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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베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 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 P30 -
삶의 연륜을 느끼게 하는 선생의 유고 시에는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한 아픔으로 그리운 어머니의 존재를 생각하시기도 하고, 선생의 거처를 빗대어 세상의 삭막한 내색을 그려낸 마음도 엿보인다. 짧은 시집에 사연 많은 긴 인생 여행을 담았다.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지난날의 추억을 펼치기도 하다가, 짧고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이야기도 끄집어보고, 삶의 희로애락이 쌓인 인생의 중후한 멋이 흐르는 시의 노래를 아름다운 시화집으로 엮어 냈다.
시 속에 인생이 있고, 시 속에 세월의 앙금이 비친 모습에 그만 눈시울이 적셔진다.
생전에 마음에 담아 두던 말씀을 이렇게라도 추슬러 엮은 덕으로, 선생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보는 기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함축된 시를 통하여 가족의 모습, 전쟁 통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까지도 들어 있고, 생전에 느끼시던 고통을 손톱만큼이라도 가늠케 하신다. 특히 사위 사랑 끝없을 텐데 마음고생으로 편할 날이 없던 시국의 한스러운 족쇄에 시 읽는 동안 몸 둘 바를 모르게 부끄럽고 죄스럽다.
천성이 고우셔서 모든 세파를 안으로 껴안으며 글 쓰시는 일에 매달리지 않았을까? 남들보다 더한 사별의 아픔과 병마의 고통, 마음의 상처조차 겉으로 내색하지 않던 감성이 묻어난다. 문단에 우뚝 선 흙의 작가로, 시대를 펜으로 혼을 불태운 평생의 발자취는 아름다운 별로 영원히 빛나리라!
선생을 기리며 머리말을 대신 적은 따님의 지극정성이 원주 생활에 위로가 되셨을지 궁금하지만, 불후의 명작과 곱게 남긴 시편은 길이길이 남을 테니, 용꿈을 꾼 태몽의 보람은 큰 발자취로 굵게 남아 있지 않을까?
평소에 '삶의 원동력이 글을 쓰시는 기쁨이셨다.'라고 표현 하셨으니, 그것은 고통도 뒤로하고 문학에 불태운 삶의 열정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신 모습이 아닐까? 그 고마움을 펼쳐낸 인생여행의 회상에 뒤늦게나마 선생의 명복을 빌게 한다.
생전 말씀 중에, '깨달음은 많아도 모르는 게 너무 많으시다.'라며 안타까워하시고, '자연을 벗 삼아 사셨지만 너무나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을 후회하셨다.'라는, 생명 평등을 잊지 않고 펼칠 것을 명심하여 지키라고 다짐하며, 마음에 담고 되새길 숙제를 주신다.
늘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글 쓰시던 마음을 마지막 노래로 담아낸 이 시집이, 선생의 한땀 한땀 바느질하시듯 수놓으신 정성과 젊은 화가가 곱게 그린 나무판 결 섬세하고 정겨운 그림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텃밭 언저리에서 허리 펴시던 인정 어린 선생의 정겨운 여행 선물이다.
히말라야 짐 진 노새와 야크의 슬픈 풍경
마음의 여행이든 현실적인 여행이든
사라졌다간 되돌아오기도 하는
기억의 눈보라
안개이며 구름이며 몽환이긴 매일반
다만 내 글 모두가
정처 없던 그 여행기
여행의 기록일 것이다.
- P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