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의 0 영 zero 零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체득하고 견지하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적 화자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 개인적으로 아직 사람에 크게 데여본 적이 없는데 주변이나 미디어에서 전파되는 얘기를 들어보면 정말 이기적이고, 타인의 심리를 조정하는 가스라이팅에 능한 사람(주로 애인, 친구, 가족 같이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에 의해 영혼에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는 일화를 흔히 접하게 된다. 자기애와 자존감이 강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폭력에 별다른 도덕감정과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소설 화자와 좀 거리가 있긴 하지만 상대방보다 자신이 우위에 서는 관계에서 위로와 연민, 동정을 보내며 우월감을 향유하다가 힘의 관계가 역전되고 나니 열등감을 못 이기고 관계를 ‘손절‘해버린 사람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신 블로그 이웃 분이 겪은 사건이 떠올랐다. 어렵고 힘들 때 곁을 지켜주는 친구가 진짜배기라는 말이 있지만 이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성장과 성취, 성공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하해줄 수 있는 사이-관계, 상대방의 기쁨을 내 기쁨처럼 공유할 수 있는 ‘팬심‘이랄까 -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에서 이런 순수한 팬심-애정을 유지하고 키워나간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다. 배신당하거나 파괴되지 않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도 자아의 안전 지대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에 납득이 되었다. 나도 어느 정도 그런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완전히 발거벗은 취약한 상태에서 타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돌봄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선다. 그런 ‘자기통제력‘에 대한 불안-강박을 넘어서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넘어설 수 있는 초월로서의 사랑을 추구하고 싶은 욕구가 있음에도 ... 정신이 무너져 고생했던 경험이 떠올라 주저하게 된다. 그러니 사랑과 의존, 돌봄과 우정, 마음에 대해 공부할 것이다 계속.



인간 사냥꾼이랄까, 아니면 흡혈귀 같이 타인을 착취하는 인물의 내면을 심리스릴러적 문법으로 풀어내 일단 재미 있었다. 황예인 평론가와의 대담을 읽고 나니 본문을 천천히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기회가 닿을지 모르겠다. 예전에 읽은 <천국에서>와 비교했을 때 경향이나 분위기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실제로 이 텀 동안 작가가 미국에 체류하며 번역을 하며 생활했다는 전기적 사실도 존재한다) <N.E.W>도 읽어봐야겠다.



-존 후퍼의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 코너 중 ‘책 읽는 의자‘에 소개된 적이 있는 책. 이탈리아 여행을 대비할 겸 이탈리아의 역사와 문화, 지리, 음식 등을 다룬 책을 찾다가 권은중(마찬가지로 <조용한 생활>에서 김혜리 기자님과 음식과 요리, 먹는 일을 다루는 코너를 맡아주셨던) 님의 <볼로냐, 붉은 길에서 인문학을 만나다>의 다음 타자로 존 후퍼의 책을 골랐다. 권은중 기자님의 책은 연재한 글을 단행본으로 묶은 영향에서인지 반복되는 부분이 많은 점은 아쉬웠지만 기본적으로 ‘볼로냐‘라는 매력적인 도시를 중심으로 음식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주셔서 입문자가 읽기에 딱 안성맞춤인 책이었다. 그에 비해 <이탈리아 사람들이라서>는 좀 더 서술의 무게감과 깊이감이 있는 편이다. ‘가족‘을 중시하고, ‘음식‘에 정말 진심이고(이 둘은 강한 상호관련성을 띤다. 저녁이면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루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일상의 의례를 중요시한다고), 가톨릭의 영향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고, 정치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혼란스러우며, 행정과 법이 복잡하여 효율성이 떨어지고, 겉모습-패션과 치장에 열심이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고 제스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남북 문제‘라는 고유의 모순을 안고 있는 나라. 부제대로 지나치게 매력적이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이탈리아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 동안 접했던 이탈리아 문학, 영화에 대해 뒤늦게 이해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현실과 환상(판타지아)의 경계가 확실치 않고, 진실verite이 단일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 상대적인 버전으로 복수의 진실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 이런 일반화에는 항상 오류의 위험이 따르고, 또 저자의 포지션이 영국 출신으로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탈리아 란 걸 감안하고 수용해야겠지만 - 예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는데 다시 읽으며 새삼 신기했던 부분은 이탈리아식 ‘기사‘의 문체와 형식. 일반적으로 ‘기사‘하면 정확한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서술한 글을 연상하겠지만 이탈리아의 기사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성이 강하다고 한다. 핵심 정보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고 초중반부에 썰을 많이 푼다고...



관심 있는 나라를 이런 식으로 다룬 책을 좀 더 읽고 싶어졌다. 일단은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정도.



