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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을 위하여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2년 6월
평점 :
미나토 가나에의 'N을 위하여'는 이제야 소개되지만 사실 '야행관람차' 앞에 쓰여진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 순서를 미리 알려두는 게 좋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이 작품이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 세계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전 '왕복서간'에 대해 글을 쓸 때 그녀의 작품이 점차 '고백'과는 정반대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했었고 그 과도기에 속하는 작품이 '야행관람차'라고 밝힌 적이 있다. 오로지 타자의 제거에만 하던 주체가 타자가 짊어진 짐을 나누어 받으려고 한다는 게 보인다는 이유로...
(보다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조 http://blog.aladin.co.kr/748481184/5718450 )
하지만 사실 그 과도기로서의 시작은 '야행관람차'가 아니었다. 그 진정한 시작은 바로 이 소설 'N을 위하여'였다. 단적으로 'N을 위하여'는 '야행관람차'에서 보여주고 '왕복서간'에 이르러 완성되어진 그 변화에 있어 '발아'와도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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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날개를 보면 미나토 가나에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지금까지 저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그로 인해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만, 이번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자기주장을 다소 억제하기로 했습니다.
- 출간에 즈음하여, 미나토 가나에의 말 중에서 -
본편을 읽기전에 이 말 부터 읽었는데 그 때부터 이 소설이 '고백' '속죄' '소녀'로 이어진 흐름과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다. 읽어보니 과연 달랐다. 고백과 똑같은 형식이지만 'N을 위하여'의 독백의 주체들은 '고백'의 독백 주체들과 명백하게 반대되는 것을 위해 말하고 있었다. '고백'은 그야말로 타자의 제거를 위한 '독(毒, POISON)백'이었지만 'N을 위하여'에서는 타자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독을 삼키는 독백이었다. 단적으로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아예 사랑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린다.
"그럼, 말이지, 스키시타에게 사랑이란 뭐지? 아니 바꿔 말하지 궁극의 사랑이란?"
(...)
"죄의 공유."
스키시타가 중얼거렸다.
(...)
"... 공유란 것은 아무도 모르게 상대의 죄를 절반 짊어지는거야. 아무도. 그러니까 상대도 모르게 죄를 떠안고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것"
(P. 154)
사실 'N을 위하여'는 이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말은 이후에 성취되어지는 가나에의 변화그 자체를 나타내는 정의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후의 작품들 자체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나타났던 '죄의 공유'가 '야행관람차'에서도 '왕복서간'에서도 내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야행관람차'에서는 살인죄를 가족과 이웃들이 나누어 짊어지고 '왕복서간'에서는 친구나 연인들이 짊어진다. 이렇게 내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가나에가 궁극적 사랑의 모습으로 죄의 공유를 믿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 같은 변화가 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쩌다 '죄'라는 것을 타자의 제거를 위한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궁극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통로로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이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대부분 살펴보는 것은 작품이 만들어졌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다. 작가도 어차피 시대와 별개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고 독자들의 공감 또한 당시 시대적 상황과 불가분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N을 위하여'는 2010년에 나왔다. 2009년의 일본은 2008년 초래된 위기를 어느 정도 해결해 가는 양상이었으나 여전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실업률은 역사 이래로 최고조에 달했고 극빈자들의 수 또한 200만명을 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어딜가나 절망과 곤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미나토 가나에가 보여준 변화는 어쩌면 거기에 공명한 것은 아니었을까?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웃들의 비극적인 삶을 마주하면서 자신의 작품으로나마 이들을 대하는 데 있어 배척과 심판 보다는 먼저 이해와 배려가 주어질 수 있도록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전과는 달리 자기 주장을 굽히고 먼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 'N을 위하여'을 보다 의미심장한 작품으로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소설을 주의깊게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소설에 미나코 가나에의 분신이라고 해도 좋을 인물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 같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가나에의 내면이 그대로 투영된 존재가 말이다.
바로 그 존재가 초보 미스터리 작가로 나오는 '니시자키 마사토' 이다.
