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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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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노 게이고는 분명 부러운 재능을 가졌다. 별로 특별한 기교도 그렇다고 뛰어난 문장도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첫 페이지를 시작하면 끝까지 몰입해서 읽게 만든다. 도대체 그 흡인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을 때 마다 내가 먼저 집착하는 건 작품에 드리워진 그의 테크닉이다. 

 

  이번에 나온 '새벽 거리에서'. 

  벌써 일본에서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올해 키시타니 고로와 후카다 쿄쿄(이런 '부호형사'에 이어 또 만나는군요. 뭔가 인연이 있는 것일까나~^ ^;) 주연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감독은 한국에서도 개봉된 '화이트 아웃'을 감독했던 와카마츠 세츠로... 

새벽거리에서 영화 포스터 

  그러니까 이번에도 게이고는 확실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 이것이 다소 의외일 수도 있는 것이 이 작품, '새벽거리에서'는 분명한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고 더구나 소재 역시 그리 대중적 호감을 얻을 수 없는 한 중년 가장의 불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게이고의 주 무기인 미스터리도 강하지 않고 소재 역시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아마도그건 역시 게이고 특유의 너무도 자연스레 녹아들었기에 얼른 드러나지는 않는 '플롯짜기'의 기교가 잘 발휘되었기 때문에 그러지 않나 싶다. 

  소설은 주인공 와타나베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거기서 그는 불륜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불장난과도 같은 불륜으로 인해 공들여 쌓아왔던 모든 인생이 단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게이고는 첫 페이지에 불륜이 가져오는 파국적 결말을 독자에게 충분히 공감되도록 설명한 뒤, 마치 뒤통수를 치듯이 주인공이 그런 불륜에 빠져들었음을 알린다. 바로 여기서 서스펜스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불륜에 빠져버린 주인공이 과연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까 하는... 

 

   하지만 불륜에 빠져드는 주인공을 대부분의 독자들이 받아들일 리 없다. 그래서 게이고는 현명하게도 불륜에 빠져드는 이유가 다른 게 아니라 결혼을 하면서 가정을 지키느라 잃어버렸던 혹은 포기했었던 '젊은 수컷으로서의 야성' 혹은 '남성성'을 되찾아오는 것으로 그린다. 

   "모두 다 남자가 아니야. 마누라가 여자가 아니듯 우리도 남자가 아니라고. 남편, 아버지, 아저씨, 그런 걸로 변해 버린 거지. 그러니까 여자 이야기 같은 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P.16)

  옛날 대학 산악부원들과의 대화는 기혼인 중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했을만한 회한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불륜에 빠져드는 주인공을 비난하기 보다는 응원하게 되고 그래서 작동되는 서스펜스의 강도는 더욱 고조된다. 그렇게 만든 다음 게이고는 와타나베 불륜의 대상 아키하를 등장시킨다. 

 

                                                                          영화에서 아키하 역을 맡은 후카다 쿄쿄
 

    서스펜스 차원에서 작동되는 불륜의 유혹이기 때문에 따라서 게이고는 당연히 아키하도 평범한 여성이 아닌 뭔가 색다른 매력(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그런 식으로)의 어떤 비밀스런 구석을 가진 존재로 만든다. 따라서 독자는 당연히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기대하기 보다는 여자가 가진 기묘한 모습으로 인해 도대체 저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혹은 과연 그 감추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더 기대하게 된다. 그런 독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달리 말하면 자신이 장치한 서스펜스의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게이고는 와타나베가 그 자신의 장담과 그 모든 희생을 무릎 쓰고라도 아키하를 선택하게 되는지 거기까지 이르는 와타나베 자신의 감정의 흐름은 생략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고 실제 그렇게 한다. 그러한 게이고의 계산은 맞아 떨어져서 독자 역시 와타나베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빠져들게 되는 것인지 묻지 않는다. 이미 거기서 독자는 완전히 와타나베 편에 서서 어떻게 들키지 않고 그 아슬아슬한 연애를 이어가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게이고가 독자를 이 게임에 더 깊이 끌어 들이도록 또 하나의 서스펜스 장치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아키하가 1년 뒤 3월 30일까지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다.  

 

  아키하로 인해 불륜의 서스펜스가 미스터리의 서스펜스로 절묘하게 전이된다. 

