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한 유언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신당한 유언들'은 1993년에 나왔다. 1990년에 나온 소설 '불멸'로 부터 3년 뒤다.

  '배신당한 유언들'은 에세이다. 지금까지 밀란 쿤데라가 쓴 총 10편의 에세이들 중 7번째로 나온 것이다. 소설은 모두 9편을 썼다. 2000년에 나온 '무지'가 현재로선 그의 마지막 소설이다. 이후로는 에세이만 나오고 있다. 굳이 책에 대한 리뷰와는 별로 상관 없을 것도 같은 이런 사실들을 언급하는 건,(물론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배신당한 유언들'과 그 전에 나온 소설 '불멸'이 아무래도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불멸' 바로 전에 나온 '소설의 기술'이라는 에세이가 또 바로 그 전에 나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설인 것처럼 말이다. '배신당한 유언들'도 그렇다고 본다. 밀란 쿤데라 스스로가 말하는 '불멸'의 해설서라고.

 보다 쉽게 비유하자면, DVD나 블루레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독 자신의 음성해설 같은 것...

 

 

  왜냐하면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가 소설 '불멸'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와 아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여 '배신당한 유언들'이 알송달송했다면 이참에 '불멸'을 한 번 들춰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에세이에서 모호했던 내용들이 소설을 통해 더욱 분명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혹, 그 정도도 왠지 귀찮다고 느끼시는 분들을 위해 정말 보잘것 없는 '리터러시'의 소유자이지만 감히 '배신당한 유언들'이 실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정리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일종의 분리에 대한 이야기라고...

 

 

   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말을 찾으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봤으나 아무래도 한 단어로는 저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셜록 홈즈가 자주 쓰는 참 재수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처음엔 알듯 모를듯한 말을 툭 던져놓고 상대방의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실컷 즐긴다음 구체적 설명이 들어가는 것. 나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럴거면 처음부터 말하면 좋잖아!'하고 돌을 던져도 그냥 맞을 수 밖에 없다. 어쨌든 내 머리의 프로세서는 이렇게 밖에는 작동하지 못하므로....

 

 

  분리의 이야기다. 어떤 분리?

 소설과 소설가의 분리이다. 소설의 내용을 가지고 소설가를 규정짓지 않는 것. '배신당한 유언들'은 결국 이런 말을 한다. 좀 상스럽게 직설화법으로 고쳐보면,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발 네가 읽은 것을 절대시하지도 말고, 읽을 것을 가지고 나를 어떤 사람이라 판단하지도 마.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나? 너는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자신할 수 있을만큼 무슨 절대적 근거라도 있는 것인가? 우리는 부단히 변하는 존재야. 너도 변하고 나도 변하지. 그런 우리에게 책은 잊혀진 시대의 유물, 지워져 버린 생물의 화석과 같은 것일 뿐이야. 너는 솜씨좋은 고고학자처럼 그걸 가지고 나를 유추하려들지. 하지만 그건 너의 상상력이 빚어낸 수사학일 뿐, 진실은 아니지. 그런데도 넌 진실이라 주장해. 너의 상상이 주형한 틀에 나를 맞추려들어. 이건 폭력이지. 더구나 그것이 글이 되었을 경우 그건 불멸이 돼. 기록으로 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도 하지. 진실이 아닌데도 불멸이 되어 진실과 대등한 위치를 가지게 돼. 거기에 대해 내가 아무리 진실을 말하려 해도 소용이 없지. 이미 불멸이 되어버린 글 앞에선 초라한 자기 변명이 될 뿐이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해한다고 말하고 이렇게 저렇게 나를 규정짓는 것은 소송과 다를바 없어. 내 '불멸'이란 소설에서 괴테가 '불멸은 영원한 소송이죠(P. 136)'이라고 말했듯 말이야. 카프카가 정확히 꿰뚫었듯이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고인을 없애기 위해 제기하는 소송인 것이지('배신당한 유언들' P. 340) 난 이게 싫어. 오만한 규정이 싫어. 유언의 진의는 오직 죽은 자만이 알 뿐이야. 우리는 늘 보지 않았나? 같은 유언임에도 불구하고 상속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더구나 자기가 한 해석이 옳다고 기꺼이 소송까지 불사하는 것을! 난 그런 것을 경계하려 해. 오만하게 진리라 주장하며 규정짓는 너의 입을 좀 닥치게 하고 싶어!"

