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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게의 전쟁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원숭이와 게의 전쟁'은 제가 처음 만나보는 요이다 슈이치의 소설입니다. 예전 신간 추천할 때도 썼습니다만 전 이 소설을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간의 대결을 다룬 소설이라 생각했습니다. 소개글에 그렇게 나와 있었거든요. '현재 '약자'라고 불리는 위치에 있거나 한 때 있었던 자들이 서로 힘을 모아 거대한 사회 권력, 기득권층에 맞선다'라고 말이죠. 그래서 뭔가 얼마전에 방영한 드라마인 '추적자'와 비슷한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더군요. 읽어보시면 분명히 느끼시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방식의 사회 권력의 기득권층과 싸우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사실 초점이 좀 엇나간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평성(헤이세이) 원숭이와 게의 교전도'입니다. 제 생각엔 제목에 이미 요이다 슈이치가 이 소설에서 하고 싶어하는 것들이 다 나타나 있는 것 같습니다. 저기서 '평성'은 현재 일본에서 사용중인 연호를 말하고(예전에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인 다카하타 이사오가 만들었던 애니메이션 중에 '평성 너구리 대작전'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의 '평성'이나 여기의 '평성'이나 의미는 같습니다.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죠.) 원숭이와 게의 싸움은 일본에 전래되는 유명한 동화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그 이야기는 해설 부분을 인용하자면 이렇다고 하는군요.

 

 어미 게를 속이고 죽인 교활한 원숭이에게 새끼 게들이 앙갚음 하는 내용의 전래동화다.(p. 548)

 

 아마도 여기서 원숭이 를 거대한 사회 권력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전래동화만 놓고 봐도 그렇죠. 이건 마르크스로 치면 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마찬가지의 모습이니까요. 원숭이가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소설을 읽어보면 요이다 슈이치는 원숭이를 그걸로 상정하고 있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이 소설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주인공들을 위기에 몰아넣는 힘있는 세력들이 나옵니다. 하지만 소설에서 별로 중요한 역할은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그건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 정도에 불과합니다. 어떤 풍경들은 더러 여행자의 마음을 끌어 무작정 정거장에 내리게도 하지요. 그런 정도의 풍경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데 하나의 계기로 작용 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소설의 소개글은 초점을 잘못 맞추고 있다는 것이죠. 만일 이 이야기를 그렇게 본다면 이 작품은 정말로 심심한 작품이 되어 버립니다. 사회 권력층이 나타나고 그 도구로써 야쿠자들이 움직이는데도 정작 아무런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요이다 슈이치는 그 대목을 서술할 때 조차 평이할 뿐이고 등장 인물들 또한 이렇다 할 불안감이나 위기감을 보여주지 않아요. 자기 자신이 당사자인데도 마치 영상 속에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인양 초연함이 있습니다. 차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말이죠. 더구나 해결 장면에 가서는 더 가관입니다. 정말 흐지부지 모든 갈등들이 정리되어 버리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다행이구나 싶더군요. 만일 갈등 초반에 잔뜩 힘을 주고 긴장감을 부여했다면 결말 부분이 정말 허탈했을테니까요. 소설에서 유일하게 긴장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던 그 부분은 조용히 피어올랐다 조용히 사그라지는 모기향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소개글 식으로 이 소설을 사회적 약자들의 사회적 강자와의 한판 승부로 몰고가려 했다면 김어준 식으로 '실패!'라는 것이죠.

