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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ㅣ 바벨의 도서관 27
허먼 멜빌 지음, 김세미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바다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소설을 읽는 우리는 언제 놀라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소설 속 무엇이 우리를 놀라게 했는가?"하는 물음과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필경사 바틀비』는 두 질문에 같은 것으로 답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내가 생각한 답은 '허무함' 혹은 그와 쌍둥이나 다름없는 '덧없음'이다.
무엇의 허무함이고 덧없음인지 얼마간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신을 '나'로 소개한 화자는 스스로 밝히기를 '극도의 안전 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법률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야망 없는 변호사 가운데 한 명'이며, '부자들의 채권과 저당권과 권리증서들을 다루며 안락하게 일'하는 신중함이 장점이라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나'가 업무가 크게 늘면서 새로운 필경사를 고용하게 된다. 그렇게 고용된 필경사가 바로 '바틀비'다.
보통의 필경사를 기대했던 '나'의 바람과 무관하게 바틀비는 필사 외의 업무를 거부한다. 정말 당당하고도 단호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던 거다. 아마도 '나'가 극도의 안전 주의자인 동시에 신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텐데 업무를 거부하고도 바틀비는 당장에 해고되지 않는다. 하지만 바틀비는 점점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늘어간다.
'나'는 결국 특단의,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고 바틀비의 운명은 비극적인 결말을 향한다.
『모비딕』속 에이해브의 광기에 찬 복수와 비극적 운명과도 닮아 있는 바틀비지만 그 태도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하고 싶지 않다'는 수동적인 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능동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바틀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현을 찾자면 '수동적 능동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가 결말에 닿아 '나'가 바틀비의 이력을 이야기해줄 때까지 독자는 왜 바틀비가 '하고 싶지 않'아 하는지, 그 고집스러움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 하나는 저절로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바틀비의 '싶은'이라는 표현이 갖는 마력이 전염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내 경우에는 평생을 필사로 먹고 살아온 60대 동료 필경사인 터키가 쓴 '싶다'는 단어를 '나'가 짚어내는 순간에 바틀비처럼 나 자신 역시 '싶은'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에 놀란 이유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뭐라고 마음속에 숨겨진 '소망'이라고 해도 좋을 본능을 일깨웠을까 싶어 졌기 때문이다.
터키도, 또 다른 필경사 니퍼즈도, 화자인 '나'조차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틀비의 당당하고도 단호한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태도에 끌렸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야기가 결말 무렵에 이르면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끌림, 전염이 사실은 이미 텅 빈 껍데기를 향한 '죽어버린' 혹은 '의미를 잃어버린' 어떤 것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지점에서 이 짧은 소설, 도무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 거부를 거듭하는 바틀비의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 된다(왜 그런지 궁금하다면 길지 않으니 꼭 읽어보시길).
세상에 존재하는 일단의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하나의 의미가 살아남아 전해지기 위해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바틀비의 이야기가 허무함과 덧없음에 수렴하는 이유는 이미 바틀비는 의미를 잃고 껍데기만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바틀비의 말과 행동이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 또한 바틀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 역시 텅 비어있었으므로, 바틀비의 울림을 따라 공명했던 것이 아닐까. 그 공명이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의 내부에까지 퍼졌던 것은 아닐까.
'본래 그러했어야 했던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런 의도가 전해 지거나 실현되지 못하고 유실되어 사라졌다면, 그 사라짐으로 인해 처음의 의도를 통해 삶의 무게 혹은 마음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던 사람들, 행복해져야 했던 사람들이 불행 속에서 절망하며 죽어갔다면(반드시 숨이 끊어지는 '죽음'이 아닐지라도) 처음의 의도는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어지는 것일까.
바틀비의 이야기에 담긴 비극은 그 지독한 허무함으로 허무 타령을 일 삼곤 했던 나를 놀라게 했다.
덧없음이 다시 의미를 갖는 순간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허무함은, 덧없음은 상실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바틀비의 삶은 허무했으나 그의 이야기는 전해지고 다시 전해져서 다른 의미를 낳을 것이다.
'싶다'는 말이 사치처럼, 때로는 금기처럼 되어버린 시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오래된 박물관의 박제처럼 낡아가는 이 날들에 바틀비의 삶은 어떤 의미를 낳게 될까.
새롭게 생겨난 이 의미에 허무함과 덧없음에서 느꼈던 놀라움보다 더 커다란 놀라움을 느낀다.
조용하고 격렬하게 분노하는, 수동적인 능동성을 소유한 바틀비.
나도 가끔 바틀비처럼 말하고 싶어 질 것 같다.
"아니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