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에서 고병권씨 등과 공동체 애기를 줄기차게 해오셨던 이진경씨의 <코뮤니즘>을 보면 연대의 쾌감이 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우리는 왜 연대해야 하는가? 이진경씨의 말대로 라면 그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한 쪽에서는 <나홀로 볼링> 친다고 난리고, 다른 한 쪽에서는 <고독이 필요한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배두나가 출연했던 영화 공기인형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인간은 안에 무언가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다른 바람으로 그것을 채워야 한다우리 모두는 애초부터 결핍된 존재이고, 그 결핍을 누군가는 사랑으로 채우고, 누군가는 일로, 누군가는 공부로 채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현대인이 살아가면서 갖는 주된 개념 중 하나가 나는 독립된 존재이고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공동체는 하나의 억압이라고 느낀다는 것일 것입니다. (공동체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슈 중 하나가 억압과 개인과의 대립이라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결국 공동체와 연대가 사라진 ,원자화되고, 개인적인 삶이 나쁘다는 가치판단이 있기 때문에 나 홀로 볼링같은 책도 나오는 것이겠지요. 이 책에는 시민의식의 고양이 가져다주는 장점을 무슨 카탈로그처럼 조목조목 열거하지만, 그런 이유들을 넘어 근본적으로 보이는 것은 오히려 이진경씨가 <코뮤니즘>에서 말한 연대의 쾌감이겠지요..

 

저는 솔직히 피부에 와 닿지 않지만 아마 2002년의 월드컵같은 분위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때 저는 광장을 구경했지만 정작 경기는 tv를 통해 집에서 보았습니다. 그게 더 편하고 경기를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때 광장으로 몰려갔던 사람들은 축구가 아니라 연대의 쾌감이 목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레베카 솔닛이라면 환상의 공동체라고 했겠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단초를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돌발적인 재난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아비규환 속에서 폭도로 변해서 무법천지가 도래할까요? 아니면 연대의식을 발휘해서(약간 닭살돋지만) 재난의 유토피아를 이룩할까요? 이 책에서 솔닛은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핼리팩스 폭발사고 등의 재난사례를 열거하며 사람들이 재난 앞에서 얼마나 이타적으로 변하고, 숭고해지는지 설명합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이기 때문에? 솔닛은 이렇게 말합니다.인간이 선하냐,악하냐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 악함에 대한 믿음이 현실의 행동을 결정한다고요. 자신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투신할 수 있는 기회, 기존의 가치관과 제도, 계급과 소유를 무력화시키는 기회를 재난은 제공합니다. 지킬게 없어진 인간들은 벽을 허물고 서로서로 손을 맞잡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관습과 제도가 붕괴되고, 모든 것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사람들은 연대하고 스스로를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오히려 패닉에 빠지는 건 지킬게 많은 엘리트들입니다. 경쟁에 길들여져 있고, 쌓아올라온 엘리트들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구호가 아닌 기존의 제도와 권위를 회복하는데 주력합니다. 이 책에는 아나키즘의 냄새가 물씬 납니다. <아이 엠 히어로>같은 만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죠. 숨죽여살던 루저들은 좀비들의 시대가 도래하자 비로소 가슴을 펴고 세상을 응시합니다.

 

고백하자면 책을 읽다가 뭉클한 가정을 몇 번 느꼈습니다. 이런게 연대의 쾌감일까요? 자기를 버리고, 더 크고, 더 숭고하다고 생각되는 대상에 자신을 투사하는 감정. < 코인로커 베이비스>에서 도쿄를 테러하는 기쿠가 생각하는 재로 뒤덮여진 아름다운 거리.

 

