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하루키적으로 밀어붙이면 유즈는 매춘을 한게 아니었을까?  오월의 메이처럼 혹은 태업감는 새의 아내처럼.. 돈이 목적은 아니고 무슨 정신분석학적이고 고상한 느낌도 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매춘이라는 소재는 하루키 소설에 꽤 등장하는 것 같다. 태업감는 새의 주인공의 유사 매춘 체험. 제목은 잊어버렸는데 태업감는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에 나오는 단편에는  주인공이 직접 여자를 사는 장면도 나온다. 물론 쿨하고 다정하다. 따지고 보면 노르웨이의 숲도 결국 그런 이야기 아닌가. 나가사와 말 마따나 사랑하는 사람하고는 못하니까 따른 여자와 해결하는 것,, 이건 일큐팔사에서 후쿠스케 머리가 여자를 사는 것과 비슷하다. 근데 일큐팔사는 그냥 끝난 거임? 예전에 지하철에서 일큐팔사4 광고를 봤는데 동일본 대지진 이후로 쑥 들어가 버렸다. 음모론을 가동하자면 아마 출판계획이 잡혀있었던 일큐팔사4권이 대지진 이후로 하루키가 폐기해 버린거다. 상황이 바뀌어 버렸으니까..하긴 3권이 좀 유치하긴 했다. 내가 읽어본 하루키 작품 중에선 제일 유치했다. 따지고 보면 1,2권도 말이 너무 많았지. 암튼 에반게리온 마냥 신비전략은 여전하다. 태엽감는 새,해변의 카프카 부터 이런 스타일이 시작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쫌 식상한 느낌도 들고 건성건성 읽게 된다.  어찌 보면 다른 사람과의 공감이 부족한 자족적인 사람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마지막 장면은 노르웨이의 숲의 전화장면과 겹친다)  그리고, 이 자기페이스대로만 사는 이 주인공의 모델은 분명 하루키 자신. (이 사람은 소설가 안됐으면 뭐 하면서 살았을까. 모르지 다방도 한 적 있긴 하지) 

 아무래도 하루키라는 작가는 현대라는 시대의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그러니까 공감지수가 높아지는 거겠지 이거 내 애기 아냐 하면서.

근데 거기서 더 나가지는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읽고 나면 알 수 없는 허망함 같은 게 느껴진다. 마치 멋진 구름위를 걷고 난 기분이랄까. 혹은 솜씨좋은 마술사의 공연을 보고 난 느낌이랄까. 마술 볼때는 좋았지만 끝나고 나면 현실은 그대로니. 

여튼 아저씨 그래도 저는 아저씨가 좋아요  옛날엔 정말 내 청춘의 책이었다니까요 지금은 좀 시큰둥해졌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그 정도 의미를 가진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요. 더군다나 아저씨는 바다 건너편에 사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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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레드포드는 과연 미스캐스팅일까? 아닐까?,, 분명 젊었을 때의 로버트 레드포드를 기억하는 나에겐 모든 것을 잃은 노인이 최후까지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는 이 영화의 주제가 이 미남(이었던)배우에게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문제는... 그런 로버트 레드포드가 여전히 멋있게 보인다는 사실.. 영화에서 주인공은 갖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적어도 망연자실해 하지 않고 위기에 무기력하지 않다.,.. 게다가.. 할아버지인 그가 나보다 머리숱이 많다는 사실.... 그는 여전히 멋있다...

 

근데 나이든다는게 항상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의미일까..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에서 우시카와가 말한다. 늙는다는 결국엔 무엇인가를 계속 잃어가는 것이라고,,, 그러고보니 무엇을 버리고 잃어간다는 표현이 하루키 소설에는 계속 등장하는 것 같다. 청춘 3부작에서 무엇인가를 계속 버려야 하는 추락하는 비행기의 비유처럼...누구는 나이든다는 것이 와인처럼 숙성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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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관한 책을 몇권 읽었습니다. 하나같이 어두운 갈색, 한번 발디디면 다시 발을 뺄 수 없는 바닥이 없는 늪을 연상시키더군요. 절망이라는 것은 사람을 위축시킵니다. 저는 그런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을 상상할 때 제 자신이 작아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저는 아직 그런 가난을 겪어보지 못했고 그것은 저에게 낯설게 느껴집니다.혹여 그보다 못한 상황을 한 때 겪어보았다 하더라도 자발적 가난이란 것과 저의 의지와 관계없이 닥쳐오는 가난은 다른 것일 것입니다. 그건 마치 손을 들면 언제든지 빠질 수 있는 서바이벌 게임 같다고 할까요. 그들은 이를 앙다물고 두다리로 버티고 서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조금씩 마모되어가며 무엇인가를 조금씩 잃어갑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한가지 있다면 그들이 저소득 노동에 종사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과연 가치있는 노동인지, 그런 가치는 누가 부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단 묻지 맙시다. 현재의 교육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어떤 가치를 생산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들의 생산하는 노동이 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없지만 그들은 낮은 소득을 받고 반대로 자신이 가진 것 중 많은 것을 내어 놓고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그런 순환은 반복됩니다. 누군가가 계속 생산라인의 바코드를 찍듯 한번 가난의 바코드가 찍히면 같은 일이 반복되며 대구를 이룹니다. 그런 순환속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조금 더 풍족한 생활입니다.

