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그래서 이들(10대)은 자신들의 출구 전략으로 '문화'를 선택한다.문화를 통해서 자신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선생과 부모들에 대해 복수할 것을 결심한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들이 부모한테 반항하는 패턴은 똑같다.부모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백인 중산층 부모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아이들은 그것을 잘 알았다.'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라는 부모 세대들을 대표하는 특성을 부정하면서 모든 종교적 교리를 넘어서는 비백인적 행동, 다시 말해서 음탕한 흑인의 밑바닥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이름이 바로 리듬앤블루스였다.


(77)

리듬앤블루스라는 말의 '리듬'과 '블루스'는 모두 음암과 관련된 말이었다. 하지만 로큰롤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단순히 바위가 구른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록(rock)은 동사로 '부딪히다, 흔들다'의 뜻이고, 롤(roll)은 '구르다, 휘감다'라는 뜻이다. 리듬앤블루스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음탕한 네 개의 동사인 rock, roll, shake, rattle 중 두 개인 록과 롤로 만든 것이 로큰롤이다. 로큰롤은 흑인 은어로 남녀 간의 성교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성교를 뜻하는 은어로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말이 '빠구리"다. 아, 제주도에서는 '빠구리'는 '땡땡이친다'는 뜻이므로 제주도는 여기서 제외한다. 그런데 KBS의 음악 프로그램인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진행자자인 유희열이 새로 음반을 낸 YB를 소개하면서 "우리 YB의 새로운 빠구리 음악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방송 진행을 했다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가 바로 영구 방송 출현 금지에 처해질 것이다. 로큰롤이라는 말 자체가 미국 기성세대의 주류 백인들에게 분노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개념이었다.



(119)

서태지와 아이들이 강렬한 기타 연주에 전통 악기를 조합한 <하여가>를 발표할 때 머리를 꼬아서 레게파마를 하고 나온 것은 레게음악을 한다는 상징이었다. 레게파마는 한국식 영어였고, 정확한 단어는 '드레드록'(dreadlock)이다. 드레드록은 "나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을 신종하는 자입니다."라는 뜻이다. 라스타파라아니즘은 흑인왕국주의라는 뜻으로, 흑인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드레드록은 전사의 표식이다. "더 이상 백인의 지배를 거부한다. 나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전사, 라스타다"라는 표식이었다. 이렇게 모든 패션에는 다 이유가 있다.


(179)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댄스뮤직이다. - 리하르트 바그너


(197)

여기까지가 바흐가 죽고 난 후 베토벤이 죽고 난 뒤까지 약 79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이 시기 동안 우리가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두 사건인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이때 모두 일어났다. 하루하루 역사가 매일 새롭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격동의 시기에, 모차르트의 짧은 35년간의 삶과 베토벤의 정말 파란만장했던 57년의 삶이 얹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기반 없이 이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시대를 만든 것도 있지만, 결국 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208)

바흐가 남긴 어록 중에서 정말 바흐를 잘 설명하는 한마디 말이 있다.


"누구나 나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나만큼 쓸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바흐는 진심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바흐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는 아니었다.



(226)

요제프 2세는 그 오페라의 초연을 보고는 이렇게 딱 한 줄로 표현했다.


"친애하는 모차르트여, 그대의 작품에는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




(235)

하이든은 정말 끔찍이도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함부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번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의 화음이 이상하다는 어떤 동료 궁정 음악가의 지적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그렇게 썼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지."



(252)

상황이 이렇게 달랐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창작의 동기도 달랐다. 모차르트의 꿈은 자기 작품을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작품은 630개가 넘는 그의 작품 중 몇 개 되지 않는다. 먹고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귀족들에게 위촉받은 것이나 후원자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반면에, 베토벤은 서양음악사 최초로 누구의 주문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작품을 쓴 작곡아였다. 물론 베토벤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헌정했다. 하지만 모차르트와는 달랐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헌정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곡을 써놓고 난 뒤에 누군가에게 떠맡기듯이 헌정을 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자기 마음대로 헌정을 해놓고는 돈을 달라고 한 적도 있다. 마치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것처럼 작품을 헌정하고, 돈을 요구해서 받아낸 것이다.




(266)

"친구들이여, 박수를 쳐라! 연극은 끝났다."


베토벤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말이다. 폼 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죽기 하루 전에 한 것이다. 실제로 베토벤은 이런 말을 끝으로 눈을 감는다.


"아깝다, 아까워. 너무 아까워!"


베토벤은 대체 뭘 아까워했던 걸까. 베토벤은 병석에서 와인을 주문했다. 그런데 그 배달이 조금 늦었다. 그는 마지막 와인을 먹지 못하고, 아니 따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와인 도착이 너무 늦었다고 한탄하면서 죽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을 규정하는 말 중에 나는 롤랑 마뉘엘의 이 문장을 가장 좋아한다. 


"베토벤은 음악을 기술에서 의식으로 만든 사람이다."



