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 김상봉 철학이야기
김상봉 지음 / 한길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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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나니 무거운 짐을 벗은 기분이다. 400페이지 가까운 분량도 그렇지만, 김상봉이라는 재야 철학자가 혼신의 힘을 다해 쓴 글자 하나하나가 내겐 좀 버거웠다. 이해가 안간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작가는 최대한 쉽게, 그리스 비극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그 쉬움이 구구절절 내면에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지라 진도를 나가는 게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난 근 일주일 이상을 이 책을 들고 씨름해야 했다.

작가가 그리스 비극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가 한창 융성할 때, 비극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둘째, 비극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힘은 자기 자신의 고통에 관한 연민과 공포의 정념들을 자기 중심적인 구심운동으로부터 해방시켜 그것을 타인의 고통, 아니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같이 겪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고통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9306쪽)]] 그래서 작가는 '파멸에 이르는 고통'마저도 긍정하라고 한 니체를 비난한다. 니체를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재적인 철학자로만 알고 있던 나로서는 작가의 비난에 당황했고, 갑자기 김상봉님이 높아 보였다.

그리스 시대는 보기 드물게 민주주의가 실현된 시대였다. 하지만 그것은 노예와 여성들의 참여를 제한한 반쪽짜리 민주주의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작가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러나 당시 아테네에 팔려온 노예가 오늘날 한국에 와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보다 더 노예적으로 살았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또한 수백 명의 국회의원들 가운데 여자들이 몇 명 끼어 있다고 해서 한국 여인들이 사회.정치적으로 그 당시 그리스 여인들에 비해 더 대접받고 있다고 할 수 있는지 그것도 의심스러운 일입니다(367쪽)]

이런 식으로 작가는 그리스 비극을 보는 눈으로 한국 사회를 보며, 거기에 대해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겨눈다. '예술이..현실 전체를 인도하는 원리가 될 때만 진정으로 자율적일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가 보기에 친일.친독재 시를 지은 서정주는 한낱 '기생'에 불과하고, 박정희를 찬양하는 이인화는 '멋지고 화려한 겉모습에 매혹되는..노예적 정신'의 소유자에 불과하다. 작가의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다음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확신하거니와 오늘날 한국에서 큰 인물이 나오기 어려운 것은 전적으로 TV 드라마 탓입니다. 허구한 날 남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자 둘이서 비열하고 유치하게 싸우는 드라마를 보고 큰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여자다운 여자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곳에서 어떻게 남자다운 남자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281쪽)]
그런 드라마가 판을 쳐도 큰 인물은 나온다. 김상봉님이 그 한 예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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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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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 중 참으로 나쁜 사람이 하나 있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는 짓밟고, 나처럼 조금 덜 약한 사람은 괴롭힌다. 내가 보기에 절대악에 가까운 그 사람의 행태를 알라딘 마이페이퍼에 써 놨더니, '갈대님'이 이런 답글을 달아 주셨다. '그런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아주 정확하게 잡아낸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을 읽게 된 이유였다.

