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아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작은 고독이다.

 

 

  특별히 감상에 사로잡힌 건 아니다. 그리움을 느낀 것도 아니다. 만나고 싶은 얼굴을 떠올린 것도 아니다. 아무런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을 주말을 맞이하고,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건 오랫동안 질리도록 반복했다. 아무 데나 좋아, 모임만 있다면 어디라도 좋아.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눈의 아이' p. 9)

 

 '눈의 아이'의 화자, 마에다 유카리는 너무도 외롭다. 그녀가 얼마나 외로운지는 미야베 미유키가 다음과 같은 탁월한 묘사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읽으면서 역시 미야베 미유키라고 생각했던 문장이기도 하다.)

 

 방은 추웠다. 벽시계에 달린 온도계는 섭씨 사 도를 가리킨다. 잔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더니 자동응답기 램프가 깜빡이고 있었다. 코트도 벗지 않고 보일러도 틀지 않은 채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한겨울의 금요일이다. (p. 10)

 

 그렇게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마에다 유카리는 몸을 녹이기도 전에 자동재생기 부터 재생한다. 도대체 얼마나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웠으면 그토록 서둘러 확인했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은 마지막 문장인 한겨울의 금요일에 이르면 더욱 강해져 버린다. 그녀가 추위에 떨면서 잔업까지 마치고 온 날은 남들에게는 '불타는 금요일'이었고 그런 때 조차 그녀는 언 몸을 녹이기 보다 언 마음을 먼저 녹여야 할 정도로 외롭다. 그녀가 얼마나 외로움에 깊이 빠져있는가를 미야베 미유키는 이렇게 몇 개의 문장만으로 별다른 설명없이 절절히 느끼게 한다. 읽으면서 '이러니까 미야베 미유키인거야...'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연히 일어나는 궁금증. 그녀, 마에다 유키는 왜 그렇게 고독하게 된 걸까?

 시작은 초등학교 동창생의 간만에 만나자는 연락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매일 사이좋게 어울려 놀았던 친구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서먹서먹해져 그 후로 20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였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사건이란 바로 같이 놀던 여자친구 하나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로 부터의 호출이었다. 눈이 오는 날에 살해되어 눈의 아이가 되어 영원히 열 두살로 남아있는 '유키'를 다시금 기억하기 위한...

 

 이번에 나온 미야베 미유키의 '눈의 아이'는 표제작 눈의 아이를 비롯하여 모두 다섯 개의 단편이 들어간 단편집니다. 거기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단편 '눈의 아이'는 이 단편집에서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이 어째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 같은 걸 말해주는 작품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무관심이다. 그러니까 타인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 그것은 유키가 죽었을 때 마에다 유카리의 엄마가 그녀에게 했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바로 드러난다.

 

 솔직히 말해, 모두 유키코의 가족이 사라지자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아주 노골적으로 그런 안도감을 표현했다.

 

 - 장보러 가다가 유키코 엄마와 마주치면 무슨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 줘야 좋을지 몰라서 괴로웠어. 오죽하면 길모퉁이로 피해다녔다니까. 이제 그런 데까지 신경 안 써도 되겠구나. (p. 12)

 

 유키코를 죽인 범인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다. 그에 대한 불안 보다도 딸을 잃어버린 이웃의 비탄에 젖은 얼굴을 더 가까이서 봐야한다는 사실이 더 꺼림칙하다. 제삼자의 본심이란 그런 것임을 엄마로 부터 배웠다. (p. 13)

 

 어쩐지 이 말에서 임마누엘 레비나스가 했던 말, 그러니까 '타인의 얼굴은 우리로 하여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가 생각난다. 우리가 비탄에 젖은 얼굴들을 피하게 되는 건 바로 그 책임을 은연중에 일깨우기 때문이다. 그 고통에 우리도 참여하고 그것을 나눠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 '눈의 아이'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녀가 이 책을 통해 다섯 편의 작품에 걸쳐 누누이 말하고자 하는 건 지금 일본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이 마에다 유카리의 엄마의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러한 개인의 모습은 다음 편인 '장난감'에서 보다 사회적 차원의 모습이 되어 미야베 미유키의 발언은 더욱 직설적이 된다. 그 작품의 주인공 친척 할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아내의 죽음으로 오래도록 경영해 온 완구점을 팔아야 할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가게를 그대로 지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오래도록 그 이웃이었던 같은 상가 사람들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 가게를 팔게하려고 자식들을 부추기거나 할아버지에 대한 악의적 소문을 흘린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 하면,

 

 "문제는 부모님의 부모님 세대부터 가게를 물려받아 평생 처마를 잇대고 살아온 분들이라 누구 한 사람 멋대로 가게를 닫고 '그럼 잘들 있게' 하고 떠나기가 어렵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동네에 돌아올 생각도 없는 자식들에게 완구점이 상속돼 땅이 팔리면 다른 가게 주인들도 이때다 싶어 상가를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이건가요? (P. 48)