(270)

모차르트는 죽기 3개월 전 자신의 친구이자 최고의 동료였던 대본 작가 로렌초 다 폰테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썼다.


"쉬는 것보다 작곡하는 것이 덜 힘들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일을 한다."


굉장히 짠한 마음이 드는 말이다.



(272) 

그(모차르트)가 지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 스물두 살의 더벅머리 청년이 이 저주의 도시 빈에 등장했다. 그는 스승 하이든의 인도를 거부했으며, 한 번 밖에,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인, 모차르트의 오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계했다. 이 청년 베토벤은 모든 제단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권좌를 만들었다. 불손하기 그지없었던 베트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할 규범이란 없다."


나는 이 짤막한 한 줄이야말로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영원한 챔피온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학적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0쪽)

자본주의의 사란 이 공공재를 특권적인 소수의 강자들이 배타적으로 점유, 사유화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농민이나 하층민들이 삶더와 생계수단을 빼앗기고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임금노예의 삶을 강요당해온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 단계에서 벌어진 이러한 폭력적 사태는, 실은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에 국한된 게 아니라 지금까지 그 본질은 조금도 변함없이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어왔다. 즉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데이비드 하비,<신자유주의 약사>, 2005)은 자본주의의 일관된 작동 기제라 할 수 있다.


(22쪽)

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 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애 없었고, 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 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 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 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86쪽)

대학은 운영하는 대학본부는 대학의 운영 목표를 학문 탐구와 지적 성숙을 이끄는 교육에 두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의 관리체제는 기업의 관리체제와 같다. 기업의 경영 결과가 재무제표라는 숫자로 나타나듯이 대학의 운영 결과는 대학의 순위로 나타난다. 가령 순위평가에서 7위인 대학은 6위인 대학에 비해 좋지 않은 대학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대학의 모든 노력은 순위를 올리기 위한 것이 되고, 순위평가에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부문은 대학 운영진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정부 역시 대학을 숫자로 관리하며, 그 숫자에 의해 재정지원 여부와 그 규모를 결정한다. 대학정보공시라는 제도는 겉으로는 각 대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이지만, 이 정보 공시에 나와 있는 정보는 그 학교에서 무슨 연구를 하며 어떤 교육을 받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학에 대한 정보든 숫자이다. 학생의 수, 교수의 수, 논문 편수, 예산 규모, 유학생 수 등이 공시의 내용이며, 이러한 숫자를 나열하면 대학의 면모를 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숫자가 지배하는 대학, 돈이 지배하는 대학에 대학의 본령인 학문과 교육은 없다. 대학은 이미 몰락하였다.



(88쪽)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 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 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142쪽)

이 급진적 변화란 무엇인가? 사실상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초,중등교육은 물론 대학에서도 인문학과 예술 교육이 축소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가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붙들린 정책결정자들의 눈에는 인문학이나 예술은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학 것으로 비쳐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고 그것들은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부모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빠른 속도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과 사회과학이 갖고 있는 인문학적 측면-상상력과 창조성에 관계된 요소 및 엄격한 비판적 사고-도 단기적인 이익추구에 혈안이 된 국가정책 때문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148쪽)

세계시민이 되자면 정말 인문학이 필요한가? 세계시민이 되자면 우선 많은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인문적 교육 없이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시민이 되자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즉 역사적 증거를 평가하고, 경제적 논리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사회적 공정성 여부를 평가하고, 외국어를 말하며, 세계의 주요 분쟁지역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적 부분들에 관한 지식만을 얻는 데는 인문학과연관된 지적 기술이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연관관계들의 어떻게 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실적 지식만을 갖는 것은 거의 무지만큼 나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학생들은 정치가들이나 문화적 선도자들이 제공하는 상투적인 것과 진실한 것 사이를, 진짜와 가짜 사이를 구분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나 경제에 관한 이해가 지적으로 총명한 세계시민의 육성에 쓸모 있는 것이 되려면 인문적, 비판적 능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 따라서 종교나 정의에 관한 철학적 이론에 대한 학습과 나란히 이루어져야 한다 



(149쪽)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 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 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고, 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154쪽)

<일본의 '영어화' 정책, 망국으로 가는길>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두 지식인의 토론 중에서...

일본어가 학문연구라는 고도의 의론의 장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 일본어도 최첨단의 용어를 갖지 못하고 뒤떨어진 언러로 전락합니다. 일본어가 그렇게 열화된다면 그것이 또 일본 국민의 우민화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표면상으로 영어를 매끄럽게 말하는 엘리트들도 모어(母語)에 입각한 깊은 사고력이라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우수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일본 전체가 우민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179쪽)

우리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회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의 저자로 거듭난다면 현실정치가 지금과 같은 파행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정치가 유권자를 이토록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율적 인간, 그리고 자율적 인간이 형성하는 공동체가 가져야 할 기본 능력이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노와 절망을 글로 써내고, 꿈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 위에 인용한 글의 저자가 말했듯이 소망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그라민은행을 설립하고 '소셜픽션'을 창안한 무하마드 유누스가 말했다. "꿈은 함께 꿀 때 더 빨리, 더 크게 이뤄진다." 사회적 글쓰기는 함께 꾸는 꿈이다. 집단지성이고 소셜픽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절대적으로 옮다면 왜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을가?

