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 메이지 이후의 일본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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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작가는 47년 생으로 재일 교포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부모가 한국인이다. 대학의 교수로서 일본사회의 주류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출신이 철저히 변경인 재일 교포인 것이다. 재일한국인이나 조선인은 아직도 일본에서 외국인 등록증명서를 받는다. 거기엔 다양한 정보와 동시에 상륙허가와 재류기간이 써있는데 당연히 자이니치들은 국적만 한국이나 북한일뿐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들이니 굳이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마치 일본에 잠시 들르는 외국인처럼 상륙기간과 재류기간을 표기한 외국인 등록증명서를 준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인 셈이다. 본인들도 억지인걸 아는지 물론 재류기간과 상륙기간에 별표시가 되어있기는 하다.

 자신들의 식민지 만행으로 생겨난 자이니치에게도 이런 대접을 하는 일본에 저자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과연 약자인 국민과 변경인들에게 어떤 대우를 했을지 살펴볼 필요가 들었던 것 같다. 2차대전의 패전, 미나마타병, 미카와탄광폭발사건,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폭발등 이런 끔찍한 사건은 대체 왜 일본에서만 반복되는지도 저자의 주요의문이었다.

  역사가 보여주듯 메이지이후 150년간 일본의 역사는 떠오르는 역사였다. 아시아 최초로 산업화에 들어섰고, 그 힘으로 아시아의 많은 지역을 지배했다. 패전 후 몰락할 것만 같았지만 한국 특수로 다시 기사회생하여 60년대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서서 거의 50년간 그 자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쇠퇴의 기미가 역력하지만 여전히 3위의 경제대국이다. 그렇게 국운이 욱일승천하는 동안 그 나라를 위해 일하고 전쟁에 참여한 국민들, 그리고 특히 약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국운을 올리는 것만이 제일 목적인 나라에서 뒤틀린 부분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일본은 교육부터 뒤틀려 있다. 패전 이후 68혁명을 통해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하고자 현대사의 아픈 부분을 집중 교육하는 독일에 비해 일본은 전쟁이전의 메이지유신까지의 역사만 집중적으로 다룬다. 일본의 교육은 상당히 국가주의적이고 다양성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데 외세의 강한 힘과 영향으로 인해 교육의 주체성이 가장 담보되지 못했던 메이지 유신 초기와 패전 직후의 시대가 일본 교육이 가장 다양하고 교육적 자유가 보장되던 시기였다는게 아이러니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 나라의 운영권을 되찾은 52년부터 일본의 권력층은 바로 교육 검토에 들어갔고, 1970년대부터는 일본의 교육이 권리만 강조하고 의무는 방기한다.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등 과거로 급격히 회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점차 검정교과서의 기준과 절차가 엄격해지고 교사의 지도방침에 대한 점검도 강화되어등 일본의 교육은 우경화와 더불어 급속히 뒤틀린다.

 일본은 지진이나 해일, 화산등 자연재해가 그 어느나라보다도 많으면서도 이를 무시한 개발을 진행해왔다. 저자는 자연에 반한 이런 인간의 세공, 잔꾀 등이 지진의 운동에너지가 될 위치에너지를 키워다고 말한다. 즉, 지진으로 더 큰 피해가 될만한 인재로서의 잠재적 에너지를 더 키워단 셈이다. 지진해일이 많은 나라가 원전을 하는게 그런게 아니겠는가. 하여튼 저자는 재난이 날때 그 지역, 사회, 국가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본다. 25년전 고베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이 일어나는 순간은 무척 짧지만 그 여파는 수십년을 간다. 일본정부는 붕괴한 해당지역에 집단 이전이나 토지정리, 부흥재개발 등으로 복구를 추진했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지역민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런 복구방식에서 지역 커뮤니티의 재생이 방해되었고, 서로 연결되어 버티며 재기해야할 사람들이 유리화되었다. 때문에 해당지역의 가설주택과 공영주택에서는 한해 이재민 고독사가 천명 넘게 발생한다고 한다. 이런걸 복구라 말할 수 있을까.

 문제가 하도 많은 아베총리의 외할아버지도 기시 노부스케도 총리였고, 한국을 무시하는 일본 외무상 고노의 아버지는 아들과 다르게 일본의 가해행위를 인정한 고노담화를 한 그 고노였다. 이처럼 일본은 한국과 다르게 정치가 세습된다. 일본은 정치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94년 정치개혁 4법을 통과시켰는데 명분과는 다르게 그 법은 자금의 운용과 인사발탁의 기능이 정당 지도부로 집중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때문에 각 지역 의원은 일본 국민이 아닌 정당의 지도자에 충성하게 되는 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법의 통과후 정치세습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는데 96년 이후 일본 총리10명중 8인이 무려 정치가 집안 출신이다. 중의원의 세습률은 25%를 넘어서가 집권당인 자민당은 경우가 더 심해 30%를 넘어선다. 2017년 11월엔 총리를 포함해 내각의원의 절반 이상이 세습의원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니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 할수 있겠다. 정당지도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의 통과후 세습의원이 많아 진것은 정당이 가족 정치인들에게 선거에 유리한 지명도와 자금, 지원조직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본 정당은 정권을 얻어 국민의 민의를 반영하기 보단 관직임명권을 얻고 권력이 당 지도부에 집중되고, 각 의원들이 지역이나 국민의 생각보다는 정당지도부의 명령에 복종하는 형태가 된다. 제대로 튀틀린 셈이다. 