하지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어제까지의 세계>를 보면 저는 또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뉴기니, 이누이트,북아메리카의 원주민 등의 생활을 소개하고, 현대와 대비하며 고찰한 이 책의 주요 메타포 중 하나는 나와 너의 혹은 우리와 타자의 구별입니다. 심지어는 종교, 언어의 존재이유도 우리와 타자를 구별해 주기 때문입니다. 수렵채집사회가 되었던, 농경사회가 되었던 사람들은 연대합니다. 하지만, 그 연대는 경계를 짓고 경계안의 사람들끼리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학연과 지연에서 느껴지는 감정, 혹은 8,90년대에 조폭영화에서 보았던 의리와 우정에 대해 떠올랐습니다. 원주민들이 경계를 짓고, 타부족을 배제하고, 혹은 인척관계를 따지며 서로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장면은 제가 어렸을 때 동네꼬마들과 놀던 감정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지금보면 어떤 면에선 세련되지 못했다고 느낄 수 있는 감정, 그런 것들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만약 원주민들의 사회가 인간사회에 대한 원형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그 원형에서 진보한거라면 우리는 그닥 숭고하지도 않고, 결국 생존에 목맨 여타의 동물과 좀 다를 뿐인 지구상의 개체처럼 느껴집니다. 재밌게도 다이아몬드는 아나키스트의 꿈은 (레베카 솔닛?) 실현 불가능이라고 말합니다. 부족간( 영어로는 밴드네요. 네이버의 밴드? 하하 우리는 털없는 원숭이인가요? ) 의 전쟁과 보복의 악순환 등을 너무나 쉽게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진경씨가 말한 연대의 쾌감은 동전의 양면처럼 차별과 배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부족내에서는 음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한 명만 굶어죽는 경우는 없습니다.하지만, 타 부족에 대한 증오나 살인은 현재의 인종차별과 어찌 그리 닮았을까요. 이책에서 보여지는 원주민들의 행태가 이진경씨가 말한 연대의 쾌감의 원형일까요.

영아살해, 노인 유기, 전쟁, 장애인,병자 유기 등 이책에는 서늘한 대목이 많아요. 한 가지 위로는 이런 경계짓기가 주로 지킬게 많은환경에서 사는 부족들에게서 관찰된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자원이 부족한 사막같은 곳에서는 이런 구별짓기가 덜하다고 하네요. 역시 인간은 무소유가 답인 걸까요.

 

어쩌면 삶이라는 것도, 나라는 존재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네요. 평균수명이 45세인 피디한 사람들이라면 항상 죽음을 피부로 느끼며 어제의 삶이 오늘의 삶과 달랐을 테니까요.마치 수억개의 정자 중 하나만 수정에 성공하듯 나는 자연이 내놓은 수억개의 정자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피다한의 원주민들은 지금의 저보다 그걸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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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하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아. 이 영화에 나오는 리무진은 카메라를 은유한다는 거. 극 중에 드니 라방이(아니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나?) 카메라가 점점 작아진다고 불평하지. 영화 말미에 리무진들은 자신들이 너무 크다고, 사람들이 자신들을 폐기처분 할 거라고 불평하지. 나는 거기서 힌트를 얻었어.

근데 만약 이 영화가 페르소나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라면 사실 이런 문제는 "싸이코 닥터" 같은 만화에서도 단골 주제 아니었나?  물론 훨씬 솜씨좋게 영화와 현실을 섞어 놓았다는 느낌은 들어. 내가 처음 이 영화에 땡긴 이유는 어쩌면 이 영화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어,. 사람들은 왜 영화를 볼까?  왜 영화를 만들까 하는 것이었지.  (왜 비싼 돈 들여가면서 돈지랄(?)을 하는 것일까?)

 

영화평에는 호평 일색이더군. 예전 같으면 쉽게 혹했을 것 같은데 요즘엔 내가 변했나봐.  이게 그냥 <후까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 예나 지금이나 내가 무식한 건 그대로인데, 요즘엔 좀 뻔뻔해졌나봐.   "예술영화 특유의 신경과민(?)이랄까."  그런 표현만 떠오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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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폴란은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조엘 샐러틴의 농장이 자급자족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묘사합니다. tv도 없고 홈스쿨링 교육을 하고 먹을 것도 직접 기르기 때문이었죠.

조엘 샐러틴은 딱히 반문명주의자거나 반자본주의자는 아닙니다. 단지 순환방목을 통해 자신의 목장을 유지해 나가는 농부입니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주로 거대식품산업이나 무늬만 유기농인 <유기농제국>, 미국 연방정부 정도 입니다.(세금내는 걸 엄청 싫어해요. 어떤 면에선 희한하게 무정부주의자인 셈이죠)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자본주의자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자본주의와 생태주의의 기묘한 동거라고나 할까요.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의 생활방식이 자급자족의 양상을 띄는 것은 아마 그의 농장운영 방식과 관련이 깊을 겁니다. 다품종소량재배를 하다보니 지역밀착형으로 판매를 할 수 밖에 없고 지역경제에 근거한 공동체를 추구하다보니 자연 생활방식도 그에 따라 가는 거겠죠.