 

 이런 이유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일부러 말을 안 했는데 이러한 상가 사람들의 모습은 그 동기가 '눈의 아이'에서 유키를 살해했던 이의 살인 동기와 그대로 겹치기 때문에 그 개인적 모습이 집단으로 확대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만 챙기고 보는 모습을 미야베 미유키는 두 편에 걸쳐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비판을 미유키가 보다 사회적 차원으로 넓혀서 하는 것처럼 이는 현대 일본 사회에 대한 미야베 미유키의 발언이기도 하다. 띠지에 나와있는 말에 의하면 이 단편집은 일본에서도 느닷없이 나왔다고 한다.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표작가로 늘 동시대의 일본이 가진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이니만큼 이 역시 그녀가 보고 느낀 일본 사회의 문제점 때문에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느닷없이' 나왔다는 점에서 거기에 대한 발언이 그녀에게 절실했었음을 아울러 느끼게 한다. 이러한 절실함은 단편집이 나아갈수록 그녀가 지금 일본 사회에 바라는 모습, 그러니까 대안이 더욱 더 명확해지고 있다는 것에서 더욱 확증된다.

 

  그녀가 느끼는 문제점은 이미 앞의 두 편에서 나왔다. '지금 일본 사회에서는 유키와 그 할아버지처럼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으로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런데 그 이유를 환기시키는 자들이 모두 죽은 자들이다. 그들은 죽었지만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지 않고 유령이 되어 다시 돌아와 존재 자체로서 이기심과 무관심을 비난하는 일을 맡는다. 그 역할을 모두 '저편의 존재'가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2011년 일본에서 가장 많은 '저편의 존재'를 만들고 말았던 3월 11일의 쓰나미와 원전 사태를 연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단편집이 정말은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추리가 어느정도 가능하다. 바로 소설 속 유카리의 엄마나 상가사람들처럼 빠르게 3월 11일의 비극과 희생자들을 잊어가고 있는 당시 일본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단편집 '눈의 아이'는 2011년 여름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미증유의 비극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 때는 일본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3. 11에 관한 것을 보기가 어려워져 있었다. 반응의 추이만 놓고보자면 일본 사회는 정말로 빠르게 그 비극과 희생자들을 잊어갔던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가 발언하는 건 바로 이러한 일본의 상황이다. 그녀는 그 무관심이 분명 의도적이라 보았고 그렇게 되는 이유를 하나는 책임을 짊어짐의 거부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궁극적으로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기도 한 이기심이라 보고 바로 두 편의 작품에다 그것을 우려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이 작품집을 내어놓은 것은 '돌이켜 봄'이다.

  그건 그 비극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 잊지 않는 것이며 그 과거가 바로 타인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기에 궁극엔 그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고 그 책임을 떠맡음이다. 정확히 뒤이은 세 편의 단편들은 거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요코'는 '기억'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며 '돌베개' 그리고 마지막 '성흔'은 결국 사회의 궁극적인 치유는 타인의 아픔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대해 뭔가 책임을 나누어 짊어질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읽으면서, 특히 '성흔'에 이르러 나는 미야베 미유키가 내어놓는 대안이 왠지 언젠가 읽었던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 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때 사사키 아타루는 이렇게 말했다.

 

 넓게 보자면 우리는 이재민입니다. 그러나 집을 잃은 도호쿠의 이재민이 보기에 우리는 이재민이 아니겠죠. 말하자면 '후방 지원'을 해야 할 입장입니다. 도호쿠의 이재민들에 대해서는 그녀들 그들의 경험을 'THE ONLY ONE' 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괴로움이 'ONE OF THEM' 으로써 많은 참화 가운데 하나이며 여러 사람이 안고 있는 쓰라림이라 여기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냉정한 시선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적 이재민의 'THE-ONLY-ONE-NESS'도 지킬 수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성흔'은 정확히 'ONE OF THEM' 의 작업에 속한다. 그러고보면 첫 단편 마에다 유카리의 경우는 완전히 'THE ONLY ONE' 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의 고독만을 생각했고 그렇게 늘 어릴 때부터 자신의 아픔만 생각해왔던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ONE OF THEM'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 '완구점'에서 할아버지의 유령을 바라보는 것이나 '지요코'에서의 기억은 모두 'ONE OF THEM'하는 것을 뜻한다. 미야베 미유키는 이러한 'ONE OF THEM'을 뒤이은 '돌베게'에서는 리포트 쓰는 것으로 마지막 '성흔'에서는 직접 대화와 참여로 더욱 확장해 나간다. 결국 이 단편집 전체는 'THE ONLY ONE'에서 'ONE OF THEM'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미야베 미유키는 마지막 '성흔'에서 다시금 처음 '눈의 아이'에 나왔던 눈을 삽입함으로써 이 여정을 완결시킨다.