 변경민과 약자에게도 국가주의앞에 그저 도구일 뿐이다. 일본은 52년에 본토를 미국으로부터 찾았지만 오키나와를 찾는데는 그로부터 20년이 더걸렸다. 2차대전때 본토보다 먼저 공격당해 점령당한 오키나와는 당시 전인구의 1/4정도가 죽었다. 미군이 죽인 것보다 옥쇄당한 이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전후 주일미군의 대부분이 오키나와에 주둔한 것도 오키나와가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이니도 그렇다. 그들은 비록 이등국민이긴 했지만 일본제국의 신민이었다. 그러다 패전하니 자동으로 외국인이 되어버렸다. 어째서 일본은 동화의사가 없으면서도 한국이나 북한으로의 귀순을 희망하지 못하거나 안한 이들에게 이중국적을 부여하지 않았을까? 농민도 약자이다. 일본은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쌀값안정은 도모하면서도 수입품과의 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해 농민들에게 쌀생산 제한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농민간의 이합집산이 일어났고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들었다. 후쿠시마에서 원전으로 재산과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어째서 도쿄의 불을 밝히기 위해 자신들이 그런 꼴을 당해야 했는지를 묻는다. 이는 하시마탄광의 일본, 조선, 중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사양화되던 탄광산업으로 인해 예산이 줄어 위험속에서 작업하다 희생된 미카와 탄광의 노동자들, 그리고 미나마타만의 어부들도 했던 말일 것이다. 

 이 책을 메이지 유신이후 상당히 많은 일본의 뒤틀린 역사와 현재, 희생된 사람들을 현장을 찾으며 기리고 성찰한다. 저자가 보기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당시 화혼양재를 택했다. 과거 중국을 배우자는 화혼한재에서 한을 양으로 바꾼 것이다. 한국의 동도서기나 중국읜 양무운동과 괘가 같다. 이는 기존의 정신문명을 보존하면서 서구의 과학기술만을 따르자는 것인데 일본의 경우 두 나라와는 달리 성공하면서 오히려 동아시아의 전체주의적 사고에 서구문명기술만 발달한 기형아를 낳은 셈이 되고 말았다. 때문에 메이지유신의 성공부터 일본의 뒤틀림은 배태되었다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정신문명의 변화까지 이어지지 않았기에 민주주의도, 문화주의도, 성찰과 반성도 없다. 더구나 최근 버블경제의 붕괴와 저출산 고령화, 지방의 쇠퇴, 감각적 충동의 해방, 국권과 민권의 분열, 국가와 자본의 유착, 도쿄로의 부와 인구의 쏠림, 미국만의 추동과 다른 나라의 무시, 계급 격차의 확대라는 문제가 전방위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는 오히려 과거로 회귀에 더욱 국가주의로 경도되고 그 수단인 국민의 순수성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치닫는다는게 저자의 해석이다. 

 재밌고, 한국에게도 공통되는 부분이 있어 상당히 반면교사가 되는 책이지만 많은 주제를 다루면서 상세하고 깊이 있는 서술이 좀 부족해 이해가 어려운 면이 있었다. 지금 책의 두배 볼륨으로 두껍게 서술했다면 더욱 나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거기에 일본학자이니 당연히 일본식 한자를 많이 썼는데 이 부분이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다. 여러모로 아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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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 : 국제정치 편 - 역사 분쟁 · 무역 전쟁 · 이념 갈등 차이나는 클라스 4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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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나는 클래스를 본적이 없다. 아이들 키우며 아내가 고장난 TV를 고치지 않은 탓이다. 수리비가 20만원이 나왔는데 새로사는게 차라리 낫지 않겠냐란 의견을 서로 나눈후 무려 3년을 TV없이 살고 있다. 좁쌀같은 성격에 누구도 적극성이 없어 이리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내가 그 대단했던 월드컵 사상 최대 이변인 러시아 월드컵 한국대 독일전 마저 주방용 조그만 TV로 시청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차이나는 클래스도 당연히 보지 못하지 않겠는가. 이대로라면 코로나가 다음 월드컵을 허락한들 역시 주방TV신세일 것이다. 

