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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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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의 대단한 업적은 그의 저서를 실제로 읽은 바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아마 다들 익히 들었을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엮인 문장들이 반성적 운동을 촉발하고 사회적 시선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랍지 않은가. 물론 그 알맹이가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을 말하는 참신한 방식 또한 내용의 측면을 떠나서 누누이 회자되곤 했다. 하물며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생활에서 우선순위가 밀려난 환경의 문제를 생태학적 관점에서 다루었다고 하니 저자의 화법에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책이 분야별 전문가가 지닌 지식이 일반 대중의 인식에 스며들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찌감치 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저자의 고백을 듣긴 했지만, 물리학과 화학이 생물학의 근원이라고 여겼던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했을 때 인간들이 공통으로 향유하고 있는 어떤 정서를 끌어낸다는 점은 그녀의 '말하기'가 더욱 빛나는 이유다. 집 앞에 있는 나무와 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들로부터 생태적인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문가로서의 책임 의식을 갖고 과감하게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부드럽게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덧 고전이라 불리고 있는 이 책이 실토하고 있는 반세기 전의 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들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다. 저자뿐만 아니라 많은 전문가들이 환경의 문제에 대해서 경고를 꾸준히 했으나 그에 따른 약간의 변화가 갖가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새로운 문제를 당췌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규정에 따라 쓰레기 분리수거도 철저히 하고, 약간 비싸지만 환경을 생각한 제품을 이용하지만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보다 더 폭발적으로 환경을 괴롭히는 것들을 나도 모르는 새 하고 있을 터. 그런 점에서 레이첼 카슨의 경고는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침묵의 봄을 알리는 소리는 잠시라도 멈춰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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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지 않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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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세계인권 선언문을 집필하기 위한 2048 프로젝트의 모든 것이다. 선언의 목적과 의의, 운동의 과정과 절차, 참여의 안내와 방법까지 한 사회운동의 내일을 향한 어제와 오늘이 녹아 있다. 일단 책의 구성이 운동의 흐름과 닮았다. 누구나 인권을 말할 수 있다고 분위기를 잡고, 운동의 역사에 대해 나처럼 무지한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천천히 설명하고,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에 대해 분명하게 분석하고, 독자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능력에 부합하는 실천을 요구한다. 마지막에는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함께 움직일 사람들을 위한 내용도 자세히 덧붙인다. 인권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책이나 방송이 으레 그렇듯 그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내용은 아니다. 사회가 바뀌고 세상이 뒤집어져도 변치 않는 것은 인간의 권리가 아닌가. 그래서 이 운동은 소중하고 이 선언은 중요하다. 인권선언 100주년이 되는 2048년까지 법정에서 집행력을 갖는 세계인권 선언문을 만드는 데 부정적인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책에서 나오는 내용처럼 우리는 눈만 돌리면 인권이 부서지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귀만 세우면 인권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 운동을 촉구하는 움직임은 반가운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 자체로 상당한 의의가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책으로서의 가치를 논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사회운동을 서술한 책을 거의 접한 적이 없어서 내용 외에 달리 평가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적어도 이 책의 목적과 관련해서 논할 수는 있다. '왜 분노하지 않는가'라는 제목은 실천을 촉구하는 저자의 강력한 제의를 나타내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인권 문제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던 사람이 마음 속에서 어떤 분노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다. 누구나 인권을 말할 수 있고(말해야 하고), 5가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누려야 한다). 그런데 정작 그것이 왜 필요한가를 언급한 부분은 너무 일반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느낌이다. 연구 결과나 자료 조사가 뒷받침되어야 더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건 다른 책에서 충분히 논의된 터라 굳이 여기서 재차 반복할 이유야 없겠지만, 프로젝트의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혹은 '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반박한다 → 그렇다면 나는 이런 식으로 답할 수 있다'와 같은 서술은 그 내용이 모두 적절하고 합당하다고 할지라도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이는 저자의 사적인 의견이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게 아니고 독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데서 그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왜 분노해야 하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도 저자의 그것처럼 들끓게 해야만 프로젝트가 훨씬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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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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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기원을 새롭게 탐색한 이 책은 인민이 통치의 객체이자 교화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조선 사회의 기본적 명제가 유효성을 상실한 시점과 그 역사적 배경에 주목했다. 기존의 연구들이 인민을 역사의 주체로 편입시키지 않은 데 따른 아쉬움을 적잖이 토로하면서(1) 자신의 연구가 나아가는 길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그래서 정조가 급서한 이후 19세기 초반 즈음에 통치의 삼중 구조가 이완되고 와해되었다고 판단하고, 그때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것을 간략히 풀자면 다음과 같다. 노론 세력에 의해 장악된 세도 정치는 곧 지식과 권력의 분리를 야기했다. 유교적 통치 이념으로 굳어져 지배 구조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했던 지식-권력 사이에서 생긴 균열은 조선 사회의 질서를 붕괴시켰다. 근대적 요건은 그렇게 성립되었지만 근대의 형성은 지체되었다(2). 그것은 조선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특성 때문이다. 명청 교체기에 그것이 더욱 심화되어 이학에 경도된 태도를 보였다. 주자학적 해석의 계승과 발전에 치중한 것이다. 그러한 조선 지식계의 관념론적 경향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근대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어도 그 내막에 관해 자세한 사항은 모르는 터라 이 책의 이야기가 과연 새로운 내용인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다만 저자의 연구가 보통의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내용인가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일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쉽게 설명하고 있다. 수많은 참고 문헌의 내용을 언급하면서도 딱딱한 연구처럼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이야기를 부드럽게 잇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서론과 결론을 적당한 분량으로 구성하여 연구 목적과 결과를 명백하게 밝히는 것도 낯선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조선의 백성이 현대의 시민으로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답을 찾는 것은 이 한 권의 책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포괄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후속 연구에서는 평민 담론장이 새로운 지식 체계를 만들어내는 상황부터 '인민의 탄생'을 이어갈 것이라고 한다.

