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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ㅣ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박웅희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솔직히 두근거리며 첫장을 넘겼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재림이라는 말마저 듣는 작품이라하니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고전 미스터리적 재미를 듬뿍 맛볼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왠지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듯한 작은 시골 마을 '스리 파인즈'는 그 자체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의 작은 시골 마을로 여겨졌고 그렇게 내게는 그야말로 '클로즈드 서클'로 보였다. 배경 설명과 주요 용의자들이 될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듯한(그렇게 독자에게 스스로 미스터리 해결을 위한 예비지식을 제공하는 듯한) 첫 장이 지나가고 이 소설에서 명탐정이 될, 캐나다에서는 이미 범죄 해결로 이름이 놓은 가마슈 경감과 왠지 왓슨역을 할 것만 같은 '니콜(결국 그 기대는 뒤에 가서 처참히 무너지지만)'의 소개가 있고나서 드디어 새벽의 한 숲길에서 남에게 원한이라고는 티끌 만큼도 지지 않을 듯한 선하디 선한 할머니 제인 닐이 시체로 발견된다.
해설을 제외하고는 총 457페이지에 이르는 이 소설에서 그 십분의 일 길이의 정도에 이렇게 시신이 발견되었으니 내심으론 남아있는 저 많은 분량 동안 아마도 제2, 제3의 살인이 있을 것이라 짐작되었고 예상대로라면 내 관심은 이제 제인 닐이 아니라 그러한 살인자를 은폐하고 있는 마을 '스리 파인즈' 자체에게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렇게 범죄자를 찾아내는 것과 동시에 그 마을이 감추고 있는 비밀이 또 무엇인지 추리해나가는 재미가 더해질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 루이즈 페니는 왜 마을이 '스리 파인즈'인지 알려주는데 그것이 바로 신대륙에 와서 더더욱 위협을 받는 왕당파들을 위한 보호처라는 뜻이라니 예감이 맞아지는 것 같고 뭔가 독립의 역사와도 관계있을 것 같아 책장을 넘기는 손은 더욱 더 빨라질 것이었다.
캐나다의 여류 작가 루이즈 페니의 2005년도 데뷔작 '정물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스틸 라이프'는 만일 나처럼 그런 기대를 했다면 읽으면서 조금은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순수 미스터리적 재미만을 추구했다면 이 책은 그 남은 십분의 구 동안 도무지 나오지 않는 후속 살인, 능력자 가마슈 경감의 부지런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진척이 없는 수사, 거기다 조금은 반칙 처럼도 느껴지는 사건의 현장 등등 상당히 지루할 수가 있다. 특히나 영미 미스터리식의 빠른 속도에 길들여진 분들이라면 그것이 마치 KTX를 타고 지나간다고 한다면 '스틸 라이프'는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느릿느릿 지나간다는 느낌을 더더욱 받게 될 것이다. 사용된 무기는 흥미롭지만 트릭이나 범인 감추기가 그렇게 또 뛰어나지 않아서(처음에 예상했던 사람이 결국 범인으로 밝혀져서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다. 뭔가 다른 작가의 계책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결말의 해결에서 아무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었던 것도 아쉬웠다. 그리고 미스터리라면 무엇보다 명쾌하게 해결하는 명탐정의 매력 또한 돋보여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 명탐정 역할을 맡고 있는 가마슈 경감이 그런 매력을 보여주지 않아 또 아쉬웠다. 아마도 오랜만에 아가사 크리스티식의 고전추리의 재미를 맛볼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그 아쉬움이 더 컸던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일 전혀 사전 정보없이 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에 너무 치중하지 않고 본다면 이야기를 끌어가는 속도도 괜찮고 문장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무엇보다 번역이 좋아서 그것을 잘 살려내고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작가는 미스터리 보다는 제목 '정물화' 그대로 '스리 파인즈'라는 마을 자체를 작품에다 온전히 담아내는데 더 치중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살해당한 제인 닐이 마지막으로 그렸던 그림 '박람회 날' 처럼 말이다. 