 

그런데 자급자족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밟히더군요. 왜냐하면 우리 나라에도 이 단어를 유난히 좋아하는 분이 계시거든요. 바로 "고맙다 잡초야"를 쓴 황대권 씨입니다. 이 분이 가끔 쓰는 칼럼을 보면 필자 소개에 <야생초 편지 저자>라고 나옵니다. 얼마나 좋은 책이길래 저자 소개를 이렇게 하나 생각했는데(전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고맙다 잡초야"는 이 책의 속편 쯤 됩니다. 환경과 문명에 대한 철학과 명상, 농촌 생활에서 생기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짧은 호흡으로 쓴 책입니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심란 할 때 읽을 만 합니다. 저자가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로 들려주는 농촌 에피소드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작은 활력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처음에 왜 귀농을 결심했는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야생초 편지에 있을 것 같네요) 그 이유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지금껏 자연에 개입해서 잘 된 경우가 별로 없다는 군요. (하긴 자도 처음 외국여행에 가서 느낀 것은 "인간이 만든 것은 대부분 별볼일 없다"였습니다만) 저자는 현대의 인간들이 "사육당한다" 고 표현합니다. 비닐하우스 속 식물들처럼 편안하지만 제 본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삶을 자본가에게 맡겨버린다고 말입니다.그리고 자본가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스펙경쟁에 몰입한다고 말합니다.  이 분은 조엘 샐러틴과는 달리 자본주의를 반대합니다. 자본가가 구축한 판매시스템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니까요. 자급자족을 좋아하시는 것도 이런 맥락이겠죠.

그리고 자급자족을 위해선 여러가지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빠빠라기"에서 무슨무슨 부족 추장이 현대의 직업이라는 개념을 비판한게 기억나는 군요. 대충 비판의 요지는 직업이 인간을 파편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집을 지을 줄도 알아야 하고 고기를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우리는 정말 두 가지를 잘할 수 있을 까요? 슈마허식의 '적정기술"이나 "중간기술"이 등장하는 게 이런 맥락이겠죠. 지나친 전문화를 줄이고 대량생산을 피하는 것 . 이런 상황이라면 어찌 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대신 국영수는 사라지겠지만요)

 

근데 애덤 스미스가 바늘공장이야기를 하기 전에는 전부 이런 적정기술(?) 아니었을까요. 그게 싫으니까, 부적정(?)하니까 분업을 통한 생산량증가와 효울성 달성을 말한 것일텐데요.  그 때는 분업과 전문화가 진보와 혁명을 의미했을 텐데 지금은 다시 자급자족의 삶을 애기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은 바다가 좋은지도 모르고 바다없는 자신의 삶을 별 불만없이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겔쓰리없이도 우리가 별 탈 없이 살았던 것 처럼요. 그런 때 황대권 아저씨 같은 분이 나타나서 바다가, 겔쓰리가 이렇게 좋은 거라고 알려주는 게 이런 분들의 사명이겠죠. (불경하게 말하면 이브의 뱀처럼?) 부디 아저씨가 자신의 이상을 이루었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아저씨는 이 때다 하고 다시 조근조근한 어조로 농촌에피소들 늘어놓을 겁니다. 그리고,그걸 읽은 누군가는 용기를 얻어 아저씨의 뒤를 따를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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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사랑..... 노부부의 대화를 보면 마치 아직도 연애 중인 것 같았다. 열정적이었다는 애기가 아니다. 노부부는 서로 대화중에 꼬박꼬박 고맙다는 말을 한다. 몇십년을 같이 살았을 텐데 아직도 서로에 대해 완전히 모른다!.. 보통 그 나이에는 서로를 보면 짜증부터 솟구치거나 뚱하니 서로를 바라만 볼 것 같은데,,,(아,이제 당신은 지겨워...)