 

 

 

  뭐,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극도로 작아지는 자신감이란...) 보잘 것 없는 리터러시의 그물로 포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이렇게나 단정지어 버리다니. 밀란 쿤데라가 정확히 내 심장에다 비난의 화살을 쏘아 퍼부어도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리뷰라는 것이 어쨌든 무슨 말이든 해야만 하니, '진격의 거인'처럼 앞만보고 걸어가는 무모한 철면피가 될 수 밖에...

 

 

  아무튼 밀란 쿤데라는 쇠사슬처럼 자기에게 감겨오는 자신의 글을 통한 이런저런 타인의 아는 척과 규정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 글을 쓴 당시의 자신이 정말은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기다 그 때의 생각이 영원히 항구적인 것도 아니고 어제의 내 생각과 오늘의 내 생각도 얼마든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수 있는 법인데도 불구하고 그 과거의 생각을 가지고 현재의 자신마저 규정하려 덤벼드니 못 참는 것이다.

 

 

  그는 '배신당한 유언들'의 시작부터 누누히 말한다. 가볍게 여기라고. 하나의 농담처럼, 피식하는 웃음처럼 여기라고. 소설가가 마치 베토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의 성전에 자신의 영혼을 봉헌하는 것과 같은 거대한 신념으로 작품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그저 모든 작품을 작가의 농담처럼 생각하라고. 그렇게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주인공의 성격이 휙휙 바뀌어서 일관성을 잃게 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고 '팡타그뤼엘'을 쓴 라블레나 '운명론자 자크'를 쓴 디드로도 여러가지 글의 형식들을 자유롭게 써서 형식의 일관성이 붕괴되더라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또 말한다. 사실 모든 위대한 작품들은 완전무결한 일관성 보다 프리재즈 스타일처럼 즉흥적 변주를 즐겼으니 그 소설을 무겁게 하는 완전무결함에 대한 요구야 말로 사실은 소설을 질식시키는 것이며 소설을 읽는 당신 자신 역시 질식시키는 것이라고.

 

 

 첫 머리에 나오는 유머, 웃음 혹은 농담은 그런 의미다. 스트라빈스키의 즉흥곡 또한 그렇다. 모두 당신으로 하여금 카프카에 대해서 막스 브로트가 했던 것처럼 소송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소송 그것은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다. 오로지 피고인을 죽이는 '마녀사냥'이다. 예컨대 앞서 인용한 소설 '불멸'에서 괴테의 대답을 낳게 한 헤밍웨이의 고백이 그렇다.

 

 

 헤밍웨이가 말한다. "보세요, 요한. 나 역시 그들의 영원한 구형(求刑)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신세랍니다. 나의 책을 읽는 대신 그들은 나에 관한 책을 써 댑니다. 내가 여편네들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고, 아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어느 비평가의 입을 찢어 놓았고 성실하지 않았으며 너무 오만했고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혔다고도 합니다.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가 이백여섯군데이면서 이백서른군데라고 떠벌렸다질 않나, 내가 상습적으로 수음을 했다는 등, 어머니에게 매우 고약하게 굴었다는 얘기도 해 대지요."('불멸' P. 136)

 

 

 

 이런 식의 떠벌림. 손쉬운 판단, 제멋대로의 자의적 규정들을 막는 것. 다시 말해 배신당한 유언들을 가급적 줄이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목적이라고 보여진다(어디까지나 '나'라는 필터에 걸려진 말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하여 이런 어미를 쓴다.). '어떻게 웃음 혹은 농담이 소송을 막을 수 있을까?' 혹시 아직도 궁금하다면 발터 벤야민이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유머는 선고가 없는 집행의 세계로서, 그 속에는 사면(은총)이 웃음 속에서 요란하게 들려온다.

