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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 사건과 스캔들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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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기 전 까지, 딱 겉으로만 보았을 때의 느낌은 일본인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인만큼 나도 모르게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하지만 실제로 읽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물론 일본인이 조선인을 살해한 사건도 있었지만, 그 외에도 조선인들 끼리의 살인사건, 조선인이 일본인을 살해한 사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연쇄살인 사건, 근대의 정조와 사랑이야기, 몰락한 왕조와 부패한 귀족의 이야기, 신 여성의 이상과 현실 등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사건들의 공통점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혼돈과 혼란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위에서 말하는 조선 귀족은.. 조선을 일본에게 송두리째 가져다 바친 친일파들에게 주어진 작위이다. 일본이 그들을 조선귀족의 작위를 주고 은사금도 후하게 내려주었다. 하지만 ! 대부분의 조선 귀족들은 대부분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함정 ㄷㄷㄷ
재산을 탕진하고 이왕직, 총독부에 돈 달라고 생떼를 부린 조선귀족(친일파) 중에는 당시 순종의 장인이었던 윤택영도 포함되어있다.
결과적으로 꽤 많은 친일파의 재산이 광복 전에 탕진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랄까. 아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토지왕이나 몇몇 친일파의 재산은 꽤 오랫동안 남아서 그 자손들의 배를 불려준 것도 사실 ! (남이섬은 민영휘 자손의 땅이라죠^^?)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던 안기영 교수에게는 이성규라는 아내가 있었다.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 교원 생활을 하던 이성규에게 반한 안기영은 그녀에게 끈임없이 구애하여 결혼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 시대가 으레 그렇든 아무리 신여성이라도 결혼을 하게되면 가부장제도에 갖혀서 사는 삶을 살게 된다. 이성규 역시 그랬다. 심지어 남편 안기영기 해외로 유학을 떠나면서 집안의 생활비, 남편 안기영이 남긴 빚까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이성규는 고된 삶을 버텼다. 안기영이 유학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남편이자 음악과 교수였던, 독립운동가였던 안기영은 조강지처를 납두고 본인이 가르치던 제자 김현순과 눈이 맞은 것이다. 거기다가 너무 뻔뻔하게도 안기영과 김현순은 해외로 도피한다. 심지어 애까지 낳고 살고 있었다. 

당시의 형법에는 간통죄가 있었다. 하지만 그 간통죄는 '부인 및 그 상간자의 간통에 대하여 2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라고 하여 남편의 간통에는 면죄부를 주었다. 즉 남편이 젊은 여자와 같이 살고 있어도 조강지처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소름돋는 사실 하나는 1930년 일본의회에서 남편의 간통죄를 처벌대상으로 하자는 문제가 올라왔었는데, 당시 첩을 둔 의원들의 조직적 반발로 입법이 안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남녀 모두의 간통죄가 처벌대상이 되었는데, 이 역시 웃긴 사실이 하나 있다. 당시 해당 법안의 투표를 진행한 국회의원 수가 110명이 었는데 찬성이 57표, 반대가 56표 였다고 한다. 딱 1표 차이로 간통죄가 입법화 된 것이다. 아! 하지만 이런 간통죄도 2015년에 폐지되었다.

이 외에도 이 책에서는 오랫동안 인문학에서 금기시 되어왔던 명사들의 사생활을 파헤쳤다. 위에서 언급한 안기영도 그렇지만,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었던 박희도의 삶도 그렇다. 당대에는 친일보다 성추행을 더 금기시 했나보다. 박희도의 친일행적은 현대에 들어와서 속속들이 밝혀졌지만, 그가 전 조선을 뒤흔든 '여 제자 정조 유린 사건'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책은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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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빛은 한반도로부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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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는 규슈를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누어서 답사를 하고 있었다.

북부는 요시노가리, 히젠나고야성, 가라쓰, 아리타, 이마리, 나가사키, 다자이후

남부는 사쿠라지마, 심수관, 기리시마, 남향촌 등등


뭐랄까 내용 자체는 새롭다! 라고 느끼지는 못했지만.. 생각보다 자세히 적혀있는 느낌이랄까?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들의 이름을 최대한 기억하려는 모습이 바로 그랬다내가 알고있던 이삼평, 심수관, 백파선, 박평의 말고도 다른 도공의 이름이 실려있었다.


이미 일본 땅에 20년 가까이 정착한 상태에서 귀국한다는 것은 정부의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포로였다가 귀국한 다음 자신들이 받게될 처우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도 했던 모양이다.