-녹색 계급의 출현



<지구에 착륙하는 방법><나는 어디에 있는가?>에 이은 라투르의 생태정치학 저작들. 이음 출판사에서 내는 과학잡지 <에피>에 ‘인류세‘ 코너도 있고, 박범순 카이스트 인류세 연구센터장의 글도 자주 실리는데 라투르의 근작들도 이음에서 발빠르게 번역돼서 참 고무적인 부분이다. <녹색 계급의 출현>은 라투르와 슐츠(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동 작업을 했듯)가 쓴 녹색 ‘공산당 선언‘ 같은 책이었다. 인간과 비인간의 구분, 위계를 철폐하고 ‘지구생활자‘라는 새로운 주체를 제시했던 라투르는 이 책에서 ‘신기후체제‘의 파국적 위기에 맞서 대항할 주체화의 계기로 ‘계급‘을 (재)소환한다. 근데 여기에 ‘녹색‘을 곁들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생산력주의에 갇혀 있었고, ‘진보‘ ‘발전‘ ‘풍요‘ ‘확장‘의 구호가 아닌(이를 통한 해방은 공멸적 파괴와 다른 생명체에 대한 파괴와 착취에 기반하는 것이 되어 진정한 해방일 수 없기 때문에) 지구의 거주가능성-생존가능성을 보존할 수 있는 ‘감싸기‘의 생태정치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메모 형식이라 시론적, 선언적 성격이 강한데 오히려 그래서 사고를 촉발시키고 연결시키는 면모가 크기도 하다. 네 편의 해설 모두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견지하여 이 선언문을 어떻게 활용/사용할 지에 대한 방향을 잘 제시한다. 선언문이라 그런지 읽다 보면 가슴이 웅장해지는 모먼트가 존재한다. 박동수의 <철학책 독서 모임>에 제시된 <숲은 생각한다> <반려종 선언> <부분적인 연결들> 포스트휴먼, 신유물론, 과학기술학 저서 리스트로 공부를 이어가면 참 좋을 텐데... 혼자 읽기엔 좀 빡셀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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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 한 사람만을 위한 서점
정지혜 지음 / 유유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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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혜의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 한 사람을 위한 서점>(이하 사적인 서점)이란 책이 있다. 출판편집자에서 땡스북스 서점 직원으로, 땡스북스 점원(스태프)에서 팝업스토어 운영자로, 팝업스토어 운영자에서 서점 운영자로 ‘서점인‘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정지혜 씨의 여정을 기록한 에세이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기 위해,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생존할 수 있는 모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편의 성장소설 같기도 하고,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 열정과 진정성으로 도전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는 청년의 자서전(자기계발서의 성격이 살짝 가미된)으로 읽히기도 했다. 정지혜 님이 운영한 ‘사적인 서점‘은 이용자에게 맞춤형 책을 추천해주는 곳이었다고 한다. 예약제로 운영되며 사전에 간단한 설문-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독자인지 드러낼 수 있는 자기소개 내용을 채워야 하는-을 진행하고, ‘인터뷰이‘에 대한 사전조사를 마친 정지혜 님은 서점 방문자와 대화(때로 상담적 성격이 강화되곤 하는)를 나눈다. 그날의 대화를 바탕으로 이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을 선별하여 편지와 함께 보낸다(사실상 선물하는 거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수고에 비해 너무 적은 비용을 받으셨다고 생각한다).



책을 좋아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심정으로 방황하던 시절, 그러니까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으나 논문의 진도를 진척시키지 못해 답답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 이러다가 정신병 걸리겠다 싶어 시작한 달리기에 취미를 붙여 JTBC에서 주최한 마라톤대회 10km 코스를 완주하고(이때 최고기록을 찍었다. 46분) 알라딘 중고서점 잠실 롯데월드타워점에서 이 책을 읽었다. 그렇다. ‘책을 좋아한다‘는 ‘술을 좋아한다‘는 말만큼이나 별다른 정보를 내포하고 있지 않은 말이었다.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일을 좋아한다고, 사회적 연결망을 확장하고 느슨한 공동체의 연대를 구성하는 작업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을 때 저자, 독자, 편집자, 마케터(묶어서 출판인), 북튜버, 서점인, 서평가, 비평가 ... 어느 필드에서 어떤 플레이어로 활약하면 좋을지, 어떤 포지션에서 가장 최상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지 해보기 전에 알기 힘들다. <사적인 서점>은 저자가 필드에 나와 자신을 가장 가슴 뛰게 만드는 일이 결국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일 거라는 믿음 혹은 신념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그야말로 청춘의 기록. 이제는 냉소나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정말 순연한 사랑과 용기로 똘똘 뭉친.



이제 장병 소원 성취 프로젝트가 1주일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구상 단계를 건너뛰고 작성 단계로 넘어가자고 생각하던 시점에 문득 정지혜의 <사적인 서점>이 떠올랐다. ‘그래픽노블/만화 서가 만들기‘ 안이 당선 가능성의 측면에서나 개인적 만족도의 측면에서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선뜻 시작을 못하고 있던 차에 약 3년 전에 읽은 책의 아이디어를 차용해볼까 하는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친 것이었다.



