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하우스
피터 메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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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아들을 사고로 잃고 절망감에 빠져있던 에든버러 경찰서 형사 핀 매클라우드는 상부의 지시로 18년 전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 루이스 섬에 파견됩니다. 한 달 전 에든버러에서 벌어진 것과 동일한 수법의 살인사건이 벌어진데다 피살자가 핀의 지인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붕괴된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던 고향에 돌아온 핀은 어떻게든 과거와 마주치는 걸 회피하려 하지만 피살자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망령과도 같은 지난 시간들을 반추하게 됩니다. 지독한 상처만 남긴 첫사랑, 애증으로 뒤얽힌 절친, 따돌림과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 그리고 떠올리는 것조차 혐오스런 절해고도에서의 2주간의 잔혹한 전통 집단사냥 등 핀에게 있어 루이스 섬은 모든 게 악몽일 뿐입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무대로 한 스릴러는 더 북쪽에 있는 북유럽 배경 스릴러와는 또 다른 서늘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독립과 분리를 위한 오랜 투쟁의 역사가 스릴러의 밑바탕에 깔려 있을 땐 특유의 공격적이고 냉소적인 분위기가 그 서늘함을 더욱 강조하곤 합니다. 또 이 작품의 주 무대인 루이스 섬처럼 거칠기 짝이 없는 자연환경과 그에 맞서온 사람들의 지난한 삶이 이야기의 중심축일 경우에는 (작가 본인의 설명대로) “휘몰아치는 바람, 예측할 수 없는 날씨, 깎아지른 절벽과 매서운 파도,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섬사람들의 가혹한 삶이 서늘함 이상의 공포심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맨 뒤에 실린 영국 및 루이스 섬 지도를 보면 주인공 핀의 고향이 얼마나 척박하고 거친 환경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시사철 폭풍우가 몰아치고, 본토와의 거리 탓에 생활양식마저 유폐된 루이스 섬은 지리적기후적심리적 고립감을 자아내며 폐쇄된 공간 특유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사실상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루이스 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섬 자체가 사람들의 삶을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한다고 할까요?

그래선지 블랙하우스의 중심서사는 범인 찾기가 아니라 과거의 참혹한 유령들과 18년 만에 정면으로 마주선 핀의 고통과 회한으로 보입니다. 분량으로 봐도 핀이 태어나 섬을 떠나기까지의 시간들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더 많아 보이는데, 독자에 따라 그 대목들이 다소 지루하고 느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핀이 맞닥뜨려야 할 극적인 엔딩을 위한 필요불가결한 설정이므로 작가가 집요하리만치 세세하게 그려낸 디테일들을 놓치지 말고 차분하게 읽어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루이스 섬에는 수백 년을 내려온 전통이 있습니다. 육지에서 80km나 떨어진 절해고도 안 스커에서 12명의 사냥꾼이 2주에 걸쳐 가넷새의 새끼를 사냥하는 것입니다. 수천 마리의 새끼 새를 잡아 목을 자르고 내장을 꺼내고 염장을 하여 육지로 돌아오는 이 참혹한 전통은 루이스 섬에서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단 한 번 이 사냥에 반강제로 끌려갔던 핀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그의 삶을 불안하게 뒤흔드는 악몽입니다. 아들을 잃은 상태에서 영원히 잊고 싶었던 고향에 돌아와 과거의 인물들과 만나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핀의 캐릭터를 더욱 심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이 새끼 새 사냥은 왜 표지에 스코틀랜드 호러 스릴러라는 문구가 인쇄됐는지를 120% 공감하게 만드는 설정입니다.

