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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도시 -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령운동까지
데이비드 하비 지음, 한상연 옮김 / 에이도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자본의 한계'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영국의 공간경제학자 데이비드 하비. '반란의 도시'는 그런 그가 2012년에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1982년에 나온 '자본의 한계'는 그동안 마르크스주의가 중시하지 않았던 공간의 의미를 새로이 발굴하고 그것을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과 접합하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건 1971년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세미나로 읽기 시작하여 무려 10년간 '자본론'을 연구한 끝에 나온 결실이었다. 아무도 돌아다보지 않았던 공간을 바탕으로 자본론을 새로이 구성했기 때문에 책은 당연히 어려웠고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책이지만 사실 가장 읽히지 않는 그의 대표작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종의 신념처럼 '자본의 한계'에 투영했던 입장을 내내 관철시켰다. 그런 그에게 있어 도시로 관심이 옮겨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자본의 한계'에 뒤이어 1985년에는 '자본의 도시화'와 '의식과 도시경험'을 내놓았고 결국 그 결정체로서 1989년에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도시의 정치경제학'을 내놓았다. 도시에 관한 그의 책은 2000년에 나온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에서 정점에 달하는데 근대의 핵심이자 파리 혁명을 통한 저항의 도시였던 파리가 어떻게 그 후 반저항의 도시로 탈바꿈하는지 문화 전반에 걸쳐 그 정치경제학적 동인을 파헤쳤던 책이었다. 더구나 그 '파리'는 데이비드 하비 자신에게도 아주 의미있는 곳으로 그가 지금처럼 평생을 실천적 마르크스주의에 헌신하게 되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파리에서 일어난 '68혁명'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론에 머무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실천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원했으며 그가 해 온 모든 이론 작업은 결국 어떻게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맞춰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란의 도시'는 지금까지 그가 천착해온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바탕을 둔 공간의 정치경제학이 집약적으로 들어간 가운데 보다 약탈적이 된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서 어떻게 저항의 동맥을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방향은 처음부터 제시되고 있다. 바로 역시 68혁명을 계기로 앙리 르페브르에 의해 제기된 '도시권'을 되살리는 것이다.


 르페브르는 도시권이 애타는 호소인 동시에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도시권은 도시 일상 생활이 쇠퇴하는 위기에서 비롯하는 실존적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의미에서 호소였다. 또 도시권은 이 위기를 똑똑히 직시해 대안적 도시생활을 창조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 요구였다.(p. 9)


 이러한 도시권은 단순히 말하자면 내가 살고 싶은 환경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도시 공간의 형성 과정에 행사하는 권력, 즉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만들고 뜯어고치는 방법을 지배하는 권력을 철저하고 근본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p. 28)


 사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정작 우리가 거주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선 수동적이었다. 소수의 입안자들이 선을 긋고 중장비를 가져와 파내기 시작하면 그러나 보다 생각하기 일 쑤였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걸 하나의 권리로 만들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여기에 도시인들이 개입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도시라는 공간의 그 어떤 배치든 그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잉여 가치가 사회적, 지리적으로 집적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도시화는 언제나 일종의 계급 현상이었다. 잉여가 어디서, 누구에게서 추출되건 그것을 사용할 권한은 소수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다.(p. 28)


