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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 추정경 장편소설
추정경 지음 / 놀(다산북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벙커의 사전적 의미는 '적의 사격이나 관측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을 파서 만든 구덩이' 이다.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막기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곳. 보통 영화 속 전쟁 장면에서 만나는 벙커의 모습은 긴박감 그 자체이다. 어떻게해서든 상대의 공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벙커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모습. 그 곳을 벗어나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철저히 자신을 그 안에 숨길 수 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 숨을 수 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숨길 수 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
제 목소리를 낼줄 알았던 멋진 녀석 김하균. 3년 전 학교에서 암모니아 확산 실험을 하던 날 모든 아이들이 냄새를 맡았다고 손을 드는데 김하균만이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손을 들지 않았다. 이야기 속 화자 '나'도 주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손을 올린다. 하지만 이것은 암모니아 확산 실험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동에 휩쓸려 자기 생각을 포기하는지를 보여 주는 실험을 한 것이였다. 우리들도 많은 사람들이 '예'라고 대답하면 '아니오'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한다. 김하균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소신있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아이였다. 그런 김하균이 이제는 아이들의 돈을 빼앗고 힘이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는 일진이 되었다. 김하균이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하균이의 나쁜 행동을 지켜 보기만 하던 아이들. 어느 누구하나 하균이의 행동에 대해 말을 하는 친구들이 없다. 다른날과 다름없이 같은 반 친구 윤석이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며 자영이가 그만 하라 말한다. 자영이의 말을 시작으로 같은 반 친구들은 한 마디씩 하고 '나'가 내지른 주먹에 쓰러진 하균이를 집단 폭행하는 일이 벌어진다.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 김하균. 이 모든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괴로운 '나'
'저녁 7시 55분 한강 노들섬 남쪽' 이라는 의문의 문자를 받고 한강에 가게 된 '나'. 그곳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벙커. 벙커에 살고 있는 메시와 미노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김가출'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흥미진진한 동거가 시작된다. 아직도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고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나' 김가출. '나'는 도대체 누구인 것일까?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찾을 수 있을까? 죽었다고 생각한 김하균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청소년 소설을 마주하면서 집단 따돌림, 폭력, 자살 등의 이야기들은 이제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소설 속 이야기들은 허구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라는 점이 마음이 아프다. 소설은 소설일뿐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왕따를 당하고 어떤 아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어떤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에게 폭력을 당하며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김하균은 원래 나쁜 아이였던 것일까? 김하균은 친구들을 괴롭히는 가해자이기만 했던 것일까?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맞아 마땅한 사람,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책을 보는내내 힘들게 했던 글이 있다.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는 그 사람을 알기까지 '시간'과 '노력'을 들이다보면 대부분의 사람이 이해 가능한 존재가 된다는 함정이 숨어 있다. - 본문 106쪽
우리들은 아이들을 쉽게 평가한다. 암모니아 확산 실험을 하던 하균이의 반 아이들처럼 냄새가 나지 않아도 모두 손을 들면 나도 들어야하고 누군가 '문제아'라고 말하는 순간 그 아이는 더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문제아로 남는다. 우리들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할 정도로 시간과 노력을 하지 않으며 이해와 공감이라는 힘든 과정을 거치는 것에도 인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균이와 같은 친구들이 왜 그럴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라는 반성을 해본다. 문제아라 불리는그 아이들과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만 있을뿐 ㅠㅠ
지상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벙커. 내 마음속으로 바람이 분다. - 본문 254쪽
세상의 모든 '나'에게 벙커는 더 이상 살아남기 위해 숨는 곳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꼭꼭 숨어버리는 벙커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