정지혜 님의 사적인 서점 +김현 시인이 창비 시요일에서 연재했던 ‘시 처방전‘ + 그리고 어느 책축제에서 팝업스토어 성격으로 운영했다고 하는 ‘책 약국‘ -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책을 처방전으로 추천-선물해주는 형식. 이런 느낌으로 책 추천과 고민상담이 배합된 익명의 신청서 - ‘정말 재미 있는 소설‘ ‘로맨스 소설‘ ‘제대하고 나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이 가득한 사람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마음의 위로가 되는 책‘ -를 받고, 1주일에 한 명에서 두 명씩 책을 선물해주는 것이다. 책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는 독자, 혹은 직접 얼굴을 보고 상담이나 대화를 하긴 부담되지만 사연을 들은 사람이 한 사람을 위해 고심해서 고른 책을 받아보고 싶다는 독자를 노린 프로젝트. 정지혜 님의 ‘사적인 서점‘처럼 대면으로 대화를 나눠볼까 생각해봤지만 그러면 너무 스케일이 커져서 지속하기가 어려워질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한 번 만나고 스쳐지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대화-상담을 원하는 수요가 그리 많지 않을 거라 예상되기도 했고. 그래서 내 특기를 살려 책 추천에 모든 능력과 에너지를 쏟아부어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정지혜 님이 고민했던 것처럼 독서량이나 독서의 범위에서 부족한 면, 한계 지점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능숙하고 완벽하게 잘 해낼 수 있는 일은 재미가 없을 것이다. 도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전역하는 나 자신을 위한 책 선물을 하기. 크... 완벽하다. 다음 주부터 좀 바빠질 예정이라 시간 내에 신청서를 완성할 수 있을지 좀 걱정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으니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거라 믿는다. 앞으로는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도 기각시키기로... 데부씨의 사적인 서점 커밍 쑨(제발... 뽑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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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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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행 에세이가 땡겼다. 때마침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 <언젠가, 아마도>가 병영도서관에 꽂혀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여행할 권리>였는지 다른 책이었는지 헷갈리는데 제주도 올레길을 걷다가 휴식차 들렀던 카페에서 재밌게 읽은 적이 있어서 안심하게 선택했다. <언젠가, 아마도>는 여행잡지에 연재한 쪽글을 모아놓은 형식이다 보니 그때 읽었던 책에 비해 한 꼭지의 분량이 적어 아쉬웠다. 대서사시-대하드라마까진 아니더라도 드라마, 영화 한 편 정도의 스케일과 길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릴스 수준이었다. 하지만 짧은 분량에서도 독자의 마음을 건드리거나 생각을 자극하는 포인트를 뽑아내는 프로작가 김연수의 탁월한 솜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이 양반은 프로여행가였다.



부대에 여행 잡지 트래비가 들어왔다. 태국 방콕, 일본 훗카이도, 샌프란시스코, 튀르키예, 정원을 감상하기 좋은 국내 카페, ‘먹는 것에 진심인‘ 걸로 평가받는 호텔의 뷔페와 디저트, 국내 섬여행 등을 다룬 권호였는데 재밌게 읽었다. 예전에도 들어온 적이 있었을 것 같은데 다른 권호도 없는지 찾아봐야겠다. 읽다 보니 전역 이후 배낭여행의 행선지를 이탈리아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당시의 심정과 기분, 욕망에 따라 여행지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섬에서 혼자 삼시세끼를 찍고 싶어질 수도 있고, 유럽 대신 동남아에서 좀 여유 있고 풍족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여행 텍스트를 좀 더 읽고 싶어졌다. 여행 에세이 추천해주세요 ~~(문인이 쓴 여행 에세이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나 김훈의 자전거 여행 같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쉬움은 남지 않게>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머물 때였다. 거기서 나는 망명 작가 놀이를 하면서 지냈다.

(...) 길바닥에는 사각형 돌이 깔려 있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마차와 차와 개와, 그리고 이슬람군과 십자군과... 또 뭐가 있을까. 아무튼 그 길로 다녔을 법한 모든 것이 지나간 덕분인지 불빛을 받은 돌바닥은 유리처럼 매끄럽게 반짝였다. 밤의 골목은 차도르를 입은 소녀의 두 눈동자처럼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알바이신 언덕에는 그런 골목이 흔했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길인지라 반짝임에 이끌려 무심결에 발을 들이고선 끝까지 가보지 못하고 중간에 되돌아나오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라나다에 머무는 동안 그렇게 되돌아나온 골목이 얼마나 많은지! 거리를 헤매다가 지친 몸으로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카푸치노를 주문한다. 카푸치노 한 잔이면 충분하다. (...) 고개만 들면 거기에 밤의 알람브라 궁전이 있으니까. 내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몇 개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불 밝힌 알람브라를 올려다보는 건 꼭 그 꿈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머무는 동안 알람브라 궁전이 야간 개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생 하렘에서 인생을 보낸 이슬람 군주처럼 보름을 탕진했고,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밤의 알람브라 궁전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그라나다를 떠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저 멀찌감치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만 보면서, 마치 궁전과 후궁을 남겨둔 채 허겁지겁 도망치는 군주처럼, 마드리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중에 다시 와서 밤의 알람브라 궁전을 꼭 봐야지, 하는 초등학생 같은 다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시 왔을 때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

