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 - Movie Tie-in 펭귄클래식 139
솔로몬 노섭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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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실 소설이라고 부르기 미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이유는 이 이야기가 저자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영화도, 가상의 이야기도 아닌 누군가에는 현실이었던 이야기다. 자유인으로 태어나 노예로 전락한 상태로 절망적일 정도로 길게 느껴졌을 12년 동안의 이야기인 거다. 


 이 작품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솔로몬 노섭은 1808년 노예제도가 폐지된 미국의 북부, 뉴욕 주에서 자유인으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노예였지만 마음 좋은 주인을 만나 일찍 자유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솔로몬 노섭은 흑인이지만 자유인으로서 30년 넘는 시간을 보낸다. 바이올린 연주를 배우고 기술을 익히고, 부인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납치되어 아직 노예제도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남부로 끌려가게 된다. 자신의 본래 신분을 떠벌렸다가는 언제든 맞아 죽을 수 있다는 공포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다시는 가족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이 된다. 결국 솔로몬 노섭은 틈을 노려 편지를 보내서 소식을 전하거나 탈출을 궁리하면서 훌륭한 노예를 연기한다. 


 만약 나였다면 30년 넘는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불과 며칠 만에 박탈당하고도 참아낼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많은 흑인들이 납치되어 노예가 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중 대부분은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주인에게 살해당하거나 도망치려다 죽거나 잡혀와서 맞아 죽거나 하는 비극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남은 노예들은 더 순종적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였다. 일단 사람이기에 살고 싶어 하는 게 자연스러우니 말이다. 놀라운 건 대부분의 노예들은 결코 반항하거나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들은 완전히 길들어 있었다. 이것은 학습된 무기력과 다르다. 어떤 노예들은 '기꺼이' 노예를 자처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를 노리고 다른 노예들을 괴롭히는 노예도 있었다. 


 사실 이런 풍경은 현대, 우리 사회에도 만연해 있다. 노예를 자처하는 사람과 노예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흔히 우리는 '권력의 노예'라는 말 혹은 '금전의 노예'라는 말을 예사로 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살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말을 하는 본인들이 그 누구보다 앞장서 있는 노예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노예 12년 속 솔로몬 노섭의 경우는 무척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가 글을 몰랐다면, 손재주가 없었다면, 악기를 잘 연주하지 못했다면 그의 운명은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았을 거였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몰랐다면 악사로 고용되어 납치되는 일도 없었겠지만 그를 납치하려는 사람들이 무슨 구실을 대고 그를 끌어들였을지 모르기에 그의 배움과 앎이 힘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겠다. 


 솔로몬 노섭이 노예 생활을 끝내고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자신이 자유인임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였다. 자유는 마치 형상기억 합금 같다. 자유롭던 시절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한 그 자유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0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시절을 잊고 노예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자유를 위한 생존보다 생존을 위한 복종을 택한다면 자유를 되찾을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거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고 하루하루 무너지고 망가져가는 여자 노예의 사연이었다. 그 여자는 주인에게 사랑을 받아 거의 자유인처럼 살며 아이를 낳고 기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주인이 약해진 틈을 타, 여자 주인과 사위가 그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상에게 팔아버린 거였다. 아직 어린 딸은 크면 예뻐질 것이라며 높은 값을 매겨 여자를 산 주인이 함께 사들일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아들과도 그렇게 헤어졌다. 혼자 남은 여자는 아이들을 걱정하고 그리워하느라 야위고 약해져 간다. 그리고 결국 아이들과 다시 만나는 일 없이 일찍 죽어 묻힌다. 


 우리나라에도 노예제도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바로 노비제도다. 하지만 나는 노예제도보다  노비제도가 더 악독한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서양의 노예는 피부색이 다르거나 인종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다른 인종을 저능하다고 여겼고, 천하다고 믿었으며, 발달이 덜 된 미개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고를 노예에게 심어주기 위해 짐승의 우리에 재우고 가축과 동일하게 다루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노비제도는 어떤가? 바로 이웃하고 지내던 이웃집 사람들이 다음 날부터 노비로 전락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같은 민족, 같은 피부색, 같은 교육 수준에 있어도 노비는 양반은커녕 평민과 마주 앉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지독한 차별과 계급의 구별이 우리나라에는 있었다. 노비는 혼까지 노비로 물들게 만들었다. 노비 문서를 만들어 대대로 사고 팔며 종속시켰다. 노비는 물건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거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신분이 천한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죽음을 앞당기는 일이 적지 않았다. 개혁의 의지도 가능성도 없는 꽉 막힌 세계. 그것이 과거 우리나라에 드리웠던 어둠이다. 


 이 시대는 어떨까? 조선이 대한민국이 되면서 우리는 자유를 되찾은 걸까? 

사람들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누리고 있는가? 


 노예와 자유인의 간극은 아주 작은 사고의 차이에 있다. 자유인이라고 해도 사고가 노예나 다름없으면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노예처럼 묶여 있더라도 자유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고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노예로 살다 노예로 죽지 않을 수도 있다. 


거의 모든 것이 생각의 문제다. 행동은 생각의 결과물이다. 아무리 무의식적인 행동, 충동적인 행동이라고 해도 생각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 튀어나오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 바로 자유에 대한 의지라는 이야기다. 

 자유인으로 태어나 노예처럼 부려지는 삶이 있는가 하면, 노예로 태어나 자유를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되묻는다. 대답은 당연히 자유로운 삶이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그리고 자유롭게 살 것이다. 


 나는 노예는 되지 않겠다.

그런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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