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이 글은 언젠가 했던 주장의 재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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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부스>라는 영화는 어디 있는지 모를 저격범에 의해 공중전화 부스에 갇힌 남자(콜린 파렐)의 수난기를 그리고 있다. 거기서 주목할 장면. 남자가 공중전화를 지나치게 오래 쓰자 화가 난 여자들이 ‘기도’를 데려온다. 기도는 방망이로 전화부스를 두들겨 깨고, 남자의 멱살을 쥐고 흔든다. 그런 남자에게 저격범은 “내가 해결해 줄까?”라고 재차 묻고, 남자는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기도는 저격범이 쏜 총을 맞고 몇 걸음 걷다가 즉사하는데, 신기한 것은 여자들의 반응이다.

“나쁜 자식, 죽이기까지 하다니!”는 흔히 있는 반응이라 쳐도, “저 자식이 쐈어요. 내가 봤어요” “권총을 갖고 있었어요”라고 경찰한테 말하는 건 전화만 걸고 있던 남자로선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들이 직접 봤다는데 “내가 총이 어딨냐”고 아무리 우겨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인간에겐 만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지만, 사람은 거기에 자기 마음을 더해서 사물을 바라본다. 족구를 하다가 아웃이냐 세이프냐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일이 흔한 것도 다 그 때문이다. 십년쯤 전 내 여친이 차를 몰다 교통사고를 냈을 때, 옆자리에서 똑똑히 지켜본 나와 다른 목격자들의 증언이 180도 틀린 것도 내 생각처럼 “일부러 거짓말 하는 것”만은 아니었을거다. 다시 얘기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믿는만큼 보고, 자신의 신념을 눈을 통해 재확인하는 경향이 있다.


꼭 눈만 그런 게 아니다. 작년 여름이 오기 전, 언론에서는 ‘십년만의 더위’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막상 작년 여름의 더위는 십년 전의 그것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밤 12시에도 30도를 넘는 불볕더위, 에어콘이 동이 나고 사람이 죽기까지 했던 그 더위에 비하면 작년의 더위는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94년 7월에는 밤에 30도를 넘는 ‘열대야’ 현상이 27회나 있었던 반면, 작년 여름에는 단 세 번에 그쳤다는 통계도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올 여름은 정말 덥다”며 손사래를 쳤고, 심지어 ‘94년보다 더 더웠다’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십년 전 기억을 잊어버린 것도 한 이유가 되지만, ‘십년만의 더위’를 소리높여 외친 매스컴과 거기에 세뇌당한 사람들의 습성이 더 큰 이유이리라.


여름으로 치닫는 4월, 올 여름은 “백년만의 무더위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누가 그러냐고 물으니 주위 사람들이 다 그런단다. 작년은 십년만의 더위, 올해는 백년만의 더위?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난다. 해마다 더위를 강조하는 게 혹시 에어콘 회사들의 농간은 아닐까? 십년만의 더위로 작년에 짭짤한 수익을 올렸으니, 올해도 비슷한 전략을 펴는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에서 봄이 실종되고 5월부터 9월까지 근 5개월간 여름이 지속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올 여름은 정말 덥다”는 호들갑이 아니더라도, 최근 우리나라의 여름은 늘 더웠다. 백년만의 더위 운운에 현혹되지 말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지어다. 덥다 덥다 하면 더 덥게 느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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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0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5-04-10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어컨 회사에서 붙인 플랜카드에서 백년만의 더위 어쩌고 하는 광고문구를 본 것 같습니다. 올해가 백년이니 내년에는 천년만의 더위 또 그 다음해에는 인류역사상최대의 더위가 되겠군요.^^

▶◀소굼 2005-04-10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 그 백년만의 더위를 말했던게 외국 박사였던거 같았는데 그에 대한 반론을 한국 박사가 했었던걸 본적이 있어요. 에어콘회사들로서는 꽤 괴씸했을거에요 한국 박사가;;

sooninara 2005-04-1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4년 여름 잊혀지지가 않아요..그때 아이들을 가르쳤는데...집에 아이들이 없는겁니다. 너무 더워서 시원한 집으로 엄마 포함 가족 모두가 피난을 가버려서..밤에 돌아오더라구요..ㅠ.ㅠ
다가구 주택등은 주인집이 3층등 제일 높잖아요? 그곳에 하루종일 더위가 안가셔서 앉아 있질 못하니 다른집으로 피난을 가더라구요..요구르트아줌마들도 만나면 이렇게 더운것은 처음 본다고..정말 작년은 장난 수준이었죠^^

클리오 2005-04-1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는 만큼 본다'고 어떤 사람이 그랬지만,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마태님의 주장에 저도 100% 동의합니다. ^^

포도나라 2005-04-10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생각을 때리면서 웃음도 나오는 글이었습니다..
정말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사물을 보는 게 아닌가 싶네여...
그치만 한국의 더위는 이곳의 더위에 비하면 그냥 예쁘게 봐줄 수준이져...
근데 이 곳 사람들은 이렇게 덥기 때문에 오히려 십년, 백년에 속지 않을 것 같습니다?! ㅋㅋ

라쇼몽 2005-04-1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4년도에 어느 여름날, 충동적으로 반팔 옷 몇 벌의 소매를 가위로 오려냈던 기억이 납니다. 하도 겨드랑이에 땀이 차서 견딜 수가 있어야죠. 좀 시원하더만요.

sweetmagic 2005-04-10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여름은 정말 더울 거예요

하루(春) 2005-04-10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오, 수정'이란 영화가 떠오르네요.

ceylontea 2005-04-11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중으로 60,000 이 되지 않을까요??

459928


2005-04-11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엔리꼬 2005-04-11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4년 여름... 군복무 시절의 뜨거웠던 여름날들이 기억나는군요.. 부대에서 경비병으로 근무했는데 초소 안이 어찌나 더웠던지..... 그런 날은 퇴근해서 집에서 샤워를 샤샤샥 (단기사병)

마태우스 2005-04-11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림님/댓글만 봐도 끈끈해져요...^^
실론티님/앗 그렇군요. 상황이 많이 어려워서 이벤트는 안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죄송.
하루님/앗 전 그 영화 안봤어요.... 제 글이 수정같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매직님/안되요 전 더위에 약하단 말이어요!
황게으름동이님/오오 그런 파격적인 행동을..... 멋지십니다!
여행자의 노래님/혹시...사막 사시나요???? 글구 제가 인사는 드렸던가요??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나중에 갈께요. 지금 좀 시간이...
클리오님/전 클리오님과 소주 대병을 마셔야 한다는 것에 100% 동의해요.^^
수니님/아 다들 그 당시 추억이 있으시군요... 3층은 시원한 줄 알았어요
따우님/지금은 에어콘 없음 못살지요.....인내심이 부족해져가지고요
소굼님/아 그게 외국박사가 한 얘기군요.... 음, 신문을 안봤더니...'
플라시보님/갈수록 과장이 심해지는군요^^

하얀마녀 2005-04-15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4년 여름이 그렇게 더웠는 줄 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그 때 군인이었거든요. 여름은 원래 더운거고 어차피 철조망 안 쪽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이라는 생각이어서요. 작년 여름도 덥긴 더웠죠. 에휴, 올 여름은 어떻게 날 지... ^^
그런데 왠지 저도 에어콘회사의 농간이 의심스럽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