 이 책은 쉬운데 좀 알찬 지식들이 있다. 북한과 소련, 중국의 개혁 개방이다. 북한의 개혁 개방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우선 김정은이 스위스에서 유학하며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고, 기득권을 물리칠만한 강력한 1인집권체제라는 점과 동시에 중국, 베트남이라는 성공적 모델도 같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 소련을 개혁개방에 실패했다. 이는 소련이 절대빈곤이 아닌 중화학 공업중심으로 소비재가 부족해 돈이 있어도 소비재는 못사는 기형적 빈곤상태였으며, 개혁개뱡의 주체였던 고르바초프가 불과 4세대 지도자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르바초프는 아예 기득권층의 저항을 물리치고자 민주정치를 감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억눌렸던 민족주의가 되살아나 소련연방은 여러나라로 쪽져 버렸다.

 반면 중국의 개혁개방은 성공한다. 중국은 우선 절대적으로 빈곤한 상태였고, 덩샤오핑은 무려 1세대 혁명지도자로 특별한 지위없이도 사실상 최강의 권위를 누린 존재로 개혁개방 반대세력을 억누를수 있었으며 사실상 일당독재이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집단지도체제로 나라를 이끌었기 때문으로 본다. 덩샤오핑은 민주체제가 매우 비효율적이고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언제든 분열가능성이 있는 중국을 분열시킬 수 있는 위험요소로 보았다. 때문에 중국은 한국이나 대만식의 민주화가 아닌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정치제도화의 길을 택했다. 정치제도화는 민주화는 아니지만 시민들이 원하는 국방, 치안, 사회복지, 경제성장등의 필수적 정치재를 제공해 안정화를 노리는 것이다. 

 중국은 때문에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 정치재의 제공에 사활을 건다. 중국은 국유기업이 많은데 효율성이 떨어져 적자를 보는 경우에도 일자리의 제공이라는 사회적 역할때문에 적자를 국유은행이 보전해준다. 그러면 그 기업을 쓸데없이 살아남아 생산을 지속해 과잉생산을 일으켜 시장을 혼동시키고, 사회에 필요한 자원을 역시 쓸데없이 집어삼켜 좀비기업화한다. 중국의 체제가 유지되려면 매년 2천만개의 일자리가 요구되는데 공산당은 어떻게든 천 이삼백만개의 일자리를 생성하여 제공한다. 

 중국 공산당원은 무려 8900만에 달하는데 인구대비로 생각하면 소수다. 이중 겨우 2000명을 뽑아 5년마다 공산당 전당대회를 연다. 여기서 다시 200명의 정위원과 160명의 후보위원을 뽁고 이들로 중앙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중앙위원회가 1년에 1-2회 열리고 중국을 좌지우지하는 엘리트집단이다. 또 여기서 중앙정치부에 속하는 25명의 위원이 있고 또 여기서 상무위원 7명이 선출된다. 시진핑은 중국의 상무위원직책중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 국가주석을 겸임한다. 국가주석은 상징적 권력에 불과하지만 총서기는 공산당 인사권자이며 중앙군사위원 주석은 무려 군지휘권자다. 사실상 모든 권력을 장악한 셈인데 시진핑 이전 부정부패한 기득권층이 공산당 지도부에 저항한 사건으로 인해 권력집중이 허용되었다. 시진핑은 이미 헌법개정으로 무한집권이 가능한 상태다. 

 이란은 이슬람공화국이다. 글자그대로 종교와 공화정이 결합한 초유의 실험인 셈인데 이슬람 법학자인 최고지도자가 국가원수이자 성직자이고, 그가 군통수권과 전쟁성포권, 외교 사법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하지만 공화정 체제로 대통령을 놀랍게도 직선으로 선출하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는다. 이란의 국정은 최고지도자가 더 큰 영향력으 갖지만 대통령 및 공화정 인사들과 협의를 하는 체제이다. 양자의 조화랄까나. 

 이란이 이리된데는 영국과 미국의 탓이 크다. 이란은 본디 오랜 기간 왕정체제였다. 영국은 이란의 유전을 개발해 이란 왕조와 결탁했고, 영국이 이득을 취하는 대가로 사우디처럼 왕가는 보호받았고, 이득을 얻었다. 그러다 모함마드 모사데그란 자가 등장한다. 그는 영국이 자국의 석유로 이득을 취하고 이란 국민이 가난한 것에 분개해 영국이 장악한 석유를 국영화해버렸다. 이에 영국은 미국을 종용해 쿠데타를 일으켜 모사데그를 축출한다. 당시 한국전쟁 직후로 영국은 사회주의자인 모사데그가 소련과 결탁할 우려를 제기해 미국을 설득했다. 모사데그 이후 이란은 급진적인 백색혁명으로 서구의 여러 문화와 제도를 도입한다. 이란에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었겠지만 이 같은 급진적 변화는 많은 이란의 전통주의자들에게 경각심과 반감을 불러온다. 또한 이후 팔레비는 부를 쌓기만 하고 역시 이란 국민을 돌보지 않는다. 결과는 호메이니 혁명이었고 이란은 지금의 모습이 된다. 