조주은씨가 쓴 <현대가족이야기>를 보면 자동차공장 노동자 가족의 꿈은 자식에게 기름밥을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중산층 화이트 칼라 가족을 다룬 <기획된 가족>의 사람들은 자식들이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게다고 말합니다. 억대연봉을 받는 어머니는 자신은 공부하느라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말하지요. <사당동 더하기 25>에서 사람들은 단칸방에서 칼잠을 잡니다. 반면 <우리는 다은 집에 산다>의 사람들은 대출을 받아 자신들이 원하는 집을 직접 짓습니다. 사당동의 주민들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대포폰과 대포차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획된 가족>의 화이트칼라들과 성미산 마을의 중산층들에게 비난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 역시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사당동 사람들처럼 몸부림치며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씁쓸하게 여기는 것은 계층에 따라 계층에 따라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 원하는 집을 지으면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어떤 사람에게는 애초에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다른 환경에 태어났더라면 그들 역시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좀 더 나은 삶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고, 그런 욕망을 상상하지도 않습니다. 아니 스스로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하도록 외부의 강제를 받는 것일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금지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둘 사이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기 떄문입니다. 좀 지루하게 말하자면 저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같다고 느껴집니다. 물론 잘났냐”, “못났냐하는 표현은 알고 있습니다. 어째서 잘난인간은 그런 꿈을 꾸고, “못난인간은 그런 꿈을 꿀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잘남이라는 것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일브로너는 <자본주의,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에서 자본주의 경제사를 간략하게 요약했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본주의가 최초로 스타트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축적이 일어나서 어떤 임계치를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떤 임계치를 넘어섰을 때 자본주의는 무한질주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자본주의는 인간과 자연을 연료로 삼아 끝없이 앞으로 나아갑니다. 만약 그 질주를 멈춘다면 그것은 이제 자본주의가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와 자연의 희생으로 자본주이는 점점 여분의 것을 만들어내고, 그 여분 중 대부분을 소수의 누군가에게 주어버리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예전보다 많은 것을 가지게 됩니다.

, 그전까지 임계치에 달하는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개 사회적인 약자입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으며 자본의 축적을 위해 희생됩니다. 이 과정이 서구의 경우에는 장시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새로이 자본주의가 유입된 곳에서 이러한 시스템의 재구축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독재입니다. 독재와 독재자. 그들에 의해 기존의 시스템은 변형되고 그 와중에서 많은 고통이 생기며 그 고통은 그 사회의 약자들에게 전가됩니다. 어저면 그 때 사당동 사람들은 그 당시의 약자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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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팅숏이라는 게 있습니다. 영화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아마도 갑자기 화면이 끝나는 숏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건 미카엘 하케네의 <아무르>였습니다. 씨네21에 올드독이 영화평을 쓰면서 마지막 커팅숏이 너무 날카롭다는 뜻의 글을 썼었지요.저는 이 것 덕분에 이 용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르>에서 출연배우가 빈 방안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데 갑자기(cutting) 영화가 끝납니다. 제 느낌을 말하자면 굉장히 하드보일드 하다는 느낌입니다. 회한이나 여운,변명, 설명, 용납도 없이 그냥 끝나버리니까요. 어쩌면 그것은 완벽한 허무일지도 모릅니다. 허무가 제게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패자부활전도 없이 존재함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 존재하는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저를 낙담시킵니다. 어쩌면 마룽마 켄지가 어릴 적 농사짓는 아버지를 보며 느꼈던 감정인지도 모릅니다. 바람구멍이 뚫린듯한, 허무. 커팅숏, 그것은 제게 최종적으로 허무라는 감정을 유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매일매일이 커팅숏이 아닐까요 저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간다는 것 그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면서 저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을 좀 더 쉽게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 마치 커팅 숏처럼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이런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결국 매일매일이 커팅숏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칼 위를 걷는 기분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커팅숏을 매일매일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런 커팅숏이 최종적으로 불러오는 허무라는 감정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힘들지만, 무의미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하루키 소설의 문장이 떠오르는 군요, 이것도 <아무르> 못지 않는 커팅숏입니다.

 

낯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알게 뭐냐”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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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상을 해 본다. 정유미는 아마도 재학시절 과에서 관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선균이 정진영에게 말하는 장면 여전히 예쁘더라구요”) 정유미가 영화에서 오랫동안 잠적한 이유는 아마 실연때문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남자 안만날 거라는 정유미의 대사) 그리고, 그 대상은 아마 제일 초반에 등장하는 이민우일 것 이다. 거짓말한 이민우에게 사과하라고 소리치는 정유미의 태도는 좀 오버다. 꼭 배신당한 여자가 애인에게 한풀이할 때의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헤어진 연인사이의 대화같은 뉘앙스가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상황이 비스듬하게 겹치는 분위기는 극장전에서 김상경이 병원에서 사과하는 장면이 있다) 두 번째로 이상한 장면은 정유미가 이민우를 만난 다음에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웬 미친 놈을 만나서 열받아서 술 마셨어) 이 반응도 좀 오버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속으로 한 번 욕하고 말지 대낮에 그것도 혼자서 술 마시진 않는다. 정리하면 이민우가 한번 정유미를 물먹였고, 정유미는 그 때 그 상황이 생각나서 홧김에 술을 마신 것이다.

