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빨리 해야지. 파출소도 좁고, 오늘 책임량 채우려면 아직 스무명이나 남았는데.」 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앞으로 나서더니,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상부의 지시로 실시하고 있는 장발 단속에 걸렸으므로 지금부터 차례로 삭발을 실시한다. 차후로는 또다시 장발을하여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명심하기 바란다.」.마치 연설하듯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하고는 젊은이들을 휘둘러보았다. 「아저씨들 부수입 오르겠다.」김선진 앞의 젊은이가 이발기를 든 경찰 옆의 의자에 털퍽 앉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경찰이 이발기를 들며 물었다. 「이거 말이유. 값 나가잖수?」그 젊은이는 의자 밑에 수북하게 쌓인 머리카락을 발로 가리켰다. 그걸 고물상에 팔면 돈이 되지 않느냐는 배짱 좋은 야유였다. 「이새끼 이거 영 맹탕이네.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명색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래도 되는 거냐? 머리를 발끝까지 기르고 다니든 빡빡밀고 다니든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야. 근데 대통령이 그런 것까지 간섭하고 억압하고 나서? 이건 멋대로 유신헌법 만들어 독재를 하면서 생긴 횡포야. 그런데 저항 안 하게 생겼어?」 - P8
「지난 1년 동안 나라가 돼온 꼴을 좀 봐. 이건 도무지 나라라고 할 수가 없잖아? 대통령을 뽑는 데도 국회의원을 뽑는 데도 국민의 존재가완전히 무시되고 있으니 이 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되겠어?」「더 말하면 뭘 해. 대통령후보로 혼자 출마해 체육관에 대의원들 몰아넣고 체육관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가관인데국회의원 뽑는 것을 보라구. 대통령이 73명이나 임명해 버리니 야당은제아무리 발버둥쳐 봤자 허수아비 꼴이고, 국민의 뜻은 완전히 묵살되고 마는 거지. 이런 꼴에 비하면 그래도 이승만 독재는 아주 민주주의였던 거야.」「그뿐이면 말도 안 해. 국회를 그 꼴 만들어놓고도 부족해서 국정감사를 폐지하는 법까지 만들었으니 이게 도대체 뭘 하자는 수작이야. 국정감사가 있어도 부정부패가 갈수록 심해졌는데, 그나마 국정감사 없애면공무원들이 얼마나 맘놓고 해먹으며 난장판을 치겠어. 도대체 나라를이 꼴로 몰아가는 박통 의도는 뭐야?」「그야 뻔하잖아? 만년독재를 하자면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세력이있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믿는 게 누구야? 군대 아니야? 그리고 국가예산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게 국방예산이잖아. 막대한 예산을 국정감사받을 필요 없이 군인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특혜를 베풀어주는 대신박 통은 군부의 충성스런 지지를 손아귀에 넣는 거야. 그 다음이 공무원장악이고. 그러니 세금 내는 국민들만 불쌍한 거지 뭐야? - P14
-좋아 좋아. 빼앗긴 민주주의는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데 말이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박이 안 하면 안 된다는 논리가 일반 국민들사이에 꽤나 먹혀들어 가고 있다는 게 좀 곤란한 문제 아니겠어? 4. 19가얻었던 국민적 호응과 비교해서 말야. -그게 바로 독재자들이 써먹는 전형적인 수법이야 팔십 넘은 나이에이승만도 나 아니면 이 나라는 안 된다고 했거든. 그런데 그때와 지금의상황이 다른 게 바로 경제문제야. 박동이 경제개발을 추진했고, 그 먹에 이만큼 잘살게 됐다. 앞으로 계속 더 잘살게 되려면 박동이 나라를이끌어가야 한다. 아주 그럴듯한 감언이설이고, 판단력이 약하거나 가난한 일부 국민들은 속아넘어 가기 딱 좋은 괴변이야. 그러나, 오늘의경제발전을 이룩한 것은 박 등이 아니라 하루 14시간이 넘는 중노동. 그러면서도 입에 겨우 품질이나 하는 저임금, 건강을 해치는 형편없는 작업환경 등 온갖 악조건 속에서 피땀을 흘리며 일해 온 국민들의 노력과힘이라는 것을 이번 데모에서 동시에 일깨워야 해. 국민 여러분이 경제발전의 주인공이다. 국민 여러분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다. 이 진실을밝혀 박 정권이 유포해 온 최면에서 국민들을 깨어나게 하는 게 우리들의 또다른 임무야. 국민들이 그 최면에서 깨어나는 건 바로 박 정권이안주하고 있는 성벽을 무너뜨리는 거니까. - P16