-178p


임진왜란의 다른 이름은 도자기 전쟁, 당시 일본 장수들은 수 많은 도공들을 사로 잡아갔다포로로 잡혀갔던 도공들은 임란이 끝난 직후 까지만해도 머나먼 타향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일본 정치도 안정화가 될 무렵, 포로로 잡혀간 도공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많은 도공들이 터를 잡았던 사쓰마번에서는 도공들을 사무라이 계급과 동일 대우를 해주며 지원해주었다.


조선에서의 그들은 도자기를 구우면서도 온갖 부역을 했어야 하는 천대 받는 아무개였는데 일본에서는 그들을 장인으로써 대우를 해주기 시작한것이다그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고향으로 돌아와라! 한들 누가 가겠는가 돌아가는 그 순간 그들은 다시 모진 일을 감내해야하는 아무개가 되는 것인데그들은 그렇게 일본에 남아서 도자기를 빚었고, 그 도자기는 서양에 곳곳에 널리 알려지며 명품으로 자리잡았다.


다른 단락은 감정의 동요가 없었지만,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조선이라는 나라의 무능력함에, 한 치앞을 바라보지 못하는 조선에 치를 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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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靈探偵八雲10 魂の道標 (單行本)
카미나가 마나부 / KADOKAWA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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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 9권이 발매된 뒤 장장 5년 만에 나온 신간이다. 즉 이 5년간 작가님은 야쿠모 문고판 발매와 각종 신작만 발행하고 있었다. 문고판을 사고 있으면 신간이 나오겠지, 작가님의 새로운 작품을 읽고 있으면 나오겠지 하고 기다린게 벌써 자그만치 5년 이라니.


아무래도 5년만에 나온 신간이다보니, 앞에 내용이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소설(일반판)은 두꺼우니까 문고판으로 8,9권을 읽고나서야, 10권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원서다 보니.... 확실히 한글 소설을 읽는 것보다는 시간이 오래걸린다는게 함정


나나세 미유키로 인해 왼쪽눈의 시력을 잃은 뒤의 야쿠모는 본인의 존재가치에 대해 생각을 하다못해 저 멀리 심연의 끝까지 떨어진 듯 싶었다. 진짜 읽는 내 몇 대 쥐어 패주고 싶을 정도 ㅠㅠㅠ 하루카가 야쿠모가 자기를 두번 다시 안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까지, 정말 온 감정을 다 토해내며 울부짖고 나서야.......그때서야 내가 알던 그 야쿠모로 돌아왔다. (소설의 반페이지가 지나서야 .....하 하루카 넘나 큰일한것. 반 페이지까지 읽는데 넘나 진짜 쥐어패고 싶었다 ㅠㅠㅠㅠㅠㅠ)


정말 진짜 생각보다 야쿠모가 정신을 차리는게 너무 오래 걸렸는데, 아마 야쿠모를 바꿀수 있는 하루카가 각성하기까지가 오래걸려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루카 역시 자신이 무언가를 말하는 것으로 인해, 상대방이 떠날까를 두려워하는 겁쟁이였으니까.

다만 야쿠모 보다는 강인한 사람이었기에, 보다 빨리 본인의 약한 모습을 마주하고 야쿠모를 정신차리게 할 수 있었던게 아닐까.

물론 그 와중에, 너무나 감정적이다 보니 야쿠모에 대한 본인의 진심까지 토해내고야 말았다.


야쿠모의 "내가 상냥하다는건 망상일 뿐이야" 라는 이 한마디에 완전 빡친 하루카는 "나는 망상을 좋아한게 아니야 !" 이렇게 되받아치고야 만것이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제가 나를 좋아하는 구나, 라는걸 깨달을진데 두뇌회전이 빠른 야쿠모니 말 다했죠. 하하하 (뭐 그렇다고 이 둘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했다거나 그런 건 없다는 걸 미리 밝혀 둡니다ㅋㅋㅋ)