 

 

(1) p.374~375

해방 후 많은 역사학작들이 근대의 맹아를 찾아냈고, 보부상의 활동에 주목하여 상업의 발달과 시장 형성에서 그 단서를 발견했다. 사회사 분야에서는 신분 질서의 붕괴를, 민중사에서는 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민란을 근대의 계끼로 보았으며, 정치사에서는 민국 이념을 새롭게 해석하고 통치 원칙을 수정하려 했던 군주의 시도와 제도 개혁을 강조했다. 사상사 분야에서는 주자학적 사고 체계로부터 과감한 이탈과 지식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을 괴했던 실학을 근대 찾기의 전면에 위치시켰고, '근대는 민족'이라는 등식하에 민족의 발견과 민족주의 사상의 궤적을 근대의 표상으로 정립했다. 내재적 발전의 요인들을 찾아내려는 이런 시도들은 방법론적, 인식론적 관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후세의 연구자들에게 과거 식민 유산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해 주고 나아가서는 제국주의와 대등한 입장에서 비교론적 연구를 해 나갈 수 있는 단단한 교두보를 만들어 주었다. 근대 찾기에 나섰던 연구자들의 소중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발견한 요인들은 조선 사회를 500년 동안 유지 존속시켜 왔던 가장 중요한 골격의 한 단면이나 부분을 언급한 것에 그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2) p.378~379