 

 

(스포조심)

 

 

영화 초반에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절대로 병원에 입원시키지 말라고 한다. 이 장면엔 큰 임팩트가 없다. 극적인 순간처럼 묘사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후 영화의 전개는 이 장면이 키인 것 같았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결국 이후의 할아버지의 행동은 전부 이 장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딸이 엄마를 저렇게 두면 안된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버럭 화를 낸다. 그럼 어떡하란 말이니? 실은 할머니가 이런 부탁을 해서 내가 들어 줘야해,하고 말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아버지. 그럼 어떡해요, 그런게 뭐가 중요해요 하고 받아치는 딸의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악전고투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이런 의도가 숨어있을 거라고 상상하면 무언가가 뭉클한 느낌이 든다. 감독은 마지막에 주인공을 가장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할머니를 죽이는 순간에서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할아버지는 병수발에 지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할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하기 싫은 일을 해야하는 역설에 빠진 건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은(커팅 뭐시기 하는 컷) 뭐랄까 하케네감독의 마지막은 저런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피아니스트?) 하루키 소설의 문장을 읽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나자, 토니 다키타니는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하루키의 토니 다키타니 중, 정확한 문장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완전한 여백과 허무...)

 

 

p.s. 그러고 보니 소재는 티비인생극장 같은데나 신문의 가십면에 나올만한 소재이다. 역시 다루는 사람이 문제다. 오히려 영화내내 떠오르는 생각.

"와, 저 할머니 젊었을 떄 엄청 미녀였겠는데..."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어쩌구 하는 영화에 나온 분이시란다. 젊음은 변하기 쉬운 거라지만 내가 늙어서 저 정도만 돼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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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남산강학원에서 정화스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도반이란 무엇인가"란 주제였는데 정작 내용은 도반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내용이었다. 지금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떠오르는 단어는 "공감"과 "협동"이라는 단어이다. 우리 존재의 기반은 "공감"과 "협동"이고  우리 몸 세포도 "공감"과 "협동"을 잃게 될 때 암세포가 된다는 것이다.아마 "무아"라는 개념도 비슷한 것 아닐까. 공감과 협동,  그런데, 이 공감과 협동이라는 단어를 다른 책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팀 파크스가 쓴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을 가르쳐 주세요"라는 책이다.

 

저자는 중년 남성들이 흔히 겪는 전립선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아랫배가 불에 덴 듯 아프고 취침 중에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문제는 병원 검진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 그래서, 저자는 병원만 가면 양치기 소년이 되어 버린다. 원인없는 통증 ,자기를 일단 수술하려는 의욕 만땅의 의사 앞에서 저자는 엉뚱하게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위빠사나 명상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현대의학이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와  "행위"와 "자아"를 떠난 "존재"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위빠사나명상에서 그를 가르친 구루는 존 얼 콜먼이라는 사람이다. 흔히 구루가 그렇듯 이 사람도 별로 구루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도 (직업이 목사다)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고집하는 냉소적이고도 지적인 저자를 그는 돌려놓는다. 위빠사나 수행 중에 그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친다. "만물에게 공감과 협동이 함께 하기를!"   명상을 하다 저자는 생각에 잠긴다. "옛날같으면 죽은 사람에게 감사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나는 그 때 아버지에게 뭐라고 해야 했을까?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콜먼도 물론 불교도였다. 따라서 정화스님과 같은 말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문득 떠오른 니체 생각. 니체의 마지막 발작을 소재로 한 영화인데 "토리노의 말" 이라는 영화가 있다. 물론 주인공이 니체인 건 아니다. 니체의 발작은 하나의 단서이다. 토리노의 광장에서 니체는 학대받는 말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 발작을 일으켰다. 여기까지는 이런 저런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추가된다. 집으로 옮겨진 니체는 의식을 회복하며 단 한 마디를 남긴 채 영원히 발작하게 된다. 그 한 마디는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이다.(이 영화 언젠가 한번 봐야겠다.)  이 에피소드가 과연 사실일까?  어쨌든 니체가 마지막에 전하지 못했던 말은 무었이었을까? 자기가 했던 말을 전부 부정하는 말이었을까? 니체는 왜 하필 학대받는 말을 보며 눈물을 흘리다 발작하게 된 걸까?  항상 비아냥대기 좋아하고 강자에 대해 프렌들리(?) 했던 니체. 어쩌면 니체가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말은 "공감" 과 "협동" 아니었을까?  순전한 지레짐작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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