닐은 친구 티머가 죽은 날이기도 한 박람회 날을 그림으로 그렸는데 그녀는 거기에 그 마을 사람 모두를 변형하여 집어 넣는다. 그렇게 페인도 마을 사람 모두를 생생히 독자에게 전달해 주는데 더욱 더 주력한 듯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즈 페인은 왜 미스터리적 재미를 상쇄해가면서 까지 그 마을 자체를 온전히 담아내려 했던 것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관해서 흥미로운 것이 바로 소설 속에 수많은 관계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피터와 클라라의 관계, 루이자와 티머 그리고 제인 닐의 관계 그리고 가마슈 경감과 이제 막 그에게로 배속된 신참 니콜의 관계까지. 루이자 페인이 전해주고 싶은 주제에 맞춰 보자면 특히나 가마슈 경감과 니콜의 관계가 흥미로운데 초반 니콜은 유명한 가마슈 경감과 함께 일하게 되어 기뻐하지만 후반에 가서는 갈수록 일으키는 불협화음으로 인해 예상과는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니콜은 뭔가 자기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버렸음에 기막혀 하는데 이처럼 루이자 페인이 '스리 파인즈'에 이리저리 얽힌 관계들을 통하여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그 '변화'다.
이렇게 보면 그녀가 왜 하필 제목을 정물화라는 뜻인 '스틸 라이프'로 했는지도 이해가 된다. 아시다시피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은 과히 '정물화'를 통해 현대미술 자체를 탄생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같은 사과를 100번도 넘게 그리곤 했는데 그것은 모두 순간 순간 흩어져 버리는 '진실'을 그림 속에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는 하나의 시간 밖에는 간직할 수 없는 그림에다 그 '시간'이라는 흐름 자체를 담으려 했던 것이다. 바로 그렇게 '변화'자체를 2차원적인 평면에다 담으려 했던 것이다. 루이자 페인이 이 소설 '스틸 라이프'를 통해 하고자 하는 것도 세잔이 정물화를 그릴 때 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제목 마저도 '스틸 라이프'인 것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소설 속 가마슈 경감과 유일한 책방 주인 머나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머나는 가마슈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 대다수는 변화에 잘 적응해요. 그게 우리의 생각일 때는 말이죠. 하지만 외부에서 부과되는 변화는 일부 사람들을 일시에 혼란에 빠뜨릴 수 있죠. 알베르 수사가 정곡을 찌른 것 같아요. 인생은 상실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상실에서, 책이 강조하고 있듯이 자유가 나와요.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고 우리가 적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에요.(P.204)
페인은 이렇게 '스리 파인즈'를 중심으로 얼기설기 엮어지는 관계들을 통해서 변화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를 묘사한다. 그리고 그 모든 대처의 모습들을 제인 닐의 '박람회 날' 그림 처럼 모조리 다 담아내는 것이다. 마치 제목은 정물화 이지만 세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브뤼겔을 따르고 있는 듯이 말이다.
브뤼겔의 '십자가를 진 예수' -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는 예수의 역사적인 사건을 그리고 있지만 정작 주가 되어야 할 예수는 어디에 있는지 찾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페인의 '스틸 라이프'도 이와 마찬가지라 본다. 주가 되어야할 미스터리가 각자가 변화에 대처하는 모습들을 온전히 담아내려 한 까닭에 제대로 그 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해져 버렸다. 남은 건 그 모든 마을 사람들의 잔상뿐. 그래서 내게 '스틸 라이프'는 브뤼겔적이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기대치의 문제다. 그러니까 어떤 기대로 이 책을 잡았느냐에 따라 그 만족도 역시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미스터리적 재미를 추구했다면 재미를 좀 보지 못할 것이고 순수하게 문학적 읽기의 재미를 추구했다면 감성적이며 섬세한 묘사에다 인물을 묘사하는 솜씨 또한 맛깔나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뭐, 나는 완전 전자의 기대감으로만 읽은 탓에 재미를 못 보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