법은 결토 완벽하지 않네.

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


"오히려 법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미성년인 경우,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


그도 그러했다. 자기의 생활만 보장되면 

다른 사람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년범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느냐?

문제 해결을 위해서 무슨 노력을 했느냐?

그렇게 물으면 그도 대답을 할 수 없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기 역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공범자라는 사실을.

공범자에게는 죗값을 치러야 할 책임이 똑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번에 선택된 사람은 자신이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58쪽

노무현 대통령은 역사를 참 좋아하셨습니다.

특히 계몽주의의 역사를 좋아하시고 많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저희가 흔들리면 안되는 것이 바로 그런 부분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해관계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야 이리 가고 저리 가죠.

그러나 역사의 흐름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다른 길로 가겠습니까.

어쨌든 국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했으면 좋겠고, 

신자유주의적인 문제점이 해결됐으면 합니다.

장 교수의 처방이든 제가 말한 처방이든,

처방은 다를 수 있겠지만 해결이 됐으면 합니다.

역사는 결국 우리가 다 같이 잘사는,

그리고 지속 가능한 성장이 이뤄지는 사회로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믿고, 같이 생각을 다듬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

99쪽

마지막으로, 진보정치의 지도자를 다시 부엉이바위 위에 세우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물론 인식과 실천은 같이 가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식이 중요하다고 한들,

진보정치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이 진보적인 정책들을

어떻게 현실 속에서 구체화하고 현실화하고 제도화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진정한 서민, 중산층들이 자존심 다치지 않으면서 품격을 지니는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 격조 있는 사회에서 살 수 있을까요?

진보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안전한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 품격이 있는 사회가 바로

진보가 추구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

245쪽

역사는 진보하고 있고, 정치제도나 경제제도는 그 구성원들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또 그렇게 노력해야 하는 이유들도 설명합니다.

전 지구적인 노력을 통해서 전쟁을 끝내고,

인간 이성의 힘이나 과학의 힘으로 사회제도를 개선하고

인간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역사적인 인식을 보여줍니다.

이런 인식을 철학자나 역사학자가 이야기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아주 냉철한 현대 경제학자, 주류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다는 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큰 힘이 됩니다.

사실 인간이란느 것은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방향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서 바뀌는 것이거든요.

학생들을 교육해보면 그저 평범한 학생도 계속 칭찬해주면서 잘한다고 하면

자꾸 그 분야를 개발해나가니까 정말 잘하게 됩니다.

그런데 괜찮은 학생도 타박을 주고 못한다고 하면 점점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이 인류의 역사가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대학자의 방향 설정과 믿음을 보여주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열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감동적이이었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감동이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동받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공감'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그 느낌을 '표현'해야 한다.

마지막의 '표현'은 가장 중요한데, 그 결과로 눈가에는 주름이 생기고 

큰 소리로 웃음이 나오기도 하며,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라는 감탄사가 터져나오기도 한다.

가장 극적일 경우에는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그러고 나면 그 감정과 이해의 진폭이 나에게 되돌아와서 감동은 더 커진다.

관객이 많이 차 있는 공연장의 분위기가 더 좋은 이유는 이러한 피드백을 서로가 공유하기 때문이다. (9쪽)



열정이 행복을 만든다. - 버트런드 러셀 (15쪽)



카리스마와 강압적인 것은 혼동되기 쉽다.

사람들이 리더의 순수한 의지에 감동하고 존경을 느꼈다면 그것은 카리스마다.

그러나 리더가 주는 공포 때문에 질서가 잡힌다면 그것은 강압적인 것이다.

후자는 일시적인 효과만을 가져온다.

강압적인 지휘자는 결과적으로 완벽한 연주를 해서 

모두가 자신에게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의 적들, 즉 단원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지휘자를 위해 연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연주하게 된다.

관객들은 완벽함에 박수 치지만 그 이상의 가치는 경험하지 못한다.  (42쪽)




잠깐, 정신을 차리자. 문제는 언제나 해결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54쪽)



음악은 돈과 성공 그 이상의 무엇이다.

'돈'은 그것이 지닌 가치를 이용해 다른 것과 교환하기 위한 수단이며,

'성공'이란 어떤 것을 포기하지 않고 이뤄낸 결과다.

이 두 가지는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며,

음악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아이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당신의 아이를 인생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면

우리는 음악을 가르쳐야 한다.

음악을 모르고도 살 수는 있다.

인생의 정수를 모르고도 숨을 쉴 수는 있으니까.

그러나 그런 삶을 대물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8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