지식 권력이 독점 권력으로 바뀌는 것, 권력에 새로운 지식이 수혈되지 않는 것, 학문을 달리하는 지식인이 권력자가 되는 기회가 차단된 것은 모두 조선의 지식 사회적 본질을 바꾸는 가장 중요한 동인이었다. 지식-권력의 일체화라는 중세적 요건, 또는 '조선은 곧 지식 사회'라는 등식을 떠받친 원리가 와해되는 틈새로 종교, 문예, 정치 영역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평민 담론장'이 고개를 들었다. 역으로 지식인 공론장 내지 양반 공론장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중략)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와서야 비로소 인민의 위상 변화와 천부적 권리가 평등주의적 세계관에 표명될 수 있었다. 양반 공론장에는 이보다 조금 늦게 1880년대 개화파에 의해 천부인권설이 유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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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 Dooman Riv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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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두만강 어귀에 사는 창호라는 아이가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주인공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야기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그의 죽음은 지속적으로 암시되고 있지만, 그 선택과 판단이 뒤늦게 그것도 별안간 이루어지는 터라 사태를 관망하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의미가 영화의 세계에서 어느 정도 수긍된다고 하더라도 인물의 세계에서 충분히 납득된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 순교의 책임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닌지 따져 묻는 어느 평자의 사려도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람들은 대체로 창호의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인다. 그것을 어떤 확신의 단계 앞에 오는 머뭇거림이라 한다면, 그 머뭇거림은 분명 윤리의 문제에서 시작된다. 나의 윤리와 영화의 윤리가 버성길 때 우리는 잠시 판단을 유보하게 된다. 그래서 창호의 죽음에 대한 윤리적인 확신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누구라도 더딜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판단의 시간을 거닐던 나는 인물의 자취를 되밟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행할 수 있나. 창호는 죽음을 택했다. 죽음이 불가피한 것은 모든 예술이 품고 있는 저 질문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창호의 죽음은 갈데없는 선택이다. 누군가는 여기서 콧방귀를 뀔 수도 있다. 강 건너편에 살고 있는 친구 하나 잃은 아이의 상심이라기엔 언뜻 도가 지나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창호의 충동은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어른들은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있어도 결코 쓰다듬을 수는 없다. 모든 개별자의 내면에 목숨의 욕망을 앞지르는 죽음의 충동이 꿈틀거린다지만 그것을 억압하는 현실 세계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오로지 창호뿐이다. 요컨대, 충동이 수렴되는 구심점에 창호가 서 있다. 두만강의 슬픈 운명에 내몰린 사람들 ─ 원치 않는 임신으로 실의에 빠진 누나 순희, 돈을 벌러 한국에 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창호의 엄마, 두만강을 다시 건너는 게 한평생 소원이라는 마을 할머니, 위험을 감수하고 탈북자들을 돕다가 결국 쇠고랑을 차는 동네 아저씨, 내일이 없는 듯 술만 퍼마시는 이웃 어른들 등의 고통이 그의 어깨를 조용히 짓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창호의 몰락은 슬프다. 투신의 행위가 슬픈 것이 아니라 투신의 결단이 슬프다. 창호는 지붕의 벼랑으로 한 치의 주저 없이 성큼성큼 발을 내딛으면서 얼어붙은 눈동자들이 기어이 아찔한 하향 곡선을 그리게 만든다. 적어도 그 적막의 찰나에는 창호의 몰락에 대한 어떤 맹문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영화가 사건의 심리적인 동기만 심어 놓은 것도 그 기묘한 감정이 어떤 설득을 이룰 것이라 믿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시하는 그 모든 행위로부터 영화적인 기운이 탄생한다(고 나는 믿는다). 영화 속에서 그 기운은 마침내 평소에 말을 하지 못했던 순희가 창호의 이름을 힘껏 외치는 것으로 발산된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 놓인 듯한 순희가 마지막에 내지르는 그 억색한 고함은 창호(아이)의 윤리가 영화(어른)의 윤리로 스며드는 모종의 신호일지 모른다. 이는 윤리가 발생하는 순간의 어떤 증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현실의 거울이되 현실 자체를 담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이 현실과의 긴장을 담고 있다.

 