 68혁명은 오늘날 세계를 만든 결정적 사건이다. 모든 형태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64년 TV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이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본게 혁명의 계기였다. 자유주의의 수호를 자처하던 미국에게서 유럽의 젊은이들은 제국주의적 면모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혁명은 파리를 시작으로 독일, 런던은 물론 철의 장막을 넘어 동유럽인 체코 프라하의 봄으로 이어진다. 대서양을 건나 미국 로스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거기에 일본까지 간다. 물론 독재의 압제하에 있던 한국은 아니었다. 68혁명 이전 독일 사회는 지금의 일본처럼 과거청산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총리가 나치당원 출신이니 정말 지금의 일본과 별반 다를바가 없었다. 하지만 68혁명이후 독일은 지금의 독일로 변모한다. 모든 분야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이 68혁명이 한국엔 도달하지 못한다. 당시 한국은 박정희 정권으로 독재가 극에 달할때였으며 오히려 베트남 전쟁에 40만에 달하는 병력을 파병한 나라였다. 유럽의 68혁명세대에는 한국은 86세대가 대응된다. 한국민주화에 큰 공헌을 한 세대이며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 세대에 빚지고 있다. 하지만 이후 오랜 세월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20년전 비교적 30대의 젊은 나이에 정치권력을 차지한 이들은 5-60대가 된 지금도 자리를 차지한다. 그 덕에 한국정치세력은 세대, 그리고 직능에서 대표성이 크게 떨어진다. 직능에선 언론, 법률, 교수직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책은 한국민주주의의 실현은 광장이 아닌 일상에서의 민주주의가 실현될때 가능하다고 본다. 광장과 정치에선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실생활인 가정과 직장, 학교에서는 유교적, 군사적 문화가 혼합한 권위주의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일 후엔 북한이 통일한국정치권력의 캐스팅 보드를 잡을 것으로 본다. 우린 독일의 통일을 서독이 주도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동독인들이 많은 봉기와 적극성을 보였다. 그리고 메르켈 총리를 비롯하여 통일 이후 독일의 집권자는 대개 동독 출신이었는데 이는 정치권력이 균형적이었던 서독의 세력을 동독 세력이 선택해야 집권이 가능했다는 정치지형과 관련한다. 이는 수구세력과 보수세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한국의 상황과 매우 유사한데 소수지만 2천5백만의 북한시민이 캐스팅 보드를 쥐는 정치지형을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 호남과 경상이 대립하여 충청이 캐스팅 보드를 잡았던 묘한 상황과 유사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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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1 14: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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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2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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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한국미술사 - 주먹도끼부터 스마트폰까지
이태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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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숙의 '시대를 훔친 미술'을 읽으며 시대의 정신 및 문명의 발달과 함께 호흡하며 서로를 견인해나가는 미술과 시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우리 미술 혹은 동양미술엔 이런 흐름이 없을까 궁금했다. 여러 책을 좀 보긴 했는데 그런 사조가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물론 동양과 서양의 역사 흐름은 다르며 역사를 단선적으로 보는건 위험한 시각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그런 흐름은 있다고 본다. 그러다 이 책 '이야기 미술사'를 보게 되었다. 분량은 무려 600쪽, 저자의 야심이 대단해 무려 구석기부터 현대의 한국미술을 총망라했다. 한국미술 전반을 아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직접 주요 유물의 발굴 및 견학에 참여한 저자의 식견이 빛난 책이다. 아마도 체한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소화한 것을 조금씩 써본다.


1. 토기와 도자기

 서양과 다른 동양의 미술 장르는 확실히 토기, 도자기다. 서양은 미술이 실용과 확실히 분리된 듯 하지만 동양은 그렇지 않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우리의 달항아리는 사실 관상용이 아니라 고기 따위를 담아놓던 보관용 그릇이었다. 연구에서 달항아리 중간 부분 기름층이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고기따위를 보관했다는 증거가 되었다. 

