든부터 최신간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 연대기를 작성해놓고

순서대로 읽을 생각이지만, 아마 연이은 편혜영 읽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 해야 한 달에 한 권 정도? 그 이상은 뇌나 마음이 소화하기 힘들 것 같기 때문입니다.

(편혜영의 작품을 만나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동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먼저 읽은 작품의 뒷맛을 어느 정도 만끽한 후에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야

제대로 된 편혜영 읽기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보통 누구누구에게 바친다, 감사한다라는 글이 들어가는 책의 첫 머리에

편혜영은 안녕 시체들이라고 간결하지만, 임팩트 있는 다섯 글자를 남겼습니다.

수록된 9편에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미 죽었든, 곧 죽을 예정이든 여러 시체가 등장합니다.

한 번에 1~2편씩만 읽느라 미처 발견 못한 부분이지만, 후반부의 해설을 통해

수록 작품 대부분의 처음 또는 마지막 문장이 시체에 관한,

또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묘사로 이뤄졌음을 알게 됐습니다.

 

여학생의 옷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저수지 뒤쪽의 숲이었다. (저수지)

C는 눈동자가 빠진 하얀 눈으로 내가 흘린 내장들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맨홀)

시체는 왕피천 동쪽 끝자락에서 떠올랐다. (문득,)

그는 깜깜한 밤의 계곡에 매장되었다. (시체들)

 

시체 또는 예비 시체들의 상태도 양호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해부되거나(맨홀), 물에 잠겨 퉁퉁 불었거나(문득,), 여러 조각으로 해체되거나(시체들),

단백질 결핍과 천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습니다(마술피리).

작품 첫 머리에 인쇄된 안녕 시체들이라는 다섯 글자가 수시로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수록 작품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코드를 담고 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였습니다.

저수지의 썩은내와 함께 3형제 중 둘째가 입을 열 때마다 내뿜는 지독한 구취 (저수지),

역병과 쓰레기가 발산하는 악취로 가득 찬 폐허나 다름없는 거리 (아오이 가든),

왕피천에 떠오른 여자 시체와 고양이가 물어 죽인 쥐의 사체가 풍기는 시취 (문득,),

개를 두들겨 잡던 삼촌의 온몸에 짙게 배어있던 개 냄새 (만국박람회),

아내가 즐겨먹던 생선 눈알이 작동을 멈춘 냉장고 안에서 썩으면서 풍기는 악취 (시체들),

고양이 삶은 냄새와 여자의 오줌 냄새가 뒤섞인 약국의 노린내 (서쪽 끝) ,

실제 후각으로 느껴지듯 생생한 냄새의 묘사가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냄새못잖게 시각적인 자극 역시 강렬했는데, ‘검은 물붉은 피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세기말적 풍경을 묘사하거나 그로테스크한 캐릭터와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됩니다.

썩은 저수지를 가득 채운 검은 물 (저수지),

음산한 하늘에서 개구리가 비처럼 쏟아지는 풍경 (아오이 가든),

습하고 어두운 맨홀의 내부 (맨홀), 왕피천 동굴을 흐르는 물줄기와 그것을 감싼 어둠 (문득,),

기록적인 폭우가 몰고 온 토사와 하수, 분뇨로 삼켜진 소도시 (만국박람회),

냉기 속을 떠돌아다니는 검은 연기와 오염된 검은 물로 휩싸인 도시 (서쪽 끝),

아내를 삼킨 뒤 사지를 토막내버린 U시의 깊고 거친 밤의 계곡물 (시체들),

자궁을 찢고 태어난 붉은 피로 범벅된 아이 또는 개구리 (마술피리, 아오이 가든),

폐경과 월경을 반복하며 피를 쏟아내는 엄마 (아오이 가든) 등이 그것입니다.

 

이렇듯 독자의 시각과 후각을 점령한 채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소설의 영역을 벗어나

불편하고, 거북하며 심지어 불쾌감을 일으킬 정도로 극단적인 서사를 보여줍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사라지고, 엽기적인 공포와 괴담으로 가득 찬 무대가 펼쳐집니다.

해설은 이런 편혜영의 작품 세계를 하드고어 원더랜드라고 표현합니다.

동시에 그녀만의 표현방식을 단테적 상상력, 카프카적 상상력과 결부시킵니다.

특히 주류 리얼리즘으로부터 폄하되어 온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서사를 적극 변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일반적인독자들이 이러한 변호를

, 그렇구나, 하고 끄덕끄덕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거부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건 뭐지?’ 또는 ‘So What?’이 보편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저 역시 편혜영 읽기의 출발점에서 적잖은 충격과 암담함을 느꼈고,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해설을 꼼꼼히 읽어봤지만,

여전히 동굴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래도 계속 읽다 보면 지금은 이해 불가능한 그녀만의 세계를

코끼리 장님 만지는 식으로라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된 것은

해설말미의 몇 줄 덕분이었습니다.

 

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하드고어적 이미지들 속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대소설 미학의 낯선 차원을 만나는 두근거리는 모험이 될 것이다.“

 

이 몇 줄을 의지(?) 삼는다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중단 없이 그녀의 나머지 작품들을 읽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 읽을 작품은 2007년에 나온 그녀의 두 번째 단편집 사육장 쪽으로입니다.

 

사족으로..

거의 동시에 또 한명의 관심작가인 한강의 작품들을 비슷한 방법으로 읽을 계획입니다.

여수의 사랑이 그 시작점이 되는데, 늦어도 1년 안에 두 작가의 작품을 완독하려고 합니다.