몰락의 마지막 얼굴은 순희의 그림이 할머니의 소원에 포개어지는 것으로 종적을 감춘다. 우리는 영화가 문을 닫기 직전에 다리를 건너는 할머니를 보면서도 상상적 공간으로 이끈 창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파란 하늘을 담은 강물에 파란 잠바를 입은 창호가 들이젖는다. 아마 봄이 오면 유빙처럼 그의 영혼도 어디론가 떠내려가겠지. 그렇다면 장률 감독은 그 땅의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어떤 경계에 선 인물을 줄기차게 응시했던 그가 자신의 고향을 이야기하는 것은 짐작하건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물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도 어쩐지 신중하다. 그러나 두만강의 미래를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결국 그 땅에 살고 있는 창호의 현재를 다르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라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불가능성 앞에 있는 가능성을 염원하고 가능성 뒤에 있는 불가능성을 체감하는 창호의 혼란스러운 세계에 드리운 몰락에 취해 얼마간 나는 헤어나지 못했다. 아무려나 두만강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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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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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경제의 역사를 부채의 관점에서 힘차게 써나간다. 딱 중간 지점에서 책을 반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것을 전반부(1장-6장)와 후반부(7장-11장)로 분리한다고 해도 크게 무리가 아닐 것이다. 마침 그 지점에서 전반부를 정리하고 후반부를 소개하는 대목(1)이 등장한다. 전반부에서는 부채를 관점으로 역사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우선 그 의식의 전환을 집요하게 유도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그것을 바탕으로 세계의 경제를 시간 순서대로 정리 분석하고 있다. 비교적 긴 전반부가 후반부에 대한 설득력을 좌우하는데, 저자는 역사를 증언하듯 구체적인 자료와 진술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잘 이끌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경제의 역사를 다소 벗어날 때가 있다. 부채의 관점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데로 빠지는 것이 다소 거슬린다(물론 그것은 저자의 연구가 얼마나 깊고 넓었는지 짐작케 한다). 하나같이 흥미로운 이야기라 읽는 데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논지의 중심으로 다시 돌어오기 위해서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인상을 풍겼다. 새로운 관점을 피력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나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는 것처럼 핵심적인 내용은 딱딱 짚고 넘어갈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중에서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건, '물건의 교환'에 따른 인간의 감정(2)과 '딸들의 시장'이라 요약할 수 있는 여성 상품화의 기원(3)이다. 부채의 약속은 타락한 약속이라는 주장을 줄기차게 하고 있는 저자의 생각을 그 물물교환의 에피소드에서 쉽게 읽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 교환의 대상이 물건에서 여성과 노예에 이르는 과정을 치밀하게 기술한 부분은 여성의 역사와 맞물려 인상적이었다.  

 

 

(1) P.371

우리는 부채의 본질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우리는 애덤 스미스가 그린 상상 속의 사회와 부채가 아주 중요한 어떤 비전 사이에 갇힌 것 같다. 애던 스미스가 그린 사회를 보자, 그 사회에 사는 개인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관계는 소유물과의 관계이다. 개인들은 상호 편의를 위해 서로 물건을 교환하면서 행복해 한다. 그 그림엔 거의 언제나 부채는 배제된다. 그런 개인들의 집합체가 애던 스미스의 사회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부채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이 부채로 집약되고 있다. (중략) 나는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런 방식을 취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인간경제라는 개념을 떠올렸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경제에서는 인간 존재와 관련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경제에서는 그 어던 존재로 다른 어떠한 물건이나 사람과의 등가일 수 없다. 거기서는 돈이 인간 존재를 사거나 거래하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 오직 돈은 상환 불가능한 빚을 졌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2) P.189

선물교환의 변형은 무수히 많다. 가장 낯익은 것이 맞교환 형식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맥주 한을 사준다. 그러면 다음에는 그 사람이 나에게 맥주를 사준다. 완벽한 등가는 평등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복잡한 예를 보자. 내가 친구에게 멋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사준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 그 친구도 똑같이 나를 대접한다. 인류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관습의 존재는, 특히 그 호의를 진정으로 갚아야 한다는 감정은 표준적인 경제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경제이론에서는 모든 인간의 상호작용은 종국적으로 비즈니스 거래이며, 또 우리 모두는 최소의 노력이나 비용으로 가장 많은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로 보지 않는가. 그러나 이 감정은 꽤 현실적이며,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면서도 체면을 차리려는 사람들에겐 상당한 긴장을 초래할 수 있다. (중략) 호의를 베푼 사람이 지위나 품위 면에서 자신과 대충 비슷한 사람, 예를 들어 동료였다면 그 교수가 작아지는 느낌을 받을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만일 빌 게이츠나 조지 소르스가 만찬에 초대했다면, 그는 자신이 정말로 공짜로 무엇인가를 받았다고 결론을 내리며 그 선에서 만족할 것이다. 만일 알랑거리는 부하 교수들이나 야심 넘치는 대학원생이 그와 똑같은 초대를 했다면, 그 교수는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호의를 베풀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3) P.333

나는 모든 위대한 도시 문명에서 여성들의 자유가 갈수록 축소된 현상에 대한 설명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도시 문명들 안에서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략) 가난한 채무자들의 딸들이 매음굴이나 부자들의 부엌으로 보내지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어떠한 경우든 딸들에게 더 무겁게 떨어지는 '상품화'의 압박과 여자들이 '상품화'의 희생이 되지 않도록 보호할 아버지의 권리를 재확인하려는 노력 사이에서, 여자들의 형식적 및 실질적 자유는 점진적으로 제한되고 줄어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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