 

핀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주력하던 이야기는 막판에 이르러 약간은 막장에 가까운 코드들이 터지면서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내는 쪽으로 급선회합니다. 동시에 살인사건을 놓고 제각각의 태도를 보여 온 섬사람들의 수상쩍은 행태의 이면도 속속들이 파헤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핀이 마주한 건 미친 듯이 날뛰는 바다와 그 너머에서 자행될 예정인 또 하나의 살육극입니다. 차라리 죽음이 더 편할 것만 같은 최악의 상황이 핀을 기다리고 있는 셈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핀의 과거 장면이 다소 장황하게 이어질 때는 기대했던 스릴러 서사와 많이 달라 보여서 이른 실망감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대목을 견디고 마지막 장에 이른다면 이 작품의 깊이와 무게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루이스 섬 3부작의 첫 편인 이 작품의 후속작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거친 자연, 폐쇄적인 공간, 잔인한 관습, 그리고 거기에 순응하거나 저항해온 사람들의 일그러진 삶이 한데 빚어낸 독특한 스릴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꼭 찾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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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째 여름이 남긴 기적
나타엘 트라프 지음, 이정은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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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에는 없는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아무 정보 없이 책읽기를 즐기는 독자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8, 프랑스의 소도시 발미쉬르라크의 마르셀비알뤼 고등학교에 다니는 레오는 6일 앞으로 다가온 학년말 축제 때문에 긴장상태입니다. 짝사랑하는 발랑틴을 어떻게든 축제 파트너로 만들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거리 곳곳에 30년 전인 1988년 축제의 밤에 호숫가에서 사체로 발견된 17살 여고생 제시카를 추모하는 포스터가 걸립니다. 당시 목격자는 제시카의 몸에 폭행의 흔적이 있다고 증언했지만 경찰은 단순사고로 결론을 냈습니다. 그 포스터를 볼 때까지만 해도 레오는 자신과는 무관한 과거의 일로 여겼지만,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믿기 어려운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달력은 제시카가 살해당하기 6일 전인 19886월이었고, 얼굴과 몸도 자신이 아닌 낯선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타임슬립 청춘 성장소설살인 미스터리가 곁들여진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타임루프. 타임리프, 타임워프, 타임슬립 등 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작품들이 워낙 많아서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지만, ‘7번째 여름이 남긴 기적은 나름대로 독창적인 서사를 펼쳐 보입니다.

 

우선 하루가 두 번씩 반복되고 있다. 한 번은 1988, 또 한 번은 2018.”(p104)이라는 설정이 눈길을 끄는데, 말하자면 1988년의 월요일을 산 레오는 다음날엔 2018년의 월요일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레오가 두 번의 하루를 사는 건 모두 6일이며, 마지막 날은 1988년과 2018년 모두 축제일입니다. 특히 1988년의 그날은 제시카가 살해든 사고든 죽음을 맞이한 날이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1988년의 6일 동안 레오가 매일 다른 인물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다는 점입니다. 물론 모두 제시카와 관련된 인물인데 때론 여학생의 몸으로 깨어날 때도 있어서 레오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과거를 바꿔도 현재는 달라지지 않는다.”라는 타임슬립 서사의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점입니다. 레오는 매번 다른 인물로 1988년의 하루를 살아갈 때마다 이른바 자유의지운명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 특히 자신이 빌린 몸의 주인들이 30년 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아는 경우에는 고민이 더욱 깊어지는데, 자유의지로 반짝반짝 빛나던 1988년의 17살 청춘이 30년 후 꼴사납거나 우울한 중년으로 전락하는 게 과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바꿔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레오는 소소한 말과 행동으로 변화를 시도해보기도 하는데, 그 결과는 다음날인 2018년이면 레오의 눈앞에 즉시 나타나곤 합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1988년이든 2018년이든 17살 청춘의 열정과 사랑과 고민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현재와 미래를 좀더 빛나게 하기 위해 이리저리 발버둥치지만 현실은 좀처럼 청춘들에게 희망 한 조각 쉽게 내주지 않는다는 점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레오와 독자를 사로잡는 건 실제 1988축제날 죽음을 맞이한 제시카가 레오가 존재하는 1988에 과연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입니다. 레오의 목표는 어떻게든 제시카의 죽음을 막는 것이지만 그것은 2018년 현재를 어마어마하게 뒤바꿔버리는 일이기 때문에 작가가 어떤 엔딩을 선사할지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청춘 성장소설의 분위기가 워낙 강해서 타임슬립 미스터리에 큰 기대를 건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인데다 프랑스 작품임에도 쉽고 평이한 문장들로 이뤄져서 금세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찾아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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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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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빈민가의 소아과 의사 데이비드 벡은 8년 전 여행 도중 납치된 뒤 참혹하게 살해돼 세상을 떠난 아내 엘리자베스의 이메일을 받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이메일에 담긴 두 사람만 아는 암호 때문에 벡은 엘리자베스가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는 그녀의 경고 때문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엘리자베스가 납치됐던 곳에서 두 구의 백골사체가 발견되는데, 문제는 이 일로 인해 FBI가 벡을 쫓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벡의 과거 지인마저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FBI는 벡을 공개수배하기에 이릅니다. 위기일발의 도주극을 벌이면서 엘리자베스의 흔적을 추적하던 벡은 8년 전 자신과 엘리자베스에게 가해졌던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2001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2005년 한국에 밀약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 있습니다. 워낙 출간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번역제목도 원제(‘Tell No One’)와 너무 거리가 멀어서 이런저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중고책 구하기가 주저됐는데 마침 새로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출간돼서 얼른 찾아 읽게 됐습니다.