 한국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로 시작한다. 교과서에 나온 것과는 다르게 빗살무늬 토기는 무척 큰데 50cm에 달하기도 한다. 대체 이 빗살은 왜 있는걸까 궁금증이 드는데 단순한 장식이란 견해에서, 주술적 의미, 아무표시도 없는 빈공간에 대한 불안감의 대처, 그리고 실질적 용도로 마찰방지를 위한 것이라는 것까지 다양하다. 신석기 후기로 들며 토기는 작아지고 아래는 편평해졌으며 크기도 작아지는 경향이 뚜렷해졌는데 이는 음식을 큰 그릇에 담아놓고 같이 먹던 습관에서 점차 작은 크기의 그릇에 덜어먹는 형태로의 식습관 변화를 의미한다. 신석기 시절 토기는 가까우면서도 먼 한중일이 모두 상당히 다르다. 중국의 토기는 대부분 채색토기로 화려하고 검고 붉은 채색이 많은데 이 시기 인도, 서아시아, 아프리카의 것이 유사하다. 한국의 토기는 빗살과 무채색인데 만주, 몽고, 핀란드, 우랄, 알타이의 북아시아 쪽과 유사하다. 반면 일본은 한국의 것과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조몬시대 이르러 구연 부분을 조각하는 특유의 형태로 차별성을 드러낸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빗살무늬 토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위 부분에만 점을 찍는 가벼운 띠무늬 형태 토기가 많아진다. 이 시기부터는 물레가 생겨나 세련된 둥근 형태의 토기 제작이 가능해졌다.

 삼국시대에 토기는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의 토기가 매우 다르다. 백제와 고구려는 토기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형태가 무른 연질의 토기를 주로 제작했다. 하지만 신라와 가야는 단단한 경질의 토기 생산이 가능했다. 이는 가야 지역의 토기를 고온에서 구워내는 기술로 가능했다. 신라 토기는 가야 토기의 기술과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했는데 6세기 무렵이면 무려 1000도 이상에서 토기를 구워내고 유약을 살짝 바르기 시작했다. 고구려인들이 주로 벽화를 통해 삶을 표현한 반면 당대 신라인은 토기에 장식한 토우나 상형토기로 그들의 삶과 문화는 나타낸듯 하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드디어 토기에서 도자기의 시대가 열린다. 유약을 본격 사용하고 고온에서 경질도기와 자기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도자기는 단연 청자다. 동북아시아에서 청자의 시작은 중국인데 청자는 당시 매우 귀한 사치품이었던 옥을 대신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즉, 어떻게 하면 그릇에 옥색을 내느냐가 초점이었던 것이다. 청자와 백자는 유약과 1200-1300도의 가마에서 구워내야 생산이 가능하다. 즉, 유약과 고온기술이 초점이다. 그래서 두 기술이 발달했는데 도자기는 흙과 불, 유약에 따라 그 결과가 매우 달라진다. 청자는 유약에 철분을 섞에 초벌하면 붉은 색이 되고, 이를 다시 재벌하면 푸른빛을 띤다는 것을 알게 되며 가능해졌다. 이 유약에 철분이 적으면 푸른 빛이고 다소 많아지면 탁한 갈색을 띠는 푸른빛의 청자가 된다. 가마기술은 비탈에 짓는 비탈가마와 평지가마가 있다. 비탈가마는 고온에서 산소를 차단하는 환원법으로 청자가 주로 갈색조나 황갈색조라 만들어지며 평직마에서는 산소가 많이 투입되는 산화법으로 맑은 녹색과 청생의 푸른빛의 청자를 만들어낸다. 고려는 이 중 비탈가마 형태를 받아들였다. 고려 청자의 톡특함은 유명한 상감이다. 상감은 본래 청동기에 금, 은, 보석, 뼈등을 박아 넣은 금속공예였는데 고려는 이 상감을 도자에 넣었다. 성형한 그릇의 표면에 백토나 자토를 채워넣었는데 문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유약이 얇아지다보니 상감청자의 유색은 약간 청회색조가 되었다. 조선은 초기엔 고려의 청자를 계승해 분청자가 유행했다. 분청자는 청자에 백토를 분장한 자기를 말한다. 그러다 세종대에 이르러 명나라의 청화백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청화백자가 유행하기 시작하고 이로써 청자는 거의 사라지게 된다. 


2. 불교

 한국 미술에 불교를 빼놓을 수 없다. 불화나 사찰, 탑, 불상이 모두 불교에서 비롯한 예술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스투파라는 신도들이 예배를 하던 탑이 있었다. 스투파는 인도에선 둥근 사발을 뒤집은 듯한 복발형으로 무덤과 유사한 형태였다. 하지만 중국에 스투파가 유입되어 다층탑 형식과 결합하여 3-5층의 전망형 망루와 비슷한 탑으로 변모한다. 다만 중국에선 목탑이 대세였는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화강암이 많은 한국의 자연적 특성과 결합해 석탑이 유행한다.