스캇 펙은 말한다. '악'은 질병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뭔가를 개선하려면 그것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하고, 그래야만 치료 방법도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악'에 대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방치한다면 악은 절대로 고쳐지지 않을 것이며, 악으로 인해 우리는 끊임없이 고통받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악한 사람은 사실 도처에 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도 그 중 하나다. 피해자의 대부분은 '전생에 내가 이순신이고 쟤는 도요토미였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체념하고 만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단다. 그에게 다가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하란다. '당신, 큰 병에 걸리셨군요. 얼마나 괴로우시겠어요. 하지만 당신은 치료될 수 있어요. 용기를 잃지 마세요' 물론 그 악이 치료에 응하기는 힘들겠지만, 진실된 사랑을 보여 준다면 틀림없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내가 아는 그 악에게 그런 말을 하자니 갑자기 심난해진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국의 행위와 밀라이 마을에서 일어난 양민학살 사건을 '악'으로 규정하며 집단 내에서 악이 작동되는 방식에 대해 기술한 대목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며, 미신으로만 생각되는 '축사'(우리나라 같으면 퇴마사?)에 대해서도 열린 태도를 보이는 스캇 펙의 포용력에 머리가 수그러진다. 난 이 책을 200페이지쯤 읽다가 분실하고 말았는데, 처음에는 속상하다가도 그 책을 습득한 사람이 악에 대해 깨우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풀렸다. 악과 맞서 싸우는 스캇 펙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책을 추천해주신 '갈대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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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신호 - 모든 범죄에서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법
가빈 드 베커 지음, 최정아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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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이른 아침에 친구집을 가는데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무시하고 계속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모자에 마스크를 쓴 아저씨가 날 따라오고 있다.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유괴범이다!' 어머님께 배운대로 큰길로 나가 소리를 지르는 대신, 난 친구집이 있는 막다른 골목에 접어들었다. 난 뛰고 그는 걸었지만 차이는 점점 좁혀졌다. 친구집이 보였다. 난 있는 힘껏 대문을 밀었고, 거짓말처럼 대문이 열렸다. 난 유괴범이라고 소리치며 친구를 불렀는데, 그놈은 대문을 열고 들어와 잠깐동안 날 째려보다 돌아갔다. 그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편안히 앉아 글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섬뜩한 기분이 든 이유는 무엇일까? 눈은 정확히 보지 못했지만, 내 동물적인 감각이 그의 존재를 파악했던거다. 푹 눌러쓴 모자에 마스크, 체크무늬 잠바, 손에 든 멍키 스패너, 게다가 귀티가 나는 내 모습까지. 내 육감은 이런 것들을 종합해 내게 위험신호를 보냈지만, 내 뇌는 그걸 무시한 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던 거다.
<범죄신호>를 쓴 가빈 드 베커는 일관되게 말한다. 직관을 믿으라고. 모든 인간에게는 위험을 감지하는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고 말이다. 예컨대, 편의점에 들어갔다 예감이 안좋아 곧바로 나온 한 남자는 뒤이어 벌어진 총격사건을 피할 수 있었는데, 그는 처음에 예감이 안좋은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지만, 나중에야 그걸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직관은 편의점에 있는 한 남자의 존재를 파악했는데, 그 남자는 크고 무거운 재킷을 입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재킷이라, 물론 그건 총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고, 본능을 믿은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베커의 말이다. '직관을 믿으면 생명을 구할 수 있고, 그게 틀렸다 해도 손해볼 것은 없지 않는가?'라고.

우리는 늘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만, 실제 범죄의 대부분은 아는 사람으로부터 저질러진다. 늑대가 사람을 물어죽이기라도 하면 늑대 공포증이 전국을 휩쓸어 밖에 나가는 것조차 삼가지만, 대부분의 범죄는 집 안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전조가 없는 범죄는 없다. 살인이 일어나면 '그렇게 순하던 사람이...'라며 너스레를 떨지만, 살인의 신호들은 계속 있었고, 희생자는 그 신호를 무시한 거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위험신호들에 좀더 귀를 기울인다면 혹시 닥칠지 모르는 위험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베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범죄예방에 있어 최고의 전문가인 베커의 <범죄신호>는 이런 것 말고도 스토킹 등 다양한 범죄들을 예방하는 노하우를 기술해 놓고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책이다. 특히 스토킹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여성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남자의 경우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생명의 위협을 겪은 경험이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여성들의 경우에는 상시적으로 위험을 느끼며 살아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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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또니 2004-03-22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멋진강아지를 키우시는 님~~님의 글소감을 보니깐 저도 엄청 읽고 싶어지네요..갠적으로 형사에 엄청 관심이 많은데...앞으로 일(?)하는데 엄청 도움도 될것 같고 흥미진진해 질것도 같고요...님이 보신책중에 제가 본 책이 있으까 싶어 내려왔더니 여까지 왔네요..여적 못찾고는 있지만..아직도 희망은 있기에..그거 찾으면 뭐하나 하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뭐...그냥...헤헤...좋은책 멋진책 자주 자주 올려 주세요...요새 책을 좀 좋아하게 되어서 자주 볼 요량이니깐..요..하하하..그럼 좋은 하루 되셔용~
 
인물과 사상 29 - 4.15 총선을 보는 세 개의 시선
강준만 외 지음 / 개마고원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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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달마다 나오는 <인물과 사상>이 벌써 29권째다. 그 꾸준함도 놀랍지만, 나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준 고마운 책인지라 이 책을 볼 때마다 애정이 샘솟는다.