(29-31)



<사막조차 피로 물드는 시대의 도피처>



오래전부터 혼자서 썼다 지웠다 하는 소설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2차 진주성 전투에 관한 부분이 있다. 성이 함락되고 살육이 모두 끝난 뒤, 죽은 자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일어나 6만여 명이 살해된 풍경을 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도대체 어떤 느낌일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소설을 썼다 지웠다 할 수밖에. 이 부분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진주성을 앞으로 또 몇 번이나 더 가게 될는지.

이미 한 번 이상 본 전시물들이라고 생각하고 박물관을 둘러보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남긴 시가 눈에 띈다. 본 기억이 나지 않아 들여다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 사라지는 몸이여, 오사카의 화려했던 일도 꿈 속의 꿈이런가.‘ 분한 마음이 남아서 6만여 명이나 죽이면서 살아온 한평생이라면 여한이 없노라고 말할 것이지, 꿈 속의 꿈이었다니. 그나마 교훈 하나를 남기고 그는 죽었다. 모든 억울한 백골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 결국 그도 죽었다는 것.

(...) 오히려 나는 몸이 죽는 게 어떤 느낌일지는 알 것 같다. 서른아홉 살에 나는 사막을 처음 봤다. ˝이런 게 사막이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사막‘이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실재가 내 눈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뭔가‘가 내 눈앞에 있었다.

혼자서 몇 개의 모래언덕을 넘어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들어가니 어디를 바라봐도 풍경이 똑같아서 차라리 어떤 풍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이 나왔다. 거기 서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말하자면 내가 살던 세계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랄까. 그 느낌은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감각의 대상이 사라지는 것과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나는 구분하지 못하리라는 것. 그러므로 육신이 죽을 때,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한순간 이 세상은 사라지리라는 것.

사막이란 그런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죽음을 경험해 육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아를 버리려는 은수자들은 자발적으로 사막을 찾아갔다.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둔황에서 터키 중부까지 그들의 흔적인 석굴 유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거기서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어서야 알게 된 진실을 살아서 경험했으리라. 그래서 그런 은수자 중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긴 것이다.



(...) 악은 결코 다른 악을 제거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대에게 악을 행하거든 그에게 선을 행하여 선으로 악을 제거하라. (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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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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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2 때였나. 서로 인사는 주고받지만 단둘이 밥을 같이 먹는다거나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같은 반 친구‘와 수원역에 같이 있었다. 왜 그때 그 친구와 수원역에서 같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 들어 그 친구가 뱉었던 말이 기억나곤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건 잘못되었다. 이기적이다. AK백화점 맞은편 유동량이 많은 도로 위에서 장애인들은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된 저상시내버스를 보급하겠다고 했던 수원시장에게 약속을 이행하라고 시위를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직관적으로 친구의 주장에 반감을 느꼈으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정의감의 발로에 가까웠을 것 같다) 소수(자)의 특수한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순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논리의 편에 서지 못하고 당파성에 매몰되어 버릴 거라는 두려움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랬다. 이길 수 있는 토론, 적어도 토론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선에서 정답을 확실하게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확신이 들 때 논쟁에 참전했다. 토론과 논쟁이 ‘이기고 지는‘ 싸움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의 논리를 경합시킴으로써 더 나은 문제해결이나 생각을 도출해내는 협력적 상생적 과정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대학에서도 생산적인 토론을 해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다들 쇼펜하우어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을 체득했는지 상대방에게 꼽을 주고 모욕감을 줘서 할 말이 없게 만들거나 혹은 속에 천불을 지르는 데 도사여서 토론을 이어갈 수 없었다. 사실 두려웠다. 이성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악에 받쳐 감정이 앞서는 말을 뱉게 될까 봐, 관조적으로 이성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대상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숙고할 틈 없이 지지 않기 위해 말을 이어나가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 봐. 내게 토론은 언제부터인가 수치심과 쪽팔림, 빡침으로 점철된 극도로 감정적인 활동이 되어 있었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다고 판단되면 부당하다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반정치적, 아니 탈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을 볼 때면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이미 기존 사회의 질서에서 밀려나 동등하고 정의로운 대우를 받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취하는 것에 대해 기존 사회 질서에 부합하게끔 온건함과 무해함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얼마나 기득권만이 휘두를 수 있는 특권적 행동인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평평하고 단일하고 균질적인 땅, 현실에 실재하는 차이와 차별이 지워진 상상적 공간에서만 능력에 따른 차등적 대우, 기회의 평등을 통한 공정한 경쟁의 정의론이 성립할 수 있다. 반대로 차이와 차별을 직시하고 이를 포괄하여 동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디자인할라치면 기계적이고 납작한 공정의 논리보다 복잡하고 아름다운 정치적 상상력과 논리가 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테면 마사 누스바움이 칭했던 ‘시적 정의‘ 같은 것.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이 문장이 사실을 기술하는 기술적descriptive 수사가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이상을 제시하는 규범적normative 수사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규범, 혹은 진실로부터 거의 모든 인문학적 논의가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존엄성 테제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굳이 차별에 반대해 정의를 추구해야 할 이유가 없고, 타자를 소외시키고 착취하는 폭력에 반대할 근거도 힘을 잃을 것이다. 살짝이라도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인간과 시민의 구분(발리바르, 아렌트 등 거대한 정치철학자들이 씨름했던 문제이기도 한),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느냐 하는 고민(‘소유권‘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자유주의적 자유에 대한 비판이 숱하게 이뤄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학력/학벌과 부동산 등을 통해 표출되는 민심에서 엿보는 한국적 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 답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의 자유와 평등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일 때(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의 자유가 서로 맞부딪치는 상황) ...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간‘‘자유‘‘평등‘의 개념은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사회에서 서구-백인-이성애자-남성-시스젠더 등 정상성의 규범에 맞춰 특수하게 적용된다.