진실이 하나 둘 풀리면서 표면위에 올라온건 이기심에 가득찬 나쁜 어른들의 모습과 그로 인해 무참히 짖밟인 어린 영혼들. 문제는 그 어린 영혼들 사이에는 야쿠모의 아버지인 '운카이'도 있었다. 10권에서는 절대 악이라 생각했던 '운카이'의 과거가 전편보다 더 많은 부분이 들어나있다. 문제는 '운카이'의 과거는 어째서 사람이 이렇게까지 절대 악이 되어버렸는지에 대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 이래서 이렇게 절대 어둠이 된걸까'라는 일종의 이해와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로 너무 안타까운 과거라는 것이다. 어쩌면 당시의 운카이처럼, 야쿠모가 혼자였다면 (잇신이나 하루카 등이 없다면) 운카이 처럼 그 많은 일을 겪었다면...아마 엄청난 절대 악이 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과연 11권은 또 언제 나올까 싶고..... 확실한건 11권에서 나나세 미유키의 타겟은 아마 하루카가 될 거 라는 것일까나. 하 ㅠㅠㅠㅠㅠ 최소 5년은 군말 않고 신간이 나오길 기다리겠습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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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2 - 치욕의 역사, 명예의 역사 땅의 역사 2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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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학농민혁명을 둘러싼 역사의 아이러니

경상도 사람 박성빈은 농학농민군의 접주였다. 동학농민혁명 때 생포가 되었으나 간신히 살아남아서 초야에 묻여 살았다. 박성빈에게는 아들 여럿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아들 박상희는 남로당 당원으로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다가 총살당한다. 박상희의 동생도 남로당원이었다. 박상희 동생은 형이 죽고 2년 뒤 여수, 순천에서 벌어진 군부대 반란 사건에 가담하여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사면된다. 그가 바로 훗날 대통령이 된 박정희다. 그의 정권 하에 경제가 발전된 부분은 분명 있으나, 그가 독재를 한것도 사실이고 그로 인하여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학살된 것도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정권에서 쿠테타로 규정되던 동학농민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한 것은 바로 그 였다.

 

구한말 의병장, 우국지사 최익현은 동학을 동비라고 비하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고, 동양평화론을 말했던 안중근 의사는 동학을 폭동이라 규정하고 황해도에서 아버지와 함께 동학군을 토벌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유독 눈에 띄던 동학군 일원 한명은 죽이기 아깝다 하여 살려주고, 가까이 지냈는데 그 자의 이름은 김창수 이다. 김창수는 훗날 한국인이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이다)

 

현대인들에게 동학동민운동은 반봉건, 반외세를 외쳤던 민초들의 '혁명'이다. 하지만 당시를 살던 (양반)독립지사들에겐 그저 조선의 질서를 망가트리려 하는 천민들의 쿠테타였다. 반면 해방 이후 정권의 독재자가 된 한 남자에게는 혁명이었다.

역사는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보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당시의 시선 - 당시의 사회를 살던 눈으로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역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수 백명의 일반인이 군인의 손에 학살당했다. 이 와중에도 본인들이 일으키는 학살 극이 잘못된 사실이라는 것은 인지 했는지, 인민군이나 무장공비로 변장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총을 빗 맞아서, 시체 더미 속에 있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소수의 생존자가 나왔다. 군부에 의해 은폐되었던 학살 사건은 생존자들 덕분에 이 사실은 외부에 알려진다.

-사람이 총을 쏘니까 막 내 위로 엎어질거아니야. 그 사람들이 막아줬어

-어머니는 저쪽, 우리 형은 요쪽, 피만 위에서 내리 쏟아진 거 그것만 덮어 썼지.

-그냥 위에서 막 뭐 넘어지니까 막 피가 입으로도 눈으로도 다 들어갈 거 아니야.

-사람의 피가 참 냄새가 지독해. 어째 그런고, 그래도 거기서도 냄새가 지독하단 생각은 들어


거챵 양민학살과 관련하여 당시의 관계자들이 법정에 섰다. 누구는 무기징역, 누구는 징역 몇년. 하지만 1년 뒤 전원 특사로 풀려난다. 그리고 그들은 박정희 정권에서 두루 요직을 거쳤다.

 

당시에 거창 박산골에서만 희생된 사망자는 719, 그 중 15살 이하 어린이가 절반이 넘은 364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희생되었던 박산골은 3년간 출입이 통제되었다. 통제된 기간 동안 학살을 자행한 군인들은 작은 유골 100여구를 몰래 빼어나 다른 곳에 암매장했다.

 

거창학살 사건의 희생자 가족들은 유족회를 결성하여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여 집단분묘를 만들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정권에서는 거창학살 희생자 유족회를 반 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전부 구속한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 때 거창 사건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거창 양민학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땅의 역사 2권은 1권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내용이 많이 있다. 친일파에 대한 분량도 상당하며, 정권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민초들에 대한 부분도 상당하다.. 