 

  (발터 벤야민, '고트프리터 켈러에 대한 글 중에서( 발터 벤야민 선집 9 (길 刊))

 

 

   여기서 발터 벤야민이 분명하게 발히고 있듯이 유머, 웃음 혹은 농담이란 사면이 원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구형을 바라는 소송은 유발된 웃음이 가져온 사면 속에서 절대적으로 무화되어 버린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들을, 아니 모든 소설이란 작품들도 그렇게 바라봐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소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른바 훌륭한 소설이라 평할 때 쓰는 흔한 잣대들, 그러니까 제대로 된 현실 묘사, 딱 떨어지는 기승전결, 캐릭터의 일관성, 개연성 넘치는 전개와 같은 잣대들로 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말이다. 더하여 소설가는 자신의 전부를 그대로 녹여내어 작품을 쓴다는 우리가 흔하게 가지고 있는 소설가에 대한 환상으로 부터도.

 

 

   그런데 여기까지 읽어보면 왠지 이런 의문이 하나 들지 않는가?

 

  그러니까 왜 밀란 쿤데라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하는. 그는 이런 이야기를 '불멸'이란 소설에서도 했고, '배신당한 유언들'에서도 한다. 이렇게 형식을 달리하여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어떤 이유나 계기가 있어 보인다. 밀란 쿤데라는 누누히 제발 선을 넘지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고 우리의 뇌란 어쨌든 인과관계가 맞아 떨어져야 속시원한 법이니 아무래도 밀란 쿤데라가 바지 가랑이를 잡고 못 가게 한다 하더라도 선을 넘어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진격의 거인처럼 벽을 뚫고 돌진해 보면 현실의 그가 보인다.

 

   즉, 프랑스 망명 당시의 그가! 75년 그는 프랑스에 망명했고 81년 프랑스 시민권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죽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체코에 있을 때만 해도 적극적인 반체제 운동을 했었던 밀란 쿤데라는 그러나 프랑스에 정착하고나서 부터는 체코의 반체제 운동에 대해서 소극적이 되었다. 그는 반체제 운동을 위한 체코로부터의 어떠한 협력 요청에도 잘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때로는 비판까지 감행하기도 했다.

   당연히 체코의 반체제 진영에선 그런 밀란 쿤데라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건 체코의 반체제 운동에 대하여 공감과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던 유럽 지식인들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갖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 비난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작품의 순수성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훼손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프랑스 정착 후에 쓰여진 '웃음과 망각의 역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불멸'은 바로 그런 상황 가운데서 쓰여진 것이었다. 모두가 어떤 무리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키에르 케고어의 책 제목처럼 '이 편이냐 저 편이냐' 선택할 것을 물었다. 그렇게 모두가 같은 춤을 추는 원무를 하나 골라 참여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자신의 고유한 개인성을 포기하고 집단의 일원이 되라고. 개성을 나타내는 웃음은 그만두고 단일한 표층의 망각의 일부분이 되라고. 그래서 밀란 쿤데라는 썼다. '존재의 가벼움'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져내야만 하는 '고유한 개인성'을. 그리고 썼다. 이 모든 우스운 짓거리와도 같은 불멸의 폭력 속에 농담으로 맞서기 위하여.

 

 

   그리하여 '배신당한 유언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밀란 쿤데라가 겪은 경험에서 촉발된 사유의 산물이었던 것이다.(혹은 자기 변호...) 그는 소설과의 순수 경험을 중시하라고 말한다. 그 너머의 소설가는 생각하지도 말고, 행여 어떤 사회적 혹은 역사적 사실이 여과된 것일까 추정하지도 말며 오로지 눈 앞에 현존하는 글이 가져오는 순수한 경험에만 몰두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안개 속을 나아나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유는 안개 속에 있는 자의 자유이다. 그는 50미터 전방을 볼 수 있고 대화 상대의 모습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으며, 길가에 늘어선 나무들의 모습을 즐길 수도 있고, 근처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그에 반응할 수도 있다.

 인간은 안개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누가 더 맹목적인가? 레닌에 대한 시를 쓰면서 레닌주의가 어떤 귀결에 이를지 몰랐던 마야코프스키인가? 아니면 수십 년 시차를 두고 그를 심판하면서도 그를 감쌌던 안개는 보지 못하는 우리인가?

