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길을 가다가 예고 없는 비를 만난다면 백에 구십구는 비를 피할 곳을 찾아들거나, 우산을 쓸 거라고 생각해요.  일단 나는 급한 일이 없다면 비를 피하고, 좀처럼 그치지 않겠다 싶으면 우산을 사는 편입니다(덕분에 혼자 사는 집에 우산이 여섯 개쯤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폭우 속을 우산도 없이, 쫄딱 젖은 상태로, 아주 바쁘고 급하게 걸어가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그런 사람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때그때 다를 것 같은데, 어떤 때는 '비 맞는 걸 좋아하는가 보다'할 수도 있겠고, '미친 거 아니야?'할 수도 있겠고, '급한 볼일이 있나 보다'할 수도 있겠고, '우산 살 돈이 없나 보다'할 수도 있겠고, '더운가 보다'할 수도 있겠고,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상상을 조금 더 진행시켜 보죠. 

좀 전에 말한, 폭우 속을 우산도 없이 아주 바쁜 듯 걸어가는 그 사람이 1년 365일 정말 미친 듯이 걸어 다닌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운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직업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요. 그 사람은 단지 걷고 또 걷기를 쉬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쳤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니면, 저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고 어깨 한 번 으쓱하고 모른 척해야 할까요?


 이미 예상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앞서 얘기한 '그 사람'의 이름은 '좀머 씨'입니다. 이 책 『좀머 씨 이야기』의 좀머 씨죠. 좀머 씨에게는 '강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강박을 간단히 설명하면, 한 곳에 멈춰서 있으면 '무엇'인가가 자신을 찾아낼 거라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네요. 

 정말 좀머 씨는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그 '무엇'으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쳐 다닙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우박이 쏟아지는 날에도, 더운 날에도, 추운 날에도, 끊임없이 걷고 또 걷지요. 좀머 씨를 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병이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 병이란 게 정신병이기에 결국 거칠게 말하면 미쳤다는데 동의하는 셈이죠. 

 책의 제목은 『좀머 씨 이야기』지만 실제 화자는 '나'이고, 전체적인 이야기는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좀머 씨는 그 이야기 속에 서너 번 등장할 뿐이죠. 그럼에도 책의 제목이 『좀머 씨 이야기』인 이유는 '나'의 삶에서 좀머 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정적인 역할'인지 궁금하신 분은 한 번 읽어보세요. 길지 않은 이야기라 금세 읽을 겁니다.


 '나'는 좀머 씨가 이야기하는 걸 딱 한 번 보게 됩니다. 폭우와 우박이 쏟아지던 날이었고, '나'는 아버지와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죠. 폭우와 우박이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들판을 지나갈 때 '나'는 좀머 씨를 보게 됩니다. 폭우와 우박에도 걷기를 그치지 않은 좀머 씨였지요. 

 '나'의 아버지는 좀머 씨에게 자동차에 타기를 권하며, 평소에는 '틀에 박힌 빈말'이라며 쓰지 말라고 하던 표현인 '그러다가 죽겠어요'라고 말해버립니다. 아버지 나름대로는 좀머 씨를 생각해서 한 말이겠죠.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좀머 씨는 몹시 흥분해서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말하고는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처음 『좀머 씨 이야기』를 읽었을 때가 떠오르네요. 그때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라는 좀머 씨의 외침이 단숨에 가슴에 와서 박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굳이 이런저런 설명의 말들을 가져다 붙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죠. 

 이런 게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좀머 씨에게만 보이는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보통의 사람들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지만 좀머 씨는 그 '무엇'이 시시각각 거리를 좁혀 오는 게 느껴졌던 것일 거라고요. 


 우리는 종종 '호의'를 베풉니다. 대부분의 경우 호의는 받아들여지고, 예외적인 경우에는 정중히 거절당하기도 하죠. 하지만 좀머 씨처럼 배은망덕하게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네, 배은망덕이라고 적었습니다. 일부러 적은 거죠.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좀머 씨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오히려 꺼려하는 호의를, 그것도 '틀에 박힌 빈말'을 건네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던 것 아닐까요.


