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깊은 받아들임 - 바다보다 드넓은 참된 자기로 살아가기 Modern Spiritual Classic 6
제프 포스터 지음, 김윤 옮김 / 침묵의향기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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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어느 여름날 친구가 죽었다. 학교 안에 차려진 분향소에는 스무살 남짓한 학생들의 영정사진이 즐비해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성거렸고,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몰려왔다. 그제서야 나는 죽음을 알게 되었다. 아, 사람은 언제든 죽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후로 죽음의 불안에서 오는 근원적 결핍감이 나를 흔들었다. 내 삶을 통째로 쥐고 흔들었다. 사는 것이 허무했고,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그만두고 절에 들어갔다. 그리고 중이 되었다. 중이 되어서는 선원에 갔고, 좌복 위에 앉아 사람들이 참선이라 부르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우울, 권태, 허무,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근원적 결핍감. 그런 것들이 결국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내몬다. 영성을 찾고, 구도자가 된다. 이 책의 저자인 제프 포스터도 아주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에크하르트 톨레도 그랬다 하고. 결국 병든 인간들만이 참선을 하고 영성을 이야기하며 깨달음을 찾는 것이다.


나는 전통적인 선불교 제도권에서 공부해왔지만 비이원론 전통의 많은 영적 가르침 또한 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어느 날 나는 선원장스님께 물었다. "스님, 이 선이라고 하는 것... 선이라고 하는 것의 효용은 안도감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심리적인 안도감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더 근원적이고, 더 깊은 안도감인 것 같아요." "그렇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지."


선을 하면서 내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내가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선이란 그 '무엇'이 아닌, 그 무엇들의 '바탕'에서 살아가게 해주었다. 초점이 몸과 마음이 아닌 몸과 마음의 바탕으로 옮겨가면서, 삶의 방식은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으로 바뀌어나갔다.


저자는 깊은 받아들임을 통한 궁극의 평화는 '개인적' 평화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어떤 개체적, 심리적 결과물이 아닌 그보다도 더 근본적이고 완전한 의미의 평화임을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이 아주 중요하다고 본다. 사람들은 여전히 참선이나 영성적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심리적 평화'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심리적 평화를 얻는 것은 결국 또다른 풍경일 뿐이다. 근본적인 것은 모든 풍경의 배경을 아는 것이지, 풍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풍경은 외부의 조건에 따라 또다시 변화하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근원적 평화, 근원적 안도감이며 오직 이것이야말로 실존의 근원적 결핍감을 해소한다고 본다. 정체를 알 수 없던 근원적 '불안'의 해소라고 이야기해야할까..


저자는 생각, 느낌, 감정이 아닌 그 모든 것들의 바탕에서 그것들은 근원적으로 받아들이길 이야기한다. 그 받아들임은 은밀하게 가장된 '추구'를 내려놓음으로써 이뤄진다. 저자의 이야기는 특별한 영성적-수행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성이나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추장한 이야기들 또한 몰라도 상관없다. 저자는 삶의 자질구레한 사건들, 이를테면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던가, 타인에 대한 인정 욕구, 자기 자아감이 좌절되는 데서 오는 무력함과 같은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사건 사례들을 통해 그 모든 추구의 날 것을 그대로 직시할 것을 이야기한다.


돌아보면, 그렇게 받아들이려는 노력의 이면에는 하나의 주제(다른 말로는, 추구)가 있었습니다. 즉, 나는 통증을 받아들이면 '통증이 사라질 것이라고' 내심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받아들임으로 가장한, 통증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아름다운 영적 수행이라니, 추구자가 숨기에 얼마나 교묘한 장소인가요! 어떤 희망이나 동기, 기대를 품고 하는 받아들임은 참된 받아들임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장된 거부입니다. ----- p.84