 처음엔 탑이 중심이었지만 불상이 유래하며 불상의 인기가 탑을 넘어서게 된다.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본 뜻 것이기에 사리가 보관된 탑보다 신앙과 관련하여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공해 신자들을 포섭하기 더 쉬웠다. 그래서 사찰도 탑 중심에서 불상을 모신 금당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불상 중 천불은 같은 모양과 크기를 지닌 천개의 불상을 의미하며 삼존불은 부처를 중심으로 미륵반가사유상과 보살상이 위치한 것이다. 7세기 전반엔 삼국에서 미륵반가사유상이 유행했는데 아무래도 전란과 나라의 멸망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이 결합한듯 하다. 반가사유상은 글자그대로 오른 다리를 왼다리에 걸치고 그 오른 무릎위에 올린 오른 팔로 턱을 괸채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의 불상이다. 중국의 반가사유상은 대개 석불이지만 한국은 금동불로 제작을 했다.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6-7세기 일본 불상과는 달리 적송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일본 불상이 대개 조립식이었던 것에 반해 반가사유상은 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때문에 일본 반가사유상은 한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삼국시대 탑과 불상의 배치인 가람배치는 지역마다 다르나 탑하나에 세개의 금당을 배치한 고구려식 1탑 3금당이 일반적이었다. 백제에는 3탑 3금당, 3탑 1금당식의 독특한 형태도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팔각형의 목탑이 많았고, 신라와 백제는 목탑과 석탑이 공존했다. 백제미륵사는 1탑 1금당으로 가운데 목탑이 있었고, 동서에 석탑이 있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다. 백제 사비시대의 정림사지 5층석탑은 목탑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한 완성형 석탑이다.1층의 탑신을 높게 설정하고 2층부터 탑신의 너비와 높이, 길이를 급격히 줄여 시선이 1층에 머물게 하였고 1:1.618의 황금비를 나타냈다. 

 남북국 시대 신라는 불교를 이용해 백제와 신라, 고구려의 삼민을 통합하고자 하였고, 왕즉불의 이념아래 전국토를 불국토로 이념화했다. 이에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이 건립되었고, 석굴암을 만들었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자연 석굴이 많아 석굴 사원을 만들기 손쉬웠지만 신라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기에 거대한 인공암반을 그 산꼭대기에 올려놓고 인공석굴을 조성한게 석굴암이다. 그리고 불교의 소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범종도 많이 주조한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불교는 쇠퇴해 석탑이나 조형물의 조형미가 쇠퇴한다. 몰락한 왕권을 상징하는듯 한데 불상의 얼굴도 이상적이고 근엄한 것에서 딱딱한 표정으로 바뀌었고 얼굴도 우리와 유사해진다. 신라 말기 선종이 유입되었는데 이 선종은 중앙집권적인 교종과는 다르게 누구에게나 부처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지방세력의 입맛에 잘 맞았다. 때문에 이시기 지역색이 강한 불교 문화가 발달한다.

 고려가 들어서며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영향인지 고구려식 팔각형 목조탑형식을 따른 다각다층석탑이 유행한다. 13-14세기 고려말에 이르면 권문세가의 영향으로 취향이 담긴 화려하고 장식적인 불화가 많이 만들어진다. 이 불화는 적록의 보색대비를 강조한 고구려 벽화와 비슷하여 광물색의 원색조와 적록의 보색대비가 특징이다. 고려불화는 고급스럽게 비단에 적, 녹, 청색을 중심으로 흰색과 황색, 금색, 은색 물감을 사용하였다. 뒷면에도 물감을 칠하는 배채법을 사용하여 적록을 선명히 하고 변색을 막고 그림에 안정감을 주었다. 변상도는 불경의 주요내용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인데 14세기의 미륵하생경변상도는 옅은 선묘방식이 퇴락하고 미륵불의 이목구비가 매우 짙게 표현되어 조선초기 불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13-14세기는 원의 영향으로 진흙으로 구운 후 금박을 입힌 소조불이 나타났고, 3,5,7,9의 홀수탑에서 십이라는 숫자를 중시하는 화엄종의 영향으로 경천사지 10층석탑이 그것도 대리석으로 만들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불교는 탄압받지만 왕실의 후원과 민간의 신앙으로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한다. 특히, 전란후 승병의 활약으로 왕조보존에 대한 보답으로 국가가 나서 불교를 중흥하는데 인조와 숙종대에 전국의 사찰이 새로 재건될 정도였다. 전란 후 조선에서는 희생된 수많은 이들을 기리는 극락왕생을 비는 천도의식이 활발했다. 때문에 천도의식을 위해 거는 불화인 괘불이 많이 제작된다. 괘불은 무려 10m크기로 법당 밖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거행할때 거는 탱화였다. 