 

 해서, 원숭이는 분명 다른 것을 뜻할 겁니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쓰고 상도 여러 개 받은 요이다 슈이치 정도 되는 작가가 초보자가 봐도 한 눈에 문제가 드러나는 허술한 설정을 할 리는 만무하니까요. 아마도 그 원숭이의 정체는 궁극적으로 요이다 슈이치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무엇을 주려했느냐가 밝혀질 때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 같네요. 그렇다면 요이다 슈이치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주려 했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제목처럼 정말 많은 '새끼 게'들이 나옵니다. 소설의 시작은 정말 '새끼 게'처럼 작고 좁은 곳에서 시작합니다. 도쿄의 가부키초 술집 계단과 간판 사이의 아주 작은 틈새에서 아기를 안고서 웅크리고 앉아있는 마지마 미쓰키의 모습에서 시작하니까요. 그녀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안고 벌써 오래도록 연락이 끊긴 돈 벌러 고향을 떠난 남편을 찾아 도쿄로 상경한 참입니다. 하지만 남편의 행방은 알 길이 없고 더 이상 어디 갈 데도 없어서 거기 쭈그려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그녀가 처한 상황에서 보여지듯이 그녀는 작디 작은 존재입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런 문장을 첨언하여 그녀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 지 강조해서 보여주지요.

 

 설마하니 그런 곳에 사람이 있을 줄은 모르는지 그럭저럭 그 자리에서 20분 가까이 쉬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도 미쓰키를 알아채지 못했다.(p. 7 ~ 8)

 

 그렇습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거대한 사회 속에서 너무도 작고 너무나 보잘 것 없어서 보여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요이다 슈이치가 바라보는 '새끼 게' 의 전형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러했던 '새끼 게'들이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존재가 되는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마지마 미쓰키만 봐도 그렇습니다. 후에 도쿄에 정착하게 된 미쓰키는 자신이 상경한 사연이 알려져서 방송까지 타게되고 결국 유명인이 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 모두의 시선 속에 당당히 드러나는 존재가 된 것이죠. 이는 계단에서 웅크리고 있던 미쓰키를 처음 발견한 준페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손님들을 대상으로 한 'BAR'에서 가게에서 통용되는 한국말을 몰라서 사실은 거의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던 준페이는 후일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의원 선거에까지 출마하여 일본 정치의 희망으로까지 성장하게 됩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원숭이와 게의 전쟁'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존재감이 한없이 엷었던 존재들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고 뚜렷한 존재감을 획득하게 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한 마디로 성장 소설인 것이죠. 그러면 원숭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단순히 어떤 계층 이나 세력 같은 것을 뜻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여기의 원숭이는 등장인물 각자마자 마주하고 있었던 상황 혹은 한계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진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만들고 낙담과 절망 속에 늘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드는 그런 처지나 조건들 말이죠. 결국 원숭이란 등장인물 각자가 '나는 안 돼'라고 느끼게 만드는, 그 너머의 미래를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대한 벽과도 같은 한계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소설이 제목에서 뜻하듯 서로 싸우는 이야기라면 그것은 현실에서 느껴지는 장벽을 너무 크게 보고 구차한 변명이나 해대며 포기하기 바쁜 자신과 싸우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아마도 그래서 전 요이다 슈이치는 굳이 '교전도'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이 소설을 일종의 그림으로 보기를 원합니다. 그 그림이란 예를 들자면 브뤼겔의 그림 같은 것이죠. 다양한 인물 군상들의 저마다 다른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런 브뤼겔의 그림 말이죠. 그렇게 이 소설엔 정말 많은 새끼 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모두는 동일한 비중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획득해 나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도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말이죠. 말하자면 이 소설은 서로가 모두 다른 빛을 내는 이채로운 존재들로 이루어진 모자이크 그림과 같습니다. '교전도'는 어쩌면 같은 '새끼 게'로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지도 모를 우리들의 입을 침묵시키려는 요이다 슈이치의 의도입니다. 이토록이나 많은 사례들이 있다면 변명의 여지 또한 줄어들테니까요. 그러니 보다 분명하게 요이다 슈이치가 이 소설을 통해 하려는 것이 드러나는 것 같네요. 이 소설은 정말로 뭔가 위안이 되려하고 힘이 되려 합니다. 그냥 사회를 스케치하듯 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려 하는 책입니다. 솔직히 읽다보면 여기에 묘사하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과 그들의 연대가 좀 과잉되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소설이 일본에서 유행중인 '치유계'를 표방하고 있지도 않은데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다 착하고 성실하게 나오니까요. 미쓰키의 무책임한 남편인 도모키까지 그렇습니다. 소설이 잔잔한 물처럼 긴장감이 없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욕망을 남을 희생시켜서라도 꼭 이루겠다는 강렬함이 없습니다. 그 보다는 설사 협박자의 위치에 있더라도 자신의 이득 보다 먼저 남의 상황을 헤아리고 배려합니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니 심심하고 잔잔할 수 밖에요. 소설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다 이러하다 보니 과잉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소설에서 과잉이 나타나는 건 작가가 무리를 해서 입니다. 꼭 하고 싶은 뭔가가 있기에 무리하는 것이죠. 저는 그게 주제 같습니다. 이를테면 타인에 대한 관용과 연대의 정신이죠. 새끼 게들이 서로 협력해서 원숭이에게 복수한다는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무엇보다 같이 있는 이들에게 마음 문을 열라는 것을 촉구하는 소설입니다. 미쓰키와 준페이가 일하는 주점의 마담 마키의 고백에서도 드러나듯이 내 곁에 누가 있는가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니까요. 주어진 처지와 한계를 극복하게 되는 것도 준페이와 사노 요코의 관계처럼 다 그러한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서 입니다. 그렇게 이 소설은 나 아닌 타인의 소중함과 왜 그들을 관용하고 연대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그것을 독자들에게 분명히 주지시키려고 요이다 슈이치는 다소의 과잉마저 무릎 쓴 것이죠. 그래서 아마 이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문학적 성취 보다는 요이다 슈이치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주려는 것이 너무 분명한 나머지 계몽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재밌게 읽었습니다. 현실이 너무도 저를 무력하게 만드는지라 이 소설에서라도 위안을 받고 싶어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이다 슈이치의 전작도 궁금하더군요. 찾아보니 '요노스케 이야기'가 이와 비슷한 것 같더군요. 일단 그 소설부터 읽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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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디바 2013-02-25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혹평한 소설인데 이렇게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점에 놀랐어요. 헤르메스님의 혜안은, 작가의 다른 의도를 읽어내시는군요. 매우 흥미롭게 봤습니다. 원숭이와 게가 아예 따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을 묘파한 것이다라는 분석이 인상깊네요. 저도 사실 이 작가를 처음 접해서 호감을 갖기 좀 어려웠던 것 같아요. 헤르메스님의 따뜻한 시선을 저도 독서에 참고해보려고 합니다. : )

