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설명: '더위'를 쳤는데 없기에, '더 위저드'로 골랐음.
3시 반까지는 눈 딱 감고 논문만 쓰려고 했는데 글을 써야겠다는 유혹이 더 컸다. 소재 빈곤에 시달린다는 루머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도 이유가 된다. 아무튼 이제 고찰을 쓰고 있으니, 논문 한편이 곧 완성될 전망이다. 이 논문은 다른 논문과 달리 매우 불법적인 논문이 될 듯 하다. 왜? 물론 가르쳐 줄 수 없다! 불법이니까! 알라딘에 교봉서 파견한 첩자가 있는 걸 알고 있는지라, 내가 쪽팔린 것은 괜찮지만 불법적인 것은 결코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알라딘에 자신의 소신을 써서 구속되었다 풀려난 송모 교수의 예를 보면서, 난 나의 결정-불법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올바르다고 혼자 좋아하고 있다.
더위
더위를 타는 사람은 결코 우아하기 힘들다. 적어도 여름에는. 무슨 옷을 입든지 5미터만 걸으면 등이 축축하게 젖는다. 자신도 찝찝하지만, 보는 사람은 더더욱 짜증난다. 더위를 타는 사람은 대개 뚱뚱한 사람이다. 나도 젊을 때는 더위고 뭐고 몰랐던 것 같은데, 7년 전에 비해 체중이 십여킬로가 불은 지금은 무지하게 더위를 탄다. 하기사, 체중이 불기 전에도 난 땀이 많았다. 땀이 많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옷을 입더라도 없어 보인다. 내가 그렇다. 워낙 없게 생기기도 했지만...
내 친구 하나는 나보다 더 더위를 탄다. 그녀석은 에어콘이 되는 방안에 앉아 숨만 쉬고 있어도 땀을 비질비질 흘린다. 그 녀석과 몸이라도 닿는 상상을 하면 끔찍하다 (샤워도 잘 안한다는 소문이..). 녀석은 결코 비빔냉면을 먹지 않는다. 자기는 비냉을 좋아하지만, 그걸 먹으면 땀이 비오듯 흘러서 어쩔 수가 없다는 거다. 그러고보니 오늘 점심 생각이 난다. 무서운 학장님을 앞에 두고 추어탕을 먹으면서, 난 계속 물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야 했다. 사람들은 그런다. 물수건 그거 무지하게 더럽고 세균이 많으며, 따라서 얼굴을 닦아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친구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만만치 않게 더위를 타니까.
학장님의 말씀이다. "이열치열!" 난 더위로 더위를 이기는 게 정말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다. 옛날에 그 말을 가르쳐준 초등학교 선생님은 이런 비유를 했다. 옷을 아주 두껍게 입고 하나씩 벗으면, 나중에는 겁나게 시원해진다고. 그때는 그럴 듯 하게 들렸지만, 커서 생각이 좀 변했다. 여름에 옷을 두껍게 입으면, 다 벗어서 시원해지기 전에 더위로 쇼크사 할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땀띠가 온몸에 나서 괴로움을 겪을 거다. 이열치열을 할 사람은 하시라. 난 선풍기와 에어콘으로 더위를 이길 테니까.
내 친구 중에-여자다-더위를 안탄다고 자랑하는 애가 있다. 그녀는 늘 더위 타는 사람이 촌스럽다느니 하면서 자신의 우아함을 뽐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회사에서 에어콘을 끼고 살며,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더워 죽겠다고 난리를 친다. 요즘의 더위가 좀 살인적이긴 하지만, 반응이 나와 별 차이가 없으면서 왜 더위를 안탄다는 걸까? 우리 엄마야말로 더위를 정말 안타는 분이다. 선풍기를 3단으로 틀고 잠이 드는 나에 비해, 어머님은 여름 내내 선풍기를 안트신다. 땀? 어머니 사전에 없는 단어다. 하지만 작년 여름의 어느날, 어머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젠 정말 덥더라. 그래서 선풍기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말은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다. 우리 식구는 둘인데 선풍기는 네 대, 엄마가 원한다면 삼면에서 바람이 불어오게 만들어 드릴 수도 있는데, 왜 말씀을 안하시고 그러는 걸까. 그 경험을 거울삼아 올해는 계속 엄마 방에 선풍기를 놔 드리지만, 어머니는 통행에 불편하다면서 자꾸 벽장 속으로 집어넣으신다. 어쨌든 더위를 안타시는 우아한 어머니가 난 정말 부럽다. 내가 어머니 체질을 받고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피부에 뭐가 자꾸 나고 그러는 것만 어머니를 닮았다.
어젠 비빔밥을 사먹으면서 무진장 빨리 먹었다. 조교가 놀라서 묻는다. "왜 그렇게 빨리 드세요? 배가 많이 고프셨어요?" 물론 아니다. 단지 밥먹는 시간을 줄여야 덜 괴로울 것 같아서다. 추어탕만큼은 아니지만, 비빔밥을 먹는 것도 무진장 땀을 흘려야 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처럼 더위를 타는 사람은, 여름에 밥먹는 것도 대단한 일을 하는 셈이 된다.
엊그제, 내가 올 들어 가장 덥다고 느낀 그날 서울의 온도는 26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그리 더웠을까? 습도 때문이다. 그날 서울의 습도는 85%였다. 집에 가서 젖은 옷을 벗은 뒤 간단히 짜니까 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걸 엄마가 보는 바람에 걸레로 마루를 닦아야 했지만, 옷에서 땀을 짜면 굉장히 뿌듯하다. 뭐랄까, 내가 마치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나만 그런가? 하여간 우리나라는 아열대 기후다. 어릴 적엔 맨날 4계절이 뚜렷하느니, 온대성 기후니 하고 배우지만, 순전 사기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아열대가 맞다. 그럼에도 아열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아열대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 사람들은 게으르고 못산다는 그런 편견. 그래도 할 수 없다. 우린 아열대다.
사하라 사막은 50도까지 올라가지만 견딜 수 있다. 습도가 낮기 때문이다. 미국의 댈러스는 40도가 넘는 날이 무진장 많지만, 역시 낮은 습도 때문에 그렇게 더운 걸 모른다. 나쁜 습도 같으니. 십년만의 무더위란다. 장마 때문에 유예되어 왔던 것이 엊그제부터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94년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남은 한달여를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 뿐이다. 이놈의 더위...... 내가 이런데, 털있는 동물들은 얼마나 더울까. 벤지가 이번 여름을 무사히 넘기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