이 책에서 나는, 겉보기에 상황이 좋지 않을 때도, 더 깊은 의미의 좋음을 알아차리는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겉보기에 상황이 완전해 보이지 않을 때도, 더 깊은 완전함을 보는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궁극의 이완, 궁극의 평화, 궁극의 쉼에 관해 얘기합니다. 당신이 분리된 개인으로서 이완되거나 평화로워지거나 쉬는 방법에 관해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고통스러운 경험을 포함하여 모든 생각, 모든 감각, 모든 느낌이 당신 자신인 그 공간에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알 때 주어지는 더 깊은 의미의 이완에 관해 얘기합니다. ------ p. 86


저자는 어떠한 것을 더 좋게 바꾸려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실상을 근원적으로 받아들이길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은밀하게 행해져온 '추구'를 직시하는 것으로 이뤄지며, 그 받아들임은 또다시 '추구'를 멈추게 하는 긍정적인 작용을 일으킨다. 다만 저자의 이런 견해가 구도자들로 하여금 또다시 가장 은밀한 '추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론 현실적 문제들이 '추구'를 통해 빚어지기에, 그 '추구'가 멈춰지면 현실적 문제들 또한 많은 부분 해소되리라는 뉘앙스를 넌지시 비추고 있다. 깨어남과 깨달음이 주변의 갈등들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현실적 문제들이 여전히 그대로 산재한다면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제방에 어른스님 몇분도 "혼자 깨달아 뭣하냐"는 말을 하시는데, 이것은 조금 논의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깨달음의 정의와 범위는 너무 광범위해서, 깨달음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가 필요할 듯.)


이른바 가장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조차 친밀한 인간관계에서는 여전히 갈등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정말로 깨달은 것은 아니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깨달음의 의미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전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뜻일까요? ----- p.218


선불교에서는 돈오돈수라는 말이 있다. 단박에 깨달아 단밖에 닦아 마친다는 이야기이다.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오직 깨달음만 이야기할 뿐이지 수행은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수행해서 깨닫는 것도 아니고, 깨닫고 나서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생사적 자기와 무생사적 진실한 자기는 근본적 차원이 다른 입장이므로, 생사적 자기와 무생사적 자기의 관계는 비연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생사의 자기 연장선상에서 연속적으로 진실한 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약해서 진실한 자기로 전환하므로 임제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하여 "나의 견처를 가져 말하면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옛도 없고 이제도 없다. 얻는 자는 바로 얻어서 오랫동안 수행하였다는 세월이 필요없다."라고 말했다.


생사의 자기는 닦을 것이 있지만 생사가 없는 진실한 자기는 닦을 것이 없다. 만일 닦을 것이 있다면 이것은 생사의 자기 연장선상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진실한 자기입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임제스님은 닦음이란 장엄문, 불사문이지 불법은 아니라 하고 이것은 업을 조작하는 것을 면치 못하여 생사를 탈각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만일 도를 닦는다면 이것은 도를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통적 조사선을 체험함에는 돈오돈수의 입장이라야 된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서옹스님 법문 중에서


​아마 이것이 선불교와 여러 영적 가르침들 간의 공통적이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뉘앙스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선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오직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실존의 불안에 관한 해결을 중점으로 두지만, 현대의 영적 가르침들은 그보다도 삶의 현실적 문제들에 주목하고 있다. 똑같은 깨달음을 이야기하지만, 그 깨달음의 효용이 어디에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 해석과 주장이 조금 달라지는 듯하다.


어쨌든 이 책은 좋은 책이다. 그럴싸한 영적 미사여구들로 사람들을 현혹하지 않고, 정직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또 치밀하게 법을 이야기한다. 삶에 지친 현대인들이 보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부담없이 펴들만 하지만, 그 안의 내용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는 현실의 부정, 소망적 사고, 희망을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삶에 관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큰 자유는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인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희망과 꿈, 계획과 아무리 강하게 충돌하더라도. - P44

깨어남은 삶에 참여하는 것의 끝이 아닙니다. 참여의 시작일 뿐입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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