ICE-9 2013-03-12 18:24   좋아요 0 | URL
이런, 여의님 이제야 댓글을 달아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하네요. 처음으로, 거기다 이렇게 좋은 말을 해 주셨는데 말이죠. 요즘은 너무 바빠서 책 읽고 글 쓰고 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댓글 확인을 일일이 못하게 되네요. 따스한 마으으로 작품을 대한다고 해주신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해서 그 말씀이 더욱 고맙게 느껴지네요.^ ^

희선 2013-02-25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래 소개글은 좀 지나치게 쓰지 않나 싶습니다
권력층과 싸우지 않더라도, 여기 나오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벽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작가는 우리나라를 좋아하나 봅니다, 소설에 우리나라 사람 이름이 자주 나와요, 요노스케 이야기에도 나온답니다, 대학을 갓 들어간 요노스케가 자라가는 이야기거든요
이 작가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고, 그저 요노스케 이야기는 읽어서...^^


희선

ICE-9 2013-03-12 18:27   좋아요 0 | URL
과장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이번 건 좀 핀트가 어긋나서 말이죠. 아마 소개글에 혹해서 읽었다면 좀 평가가 그리 좋지못했을 것 같아요. 아, 역시 그랬군요. 이 작가가 우리나라를 좋아하고 있었군요. 희선님의 댓글을 읽으니 더욱 요노스케 이야기가 읽어보고 싶어지는데요. 이미 요노스케를 읽어보신 희선님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