 그러므로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소수의 손아귀에만 주어진 작업에 대중들 스스로 전면적으로 개입하여 착취의 선들을 끊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왜 도시화는 언제나 소수 자본가의 착취와 약탈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가?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자본주의는 계속적으로 잉여가치를 생산해야만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이윤을 창출해야만 하는 압박에 놓인다. 그래서 끊임없이 확장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생산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더라도 안심할 수 없다. 또 하나의 자본주의 필연적인 법칙인 '이윤율 저하 경향' 때문이다. 생산의 지속과 확장은 이윤율을 자꾸만 떨어뜨린다.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유다. 이대로 방치하다간 결국 공황에 직면한다. 그러므로 자본가들은 너무 생산물이 많지 않도록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 그건 바로 잉여 생산물들을 흡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자본가들에겐 이윤율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하는 것만큼이나 잉여 생산물을을 지속적으로 흡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도시 공간 형성에는 대규모의 재화가 필요하다. 한 마디로 단번에 잉여 생산물을 써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때문에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화가 진전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 모두가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는 그 실제 사례로써 프랑스 제2 제정기 당시에 조르주 외젠 오스만이 파리를 재개발했던 것과 1942년 미국에서 로버트 모제스가 오스만에 영감 받아 뉴욕 주변에 대규모의 거주 공간을 마련했던 것을 든다. 오스만이 당시 파리에 과잉된 자본을 흡수하기 위해 파리를 근대적 도시 공간으로 변모시켰다면 모제스는 뉴욕이라는 도시만이 아닌 그 외곽까지 포함하는 대도시권 전체의 재개발로 변모시켰다고 한다. 모제스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각종 대규모의 도시 기반시설로 당시에 과잉된 자본을 흡수했는데 이러한 뉴욕의 재개발은 이후 모든 나라의 도시 재개발의 모범이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이 도시화란 다름아닌 자본주의가 유지되려면 할 수 밖에 없는 잉여 생산물의 흡수를 위한 작업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이 언제까지나 여기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도시화에도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결국엔 공황으로 이어지듯이 이런 식의 도시 공간 형성은 장기적으로는 결국 투기로 변질된다. 의제자본 때문이다. 의제자본은 실제 자본은 아닌데 자본으로 의제되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이란 어디까지나 노동자가 직접 생산을 통해 얻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은 획득물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자다. 이자는 어디까지나 돈이 돈을 낳는 것으로 인간의 노동이 개입되지 않는다. 그런 것을 '의제자본'이라 한다. 자본이 아닌데 자본인 척 행동하기에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말에 반감이 든다. 이자도 결국 자본이 생산한, 그렇게 자본이 아닌가? 우리는 이걸 당연히 돈의 생산물로 간주하지만 사실 이자는 중세까지만 해도 죄악시 될 정도로 이유없이 뜯어가는 것으로 여겨졌다. 빌려준 돈이 새끼를 쳐서 그 이자까지 갚아야 한다는 건 유태인말고는 할 수 없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소득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노동을 매개해서만 인정되었다. 따라서 이자에 대한 지금의 관념이란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의제자본이 바로 그렇다. 의제자본은 주로 생산된 것이 또 한 번 만들어낸 2차적 생산물로 실은 자본주의가 제대로 순환하기 위해 발라주는 윤활유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자를 생각하듯이 거기에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어떤 생산적인 활동이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런 의제자본을 물신적 구축물이라 부른다. 외면만 보게 만들어 그것을 창출한 실제 사회적 관계는 은폐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은폐된 사회적 관계는 뭘까? 그게 바로 착취다. 혹은 약탈이다. 의제자본은 잉여가치의 이차적 형태다. 따라서 유통이나 금융 부문도 의제자본이다.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만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의제자본들은 노동을 매개로 하지 않으므로 실제 가치 이상으로 무한히 증가될 수 있다. 서로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한쪽 은행이 다른 쪽 은행에서 돈을 빌려 그 돈을 그대로 그 은행에게 빌려준다. 실제 돈은 그대로이지만 양쪽에서 카운트 되는 자산은 두 배로 늘어나 있다.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기 위한 도시 공간 형성은 바로 이 의제자본들이 마구 흘러드는 과정이다. 의제자본이 의제자본을 낳는다. 결국 투기 붐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화는 필연적으로 부동산 거품에 직면한다고 말한다. 거품과 그 붕괴 현상은 특이점이 아니라 자본주의 도시에 있어서 상수인 것이다.


 그런데 그 피해는 모조리 보다 덜 가진 쪽에 훨씬 더 가중된다. 도시화는 어디까지나 잉여 생산물 흡수를 통한 계급 착취의 과정이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용산 사태가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도시권의 획득을 통해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끊어야 한다. 그런데 도시는 모두 같이 살아가는 영역이므로 결국 도시권을 요구함은 공유재를 둘러싼 투쟁으로 나타난다.


 공공 공간 및 공공재의 생산과 접근을 누가, 어떻게, 누구의 이익을 위해 규제하는가의 문제를 놓고 늘 투쟁이 벌어진다. 도시의 공공 공간과 공공재를 공동의 목적을 위해 영유하려는 투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p. 137)


 그런데 데이비드 하비는 이 공유재를 단순히 재화로 해석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그 보다는 어디까지나 사회적 관계로 보아달라고 말한다.


 사실 공유재를 만드는 사회적 실천이 존재한다. 이 실천은 특정 사회 집단만 배타적으로 이용하거나 아니면 사회 구성원 전부가 부분적으로, 혹은 공개적으로 이용하는 공유재와의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확립한다. 공유재를 만드는 실천의 핵심에는 사회집단과 환경의 공유재적 측면 사이의 관계는 집단적이고 비상품적이어야 한다는, 즉 시장교환과 시장평가의 논리가 배제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자리잡고 있다.(p. 138)


 이런 도시의 경관이 대표적인 공유재다.