3. 조선시대 회화

 동아시아에서 산수는 만물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성리학의 기본 이념에 잘 부합했다. 산수는 이로인해 수신의 의미를 갖고 상징적 의미가 커지면서 산수화를 그리는 일이나 가까이에 두고 감상하는 문화가 유학자들사이에서 보편적 문화로 자리한다. 산수화는 중국에서 시작해 조선도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중국의 기법은 크게 북종화와 남종화로 나뉜다. 북종화는 부벽준 기법으로 붓을 옆으로 눕혀 도끼처럼 찍는 방식으로 깎아지른 절벽이나 거친 절벽의 표현에 적합하다. 남종화는 피마준과 미점 기법으로 피마준은 갈필로 그려 산과 언덕의 주름을 표현하고, 미점은 붓을 옆으로 눕혀 툭툭 찍는 기법으로 안개를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조선 초기 산수화는 북종화의 영향을 받았다. 대가인 안견은 몽유도원도에서 북송대 거장 곽희의 산수기법은 운두준법을 사용하여 능선과 주름은 마치 구름같이 표현하였다. 후원자인 안평대군과 안견의 일파는 15-16세기 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새로운 양식인 남송화 기법이 유행한다. 기법에 이어 흐름도 크게 변하는데 17세기 중반 진경산수화가 시작되고 18세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통념과는 달리 진경산수화는 사실 실경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과거 관념적인 중국의 이상화된 풍경을 그린 것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제 풍경을 그리되 자신의 인상과 주관에 따라 과장과 변형, 여러 시점을 이용해 그린 것이다. 즉, 현실경치에서 성리학적 이상을 구축한 것인데 이는 당시 명이 멸망하고 청이 등장해 새로운 유교문명국을 조선에서 찾고자하는 소중화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진경산수화는 정선이 유명하다. 그의 3대 명화는 박연폭도, 금강전도, 인왕제색도인데 모두 실경을 바탕으로 그의 이상적 바램이 구상된 그림이다. 금강전도는 토산과 암벽산으로 구성되었고, 양자는 마치 태극모양처럼 표현된다. 봉우리에 눈을 부각하기 위해 주변 배경을 암청색으로 처리한 것도 돋보인다. 정선이후  강세황과 심사정등로 대표되는 신조류가 등장한다. 정선은 조선의 명승을 통해 이상을 꿈꾼 마음의 그림을 그렸고 이는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 노론 세력의 정신세계를 대표한다. 반면 강세황의 제자인 김홍도식 사실화법은 박지원, 정약용등의 실사구시학파의 입장과 유사하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산수화와 초상화 일색이던 그림판에 풍속화가 등장한다. 조선후기 상업이 발달하며 서민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결과인데 애정소설이 유행하고, 흥과 신명의 감정을 드러내는 당나라 시풍이 완연했으며 음악도 기존의 느리고 절제된 음률이 빨라지고 변화폭도 커졌다. 그림에도 이게 반영된 것이다. 공재 윤두서는 이런 흐름의 초기 주자로 평범한 서민들의 노동을 화폭에 담는 혁신적 변화를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정조대에는 풍속화가 도화서 화원의 정식 시험과목으로 독립되기에 이르렀으며 김홍도는 단원풍속도첩에 무동, 씨름도, 서당등 25개의 화폭을 남겼다. 조선 후가 풍속화는 여성도 대상을 많이 부각되었는데 김홍도의 제자 신윤복은 남여 애정지사를 담은 노골적 성적 이미지를 그림에 담아 당대 신분사회를 질타했다. 이는 유교적 질서가 무너지고 예교와 풍속이 느려진 사회상을 반영한다. 19세기에는 관찰을 통한 사실 위주의 그림이 유행하여 당대 화가들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좋아하는 대상을 개성적인 스타일로 그려냈다. 반면 김정희 풍의 문인화도 사대부가 무너지는 시기임에도 아이러니 하고 강조되어 갔다.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한국 미술의 많은 변천과 양상을 담아냈다. 기대하고 예상했던 서양과 같은 고대인문주의에서 중세 종교 인문주의 낭만주의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이르는 시대적 흐름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흐름이라면 왕조의 흥망에 따라 초기 불교든 유교든 조금더 이상적인 흐름에서 후기에 이르러 사회적 법도와 왕조가 흔들리며 지방세력이나 백성의 요구에 맞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형국이다. 이런게 불교나 유교라는 그릇을 차용하여 반복되어 표현되는 느낌이다. 동아시아사가 발전하지 않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동아시아 수력기반 농경왕조가 다소간의 발전은 해나가지만 생산 및 분배체제가 초기엔 잘 잡혀있다가 이것이 무너지며 새로운 왕조가 들어선다는 설의 흐름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여튼 책은 상당한 한국 미술품을 책에 담아냈고, 정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국 미술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고 싶다면 볼필요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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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한 권 무엇을 읽을까 - 사서교사가 뽑은 초등 한 학기 한 권 읽기 추천도서 100
북토크톡 지음 / (주)학교도서관저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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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들은 책 읽기를 싫어한다. 지금의 우리나라가 성찰이 없고, 오로지 남들 보다 돈한푼을 버는데 사력을 다하고, 공동체를 무시하고 이익집단의 의견에 경도되어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하는 양태는 독서없는 삶과 결코 무관치 않다. 그리고 어른이 이렇게 책을 안읽는 것은 어릴때부터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며 책읽기에 재미를 붙여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본 교육방송의 독서 교육 프로그램에서는 학생들에게 어릴적 책 읽는 재미를 붙여주는 것을 가장 중시했다. 그것이 평생 독서가로 살아가는 첫 단추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선생님들이 독서교육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중요하며 좋은 책은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 '한학기 한권 무엇을 읽을까'는 참 실제적인 책이다. 문학과 비문학은 포함해 초등학생 3-6학년이 읽을 만한 책 100권을 선정했다. 초등사서교사 연구모임에서 만들었고, 현직 교사들이니 아마도 실제 수업한 책들을 사용했을테니 그 수준과, 교육과정 및 성취기준과 관련이 높아 보인다. 3-4학년 수업은 한 권당 8차시 정도로 구성했고, 5-6학년 책은 10차시 이상으로 구성했다. 