편하게 읽히는 작가들은 아니지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정작 그 불편함때문이었습니다.

모난 돌처럼 평범하지 못한 두 작가의 세계를 만끽하는 책읽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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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별 1 유다의 별 1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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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어마어마한 재산을 은닉한 채 경찰에게 토벌된 사이비 종교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

70여년이 지난 후, 그 재산의 행방을 찾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용해운과 수상한 사내들,

마찬가지로 백백교의 유산을 탐내는 사채업계의 거부 김성노와 그의 앞잡이 임인건,

김성노의 제안으로 유산 찾기에 뛰어든 뒤 거대한 비밀을 풀어가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

그리고 그와 함께 산전수전을 겪게 되는 광역수사대 이유현 팀장과 김성노의 변호사 화미령.

 

어떻게든 줄거리를 정리해보려 했지만, 방대한 건 둘째 치고 사방에 스포일러 투성이라

그냥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 정도로 그치기로 했습니다.

물론 위에 언급한 내용 가운데에도 스포일러에 가까운 내용이 있지만,

그마저도 없으면 작품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어서 부득이 노출시켰습니다.

 

적잖은 분량이지만 금세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쉽고 빠르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스케일도 크고,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뛰어나며, 언제 멈출지 모르는 연이은 반전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틀 간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참혹한 연쇄살인,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이비 종교의 악행, 대를 이은 비극적인 가족사 등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끔 다양한 코드들이 버무려져있고,

어둠의 변호사 고진과 광역수사대로 자리를 옮긴 이유현 팀장의 콤비 플레이는

전국은 물론 바다 건너 일본까지 샅샅이 뒤지느라 눈코 뜰 새 없이 스피디하게 전개됩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이야기 바닥에 깔린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추악한 탐욕이라는 테마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하거나, 소름이 돋는 느낌을 갖게 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70여 년 전 백백교가 은닉한 보물 찾기지만,

그 이면에는, 디테일에서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큰 그림으로 보면 결국엔 허황되기 짝이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욕망의 폭주들이 뒤엉켜 있어

고진과 이유현 팀장의 수사가 진실에 조금씩 다가갈수록 독자를 착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누구든 욕망의 폭주가 선을 넘었다 싶으면 여지없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드디어 진실의 실마리가 잡혔다고 흥분할만하면 엉뚱한 국면이 새로 얼굴을 드러냅니다.

베일에 감춰졌던 과거사를 쫓다보면 두 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비극과 만나게 되고

70여 년 전의 끔찍한 백백교의 만행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음을 목도하게 됩니다.

 

고진은 여전히 4차원스러운 조크와 변죽만 울리며 상대를 열 받게 하는 화법을 구사합니다.

(bar) 여사장 류경아와 김성노의 변호사 화미령 사이에서 3각 로맨스를 즐기는가 하면,

노회한 사채업자 김성노와는 통큰 담판을 벌여 거액의 수수료를 약속받기도 합니다.

때론 엉뚱한 가설로 이유현 팀장의 분노를 사기도 하지만,

결국엔 작은 단서에서 출발한 무한한 상상력으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론을 내곤 합니다.

하지만 천하무적일 것 같은 어둠의 변호사 고진도 막판에 이르러서는 여러 번 까무러칩니다.

적어도 세 번 정도는 헉~ 소리가 날 정도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데,

독자와의 공감을 배려해선지 이 지점에서는 고진 역시 숨이 멈칫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딱 두 가지인데,

우선은 가끔 고진의 추리와 결론이 너무 큰 비약을 거쳐 묘사된 나머지

독자들이 그 추론의 과정을 따라가기가 곤란한 상황이 등장하곤 합니다.

말하자면, 포착한 단서는 하나뿐인데, 그것으로 너무 많은 해답을 이끌어낸다는 점입니다.

적어도 독자들이 ~!”하며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데,

몇몇 부분은 어떻게 저런 추리가 가능?”이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비약이 심합니다.

워낙 이야기가 빠르고 긴장감 넘치다 보니 그냥 넘어가지긴 하지만,

마지막의 대반전들에서 벌어진 몇 번의 비약은

고진의 캐릭터를 초능력자로 보이게 할 만큼 도를 넘어선 느낌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유현 팀장의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 같은 단순한캐릭터인데,

이 부분은 이야기 전개를 위해 이 팀장이 희생됐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시리즈 첫 편에서처럼 지나치게 탐문과 알리바이에 집착하는 건 좀 불편해도 이해가 됐지만,

과하게 흥분하다가 무모한 언행으로 인해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몇몇 장면에서는

이 사람이 왜 이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아했습니다.

잠시 후 그것이 이야기 전개를 위해 필요한 설정이었다는 점이 드러나지만,

어쨌든 이유현 팀장이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인 것은 못내 아쉬웠습니다.

 

서평을 써놓고 보니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수사(修辭)만 가득할 뿐 정작 이 작품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도움말이나

알맹이에 대한 소개는 별로 없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내용만 가득하네요.

그런데, 앞서 언급한대로 뭐든 조금만 상세히 설명하면 바로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지뢰밭 투성이인 작품이라 이런 수박 겉핥기식의 서평 외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재미있지만 가볍지 않다는 점, 연쇄살인 + 사이비 종교 + 인간의 탐욕 등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코드의 범벅이지만 이야기는 사실적이며 깊이를 겸비했다는 점,

그리고 뒷골목 어둠의 변호사 고진은 역시 매력적이라는 점만 결론으로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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