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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남자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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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냥 지겨운 것 같다. 쓰면서도 지금 이걸 내가 왜 쓰고 있나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하는 것 같다. 얼른 최후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 오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 소설 왠지 그렇다. 들어가야 할 때 들어가지 않고 미적거린다. 건드려야 할 때 미처 예기치 못한 통증이 있을지도 몰라 두려운 것처럼 머뭇거린다. 어두운 골목에서 사나운 불량배를 맞닥뜨린 아이와도 같이 도망칠 재간은 없고 그냥 눈 딱 감고 얼른 그들이 딴 데로 가버리기를 바라는 형국이다. 무덤덤한 관찰자인 척 하지만 사실은 자학이다. 그는 그를 쓸모없다고 여기고 싶어서, 무력한 존재라고 여기고 싶어서, 아무 것도 안하는 존재가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못한다고 여기고 싶어서 관찰자인 척한다. 이 소설집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산책은 그러한 자학의 여정이다.('혀 끝의 남자' 단편은 인도 여행을 다루지만 다른 단편의 산책 묘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결국 여행도 그에게 장거리 산책에 불과하다.) 백민석. 나는 그를 모른다.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듣자니 원래는 작품이 꽤나 폭력적이었던 모양이다. 뒤에 실린 해설에서 인용한 그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폭력은 생활의 분노에서 나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어렵게 산 그는 분노했었고 폭력은 그 표현이었다. 주먹은 세계라는 바깥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는 맞기 위해 걷는다. 무너지기 위해 본다. 소진하기 위해 말한다.


 이런 느낌? (그림은 독일 출신으로 일렉트로닉 음악을 하는 MODERAT의 데뷔 앨범 커버)


 나는 혀 끝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머리에 불을 이고 혀 끝을 걷고 있었다.

 남자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혀에서 불꽃이 일었다. 입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단내가 사방으로 흘러넘쳤다. ('혀 끝의 남자' 시작 부분)


 이게 그다. 난 그렇게 느낀다. 자살할 장소를 찾는 여행자의 소설이라고... 죽기 위해 걷는다. 머리 위의 불꽃이 자신을 모조리 삼켜버릴 때까지 걷는다. 머리 위로 활활 불꽃이 타오르는 자에게 바라보는 풍경이, 만나는 사람이 무게를 갖기란, 자신의 관심을 끄는 인력을 갖기란 힘들다. 사람은 그저 남자와 여자로만 나뉠 뿐, 익명으로 간단히 처리되고 행동 역시도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 못한다. 사건도 공간도 다 그렇다. 그저 열차의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에 불과할 뿐이다. 빨리 잊어버리기 위해 보는 속도를 더한다. 말의 속도를 올린다. 서 있는 곳의 삶이라는 중력이 자신을 사로잡기 전에 서둘러 벗어난다. 그 곳의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불타오르면서 현존하는 고통은 무의미의 자각이며 그 어디서도 기꺼이 책임으로써 삶을 짊어지기에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이다. 한 발 더 내디디면 한 뼘 더 아플 뿐이다. 내내 그것의 확인만 이어진다.


 무의미, 무의미, 무의미...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어도 내 표정은 아직도 기본형이다. 그리고 여전히 내 삶과 세계의 많은 것들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 P. 229) 


 한 때는 그렇지 않은 곳이 있었다. '폭력의 기원'에 나왔던 작은 절곳과 같은 곳이. 순수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때가.

 하지만 이제 그런 곳은 사라졌고 더이상 갈 수도 없다. 그는 미로에 빠져 버렸다. 방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곳곳에 우회로를 강요하는 바리케이트가 있었던 것이다. 그건 '폭력의 기원' 단편에서처럼 누군가에게 속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혹은 '신데렐라 게임을 아세요?'처럼 문학이라는 것도 결국엔 뚜쟁이의 수단이 될 수 밖에 없는 이 자본주의라는 사회 자체 때문이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 있는 이 곳이 부활의 날이 올 때까지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연옥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그런 세계에서 쓰는 글이란 일기와 다를 바 없다고...


 우리는 더 이상 행동이 가능하지 않을 때 일기장을 펼친다. 그래서 나도, 심각한 이 모든 질문들을 뒤로하고 우선 일기를 쓰기로 했다.('연옥 일기' P.84)


 다른 이들이 그러듯이 여기의 소설들이 자전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면 애초부터 그가 일기로 작정하고 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이런 시대의 문학이란 일기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지금 돌이켜보니, 이 세계에 대한 어떤 묘사도 충분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 세계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도 충분한 것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충분치 않다. 세계가, 대상이 충분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 재현이 충분할 수가 있을까? ('연옥일기' P. 85)


 이러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떻게 하든 자기가 본 것, 느낀 것, 생각한 것 이상을 하기란 어렵고 일기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는 그것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래서 주제 넘는 짓을 하지 않는다. 타인의 이유를 알 수 없는 행위에 대해 끝까지 파고 들어가 아는 척 하는 것 혹은 있을 성 싶지도 않을 여인과의 깊은 교제 같은 것 따위를. 독자들이 혹할만한 이야기를 만들지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지도, 기승전결을 완벽하게 이루거나 인과관계를 정확히 설정하거나 하는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현실에서 있을 법 하지 않은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건 자신의 모습이 아니고 결국 누군가가 쓴 여행 가이드 대로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셋 다 동일한 저자의 여행 가이드 북을 챙겨왔고 그동안 여행 경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한국인에게 알려진 숙소며 관광지도 한정돼 있으니('혀 끝의 남자' P. 19)


 이건 그동안 주로 독서를 통해서 세계를 해석해 온 자신에 대한 비아냥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한 여자는 여행지의 실제 사정이 가이드 북과 전혀 다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역시 세상이 텍스트 대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바로 그것이 '연옥 일기'에서 재현의 불충분이란 말이 나오게 된 이유가 아닐까? 어쩌면 그 같은 한계로 인해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의 마지막 문장처럼 글쓰기에 대한 사랑을 다시 시작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전과 같이 다 안다는 듯이 주제 넘게는 하지 말고 일기를 쓰는 것과 같이 소박한 정도로만...


 아마도 그렇게 이건 스스로 의미라는 걸 만들어 보려는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혀 끝의 남자'에서 신들의 나라 인도에서도 찾지 못했던 신을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에서 찾는 것도 그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재현이 불충분할 수 밖에 없는 연옥과도 같은 이 곳에서 산책과도 같은 '쓰기'란 쓰면 쓸수록 모자람만 각인시키는 고통의 여정이지만, 그래서 쓰기 싫고, 들어가기 보단 빠져 나오려고 하고, 머무르기 보단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발끈을 다시 매고 있다. 여정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그를 좀 더 지켜보고 싶다.




 소설을 읽을 때 많이 생각났던 뮤직 비디오다. 존 홉킨스의 'OPEN EYE SIGNAL'이란 곡인데 폭력에 의한 마음의 상처를 간직하고 내내 보드를 타고 자신의 여정을 계속하는 뮤비의 느낌이 이 소설과 많이 비슷해 보였다. 처음 리뷰 쓸 때는 생각 안나더니 주말 아침에 갑자기 생각났다. 사람의 기억력은 때로 참 이상하게 작동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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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2-1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과 세상이 다른데 글은 써서 뭐 하나 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하지만 그래도 쓰고 싶어진 것인지, 이제부터는 큰 뜻보다는 작은 뜻을 위해서 쓰자인지...
자신이 깨닫기 위해서일지도...

현실과 달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도 좋죠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