그리고,이어지는 이선균과의 만남. 사실 이영화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교수 추천서를 받으러 갔다. 그런데, 조낸 성의없이 교수가 추천서를 써 준다. 밥사주면서 살살 구슬려서 추천서를 받았다. 스토리는 이게 전분데 그걸 둘러싸고, 이야기를 부풀리는 건 정신 안차린” (우리 제발 정신차리자는 정유미의 말) “제멋대로인수컷들이다.

 

아마 이 영화는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방식, 여자가 남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영화가 아닐까?( 아마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아마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세 명의 남자가 함께 만나는 장면에서는 정유미를 두고 세명의 남자가 경쟁을 벌이는 각축장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제일 권력을 가진 건 일단 김상중,.추천서를 받기 위해 정유미는 그에게 호의를 보여야 했다. 그 호의가 진심이었을까? 내 생각엔 그게 진심인지는 정유미 본인도 관심없을 것이다.하지만 정유미와 사귄적은 없고 (나이로 보나, 사회적인 조건으로 보나 약간 무리임) 어린 여자와 사귀고 싶은 중년의 판타지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알랭 드 보통도 비슷한 애기를 한 거 같은데,, 젊은 여자는 나이든 남자들에게 오히려 접근하지 말라는 금기를 일깨워 준다는... 그게 일의 기쁨과 슬픔이었나?)

정유미를 실제로 사귄 건 이선균이고 정재영은 그 일 때문인지 왠지 이선균에게 삐져 있다.(이게 일반적인 설정이다.) 그러고 보니 그 경연장은 서로간의 자원을 드러내는 장소같기도 하다. 정유미라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자원말이다.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이선균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선균은 그럴 듯하게 차려입은 여자와 헤어지고 있다. 여자는 어떤 일로 이선균에게 도움을 받은 듯 연신 고맙다고 한다.이선균은 오히려 내가 고맙지하고 의례적인 말을 한다. 난 이 장면을 왜 세세히 모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이선균의 둥장이 필요했다면 이렇게 대사를 쓰며 스토리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을까. 더군다나 시점은 2층 닭집에서 이선균을 내려다보는 정유미의 시선이다. 대사가 들리지 않는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설정일 수도 있고, 그렇게 여백을 주는게 홍상수 감독의 영화처럼 불친절한(?) 영화에 어울릴 수 있다. 하지만, 대사를 부여한 것은 이게 이선균이 여자를 대하는 방식 혹은 남자가 여자를 대하는 방식이라는 뉘앙스가 아닐까. 즉 이선균이(남자라고 표현하지 않겠다) 여자를 대하는 방식, 그것은 여자에게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김상중은 추천서를 날림으로 써 주는 것으로 권력을 드러냈고, 정재영은 술자리에서 인생상담을 해 주는 것으로 가오를 드러냈다.

얼마전에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는 짝짓기가 시장경제화 되면서 섹시함을 자본으로 한 서열이 정해졌고, 남녀가 그 서열을 놓고 경쟁한다고 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실은 빈익빈 부익부를 만들어내는 불평등인것처럼 짝짓기 의 시장도 불평등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남자사이에서의 불평등으로도 전개되지만, 남녀를 비교할 때 불리한 쪽은 여자라고 한다. 때문에 남자들은 더 나은 여성들을 차지하기 위해( 수요보다 공급이 많으므로) 여자와의 장기적 관계를 꺼리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불리한 위치를 만회하기 위해 더 짝짓기에 골몰함으로써 남녀관계에서 불리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정유미는 진화했다. 정말 영화 속 대사처럼 똑똑하고 영리한 것이다. 세 남자가 벌이는 경연장은 왠지 흥이 빠져 있고 허탈한 분위기다. 왜냐하면 정작 각축의 대상인 정유미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앞으로 잠수를 탈 것이다.) 이제 정유미는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는다. 추천서를 날림으로 써 준 교수를 구슬려서 다시 추천서를 받아오고, 선배를 찾아가서 술을 얻어먹을 줄 안다. 그나마 진심으로 대한 상대는 아마 정재영일 것이다. 그러니까 정재영이 괜히 오버하며 가오를 잡자 이쁘다며 뺨을 만져준 것일게다. 아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느낌이랄까.이제 정신차린정유미는 여자라는 불리한 위치에서 남자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좋다.김상중이나 정재영은 워낙 기본 가다가 있는 배우라지만 이선균과 정유미가 이렇게 연기를 잘했던가?. 특히 정재영과 이선균이 술마시는 장면은 압권이다. 미친놈이라는 욕은  정유미의 입에 짝짝 달라 붙는다. 미끈한 선남선녀들이 연기까지 잘 한다면 그리 불공평한게 있을까 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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