  '들킴'에의 불안이 '신뢰'의 불안으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이쯤에서 이미 와타나베의 결심은 확고해진다. 그는 더이상 아내에게 들킬까 염려하지 않으며 다만 어떻게 이혼의 말을 꺼낼 것인지 그 방법과 타이밍만을 고민한다. 우리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게다가 귀여운 딸아이 까지 있는 가정이 거의 초단위의 파국적 위기 앞에 놓여졌는데도 그 무너짐의 부채를 느끼지 않는다. 또 달리 시작된 서스펜스가 그러한 감정이입을 막는 것이다. 그러니까 와타나베가 전 인생을 걸고 모험을 하려는 지금 그 대상인 아키하가 과연 도박을 걸어도 좋을만한 존재인지 그 불안으로 인한 서스펜스가 이미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반의 서스펜스 장치로 인해 이미 와타나베에 충분히 감정이입이 되어버린 우리는 두번째 불안 역시 동일하게 느끼면서 그저 그 불안을 조금이라도 빨리 해소하려고 페이지를 넘기는 것 밖에는 없다. 

 

 

  이 가정이 파국의 코 앞까지 왔지만  우리는 냉정한 관찰자일 뿐 근심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의 불안이 아키하에 대한 와타나베의 불안과 동일한 자리에 서 버렸기 때문이다.

  

  게이고가 원래 작품에다 무엇을 중심으로 두려 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와타나베의 불륜인지 아니면 아키하의 미스터리인지 아니면 그 둘 다 인지. 얼른 갈피를 잡기는 힘들다. 미스터리가 주가 된다고 하면 그것이 실로 강하지 않음이 실망스럽고 불륜이 주가 된다면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말은 못 하겠다.) 어느 것 하나로 시원스레 해결되지 않음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정교하게 계산된 서스펜스를 작동시키는 게이고이니 만큼 이렇게 이도저도 아닌 결말을 준비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과연 지금은 알 수 없는 근저에 깔린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회피하면서 한 가지를 말하자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연기'가 아닐까 한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아닌 배우의 '연기'를 말함이다. 왜 이렇게 생각하냐면 이 작품에서 주요하게 작동되는 두 개의 서스펜스인 불륜에서도 미스터리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연기'이기 때문이다. 와타나베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의 남편을 연기하고 미스터리에서의 아키하의 역할 역시 그렇다. 문제는 이 둘의 연기가 완전히 정반대의 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와타나베의 연기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고 아키하의 연기는 일상을 파괴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상극의 힘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이 또 이 '새벽거리에서'의 매력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면에선 아키하의 존재 자체가 일상 파괴의 상징이다. 무엇보다도 와타나베로 하여금 불륜으로 이끌어 그 가정을 붕괴시키려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게이고는 이 연기의 행위들을 섬세하게 새겨넣는데 어쩌면 여기에 그 진정한 의도가 있지는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이 작품을 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서스펜스 장치들이 야기시키고 있는 불안들은 그대로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과도 흡사하다. 우리들의 근본적 불안은 언제나 타인의 내면을 내 내면 같이 들여다 볼 수 없는데서 온다. 믿을만한 존재인지 아닌지, 내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좋을 존재인지 아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 그러한 우리의 염려와 불안은 계속된다. 오죽하면 하이데거 조차 세계 속에 던져진 우리들이 느끼는 가장 주된 감정이 바로 '불안'이라고 정의내렸을까. 그러니 항존하는 그 불안으로 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연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아키하의 미스터리 처럼 진실을 파악할 수 없는 그리고 와타나베 처럼 조금의 변화에도 파국적 결말을 각오해야 하는 그러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연기'란 필요불가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게이고가 정말 보여주려 했던 것은 이러한 한계로서의 현실이 아니었을까 싶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면에 받아들여야 하는 벽 같은 것. 테우리에 갇혀야만 존재가 가능한 지금의 우리들 서글픈 현실에 대해... 

 

   결혼이란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방파제가 되어주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좋게 말해서 지켜준다는 의미의 방파제이지 사실은 나아갈 수 있는 곳까지 금을 긋는 빗장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와타나베와 그 친구들이 기혼인 자신을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미 생래적 자유를 지닌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아빠, 엄마, 아저씨, 아줌마 등등 온갖 사회로 부터 부여되는 외피를 거듭 거듭 뒤집어 쓰고서 오히려 껍데기의 정체성을 자신의 본질로 알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테우리 안에 오래도록 갇힌 짐승은 그 테우리 속 세계를 진실로 여기게 마련이고 그렇게 다른 이들의 칼질로 정형화된 세계 속에서 만족하고 살았던 불륜 전 와타나베 역시도 감히 그 세계를 벗어나는 것을 그대로 멍청한 짓이라 여겼듯이 말이다. 