윤 사장의 말이 아니었어도 자신은 그동안 한 번쯤 폐를 끼쳐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거의 다 찾아다녀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쓸모없게 된 삶의 실패자를 대하는 데 전과 너무 달랐다. 인간관계라는 것, 우정이라는 것까지도 거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서로가 이익을 보며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토록 돈독했던 우정은 거래가 필요없게 되자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세상 인심이 야박하다는 거야 상식일 수도 없는 사실이지만 친구라고 생각해 왔던 사람들의 그 야박함을 뒤늦게 겪으며 거듭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없었다. - P32
「그놈의 긴급조치 1호만 생각하면 치가 떨려요. 그건 유신독재가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지를 자기들 스스로가 입증하고 있어요. 이 세계어느 나라에도 그따위 법은 없을 거예요.」 서경혜의 태도가 금세 달라졌다. 그녀는 정말 치를 떠는 것처럼 얼굴에 분노의 빛이 서리고 야무진 입매에는 더 힘이 모아져 있었다. 「그래요. 그건 무법천지의 표본이오. 그런 세상에서 살려면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건데, 앞으로 어찌 될지.. 유일표는 혀를 찼다. 「세상에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하고, 전시도 아닌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이게 도대체 무슨 나라예요.」서경혜가 말하는 것은 긴급조치 1호의 5항과 6항이었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는 전체 7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 2. 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동을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15년 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 P73
강제로 한 여자의 일생을 망쳐놓은 것은 범죄다. 분명사회적 범죄다. 그런데 그게 다 돈으로 해결이 된다. 도대체 그자가 지금까지 망쳐온 여자들이 얼마나 될까. 앞으로는 또 얼마나 망쳐놓을까. 그런데도 그자는 돈의 힘으로 죽는 날까지 건재할 것이다. 돈, 돈이란무엇인가……………. 과연 이 세상에 진실이란 있는 것인가...... 내일 아침신문들을 본 민다리의 오빠들은 어찌 될까. 자기네 편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분노하고, 절망하고……………. 그러다가 끝내 체념하고 그자가 조금 낫게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재벌은 거대한 산이다. 아니, 산맥이다. 돈으로 덮이지 않을 사회악은 없고, 그들은 그 무기로 완전무장되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잉태해 낸 공룡이고 악마들이다. 노동 착취를 일삼으면서 그따위 짓들을 하는 한 그들은 분명 사회의 악마들이다. - P134
천두만은 그런 속임수를 쓰는 서수철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부러울 뿐이었다. 서울생활 15년을 하면서 보니 이놈의 세상은온통 속임수 판이었고, 걸리지 않고 잘 해먹는 놈이 장땡인 세상이었다. 정치하는 놈들은 권력이 있어서 해먹고, 돈 많은 놈들은 돈힘으로 더큰돈을 해먹고, 말단 경찰들은 행상들의 등까지 쳐먹고, 크고 작은 장사들은 세무공무원들과 짜고 해먹고, 해먹지 않는 놈이 없는 세상에서 못해먹는 놈만 병신이었고, 병신만 못해먹었다. 죄를 짓고도 돈만 있으면풀려나는 세상이니 판검사, 변호사 다 면허증 딴 도둑놈들이라는 말이괜히 퍼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무식한 자신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유식한 문자까지 알게 되었을 것인가. - P159
그 말을 듣고 보니 다방 안에는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하는 노래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귀에 익은 노래는 자신에게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새겨져 있었다. 하나는 군생활을 할 때 사병들 사이에서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가사가 바뀌어 군대에 갇혀 있는 젊은이들의 성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사가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같으면서도 10월 유신과 함께 박정희의 권력욕을 야유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달라진 거였다.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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