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잠에서 깨고 난 그녀는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잠깐의 잠이었다. 눈사람이 되고도 그녀는 당황해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걸 받아들이고 긍정한다. 의문 없는 수긍이 한없이 슬프게 느껴지는 소설 한강의 「작별」은 겨울의 풍경을 담고 있다. 눈이 내릴까 기대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도시는 미세 먼지로 뿌옇게 흐려져 있다. 한 줌의 햇살을 기대해보지만 내내 어둡다. 어두운 거리를 사람들이 걸어가고 웃고 뜨거운 차를 들고 손을 흔든다. 오늘의 흐림은 내일의 밝음으로 기약되면 좋겠다는 듯이.


눈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눈사람이 되어 버린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 「작별」을 읽는 동안 한강의 전작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의 시간을 떠올렸다. 대기권에서 비로 떨어질까 눈으로 내릴까 고민하는 하늘의 일을 인간은 알지 못한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손바닥에 닿는 눈의 감촉을 느껴보는 것이다. 선택할 수 없는 일 앞에서는 선택 당하는 일도 괜찮다. 십 분 정도의 노천에서의 낮잠을 자고 난 그녀가 눈사람이 되어 버리는 이야기 역시 말도 안돼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소설의 일이라면 인정하고 대체로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낙관을 가져 본다.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세상에서 눈사람쯤이야. 대수롭지 않다. 심장과 옆구리가 녹아내리는 걸 걱정하는 것보다 눈사람이 되고 나면 남겨질 아들, 윤이를 먼저 떠올리는 「작별」의 화자에게 미안한 일, 손을 내밀어 내가 가진 반쯤의 온기를 나눠 주고 싶었다. 괜찮다면 상점에 들어가서 장갑과 목도리를 사서 건네주는 일. 그 일이 그녀를 파괴하는 일임에도 눈[雪]이 되어 그녀가 남기는 눈물이 이 세계를 적신다 해도 아직 남아 있는 이 세계의 훈기를 곁에 두고 싶다.


이제 다 틀렸어.

나직이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가 얼굴을 돌려 그녀를 멍하게 마주 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만났다. 그가 차가움을 견디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입술과 혀가 녹는 것을 견뎠다. 그것이 서로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한강, 「작별」中에서)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해야 할 말을 들려주고 힘껏 껴안아 주는 일로 눈사람의 생애를 마치는 그녀. 나 없이도 세상에는 눈이 아니면 비가 올 것이고 아이는 자랄 것이다. 가장 신성한 눈 맞춤과 사랑을 주었던 아이의 생애를 지켜볼 수는 없지만 그녀는 다른 세계로 떠나기 위한 모든 작별의 준비를 마치고 돌아선다. 안녕이라고 윤이라고 현수 씨라고 녹아 없어지는 입술로 말할 수 있는 생애를 위한 작별의 순간만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지막 세기에는.


나와 타인의 구별되지 않는 세계에서 진실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강화길의 「손」은 지독한 거짓의 세계를 말하고 있다. 남편의 해외 근무로 인해 혼자 딸아이를 키울 수밖에 없는 '나'는 아이를 돌봐주겠다는 시어머니의 제안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인다. 대체 맥락 없는 희망은 절망의 순간에서만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손」은 한마을에서 일어나는 비밀스러운 일들의 실체를 독자에게 친절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짐작하고 추측해야 하는 소설속 세계의 비밀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강화길의 「손」이 시골의 음험함을 담고 있다면 김혜진의 「동네 사람」은 익명이 보장되면서 편안함을 느껴야 하는 공간인 도시에 감춰진 음흉한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다양함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듯한 얼굴의 세련됨을 가장하는 도시에서 두 여자의 일상은 비밀이 될 수 없었다. 그녀들이 자주 가는 곳이 어디인지 심지어 사는 집까지 동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곳에서 안락함 대신 오싹함을 느끼는 것이다. 나와 다르게 사는 건 무조건 배타적으로 여겨 버리는 곳. 말이 말이 불러오는 곳.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에서 두 여자의 내일은 보장되지 못한다. 끝내 그녀들은 '동네 사람'으로 불리지 않는다.


「희박한 마음」에서 권여선은 과거의 일이란 복기할수록 결국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예전의 일을 떠올리는 시간이 찾아들면 그건 죽음의 시간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분명히 들리지만 어디에서 일어나는 일인지 알 수 없는 소음의 근원을 찾는 일처럼 우리의 과거는 시작을 알 수 없다. 이승우는 소설 「소돔의 하룻밤」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천사 두 명을 대하는 방식으로 인간 세계의 잔인함을 표현한다.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는 인간의 나약함과 무지를 일깨우려 찾아온 나그네를 롯을 제외한 소돔의 사람들은 폭력으로 대한다. 구원은 없다. 소설로서 증명하는 현실 세계의 명제이다.


사소한 정의마저 이루어지지 못하는 세계에서 청춘의 가치는 훼손되어 버린다는 이야기 정이현의 「언니」에서 우리는 출구 없는 문을 찾아 헤매는 경험을 한다. 갇힌 문 앞에서 탈출을 지시받은 청춘은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을 찾고 문이라고 부를 수 없는 벽 앞에서 주먹으로 두드린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상한 명언을 떠올리면서. 지하 카페에서 파는 메뉴를 두고 지갑에 들어 있는 돈을 떠올리면서 주문을 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인회 언니는 집중해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고 한다. 가장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는 권리마저 박탈 당한 현실에서 탈출자는 없다.


다양한 시간을 살고 있는 만큼 소설의 이야기도 다채롭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다. 모두 다르고 모두 이상하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 뻔하니 이해보다는 오해로 놔두는 게 현명한 일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소설 덕분이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서 배운다. 현실에서 관계하는 인간들에게는 적절한 무시와 비웃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소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정지돈의 소설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를 이해하기보다는 오해한 채로 놔두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소설을 오독하는 재미로 살아간다. 답을 맞히고 높은 점수를 내는 일에는 실패했으니 소설을 읽으며 지낸다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도 신난다. 이왕 엉성하게 살기로 했으니 어떤 소설을 읽을 때는 느슨함을 유지한다. 과거를 이야기하는 듯하다가 돌연 표정을 바꿔 반복되는 미래의 예언을 들려주는 소설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를 읽을 때에는 긴장보다는 여유를 찾으시길.


소설의 세계가 그 세계가 일부러 꾸민 얼굴을 보여 주고 거짓말을 무람없이 하는 세계여서 한순간에 눈사람이 되고 오해를 받아도 그저 사과하는 일로 편안한 내일을 받아들이기로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소설의 실패는 현실의 긍정으로 연결된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서로를 불러 이곳에 내가 있고 그곳에 당신이 있다는 실감을 확인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그 사이 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온전히 작별의 말을 하지 못했다는 진실을 떠올린다. 언제라도 그들에게 사랑과 안녕을 말할 준비를 하며 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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