 마야코프스키의 맹목은 영원한 인간 조건에 속한다. 마야코프스키가 걸어간 길 위의 안개를 보지 않는 것. 그것은 인간이 뭔지를 망각하는 것이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망각하는 것이다.(P. 354 ~ 355)

 

 

   왠지 이 글을 쓸 당시의 밀란 쿤데라를 생각해보면 마야코프스키와 겹쳐 보이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순수경험은 그러니까 훗설이 말했던 판단중지, '에포크'와 같다. 순수하게 눈 앞에 현존하는 '글'이란 존재 자체 말고는 내게 선입관을 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판단을 '일시 정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건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므로 제대로 내 시야에 드러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대한 윤리적 물음을 요청한다. 도대체 우리는 글을 가지고 글을 쓴 타인을 어디까지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그건 나를 중심으로 해서 10미터 밖의 안개인가, 아니면 50미터 밖의 안개인가 그것도 아니면 100미터 밖의 안개인가?(이 경우 물론 가까울수록 더 잘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판단하고자 하는 타인의 자리에 나를 놓아보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 내가 쓴 글을 가지고 남들이 판단할 경우 나는 그 사람이 과연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나를 판단하고 있다고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내가 이해받고 있다고 인정하는 만큼의 거리가 정확히 우리가 남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밀란 쿤데라가 중시하는 순수 경험은 일종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 공사를 어디서 부터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장소란 물론 바로 우리 눈앞에서 유일하게 안개에 둘러싸여 있지 않아서 뚜렷하게 현존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니까 제목의 '유언'은 우리가 정확히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지시어인 셈이다.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유언에 곧이곧대로 충실하는 자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마지막 부분은 정확히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찍어야 할 방점은 그 유언의 충실이 어디까지나 개인적 신념의 결과라는 부분이다. 그들은 순수한 그들만의 자의로 유언을 글자 그대로 따르기로 선택했다. 글과 내가 만나는 순수 경험을 중시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어떠한 선입관이나 지식의 매개없이 이루어지는 그 경험에 있어서 판단이 어디까지나 내 순수 의지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렇게 하여 개인의 고유성을 건져내고 싶은 것이다. 즉흥이나 변주를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래도 정형화되고 규격화된 것엔 전체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그는 이제 문학이 오늘날 굳어질 대로 굳어져 버린 소설의 형식으로 부터 자유로워졌으면 한다. 생각해보면 그의 소설 스타일은 꾸준하게 전형적인 소설 형식을 탈피해 왔는데 그만큼 그가 집단이 매개되지 않은 순수한 개인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현존하는 수많은 글들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글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수 년 전 과거의 글들까지 가져와 비난하고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문장만 따와서 공격하는 것도 자주 본다. 인터넷 마녀 사냥이 횡행하고 행간을 읽어내야 하며 저의를 의심하고 추정해야 하는 것이 거의 보편화되어 버린 요즘 시대에 밀란 쿤데라의 이러한 말은 얼른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 자신의 삶까지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분명한 안개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안개를 슈퍼맨처럼 투시하여 명확한 진실을 알아낼만한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 앞에 놓여진 어느 것 하나를 섣불리 선택할 수 없는 난관은 이제 사유를 촉발한다. 아마도 궁극에 가선 당신의 결단을 이끌어낼 사유를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밀란 쿤데라가 '배신당한 유언들'을 통하여 독자에게 접하게 하려는 순수경험인지도 모르겠다. 사유야 말로 바로 존재의 고유한 자기 증명이니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3-05-31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는 무엇인가를 정해놓고 글에 대해 가르칩니다
시험 문제에 다른 답을 쓰면 틀려요
하지만 글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기도 합니다
그게 맞든 틀리든 그것은 작가와는 상관없는 거겠죠
작가는 글을 쓰면 거기에서 벗어나는 듯합니다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해설서를 쓰다니, 재미있네요
예전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지만 소설의 기술은 안 읽어봤습니다
한번 읽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