이성과 합리, 객관과 보편의 자리를 자임해온 ‘남성‘의 젠더는 곧 근대성의 젠더에 다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학술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숱하게 비판해온 로고스중심주의, 서구의 이분법적 사유 틀을 그대로 답습하여 여성혐오를 발화하고 수행하는 광경을 일상적으로 목격하며 온라인상에 매개된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내 생활세계에서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실감의 차원에서 여성혐오의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사실상 파시즘에 가까울 정도의 비관용성, 비타협성, 폭력성, 집단주의적 성격을 내장하고 있어서 파시즘을 다시 읽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평소 문학과 영화, 밈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쓰는 인친이 가끔이지만 꾸준히 파시즘 서적을 포스팅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이성의 합리적 사용을 바탕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예측하여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온 근대성의 역사에서 장애는 무엇이었을까. 장애학은 더 이상 장애가 정상성에서 뭔가가 결여되거나 손실된 마이너스의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규정된) 거라고 구성주의적 시각에서 사회적 실재로서 장애를 바라보게끔 한다. 이는 장애가 실체 없이 언어로 규정된 개념에 불과하다는 게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 장애 여부를 판별하는 척도로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능과 능력이란 게 자의적으로,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뜻이다. 일단 장애의 존재론-인식론의 기본 전제를 짚고 넘어갔으니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대상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장애인이란 존재일 텐데 <사이보그가 되다>는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과학기술과 결합한 인간의 경험과 정체성, 과학기술이 장애인과 어떻게 연결되고 결합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책이다.


다만 우리는 과학기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살아가고, (...) 인간인지 아닌지를 매일 아침 고민하지는 않지만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 ‘동등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고민한 시간은 제법 길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우리는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우리의 경험과 자기 정체성을 반추해보면서, 장애에 관한 주된 과학기술 담론이 얼마간 어떤 존재들을 더 소외시키거나 그저 소비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해 불완전하고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의 연대와 의존을 모색하는 미래의 과학기술은 무엇일지, 그 기술은 누구의 주도로, 누구를 위해서 개발되고 보급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보았다. (11-12)

사이보그라는 상징은 현실과 동떨어진 SF 이미지일 뿐이며 장애인은 자신과 확실하게 변별되는 타자라고 인식 혹은 오해에 대해 김초엽이 쓴 이 구절을 제시하고 싶다. ˝그 미래는 언젠가 노화하고 취약해지고 병들고 의존하게 될 모든 사람이 마주할 미래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40)

이렇게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학이란 인식론적 무기를 통해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서 파생된 문제들을 예리하게 묘파하여 ‘모든 이들의 문제‘로 문제의식의 지평을 확장하면서도 현실에서 소외되고 차별받고 있는 장애인이란 사회적 소수자가 어떻게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궁구한다.

