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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근대의 기원을 새롭게 탐색한 이 책은 인민이 통치의 객체이자 교화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조선 사회의 기본적 명제가 유효성을 상실한 시점과 그 역사적 배경에 주목했다. 기존의 연구들이 인민을 역사의 주체로 편입시키지 않은 데 따른 아쉬움을 적잖이 토로하면서(1) 자신의 연구가 나아가는 길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그래서 정조가 급서한 이후 19세기 초반 즈음에 통치의 삼중 구조가 이완되고 와해되었다고 판단하고, 그때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것을 간략히 풀자면 다음과 같다. 노론 세력에 의해 장악된 세도 정치는 곧 지식과 권력의 분리를 야기했다. 유교적 통치 이념으로 굳어져 지배 구조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했던 지식-권력 사이에서 생긴 균열은 조선 사회의 질서를 붕괴시켰다. 근대적 요건은 그렇게 성립되었지만 근대의 형성은 지체되었다(2). 그것은 조선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특성 때문이다. 명청 교체기에 그것이 더욱 심화되어 이학에 경도된 태도를 보였다. 주자학적 해석의 계승과 발전에 치중한 것이다. 그러한 조선 지식계의 관념론적 경향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근대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어도 그 내막에 관해 자세한 사항은 모르는 터라 이 책의 이야기가 과연 새로운 내용인지 확신하기는 어렵다. 다만 저자의 연구가 보통의 독자들에게 의미 있는 내용인가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일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쉽게 설명하고 있다. 수많은 참고 문헌의 내용을 언급하면서도 딱딱한 연구처럼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이야기를 부드럽게 잇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서론과 결론을 적당한 분량으로 구성하여 연구 목적과 결과를 명백하게 밝히는 것도 낯선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조선의 백성이 현대의 시민으로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답을 찾는 것은 이 한 권의 책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포괄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후속 연구에서는 평민 담론장이 새로운 지식 체계를 만들어내는 상황부터 '인민의 탄생'을 이어갈 것이라고 한다.
(1) p.374~375
해방 후 많은 역사학작들이 근대의 맹아를 찾아냈고, 보부상의 활동에 주목하여 상업의 발달과 시장 형성에서 그 단서를 발견했다. 사회사 분야에서는 신분 질서의 붕괴를, 민중사에서는 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민란을 근대의 계끼로 보았으며, 정치사에서는 민국 이념을 새롭게 해석하고 통치 원칙을 수정하려 했던 군주의 시도와 제도 개혁을 강조했다. 사상사 분야에서는 주자학적 사고 체계로부터 과감한 이탈과 지식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을 괴했던 실학을 근대 찾기의 전면에 위치시켰고, '근대는 민족'이라는 등식하에 민족의 발견과 민족주의 사상의 궤적을 근대의 표상으로 정립했다. 내재적 발전의 요인들을 찾아내려는 이런 시도들은 방법론적, 인식론적 관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후세의 연구자들에게 과거 식민 유산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을 부여해 주고 나아가서는 제국주의와 대등한 입장에서 비교론적 연구를 해 나갈 수 있는 단단한 교두보를 만들어 주었다. 근대 찾기에 나섰던 연구자들의 소중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발견한 요인들은 조선 사회를 500년 동안 유지 존속시켜 왔던 가장 중요한 골격의 한 단면이나 부분을 언급한 것에 그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2) p.378~379
지식 권력이 독점 권력으로 바뀌는 것, 권력에 새로운 지식이 수혈되지 않는 것, 학문을 달리하는 지식인이 권력자가 되는 기회가 차단된 것은 모두 조선의 지식 사회적 본질을 바꾸는 가장 중요한 동인이었다. 지식-권력의 일체화라는 중세적 요건, 또는 '조선은 곧 지식 사회'라는 등식을 떠받친 원리가 와해되는 틈새로 종교, 문예, 정치 영역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평민 담론장'이 고개를 들었다. 역으로 지식인 공론장 내지 양반 공론장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중략)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와서야 비로소 인민의 위상 변화와 천부적 권리가 평등주의적 세계관에 표명될 수 있었다. 양반 공론장에는 이보다 조금 늦게 1880년대 개화파에 의해 천부인권설이 유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