 

   때문에 게이고가 여기서 연기를 강조하게 되는 것은, 그것도 불륜을 토대로 그것을 강조하게 되는 것은  부여되는 한계를 씁쓸해 하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정당화 하기까지 하면서 자포자기식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인위적 제스추어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넥타이 처럼 조여드는 껍질에 부과되는 현실에 갑갑해 하면서도 '어쩌겠어, 이것이 인생인 걸. 받아들여야지..' 하는 식의 타협적 태도와 '연기'가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아키하의 미스터리가 보여준 결말도 그렇지만 그래서 조금은 엉뚱하게도 보이는 그런 '산티니 이야기'가 에필로그 처럼 부러 붙었던 것은 아니었을가 싶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그래도 지금 니가 머무는 자리가 좋은거야.' 식의 테우리 속 모든 존재들에게 보내는 게이고의 위로인 것은 아니다. 뒤돌아 보는 눈이 보내는 미련 어린 청승도 아니다. 사실 '산티니 이야기'는 보다 깊이 들어가면 그 이전까지 게이고가 해 온 이야기 모두를 파괴하고 있다. 그는 연기의 종국에 무엇이 있는가를 거기서 보여준다. 그건 공허다. 주고 받는 '~ 하는 척'하는 연기들이 빚어내는 온갖 '~ 그런 척'하는 작위적 감정들만이 있을 뿐 이미 진실한 감정들은 쓸모없는 물건들이 벽장 속에 갇히듯 보이지 않게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산티니 이야기'의 게이고는 그러니까 차라리 '이게 뭐야!' 하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한 팝송의 가사와도 같이 한밤에 문득 일어나 썬글래스를 끼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화려한 외양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진실, 더 이상 우리들의 관계엔 사랑이 없음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극이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듯 파국은 찾아올텐데 우리가 왜 허무의 몸짓을 계속해야 하느냐 이런 말이다. 그러니까 '산티니 이야기'는 일종의 반어법적 표현이다. 실상 이를 통해 게이고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면 연기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위안이나 미련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은 경멸인 것이다. 

 

   제목인 '새벽'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불륜을 하고 있는 자의 내면을 그대로 시간으로 형상화 한다면 새벽 같은 것이 아닐까? 완전한 밤도 아니고 밝은 아침도 아닌, 탈색된 어둠과 희미한 여명이 뒤섞인 그대로 경계 위의 시간. 그건 그대로 정해진 자리에서 한 발을 빼고 아무것도 없는 빈 자리로 뻗는 '불륜'의 상태와도 같다.(여기서 게이고가 '불륜'을 끌어들이는 이유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자칫 내가 불륜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게이고가 불륜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한계지워진 우리의 존재 자체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불륜은 그러한 한계를 초월하려는 우리의 모든 몸짓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불륜의 형상화는 사실 홍상수가 영화에서 그토록 자주 '불륜'을 반복하는 이유와도 같다.) 

 

   '새벽 거리에서' 제목 자체는 정확히 불륜을 선택함으로 인해 그 불안정한 시간에 불안정한 공간을 헤매일 수 밖에 없는 처지를 단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제목은 '산티니 이야기'가 반어법적이었듯 그렇게 게이고가 보내는 반어법적 질문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엇이 그 새벽 거리를 헤메이도록 만드는가 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게이고의 대답은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라고. 즉 게이고는 스스로 연기를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새벽 거리를 헤메일 수 밖에 없는 모든 '우리들'에게 경멸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일종의 자학과도 같다. 

 

    아무튼, 

    거리를 두고 '새벽 거리에서'를 바라보면 분명 그리 정교하지도 않고 뭔가 특출날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남자의 불륜 미스터리라는 흔한 작품이 되는 것 같은데 게이고가 은연중 깔아놓은 서스펜스 장치에 집중하자마자 놀랍게도 그가 꽤 계산적으로 작품 곳곳에 서스펜스 장치들을 정교하게 깔아놓았음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게 게이고의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그가 어떤 식으로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지, 단 한 순간도 독자의 주의를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집중하도록 만드는지 그 기교를 살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거기다 단순히 서스펜스적 재미만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적 세계의 상태에 대한 본래적 태도 같은 것까지 다루고 있음이 또한 흥미롭게 다가왔다. 여전히 사회에 '실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게이고가 주는 재미로 그것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이 작품은 벗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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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1-17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 하두 많아서
제가 얼마나 읽어봤나 체크를 해본적이 있습니다. 농담 아니고 20권은 훌쩍 넘게 읽었는데 계속 나오는 그의 작품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

그런데도 작품마다 새로우니 참 대단한 작가입니다..

ICE-9 2011-11-19 18:44   좋아요 0 | URL
와!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
확실히 게이고가 작품 내는 속도는 혀를 내두를 정도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인기가 늘 평균이상인 것은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개념화해서 어떻게 전해야 할지 그 방법론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