 

TV조선에서 방영된 '땅의 역사'에서 거창 양민학살에 대하여 조명했을 때, 박종인 기자의 울분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마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거창 양민학살사건, 여순 양민학살사건, 정권에 의해 빨갱이로 규정되어 억울하게 죽어간 양민학살 사건을 본다면 아마... 그래서, 너무 잔혹하고 믿고 싶지 않아서, 국민을 지켜야할 국가가 자행한 일이라는게 너무 충격적이라 기억속에서 지우고 싶은 걸 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때의 국가의 모습은, 국민을 학살하던 국가의 모습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본과 다를바가 없었기에... 일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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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역사 1 - 소인배와 대인들 땅의 역사 1
박종인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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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가 팔아먹은나라, 우리가 찾으리라

19193,1운동 이전의 유림들이 일으켰던 의병운동은 오로지 조선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막기위한 의병운동이었다. (일부 제외조선의 양반네들은 성리학의 정신이 담긴 상투와 복식을 버릴 수 없었고, 한 나라의 국모를 죽인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을미년에 의병을 일으킨다. 하지만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자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무엇보다 양반출신 모 의병장은 평민출신 모 의병장을 살해하였고, 또 다른 양반출신 모 의병장은 동학농민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려 평민출신 의병을 죽였다.


191010월 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천황의 은사금을 지급했다. 500년간 조선의 이념을 지배한 성균관은 폐지됬다. 19116월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황국 유학을 가르치는 경학원이 설립되었다. 경학원의 수장은 유림들이었다.


1919(기미년) 31일 탑골공원에서 울려퍼진 기미독립선언서, 그곳엔 각종 종교단체의 사람들이 참여를 하였다. 하지만 그 속에 유교를 믿는, 성리학을 공부하던 유림들은 없었다. 그리고 유림 중의 유림, 선비 김창숙은 이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이후 김창숙과 그의 고향인 봉화 바래미마을 유림들을 포함하여 주변 영남지방의 유림들이 함께 들고 일어났다. 나라를 팔아먹는 줄만 알았던 조선의 양반네들이 아닌, 자국의 독립을 위해 행동을 하는 유림들이 나타난 것이다.


안동의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고성 이씨 가문을 비롯하여 김동삼과 의성김씨 가문, 영덕의 무안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등등 혼맥으로 얽히고 섥킨 경상도의 유림들이 독립을 위하여 만주로 떠났다. 서울에서는 명문가 집안이었던 이회영 6형제가 만주로 떠났다그렇게 그들은 만주에서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었고, 이는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역사의 시작이었다. (신흥강습소 - 신흥무관학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받쳤던 그들의 죽음은 나라에서 잊혀져 갔다이회영 6형제 중 첫째 이건영은 병으로 죽었고 둘째 이석영은 굶어죽었다. 셋째 이철영 역시 병사했다. 넷째 이회영은 일제 감옥에서 죽었다. 여섯째 이호영은 아들과 함께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다섯째가 이시영 만 유일하게 살아남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만주에서 투쟁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 등으로 넘어가서 병사 내지 굶어죽었다. 이상룡 역시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자유로운 나라에서 이 만큼 살수 있었던 것인데, 그 누구도 그들의 죽음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말 슬플 따름이다.


2. 제주에서 닫혀버린 세상을 향한 문

조선에서는 조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혹은 그럴만한 개혁성향을 갖고 있덨던 왕 혹은 왕자가 있었다. 왕이 었으나 조카 인조에 의해 폐위된 광해군, 그리고 세자였으나 아버지 인조의 못난 질투심에 의해 독살당한 소현세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둘은 동일한 사람,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광해군은 망해가는 명나라, 뜨고 있는 청나라 사이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한 외교 즉, 실리외교를 택했다. 광해의 외교정책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의 7년 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 힘쓸 수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외치던 서인세력과 조카 인조에 의해 광해는 왕위에서 쫒겨난다. 광해의 처자식은 죽었으며, 광해 혼자만이 땅 끝에 있는 유배지, 제주도까지 오게 된다. 그리고 18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제주도에서 6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는 명에 사대하는 정책, 친명정책을 펼쳤다. 당연히 청은 오랑캐므로 배척한다. 이러한 그의 선택은 조선 땅에 또 한번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청나라에 의해 조선 땅이 유린당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이때는 나라를 지킬만한 의병과 장수들도 거의 없었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받쳤고 겨우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당대의 왕 선조에 의해 대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인조의 아들들은 볼모로 잡히어 청나라로 끌려간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새로운 문물을 습득한다. 성리학만이 최고라 생각했던 조선의 왕자가 새로운 문명을 두 눈으로 보고 온 것이다. 그는 조선에 돌아와서 조선을 개혁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잘난 아들에게 못난 마음을 품었던 아버지,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심지어 소현세자 뿐 아니라 그 가족이 풍비박살 난다. 인조는 자기의 며느리이자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을 죽인다. 또한 손자이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낸다. 심지어 두 아이는 제주도에서 죽었다. 막내아들만 겨우 살아남아서 효종 때 복권된다(효종: 인조의 차남, 소현세자의 동생. 말로는 북벌북벌했으나 현실상 불가능. 결국 왕을 비롯 조선의 양반네들은 정신적인 북벌로 노선을 돌린다. 일명 정신승리)