  정말 의미도 없이, 무용하게 매일 걷기만 하는 좀머 씨는 우연히 '나'의 생명을 구합니다. 자기 자신은 아마도 '죽음'의 공포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있으면서 죽음을 두려워할 줄도 몰랐던 어린 생명을 구한 거죠. 상투적인 줄 알지만 아이러니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네요. 

   

 좀머 씨는 '나'를 구합니다. 좀머 씨가 원해서 그랬든 아니든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구하죠.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번에는 '나'가 좀머 씨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왜 인지는 모르지만 평생을 '무엇'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던 좀머 씨가 스스로 호수 밑으로 가라앉는 걸 선택한 그날에 우연히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거죠.

 좀머 씨는 도망치기를 그만두고 가라앉기를 선택합니다. '나'는 그런 좀머 씨를 구할 수 있는 상황에 있고요. 

'나'는 좀머 씨를 부르지도, 구하지도 않습니다. 서서히 멀어지며, 좀머 씨의 허리가, 가슴이, 어깨가, 머리까지 잠겨 파문이 사라질 때까지 다만 바라보고 있었죠. 

 법적으로 '나'는 자살을 방조한 셈이 되기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됩니다. 구할 수 있었던 소중한 생명을 죽게 내버려둔 도의적인 책임 또한 피할 수 없고요. 하지만 좀머 씨가 호수 밑으로 가라앉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나'뿐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좀머 씨 자신이 이제는 그만 도망치기를 멈추기를 바란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도 '나'였던 거죠. 

 좀머 씨의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부탁을 '나'는 들어줬던 거죠.


 이런 글을 쓴다고 해서 평생 도망치기만을 계속하던 사람이 도망치기를 그친 이유를 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겠죠.

 좀머 씨만큼은 아니지만 저 역시 많은 것에서부터, 아주 많은 순간에 도망치기를 거듭해 왔습니다. 지금도 어떤 일들에서는 도망치기를 계속하고 있고요. 도망치기를 그만둔 일들을 생각해보면, 도망치지 않아도 될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던 일이 더 많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생각에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하고 싶지 않은 일들에서 도망치는 건 쉽지는 않지만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평생 동안 도망쳐 다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 경우를 얘기해 보죠.

나는 언제 도망쳤을까요? 

대부분의 경우, 두려울 때 나는 도망쳤습니다. 마주하기 벅찰 만큼 두려움이 클 때, 도망치고 또 도망쳤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모르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나를 바닥이 없는 두려움의 구덩이로 몰아넣었습니다. 모르기에 두렵고,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도망치기에 알 수도 없는 상황이 반복됐던 거죠.

   

 평생을 도망쳤던 좀머 씨는 마지막에 무엇을 알게 됐을지 궁금합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일을 그만둘 만한 어떤 것을 얻었을 테니까요. 

좀머 씨가 지쳐서 포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포기라는 감정의 근원은 약함이기에 그렇게 단호하게 가라앉지는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저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도망치기를 그쳐 가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세상을 이해하겠다고 덤벼들었다가, 이상한 세상이라거나, 이해 못할 세상이라며 포기하기를 거듭했죠. 정말 뻔하고 단순한 거지만 나를 모르고서 세상을 이해하겠다고 덤볐던 게 무모했던 거죠. 

 그릇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물을 담을 수 없다고 불평하는 셈이랄까요.


 사실은 여전히 많은 일들에서, 생각에서 도망치고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는 평생 도망치다 끝이 날지도 모르죠. 그래도 조금은 더 필사적이 되어야겠다고 늘 생각합니다. 도망치는 것도 필사적으로, 맞서는 것도 필사적으로,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도망치기를 그쳐도 되는 날에 닿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조금 미친 것처럼 보인들 어떤가요.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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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3648 2016-10-19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었는데 생각하는 깊이가 다른것 같습니다. 정말 글 잘 쓰신것 같습니다

대장물방울 2016-10-20 00:32   좋아요 0 | URL
영광입니다. :)
같은 책을 읽은 분과 알게 되어서 기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