 

 정말 미야베 미유키가 뛰어난 것은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 눈을 다루는 방식에 차이를 둔 것이다.

 

  이를테면 '눈의 아이'에서 눈은 지극히 주관적 심상의 대상이다. 화자인 마에다 유카리를 비롯하여 거기에 등장하는 유키를 추억하는 모두는 오로지 눈을 유키와 관련해서만 바라본다. 그러니까 지극히  'THE ONLY ONE'적 입장으로 눈을 다루는 것이다. 이는 눈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로 더욱 강조된다.

 

  그치지 않고 내리는 눈만이 어두운 밤,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빛을 내며 팔랑팔랑 내렸다.(P. 28) 

 

  그런데 마지막 '성흔'에서 첫머리 부터 등장하는 눈을 다루는 방식은 이와 전혀 다르다. 눈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은 '눈의 아이'에서 나왔던 눈을 둘러싼 대화의 반복이라는 것은 그 때 눈에 대해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네 명이라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증명된다.(알고보면 미야베 미유키는 정말 얼마나 치밀한 것인지! 가벼움 속의 진중함이란 이 단편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반복된 대화에서 사람들은 눈에 대해 이제 이렇게 말한다.

 

쉰 살이 족히 되었을 관리인은 삼월에 도쿄에서 내리는 눈은 의외로 폭설이 되곤 하는 법이라고 했다. 아르바이트 청년은 대걸레를 한 손에 쥐고 지구 온난화와 이상 기후에 대해 자기만의 이론을 한 자락 늘어놓았다. 수예 교실의 노부인은 추워서 목에 감은 내 머플러를 칭찬해 주었다. 부인의 애용품인 지팡이의 미끄럼 방지 고무캡에는 얼어붙은 눈이 덩어리져 달라붙어 있었다. (P. 127)

 

 여기서 눈은 첫 머리부터 더 이상 'THE ONLY ONE' 이 아니다.

 어미 '-곤'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때만 되면 반복 가능한 'ONE OF THEM' 인 것이다. 더우기 그것은 청년의 말에 이르러 더이상 '눈의 아이' 때처럼 주관적 심상이 투영되지도 않는다. 그저 한낱 이론의 대상일 뿐이다. 또한 마지막 노부인에 이르면 유일한 생명의 빛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저 어디에서나 흔히 있어 그 누구의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덩어리째 얼어붙은 눈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ONE OF THEM' 이 지극히 확장된 것과도 같이...

 그러므로 '성흔'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로 인해 더욱 명확해진다. 보다 진정한 타인의 책임을 떠맡기 위한 'ONE OF THEM' 을 어떻게 하느냐?, 바로 그것인 것이다. 때문에 '성흔'은 희생자에게 가장 깊숙이 개입한다. 다섯 편 중 오로지 '성흔'만이 희생자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만큼 대안이 결의에 찬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 역시도.

 

 '눈의 아이'는 외관에 속기 쉽다. 그러니까 두께가 얇아서 가벼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소설인 것이다. 개인적으론 앞에서 주욱 써 온 바대로 지금 일본 현실에 대한 비판과 거기에 걸맞게 대안 역시도 정확하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 중 하나로 선뜻 꼽고 싶다. 녹록치 않은 깊이를 얼마 되지도 않는 부피의 이야기로 우려내었다는 점에서 더욱 만만치 않은 미야베 미유키의 내공을 느끼게 된다.

 결론적으로, '과연, 미야베 미유키!'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3-04-27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의 아이, 라는 제목은 예쁜 느낌도 들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군요
눈에 대해 그렇게 쓴 것을 알아챈 헤르메스 님도 대단하십니다^^
무엇인가에 대해 쓸 때는 그 말을 쓰지 않고 나타내는 게 좋다고 하던데, 그런 것도 잘 나타나 있군요, 본래 잘 쓰는 분이지만...
그런 것을 잘 봐야겠습니다, 저는 그냥 넘어갈 때가 많은 듯해요

사실 어떤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그 일을 쉽게 잊기도 해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는 그만 잊고 살아가라고 하죠 잊을 수 없는 일인데...


희선

ICE-9 2013-04-27 23:17   좋아요 0 | URL
아뇨, 저는 그저 강백호가 하듯이 살짝 거든 것일 뿐, 그런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미유키가 대단한 겁니다^ ^
아픔을 지켜보는 자는 그들의 아픔을 유일한 아픔으로 존중해주어야 하고 아픔을 겪는자는 스스로 그것을 자기 혼자만 겪는 유일한 아픔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세는 정말 배워볼만 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타인의 아픔은 얼마든지 객관화하면서도 스스로의 아픔은 오로지 주관화만 시키고 있지요. 제대로 된 객관화와 주관화가 정말 필요할 것 같아요. 이번의 '눈의 아이'를 통해 다시금 이것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