 

 유명한 그리스의 산토리니다. 집 하나하나는 저다마 개인의 소유물이지만 집단적으로 연출한 이 경관은 공유재다. 그게 너무도 멋져서 죽기 전에 꼭 가 보아야 한다는 말까지 듣는다. 이렇게


 개인과 사회 집단은 각각의 일상적 활동과 투쟁을 위해 도시라는 사회적 세계를 창조하고 그럼으로써 그 안에서 거주 가능한 하나의 틀로 공유재를 만들어낸다. 이 문화적으로 창출된 공유재는 아무리 사용해도 파괴당하거나 하지 않지만 과도하게 남용되면 질이 떨어지고 평범하고 진부한 것이 되어 버린다.(p. 139)


 사람들이 산토리니로 가는 건 다른 어디에서도 산토리니가 가진 아름다움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그걸 '독점지대'라고 말한다. 다른 어디에도 없어서 그 독특함과 희소성으로 가치를 가지는 공간을 일컫는다. 그 반대엔 '디즈니화'된 공간이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어서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이다. 독점지대는 이러한 공유재가 얼마든지 재화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아도 이 산토리니의 매력 때문에 많은 관광업자들이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공유재를 어떻게 창조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헤이온와이'처럼 독점지대로 이윤을 창출할수도 있고 '디즈니화'되어 그렇고 그런 공간 중의 하나로 전락할 수도 있다. 데이비드 하비가 이렇게 공유재와 그것을 통한 독점지대의 창출을 강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도시권을 이 시대에 걸맞는 인권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이다.


 그동안의 인권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소유권을 바탕으로 하여 설정되어왔다. 자유가 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소유권을 바탕으로 했듯이 말이다. 데이비드 하비는 이제 인권의 개념이 그 개인의 소유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공공으로서의 인권의 대표로서 '도시권'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시권'이 그저 가설의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충분히 형성 가능한 인권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공유재로서의 도시'와 그 '독점지대'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의 지자체들은 이 독점지대를 가지기 위해 발버둥이다. 그것은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관광산업 때문에 더욱 불타오르고 있다. 이제 공간은 집합적 상징자본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은 갈수록 막중한 역할을 한다.


 집합적 상징자본의 힘, 즉 어떤 장소에 특별한 차별성을 부여하는 행동이 갖는 힘이다.(p. 184)


 이는 도시 거주민의 집단적 실천이 만들어내는 힘이다. 그들의 노동으로 인한 것이므로 진정한 자본이다. 데이비드 하비가 독점지대를 왜 강조하는지 이제 그 이유를 알 것이다. 이것이 필연적으로 착취와 약탈을 수반하는 의제자본으로 넘쳐나는 도시화를 막는 길이기 때문이다. 도시권은 바로 그러한 집합적 상징자본을 만들어내는 참여이며 그 참여를 통해 그 어디에도 없는 자신들만의 독점지대를 만드는 가치의 창출이다. 또한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장 교환을 배제하므로 반자본주의적이다. 즉 데이비드 하비는 도시권의 요구와 그러한 도시에의 전면적 참여가 결국 반자본주의 운동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아니 그 둘은 꼭 함께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말 정도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흐름에서 데이비드 하비는 어떤 도시에서 시민들이 보다 나은 삶적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위해 참여하고 투쟁하면 자연적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리라 보고 있다. 더우기 거기에 대한 실제 사례까지 존재한다. 바로 2000년 볼리비아에서 민영화된 식수 때문에 일어났던 엘 알토시의 시민의 저항이다. 거기다 2011년의 런던 봉기와 뉴욕의 월 스트리트 점령 운동도 있다. 이런 사례들을 검토하며 데이비드 하비는 그 역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보여준다.


 즉 반자본주의 투쟁이 결국은 보다 나은(순수한 의미에서의 '인간적인') 도시에서의 삶을 결국 가져다 줄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도시권에 대한 요구는 어디까지나 진정한 목적을 위한 중간 단계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이 가졌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난다. 결국 그가 '반란의 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대로 반자본주의 운동과 도시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그리 격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어디까지나 함께 진행해야 한다는 게 이 책에서 데이비드 하비가 들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하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한 뒤로 약탈이 더욱 전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의 도시화는 서울의 아파트가 그러하듯 개인을 더욱 파편화시켜서 저항의 연대를 만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럴수록 약탈은 더욱 전면화되고 노골적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빨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다. 그들이 드러낸 이빨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분노하지만 그 분노를 넘어 연대를 위한 거점을 어디서 찾아야 할 지 막상 잘 알 수가 없다. 데이비드 하비의 '반란의 도시'는 바로 그 시작을 위한 공간을 어디에 설정해야 할 지 알려준다. 무엇보다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더이상 지금과 같은 분노와 절망을 겪지 않도록 만드는 투쟁의 현장이라는 것을. 덕분에 도시에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아주 잘 알게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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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2015-03-14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ㅉ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