그는 아직 정식 데뷔도 치르지 못한 무명 작가이지만 수 년간 백수로 지내면서도 작가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데 그런 그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다. 그건 어릴 때 겪었던 학대 때문이었다. 그는 학대로 인한 고통의 이유를 찾으려 했고 바로 그 때문에 결국은 문학을 하게 되었다. 미나토 가나에는 그가 직접 쓴 작품까지 소설에서 보여준다. 그 때문에서 소설의 구성이 다소 산만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위험을 무릎쓰면서까지 가나에가 마사토의 소설을 그것도 두 편이나 인용해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답은,
흥미롭게도 두 편에 담긴 마사토 소설의 여정이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여정과 비슷하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작열하는 새'와 '낙원'에 이르는 여정이 그야말로 '고백'과 'N을 위하여'에 이르는 여정과 닮았다는 이야기이다. '작열하는 새'는 당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을 그린다. 거기엔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에, 오로지 가해자의 전적인 의사에만 달린 것이기에 더 공포스럽다. 때문에 당하는 이로서는 오로지 순응하는 것 밖에는 생존할 길이 없다. 이건 마사토 뿐만이 아니다. 여주인공 스키시타 역시 이 고통스런 과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벗어나는 것으로 앙갚음 하려고 한다. 마사토는 새가 되고 싶어하고 스키시타는 아버지가 지배하고 있는 섬을 벗어나려 한다. 이 벗어남은 바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존재가 버티고 있는 세계를 버림이니 그 벗어남 자체가 바로 타자의 배제에 다름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열하는 새'는 그대로 가나에의 데뷔작 '고백'과 닮았다. 사실 '고백'의 모든 이들 또한 자신을 얽매고 고통을 주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실 그들의 '살인'조차 알고보면 그들의 벗어남이 좌절되었을 때 찾아온다. 벗어남을 통한 타자의 제거가 불가능함으로 아예 그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이렇게 '작열하는 새'는 '고백'의 미나토 가나에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과거의 고통이라는 것이다. 즉 스키타시와 마사토는 트라우마를 간직하고 있다. 마사토는 그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 문학이라는 소재를 택한다. 하지만 '작열하는 새'를 쓸때만 해도 마사토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행위와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한 쌍인 것일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에 대해 뒤늦게 이유를 늘어놓아 봐야 사실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동기다, 경위다, 이유다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p.247)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과거는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글을 썼던 것은 상상적으로나마 거기에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불을 지르면 중대한 범죄가 된다. 설령 사랑을 위해 지른 불이라도. 방화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폭력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광기의 이유가 사랑이라도 죄는 죄. 어리석은 행위라며 멸시받고, 매도당하고, 존재했던 사랑마저 부정되고 만다. 하지만 문학의 세계에서는 이런 것들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평가된다. 과거의 인생에서 사랑을 찾아내고 싶으면 사실을 문학이라고 승화시키면 된다. 그러려면 각색이 필요하다.(P. 260)
그렇게 애초엔 타자의 제거가 초점이었다. 하지만 '작열하는 새'를 쓰면서 그는 변한다. 글 자체가 자신을 객관화하고 그것을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객관적인 자아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글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타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됨을 뜻한다. 즉 글을 읽고 쓴다는 것 자체가 타자에게 자신을 여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 이야기를 쓰면서 작가는 여러 인물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하나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덕분에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게 된다.
마침내 나는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다 쓰고 나서 그런 예감과 보람을 느낀 작품, 그것이 바로 '작열하는 새'였다. (P. 261)
그래서 그에 뒤이은 두 번째의 소설 '낙인'은 완전히 변한다. 그건 치유의 이야기이고 이것은 바로 '작열하는 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열하는 새'와 '낙인'이 보여주는 궤적은 그대로 '고백'과 'N을 위하여'가 이루는 궤적과 같다. 이 말은 마사토에게 일어난 것과 동일한 것이 바로 미나토 가나에 자신에게도 일어났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과거에 있었던 어떤 트라우마 때문에 그녀는 '고백'이란 소설을 쓰게 되었지만 타자의 제거에만 맞추어진 '고백', '속죄', '소녀'를 쓰다가 그 과정을 통해 어느 순간 그녀 역시 시선을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 또한 아울러 보게 되었고 그것이 2009년 이래로 범람하는 이웃들의 고통들에 눈을 돌리게 하여 결국 이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N을 위하여'를 쓰게 되었다고 말이다.
가나에는 자신의 그러한 변신이 어디로 갈 것인가를 마사토가 글만이 아니라 실제 행위까지 하게 함으로써(스포일러상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강조한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러한 가나에의 결심은 '왕복서간'에 이르기까지 내내 지속되고 있다.
지금에서야 만나는 'N을 위하여'는 그런 소설이었다.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를 아예 자신의 분신까지 만들어 넣어서 친절하게 말해주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얘기하자면 약점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변화를 설명해 주려는 것에 대한 과도한 친절 때문에 구성이 다소 산만해진다는 점 뿐만아니라 주인공들이 왜 그리해야 했는지 그 동기도 잘 와닿지 않는다. 다소 무리가 있는 전개란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데 개인적으론 오히려 그래서 미나토 가나에의 진심이 더 잘 드러나게 된 것 같다. 무언가 꼭 전할 말이 있으면 사실 그 때문에 무리를 하게 되는 법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실 데뷔작 제목인 '고백'은 바로 이 작품에 쓰여져야 했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지금 미나토 가나에가 작가로서 어떻게 시작했고 글을 쓰면서 어떻게 변했으며 그래서 이제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 그 내면에 일어났던 풍경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말그대로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과도 같은 작품이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에 작가 자체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정말 꼭 읽어야 될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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