한국에 출간된 할런 코벤의 작품 15편 중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까지 겨우 7편밖에 못 읽었고 그나마도 최고평점이 4.5점으로 만점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그의 광팬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번엔 할런 코벤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납치-실종 후 시신이 발견돼 장례까지 치른 아내가 8년 만에 연락을 해온다면 남편 입장에서 얼마나 기가 막힐까요?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아내는 자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가 하면, 하필 그때 나타난 FBI는 남편을 살인용의자로 의심합니다. 아내가 납치된 곳에서 최근 발견된 백골사체는 물론 8년 전 아내의 죽음까지도 남편의 소행이라 여기는 FBI 앞에서 남편의 선택은 일단 튀어!’ 외에는 달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인공 벡을 위기에 빠뜨리는 건 단지 FBI뿐만이 아닙니다. 8년 전 엘리자베스를 살해하려던 악마와 그의 주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뭔가 결정적인 비밀들을 감추고 있는 벡과 엘리자베스 주위의 인물들도 알게 모르게 벡을 사지로 몰아넣습니다. 평범한 소아과 의사인 벡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엘리자베스에 관한 사소한 단서들에서 8년 전 진실의 작은 조각이라도 찾아내는 게 전부입니다. TV를 통해 전국에 공개수배가 내려진 상태에서 말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400여 페이지 분량 전체가 반전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빠르고 과격하게 폭주하는 롤러코스터를 닮았습니다. 벡은 연이어 알게 되는 엘리자베스에 관한 진실 앞에서 때론 놀라고, 때론 분노와 절망에 휩싸이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에게 닥친 사고가 깊고 복잡한 사연 속에서 벌어진 계획된 범죄라는 걸 확신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자신과 엘리자베스 가족의 비밀까지 알게 된 벡은 바닥없는 심연에 빠진 채 허우적댈 수밖에 없습니다.

 

막판까지 반전의 연속이라 서평에서 공개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많다 보니 두루뭉술한 인상비평이 되고 말았는데, 속도감 넘치는 짜릿한 스릴러를 찾는 독자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가 선사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꼭 맛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처럼 2000년대에 출간됐다가 지금은 절판된 할런 코벤의 작품들도 새로운 개정판으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아직 못 읽은 그의 작품들도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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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우정으로 1 스토리콜렉터 10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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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독설가로 유명한 출판 편집자 하이케 베르시가 실종됩니다. 살의까지는 아니어도 그녀를 증오한 출판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된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보덴슈타인과 피아는 일일이 그들을 조사하지만 좀처럼 혐의점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하이케의 시신이 발견되고 그녀의 동료였던 알렉산더마저 의문의 사고로 중태에 빠지자 동일범에 의한 연쇄살인을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무엇보다 하이케와 알렉산더를 포함하여 30년 넘게 우정을 쌓아온 6명의 영원한 친구들이 직종은 달라도 모두 출판계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35년 전 프랑스의 한 섬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고가 현재의 사건과 연관된 게 확실하다는 점에 착안한 보덴슈타인과 피아는 과거와 현재의 접점을 찾아내기 위해 분투합니다.

