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도 말했지만 난 좋은 초등학교를 나왔고, 인터넷 동창회가 생긴 후로는 다시금 모여서 재미있게 놀고 있다. 번개 같은 게 수시로 만들어지고, 정모도 제법 자주 있다. 옛날에 헤어진 여자애들이 아직도 20대로 착각할만큼 미모가 뛰어나니, 그럴 법도 하다.
엊그제, 한 친구-알파라고 하자-가 번개 공고를 알리는 글을 올렸다.
[간만에 번개를 갖고자 합니다. 휘성(가명)과 저, 둘이서 번개를 제안합니다. 시간이 되는 친구들은 리플 남겨 주세요]
하지만... 83회에 달하는 조회수에도 불구하고 리플은 단 한개도 달리지 않았다. 다들 바빠서? 그렇지만은 않다. 바빠서 못갈 경우 "난 그날 안되는데" 정도의 리플은 언제나 올라왔는데?
물론 이런 건 있다. 번개를 할 때는 무작정 공고를 내기보다, 핵심멤버들의 참석여부를 미리 확인받는 게 그 세계에서의 암묵적인 절차였다. 나쁘게 말하면 이런 거다. "우리 모일 테니까, 니들도 오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리플이 한개도 안달린 것은 처음이었다. 알파가 번개공고를 낸 것도 처음이었지만.
머쓱해진 휘성이 그 밑에 답글을 달았다.
"하도 모임에 못나갔더니 이제는 잊혀진 이름이 되었나보다. 오랫만에 얼굴좀 보여줄 친구가 하나 없다니....불경기라 모두 바빠서 그런건가? 어쨌든... 기다려 볼란다..."
그러자 리플이 몇개 달렸다.
-휘성, 나두 너 보구시퍼... 시간이 안되서 그랴..
-휘성, 오랫만인데...요즘은 꼼짝 못한단다...좀 지나서 보자
-휘성, 나두 한 번 보고 픈데.. 좀 여유 생기면 보자....^^
-휘성아, 연락좀 하고살자...
이게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사람들은 알파가 싫은거지, 휘성이 싫은 게 아니었던 거다. 아는 친구와 통화 도중 휘성에게 냉담한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글쎄 왜 그러지? 영삼이도 걔 아주 싫어하고, 대중이도 그러던데..."
이유를 말해줬다. 알파 걔, 다단계 일을 한다고. 친구는 질겁을 했다. "나 다단계 때문에 엄청 뜯겼거든"이라면서.
사실 알파가 나에게 다단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은 없다. 나 역시 다른 친구에게서 들었을 뿐이다.
"알파가 둘이 술을 마시자고 하더니, 갑자기 신청서를 꺼내는거야. 암웨이 가입하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우리 오늘은 그냥 기분좋게 술 마시자"
오늘은 기분좋게 술 마시자... 이건 참 모욕적인 얘기다. 하지만 알파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다른 동창들에게도 암웨이 가입을 권했다. 도대체 어떤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길래 그러는 걸까. 암웨이, 다단계, 정말이지 분위기를 깨는 데 가장 좋은 말이 아닌가?
어제 만난 초등 동창들도 알파에 관해서 다들 알고 있었다. 가입 권유를 받은 친구도 둘이나 됐고... 알게 모르게, 알파는 초등동창 사이에서 왕따가 되어 버린거다.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알파는 제법 다단계가 잘되어 웬만한 사람 월급 정도의 수익을 매달 올리고 있단다. 인생에서 돈이 중요한 거야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돈을 위해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그는 잃어가고 있었다. 난 알파가 왜 우리 동창들 번개에 그토록 열성인지 이해할 것 같았다. 알파의 주위에 과연 누가 남아 있겠는가?
왕따는 무조건 나쁘다. 알파를 따돌리며 리플 하나 달지 않은 나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데 생기는 어릴적 왕따와 달리, 나이가 들어서 벌어지는 왕따는 자기 책임이 더 크다. 알파는 알까. 남들이 자기를 왜 따돌리는지를. 하지만 "다들 바쁜가봐. 그 집 맥주 참 맛있는데..."라고 단 리플을 보면서, 난 알파에게 아무 생각도 없다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게 되리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다단계의 세뇌교육은 이렇듯 사람의 영혼을 마비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