현실에서 기계와 결합한 존재란 아이언 맨 슈트를 입고 하늘을 날거나 온갖 화려한 차종으로 변신하는 모빌리티를 타는 존재가 아니라, 낡은 철제 수동 휠체어를 탄 이들, 오래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배터리가 방전될까 걱정하는 이들, 3일에 한 번씩 신장 투석기에 접속하고 4시간씩 혈액의 노페물을 걸러주느라 스케줄 조정에 곤란을 겪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사이보그가 되어서‘ 스스로를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언젠가 도래할 첨단의 기계와 결합하거나 기계 없이도 ‘정상적인 몸‘이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들과 더 안전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63)

다시 이동권 투쟁을 하고 있는,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서 인정받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현장으로 되돌아가본다. 이는 10여 년 전, 장애 정의를 사유할 수 없었던 ‘장애맹‘의 독자가 언어를 갖지 못해 투쟁의 현실로부터 소외되고, 차별의 언어에 대항하지 못해 위축되었던 장소이자 현재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우리 시대의 가장 분명한 장소(104-105)‘이다. 이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들이 올리는 포스팅을 지켜보며, 장애권리운동의 현장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저렇게 되느니 차라리 죽는 걸 택하겠다는 발언을 들으며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발로 밟아본다. 어디에 서서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 땅의 지반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 대지인지를 자문해본다. 무능의 낙인을 가슴 깊이 두려워 효능감과 성과에 몰입하게 되는 세상에서 내 능력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나‘라는 독자적인 개체 단위(허구적 상상에 가깝기도 한)에 귀속되지 않는, 그러니까 언제나 관계망에서만 발현되는 능력으로 어디를 연결하고 누구/무엇과 연립할지 생각해본다.

장애인 인권운동가 김도현은 장애인운동의 목표란 자립이 아니라 연립을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지향하는 것이라면서, 이때 자기결정권(자율성)이란 ˝여러 주체들이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조율해가며 실현할 수밖에 없는 권리˝임을 강조한다. 나는 연립이라는 삶의 조건을,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협력과 연대, 연결을 넘어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타자‘와도 잇닿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타자는 나를 돕는 활동지원사이고, 안내견이고, 휠체어이며, 보청기이고, 오토박스이고, 청테이프이고, 친구들이며, 관객이고, 독자들이다.

(...) 도무지 생각지 못했던 어떤 세계과 정체성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이 ‘타자‘들은 확고하다고 믿었던 지식과 기술, 사상, 정치적 신념과 지혜의 매끄러운 질서에 오류로서 등장한다. 돌봄의 공동체는 그런 오류를 배제하고, 몰아세우고, 깔끔히 치료하고 쓸어버리는 대신 오류가 열어둔 이음새 사이에서 새로운 탐사를 시작한다. 타자를 돕고, 타자로서 돕고, 타자를 돕는 일을 도우며, 미래-타자의 출현에 열린 지식과 기술은 어떤 얼굴일까.(30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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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입니다 - 딴 세상 사람의 이 세상 이야기
배명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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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입니다], 배명훈, 문학과지성사, 2022

전쟁이 발발했다고 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고 했다. 처음 그 소식을 접한 장소는 군대의 행정반이었다. 2022년 2월 22일 2시 22분 22초, 얼마 전 sns에 유행했던 짤이 떠올랐다. 2022년이란 시간대가 굉장히 낯설게 다가왔다.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며 ‘강한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의 전쟁광 지도자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었던 거구나 여전히.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말이 수없이 들으며 자라온 세대인 만큼 가장 큰 위협세력인 북한 이외에도 러시아와 중국의 군사적 팽창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처음으로 생각해봤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현역 군인으로서 바로 참전하게 될 텐데 어이없게도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면 군대와 함께 이동하다는 게 제일 안전하다는 말이 떠올라 기가 찼다. 인간의 생존 본능이란... 징그러운 거구나. 월급을 쪼개 유엔난민기구에 후원하고, 각종 매체에 게재된 우크라이나 침략 사태의 원인과 배경을 분석한 칼럼을 읽으며 착잡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군사력의 우위 혹은 힘의 균형terror of balance을 통한 전쟁의 억지, 방어 전술을 기본으로 삼는 한국군에서 군대의 일원으로 전쟁의 억지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보람을 느끼면서도 전쟁이 일어나면 불가피하게 자국민의 보호 및 전쟁의 승리를 위해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다가왔다(이런 서글픔은 군인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모든 전쟁이 거의 정당한 명분 없이 일어나긴 하지만 러시아의 일방적인 침략전쟁을 두고 국제사회가 일제히 규탄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거라 예상했으나 이는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전쟁은 고도로 정치화된 활동이라고 했던가. 서방국의 섣부른 참전이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위험성을 갖고 있을 뿐더러 뭣보다 각 국가는 결국 자국의 이익이란 패를 한 손에 움켜쥐고 테이블 앞에 착석하고 있었다. 초국적 보편적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염원하는 시민들니 전 세계에서 반전 시위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뭉클하면서도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성폭력이 자행되었다는 범죄 소식에 처연해졌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귀환, 난민에 대한 차별과 배제, 소수인종에 대한 혐오/증오 범죄, ‘극단의 세기‘ 20세기를 지배했던 거대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종언을 구했는지 몰라도 그 시대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와 모순들이 좀 더 세련된 외피를 두르고 회귀한 것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충돌과는 꽤 다른 국가와 국가의 무력 충돌, 세계와 세계의 충돌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 고민하던 차에 SF 작가 배명훈의 에세이를 만났다. 자신이 SF를 쓰는 이유를 ˝국제정치학 소설을 쓰면 SF가 되기 때문˝([우리는 SF를 좋아해 #5] 은하 제국은 왜 안 돼?)이라고 답하는 국제정치학도 SF작가를. 그는 SF와 국제정치학이 얼마나 친연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 자신의 사회‘과학‘적 SF 세계관에서 SF가 국제정치학적 사고실험을 풀어내기에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를 역설한다.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국제정치학의 질문을 풀어가는 것이 제 목적이고요.?소설에서는 현실에서보다 질문을 자유롭게 던지게 되죠.˝([우리는 SF를 좋아해 #5] 은하 제국은 왜 안 돼?)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SF 작가입니다]는 앞에 (나는 국제정치학 공부한)를 괄호 친 거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국제정치학이 자주 등장하며(한국작가들이 주로 국문학과를 비롯한 어문 계열 전공자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 정도로 자신이 적을 둔 학문을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설명한 사례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마 이 책을 읽은 청소년 독자 중 한 명은 혹해서 국제정치학과에 지원했을 거라 예상될 정도로 국제정치학이란 학문, 그리고 이 학과의 세계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국제정치학과에서 한국근대소설을 읽는 대학원 수업이 있다는 사실은 국문학도로서 거의 충격적이었다..!(국문학 대학원에는 국제정치학 수업이 없지만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탈식민주의, 비교문학은 사실상 국제정치학이나 다름 없다고 위안을 삼아본다. 식민지 근대성, 동아시아 담론,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정도면 ㅇㅈ?)