 

영원한 우정으로는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열 번째 작품입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본문 곳곳에서 과거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데, 시리즈를 계속 읽어온 독자라면 보덴슈타인과 피아의 데뷔작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부터 직전 작품인 잔혹한 어머니의 날까지를 파노라마처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랜 과거에 잉태됐던 비극이 현재에 이르러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다.”타우누스 시리즈의 단골 설정입니다. 이번 작품의 프롤로그를 장식한 사건은 1983, 그러니까 작품 속 현재 시점인 2018년을 기준으로 35년 전에 프랑스의 한 아름다운 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두 7명이었던 영원한 친구들중 한 명이 익사하는 사고가 벌어졌고, 그 뒤로 그들의 삶은 제각각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그 사고로 인생의 순풍에 올라탔지만, 누군가는 폐인이 되다시피 독일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 2018년 현재 편집자, 기획부장, 에이전트, 인쇄업 등 출판계에 몸담은 채 타우누스 일대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두 명이 살해되고 나머지 멤버들 역시 35년 전 사건의 진상을 묘사한 듯한 익명의 복사본 편지를 받으면서 혼란과 공포에 빠집니다.

 

사건은 단순하지만 넬레 노이하우스는 언제나 그랬듯 과거와 현재의 미스터리를 절묘하게 엮는 것은 물론 누가 범인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또 현재의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과거를 들여다보던 보덴슈타인과 피아가 누구도 예상 못한 30여 년 전의 참혹한 진상을 파악하는 이야기는 700여 페이지의 볼륨감을 더욱 탄탄하고 충실하게 만듭니다. 별개의 사건들이지만 실은 거대한 악연에 의해 지배된 한 개의 사건처럼 촘촘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덕분입니다.

 

보덴슈타인과 피아가 수사를 이끌긴 하지만, 의외의 인물들이 세컨드 탐정역할을 펼치는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전도유망한 젊은 편집자 율리아는 본의 아니게 35년 전 프랑스에서 벌어진 사고의 진상을 그린 미완성 원고를 읽게 된 탓에 현재 벌어진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건 피아의 전 남편이자 뛰어난 법의인류학자인 헤닝입니다. 헤닝은 보덴슈타인과 피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범죄소설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상태인데, 마침 율리아가 그의 담당 편집자라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말하자면 헤닝은 소설 속에서 타우누스 시리즈의 작가가 된 것입니다. 그가 발표한 작품도 실제 타우누스 시리즈의 작품과 이름이 같습니다.) 두 사람의 수사는 때로 선을 넘은 탓에 피아의 격분을 사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하여 사건 해결에 큰 공을 세웁니다.

 

사건 외에 눈길을 끈 건 보덴슈타인의 불운한 결혼생활입니다. 58세의 보덴슈타인은 세 번째 결혼마저 파국 직전인 가운데 간암에 걸린 전처 코지마를 위해 자신의 간을 이식해주기로 결심합니다. 매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사생활 이야기는 잔혹한 사건에서 잠시 눈을 돌릴 틈을 주곤 하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먼 고통스런 내용이 대부분이라 아무래도 마음 편히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해리 보슈와 해리 홀레를 포함하여 제가 좋아하는 스릴러 주인공들도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 걸 생각해보면 스릴러의 맛이 좀더 진하고 깊어지기 위해선 아무래도 주인공의 불행이 필수요소라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2021년에 출간됐지만 이 작품의 배경은 2018년입니다. 아무래도 각각 58, 51세에 이른 보덴슈타인과 피아를 한 살이라도 젊게 그리려는 의도로 추정되는데, 독일 경찰의 정년이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늦어도 시리즈 12~13편쯤에 보덴슈타인이 퇴직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저 우울해질 따름입니다. ‘잔혹한 어머니의 날서평 말미에도 쓴 내용이지만, 넬레 노이하우스가 시간을 거스르는 소재를 통해서라도, 아니면 보덴슈타인으로 하여금 탐정사무소를 차리게 해서라도 언제까지든 타우누스 시리즈를 이어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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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 첩혈쌍녀
소피아 베넷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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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살 생일을 앞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윈저성에서 열린 연회에서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변사체로 발견되자 충격에 빠집니다. 무엇보다 다분히 변태적인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시신의 상태 때문에 철저한 보안 하에 보안정보국과 경찰이 비밀리에 내사를 벌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일 방문객과 성의 직원들까지 샅샅이 조사하지만 좀처럼 단서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물론 수사책임자인 보안정보국장이 러시아의 암살 음모가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여왕의 혼란은 더욱 깊어집니다. 여왕의 선택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캐는 것. 여왕은 신참 보조비서 로지를 비롯한 측근들을 지휘하여 사건의 진상을 하나둘씩 밝혀내기 시작합니다.