 책의 간략한 내용 소개와, 관련 활동들이 알차게 구성되어 있는데 독서전 활동과, 독서중 활동, 독서후 활동으로 구분한다. 보통 온책 읽기 활동은 독서후 활동이 많은 편인데 이 책에선 책을 분량을 나누어 읽게 한 후, 바로 활동하는 형태로 차시 구성이 되어 있어 독특했다. 100권의 책 뿐만 아니라 각 책과 주제가 비슷한 책들도 소개하고 있어서 아마 실제로는 300권 정도의 책이 소개된 듯 하다. 교육현장에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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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펭귄클래식 7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진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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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고전 문학을 보면 거울이나 그림자, 혹은 물속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또 다른 면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도리언 그레이에선 이것이 자신의 초상화인데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의 전통을 잘 드러내는 듯 하다. 하긴 그 덕에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을 발전시켰고, 무의식 같은 것도 생각해내지 않았을까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는 이전에 본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100년 전 서구 문명의 과학기술에 대한 자신감과 맹신, 그리고 이성을 믿으면서도 무의식의 발견으로 인간 본성과 내면의 어둠에도 주목하는 시대적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런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와 파멸적 결말을 세기말적 상황을 비추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용을 살피면 도리언 그레이는 10대 후반이고 혈색이 잘 도는 하얀 피부와 무척 어울리는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외모의 소년이다. 성격도 외모에 걸맞게 순수하다. 사실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것에 가깝긴 했다. 집안 배경도 좋다. 귀족이며 부모가 일찍 죽긴 했지만 외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레이는 화가 바질의 모델이 된다. 바질은 그레이의 아름다운 용모와 순수함을 담아낸 그림을 그린다. 바질은 웬지 죄책감을 느낄정도로 작업에 몰입했고, 그로 인해 작품은 순수하지 못해보였다. 바질에겐 친구 헨리가 있다. 순수한 예술가인 바질에 비해 헨리는 속세의 때가 묻을때로 묻었다. 세상을 관조하고 꿰뚫어보는 달변가 처럼 보이지만 본인의 실제 생활과 정신은 그렇지 못하다. 바질은 그런 헨리가 웬지 순수한 도리언을 물들일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예상을 들어 맞는다. 

 도리언을 만난 바질은 최고의 초상화를 남긴다. 그리고 헨리로부터 젊음의 허상함에 대해 듣고, 관련 책도 읽기 시작한 도리언은 헨리와 어울리며 조금씩 변해간다. 젊음의 허상함을 알게된 도리언은 자신의 초상화를 보며 자신의 젊음이 영원하고 늙음과 정신적 추함이 모두 초상화로 향하길 기원한다. 그리고 말도 안되게 이는 곧 실현된다. 도리언은 시빌이라는 아름다운 소녀의 연극을 관람하고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시빌은 도리언을 얻게되자 연기력을 잃게 되고, 이 모습을 본 도리언은 그녀에게 실망에 이별을 통보한다. 실의에 빠진 시빌은 자살하고, 도리언은 이사실을 알게 되지만 헨리의 말에 금방 죄책감에서 벗어나 연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도리언의 아름다운 초상화엔 잔인한 미소가 남겨진다. 도리언은 두려움에 빠져 초상화를 감추기에 이른다.

 이후 나이가 들어도 도리언은 십대의 미모를 유지한다. 하지만 그의 악행에 초상화의 얼굴은 노화와 내면의 잔혹함을 반영하여 망가져간다. 도리언과 어울진 사람들은 남여를 불문하고 불운해졌고, 도리언은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의 초상화는 그런 거의 모습을 반영해나간다. 

 책은 과거 책 치곤 전체적으로 재밌는 편이다. 이 당시 소설이나 사람들은 인생사나, 여성, 남성, 예술, 시, 드라마, 철학, 종교 등등에 상당히 단정적인 정의내리기를 좋아하는데 포스트모던 시대를 지나온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좀 듣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이런게 크게 거슬리지 않다면 볼만한 책이란 생각이다. 나의 내면을 반영한 초상화가 있어 순수한 시점으로 계속 변해왔다면 그걸 관찰할 수 있다면 어떨까? 자신의 초상화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재밌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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