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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성
버트란드 러셀 지음, 김영철 옮김 / 간디서원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아이가 성에 대해서 물었을 때, 어른들은 대부분 “몰라도 돼” “크면 저절로 알게 돼”라고 한다.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은 사실 없는지라 그네들은 성에 관한 지식을 매우 은밀하게, 주로 친구들을 통해서 습득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쓸데없는 죄의식을 가지게 되는데, 그 폐해는 자못 심각하다. “지식을 추구하는 아이가 어떤 방면에서는 이러한 호기심이나쁘다는 것을 알 때, 그의 과학적 호기심이라는 충동은 모두 저지되고 만다”
아이들이 바라는 만큼의 지식을 제공한다면 아이들이 쓸데없는 생각을 갖지 않게 될 테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아이들의 관심은 언제나 성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포르노 등을 통해 잘못된 성지식을 배우게 된다.
버트런드 러셀이 <결혼과 성>에서 한 말이다. 제목이 야해서가 아니라 저자의 명성 때문에 이 책을 샀는데, 결혼과 성, 그리고 가족제도에 대해 이처럼 공감 가게 얘기하는 책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비록 저자가 1872년생이고 그 후 성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이 책에 씌어진 말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계약결혼을 옹호하는 등 오히려 급진적인 면도 있다. 특히나 공감한 것은 사회의 도덕에 관한 대목이다. 도덕적 기준이 높아서 성에 관한 얘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없으며, 그런 욕구를 억압하는 것이 훌륭한 사람의 조건이 되는 사회는 구성원이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런 사회에서는 성매매가 창궐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별 거 아닌 책들이 판매금지가 되고 영화 ‘거짓말’의 상영이 봉쇄되는 우리나라가 성매매의 천국인 것도 다 그런 데서 기인한다. ‘나는 왜 기독교도가 아닌가’라는 책에서 기독교의 폐해를 조목조목 지적했던 사람답게 저자는 성에 대한 지나친 억압의 주체를 기독교로 보고, 그로 인한 육체와 이성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을 위해 중요한 일이라고 역설한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러셀은 정말 멋진 남자다.
“도덕주의자들은 성도덕은 남자보다도 여자에게 더 중요하다고 하는 그릇된 견해에 빠져 있다....남녀간의 평등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여성의 정조에 관한 전통적인 기준의 완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어제, 시집간 딸도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판결이 났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딸도 제사 지내라”느니 어쩌니. 제사가 대부분 여성들의 노동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시대의 변화에 따른 판결에 그런 식으로 딴지를 거는 모습은 보기 딱하다. 그런 댓글들을 다는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은 어째서 19세기에 태어난 러셀보다도 시대에 뒤쳐져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