 

올해 9월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주인공인데다 그녀 자신이 왕관을 쓴 미스 마플’, 즉 미스터리 해결사로 등장한다고 해서 더욱 관심을 끈 작품입니다. 노인이나 주부 등 아마추어 탐정이 활약하는 미스터리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윈저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현직 여왕은 저 같은 취향의 독자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설정이었습니다.

 

자칫 러시아 남자, 여왕의 파티에서 섹스에 탐닉하다 사망해!”라는 기사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라 철저한 보안이 이뤄진 가운데, 사건 전날부터 윈저성에 묵은 50여 명의 방문객과 수백 명에 달하는 성의 직원들을 상대로 벌이는 수사는 초반부터 난항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수사의 두 주체는 명확히 다른 관점을 드러냅니다. 보안정보국의 수장 개빈 험프리스가 푸틴의 지시를 받은 내부 스파이의 소행!”이라고 단정한 반면, 여왕의 직감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직감을 입증하기 위해 측근들을 활용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여왕이 측근들을 고르는 기준은 좀 독특합니다. 아무리 자신의 수족과 같은 자라 해도 자신을 그저 블로그가 뭔지도 잘 모르는 90살 할머니로만 여기는 자들은 일부러 배제합니다. 대신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자, 자신과 소통이 되는 자들을 선택합니다. 왕실 기마포병대에서 복무한 뒤 여왕의 보조비서가 된 지 고작 6개월밖에 안 된 신참 로즈메리 그레이스 오쇼디(이하 로지)가 선발된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과거 경호팀에서 일하다 은퇴한 빌리 매클라클런 역시 이런 맥락에서 여왕의 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직접 수사에 뛰어들 수도, 관련자들을 탐문할 수도 없는 여왕을 위해 로지와 빌리는 분주하게 발품을 팝니다. 특히 로지는 여왕의 최측근이자 자신의 직속상관인 사이먼 경마저 속여야 하는 것은 물론 비밀리에 대포폰까지 마련하는 등 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스파이역할에 때론 당황하기도 때론 묘한 흥분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뿐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왕관을 쓴 미스 마플을 보좌하던 전임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건, 측근들을 활용하여 미스터리를 풀어내긴 하지만 정작 여왕 자신이 해결사란 점은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측근들이 모아온 결정적인 단서와 자신이 직접 추리하여 얻어낸 사건의 진상을 티 안 나게 넌지시 던져주고 결과가 발표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수사에 가담한 측근 1~2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합니다.

이런 설정은 흥미로우면서도 동시에 주인공이 발산하는 쾌감을 맛볼 수 없다는 단점도 지니는데, “윈저성에서 펼쳐지는 본격 탐정 서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공산이 크다. 이 작품은 여왕이 자기만의 방식 - 능청스럽고 우아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무위의 기술 - 으로 미스터리를 푸는 과정을 그린다.”(p389)라는 역자 후기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미스터리 못잖게 70년 가까이 왕위를 지켜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소소한 일상들이 매력적으로 읽혔는데, 어쩌면 불과 얼마 전에 그녀가 서거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 필립 공과의 소박한 부부생활, 증손녀의 생일을 기다리는 작은 기쁨, 애마(愛馬)에 대한 무한하고도 따뜻한 애정, 그리고 윈저성의 모든 직원들에 대한 푸근한 배려 등 여왕의 일상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미스터리의 난이도나 그 결과에 대해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이런 미덕들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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