그런 면에서 배명훈 작가는 일반적인 SF 작가의 이미지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감이 있다. 자연과학을 전공했거나 자연과학적 지식이 해박해 작품에 구축된 세계의 과학적 설정이 엄밀하고 논리적인 하드 SF류를 쓰는 과학자st의 SF작가... 배명훈 작가의 설명을 들어 보니 이런 통념은 실제로 SF계에 통용되고 있는 편향이 반영된 결과인 듯하다.

물론 SF 영역에도 편향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 SF의 장에는 천문학과 물리학을 맨 위에 두는 특유의 위계질서가 있다. 중세의 신학만큼 절대적인 지위는 아니라 해도 사회과학적 추론이 맨 먼저 관심을 받을 여건은 아니다. (...) 그래도 나는 내 일을 계속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을 교과서 안에 박제해두지 않고, 본질이라 여겨지는 부분을 잡아채서 내가 창조한 세계에 놓여 있는 재료로 다시 조립하는 일을. 그것이 내가 하는 SF다. (69)

그런데 생각해보면 외계생명체, 보다 정확히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지구상에서 조우했다고 했을 때 문제가 되는 지점은 주권과 영토이다. 그러니까 이는 지극히 근대정치적 문제인 것이다. 이방인/외국인이든 외계인이든 자국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주권의 자장 안에 포섭됐을 때 고깃덩어리(외계인은 -신체가 있다면- 신체를 이루는 물질의 구성 요소가 단백질 위주가 아닐 가능성도 크지만)가 아니라 ‘시민‘이란 정치적 권리를 지닌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

SF영화 [디스트릭트 9]을 보면 (기억의 회상에 의존해 글을 쓸 예정이라 사실 관계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감안해주시면 좋겠다) 외계인들이 갑자기 남아공 어딘가에 불시착했을 때(왜 미국이 아니라 남아공이냐 하면 감독이 남아공 출신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세계는 보통 이런 식인 경우가 많다), 일단 이들을 난민 캠프 같은 곳을 조성해 수용한다. 그리고 정부의 수뇌부가 모여 이 외계인의 법적/정치적 지위와 권리에 대한 논쟁을 이어간다. E.T 같은 외계인 친구 하나만 지구에 왔다면 다락방을 지니고 있는 미국 가정집에서 부모님 몰래몰래 외계인과 함께 사는 게 가능하겠지만 (아파트가 지배적인 주거구조인 한국에서는 이마저도 불가능에 가깝다) 집단으로 함께 오면 주거지를 마련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문제가 된다. ‘내 집 마련‘의 열망이 엄청나게 강하고, 공공주택의 입주권을 따내기도 엄청나게 힘든 한국에서는 시민들이 외계인 수용에 대해 굉장히 날 선 입장을 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여간 물리적으로 점유할 공간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이방인에게 법적으로 정치 공동체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이다.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다. 국가적 차원, 대내적 차원에서 극적으로 합의를 도출해냈다 하더라도 국제정치 사회의 승인 혹은 간섭이라는 또 다른 산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미국이 판단했을 때 자국에 불이익을 미칠 위험성이 큰 존재로 판단한다면... 중국은? 세 사람만 모여도 점심 메뉴 하나 결정하기가 어려운데 국운이 걸려 있는 국제정치적 사안을 논의하려면 무려 6자 회담의 산을 넘어야 하는 게 한반도의 실정이다. 한국-미국-일본 의 자유주의 진영과 북한-중국-러시아의 사회주의 진영... 이건 마치 민초파와 반민초파의 대립을 연상시키는... 각설하고