그리고 마지막, 제주도에 굴러 온 조선이 바뀔 수 있는 마지막 기회.

1653년 네덜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던 상인, 하멜의 배가 제주도에 표류하면서 수 많은 서양의 문물이 제주도에 들어왔다. 당시 서양의 최첨단 항해술, 무기술, 신종 화약품, 그리고 기술자들이 떼거지로 조선의 품안에 떼거지로 굴러온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에 사로잡힌 조선에게 서양사람들은 그저 구경거리였고, 죄인이었다. 조선은 그들을 강진, 여수 등을 옮겨가며 막노동꾼, 일종의 관노비로써 굴렸다. 그렇게 조선에서 고된 삶을 살던 하멜은 조선관리인들이 느슨해진 틈을 타 일본 나카사키로 탈출했다. 일본은 하멜 일행에게 조선의 많은 정보를 얻는다. 조선의 군부대 배치현황, 경제, 풍습, 종교, 기타 등등.... 일본 관리인들이 하멜 일행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13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우리는 조선에서 잡초제거, 뗄감 베어오기, 양반집 구경거리그리고 먹을거리를 구걸하는 것이 전부였소


어리석은 조선은 변화할 마지막 기회를 잃었고, 일본은 조선의 모든 것을 꿰뚫며 그 날을 위해 착착 준비했다. 그리고 1876년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었으며, 강화도에서 최초의 불평등 조약 <조일수호조규>를 맺는다.

 

3. 무주 제1경 나제통문의 비밀

무주 구천동에는 아름다운산과 계곡이 있다. 구천동 33경이 그것이다. 그 곳에는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기에 위해 지나갔다는 아치형 굴, 나제통문이 있다. 지자체에서는 이 스토리를 널리 널리 광고하였고, 나제통문은 관광명소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그냥 관광객 모으려고 근사하게 나제통문이라, 내가 이름 붙인거지. (중략)

그런데 역사로 기록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군청에 가서 이야기했지, 이건 잘못된거라고. 그랬더니 이러더라고 ?

-알지만 관광이에요. 여기가 경상도에서는 수학여행길이에요백제를 평정할때 김유신이 여기로 지나갔다고 해야지요여기를 1925년도에 뚫었다고 하면 안돼죠.


그렇게 무주 구천동 계곡, 이 곳을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 그저 한 일반인이 지었던 이름 나제통문 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 있던 문,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지나왔던 문이 되었다. 신라와 백제의 전쟁으로 인해 붉게 물들었다는 그럴듯한 이야기 까지 덧붙여졌다. 역사왜곡은 이렇듯 번갯불에 콩 볶듯, 손 쉽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왜곡된 역사는 아직까지도 바로 잡지 못하였다.


4. 책의 마지막은..

책의 마지막은 친절하게도 박종인 기자님이 다녔던, 각 답사지의 주소가 나와있다. 일부는 지금도 유명한 관광지이고 일부는 그 고장 사람도 겨우 내력을 알만한 그런 흔적들이 남은 땅이다. 책을 읽을 때 만해도 "여긴 또 어떻게 찾아가지 ㅠㅠ" 이랬는데, 이렇게 사적지 주소를 알려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정말 난 그 어떤 사학자, 교수님들보다 박종인 기자님의 기록들이 더 맘에 와닿는다. 그리고 나의 여행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고내가 원하는 역사가 담겨있는 여행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으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역사, 그 지명이 남아있는 유래, 이 땅에서 살았던 촌부들의 이야기겉으로 나와 있는 역사가 아닌, 속에 감춰져있는 역사를 이렇게 알려준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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