이번 책의 부제는 '4.15 총선을 보는 세개의 시선'으로, 총선에 대한 강준만, 고종석, 김진석의 글이 실려있다. 민주당 분당에 지속적으로 저주를 보냈던 강준만의 다른 글들에는 거부감이 들었지만, 다소 냉정하게 쓰여진 이번 글은 그래도 공감이 갔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은 '정치도박'이고 그나마도 폭력적 방법에 의해 달성되었다. 그걸 인정한다 해도, 난 고종석의 다음과 같은 말에 훨씬 더 동의한다.

[나는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행태에 실망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참여정부의 파산을 팔짱 끼고 보 수는 없다는 쪽이다. 그것은 재작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의 우리의 선택을 무화하는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행태가 지금 아무리 실망스럽다 할지라도,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최악의 노무현도 최선의 이회창보다 나았다(64, 72쪽)] 고뇌와 자기성찰을 담고있는 고종석의 이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난 책값이 아깝지 않다고 주장하련다.

언제나 내게 큰 깨달음을 주는 홍윤기, 그는 이번에도 날 즐겁게 해줬다.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을 이처럼 명쾌한 논리로 드러내주는 글이 또 있을까 싶다. 그는 복잡한 통계수치를 인용하지도 않으면서, 원전센터 측의 주장 속에 담겨진 허구를 찾아냄으로써 손쉽게 그 주장을 반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홍윤기가 당대를 떠나 <인물과 사상>에 합류한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당대와 결별한 것이 본인에게는 아픈 상처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밖에도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와 김기덕의 '나쁜남자'를 비교해 페미니스트들의 편향된 시각을 고발하는 강성률의 주장에 어느 정도 공감했고, 정재은 감독의 '그 남자의 사정'에 관한 정승화의 비판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강준만의 글을 많이 못보게 된 게 아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다양한 필진에 의해 씌여진 주옥같은 글들을 읽을 수 있게 된 기쁨이 조금 더 크다. <인물과 사상>은 분명 업그레이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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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부터 말했잖아
악셀 하케 지음, 조원규 옮김, 토마스 마테우스 뮐러 그림 / 북라인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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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의 리스트를 통해 <내가 전부터 말했잖아>를 읽게 되었다. 그분은 '웃다가 죽으리라'는 리스트에 이 책을 올려 놓았는데, 막상 읽어보니 잔잔한 미소가 나올 뿐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마도 이건 얼마 전에 읽은, 역시 독일 작가에 의해 씌여진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탓이 아닐까 싶다. <세상은>에 나오는 유머의 강도가 너무도 셌기 때문에, 웃음의 역치가 올라가 버린 것 같다. <세상은>의 얘기들이 너무도 기가 막혀 웃음 말고는 다른 감정을 유발시키지 못한 반면, 이 책의 주인공은 나와 같은 소시민이며, 그래서 공감과 동정이 간다.

예컨대 이 책에 수록된 <내 손이 나를 떠났을 때>는 베르베르의 <나무>에 나오는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데, 베르베르의 것이 엽기적이고 공포스러운 것이라면, 이 책의 저자인 악셀 하케가 그리는 손은 따뜻한 친구 같다. 이 책의 이야기들이 대체로 다 그런 식인데, 주인공은 하고 싶은 말도 못하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끌려다니곤 한다. 그의 행동이 내게 공감과 잔잔한 미소를 불러일으키는 건 나 역시 그렇게 살고 있어서가 아닐까.

주인공이 아내와 가끔씩 한다는 게임은 권태기에 빠진 부부들이 한번씩 해봄직하다.
[가끔씩 파올라(주인공의 아내)와 나는 게임을 한다. '우린 지금 막 사귀었어요'라는 게임이다. 우리는 이제 막 알게 되어 저녁 극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사이인 척한다. 나는 매점에서 땅콩을 산다. 포장을 뜯으며 내가 말한다. '땅콩 종류가 심장병 있는 사람한테 좋다더군요' '심장 쪽이 좋지 않으신가봐요' 파올라가 묻는다.

나: 당신 옆에 앉아 있을 때만 그래요
그녀: 땅콩 종류는 정력에도 좋다네요.
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안먹는 거예요.
....영화가 끝나고 나는 파올라에게 집에 데려다주어도 되냐고 묻는다. 그녀가 허락을 하면 우리는 곧 우리집 건물 앞에 서게 된다. '아, 당신도 여기에 살아요?' ...우리는 놀란다(96-97쪽)]

정말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지 않는가? 모르긴 해도, 악셀 하케는 파올라와 재미있고 단란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으리라고 본다. 아무리 외모, 외모 해도, 인생을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약간의 유머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하케는 좋은 남편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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