(스포 있음 !!!)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Arrival)도 겉으로 보면 언어학의 사피어-워프 가설과 고전 역학의 해밀턴의 원리(최소 작용 원리)가 적용된 과학적 텍스트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 부분에서 국제정치학적 부분이 중요한 텍스트이다. 자신과 외교적, 군사적 노선을 취하고 있는(이에 대해 중국에 대한 편향적 시각을 드러냈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다른 세계를 설득해내는 과정 - 외계인들이 알려준 헵타포드어를 이해해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파악해 미래를 기억할 수 있게 되면서 -이 결말 부분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설득의 기술이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가족 치트키‘라는 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외계인의 외계어라는 절대적 타자성 앞에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루이스의 학자로서 성실하고 용기 있는 태도,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딸의 죽음이란 미래를 내다봤지만 그녀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마저도 감내하게 하는 만남의 축복을 선택하는 엄마의 사랑의 깊이. 한평생에 걸쳐 있는 어머니의 도저한 사랑을 한 순간의 선택에 응축시켜 느낄 수 있게끔 했다는 점에서 전율스런 감동이 전해졌던 게 아닌가 싶다.

하여튼 외계인이 지구에 오면 그를 친구로 봐야 할지, 적으로 봐야 할지 고민하게 되고, 이 타자에 대한 환대라는 윤리적, 정치적 질문에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지닌 이들끼리 함께 답을 도출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 난관과 난항이 예상되는 상황인데 바로 그런 점에서 SF의 상상력은 빛을 발할 수 있다. SF는 인물이 아닌 세계를 창조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이 세계의 초기 조건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문명이 어떤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지 관찰하기 용이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마치 빅뱅 직후 초기 우주의 상태를 파악함으로써, 우주의 기본적인 셋팅 값을 역추산함으로써 현재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처럼 세계를 부숴 말랑말랑한 반죽 상태로 만들어 다른 모양으로 빚어보면 알 수 있다. 세계의 특정한 조건이 현재 우리를 어떤 식으로 결정지었는지 - 그걸 비교해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해주는 SF 소설을 우리가 획득함에 따라.

SF의 상상은 그런 것이다. (...) SF에서 가치 있는 상상이란 다른 것과 동떨어진 재미있는 발상이 아니라, 삶과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통합적 상상을 말한다.(82)

SF 작가에게는 바로 이런 감각이 필요하다. 다른 행성에 세워진 국가는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까? 우선 우리가 아는 국가 개념에서 2020년 지구라는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비롯된 요소를 떨어내고, 보다 본질적인 내용울 추출한다. 그다음 새로운 행성의 특수한 환경에 이 핵심 요소를 대입한다. 그런 방법이 현실적이다. (...) SF 작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막스 베버의 책을 막힘없이 읽어내는 독서력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다양한 상황에 자연스럽게 적용하는 말랑말랑한 상상력이다. (62-63)

창작자들은 아직 아무도 언어로 포착해내지 못한 변화의 실마리에 이름을 부여하고 가중치를 주어 돋보이게 한 다음, 자기 창작물과 동시대 사회에 대입해보곤 한다. 예술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80)

이런 예술적 상상력, 과학적 상상력이 소위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시도하는 순문학의 예술적 상상력과 다른 지점일 것이다. 이제껏 하위장르, 주변부의 매니악한 장르로 머물러 있었던 SF가 주류로 부상하며 저변을 확장하고 있는 만큼 ‘과학‘과 ‘상상력‘의 경계가 널리 확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식 지평의 확장˝이란 개념이 SF 비평에서 중요한 개념이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특수한 정체성과 표지를 깃발 삼아 대립하고 반목하고 배제하는 증오와 혐오가 빈번해진 시대에 경계를 뛰어넘는 확장의 상상력이 우리를 여태껏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국제정치학에서 중요한 주제인 전쟁에 대한 배명훈 작가의 인터뷰 내용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전쟁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전혀 안 좋아해요. 그냥 전쟁이라는 게 존재할 뿐이에요. 이걸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잖아요.?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평화를 실현할 수는 없어요.˝([우리는 SF를 좋아해 #5] 은하 제국은 왜 안 돼?)

전쟁을 연구하는 반전주의자. 당신이었군요, 배명훈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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