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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첫 이야기의 소제목인 '스노볼'을 보며 조지 오웰의 짤막한 풍자소설이자 고발 소설인 『동물농장』을 떠올린 사람이 나만은 아니길.
노골적인 이야기들을 즐겨 읽을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싫어하는 것은 아니나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2015년 국제 도서전에서 사 가지고 온 몇 권 안 되는 책 가운데 한 권이다. 그때 산 책 가운데 한 권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서 다른 공간의 낯선, 혹은 그 책에게는 더 잘 어울리는 곳에 꽂혀 있다. 이 책을 떠나 보낸다면 누구에게 보낼 수 있을까? 솔직히 냉큼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누구에게 줘도 될지 확신이 생기지 않는 책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골적인 이야기들을 즐겨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 한 말의 반복 같지만 조금 다르다. 자신이 즐겁게 읽었다고 느껴지는 것을 권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불편한 것을 어떻게 선뜻 건네며 권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렇게 선뜻 건네기에는 책 표지마냥 차갑고 또 무거운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노골적인 이야기를 즐겨 읽지 않는다면서 하루키는 어떻게 즐겨 읽을 수 있느냐는 물음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그런 의문을 떠올렸을 사람이 있다면 하루키는 전혀 노골적인 문체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루키의 세계는 꿈속처럼 혹은 안개 속 풍경처럼 언제나 모호하다. 현실인가 하면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이 배경인 경우가 많다.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이 세계, 현실에 대한 은유로 존재한다. 그 세계의 사건들, 일화들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는 어디까지나 은유에 능한 작가라고 해야지 노골적인 작가라고 할 수 없다는 게 내 짧고 좁은 생각이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책 『최선의 삶』을 골랐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목, 다른 하나는 "체급이 달랐다"고 한 심사평이었다. 제목에는 어떤 식으로 공감해야 할지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지만 체급이 달랐다는 말은 납득이 갔다. 물론 다른 작품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어떤 수준이었는지는 알지도 못하며 그것을 판단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반칙이라고 할 수 있을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파격을 느낄 수 없으면서 끊임없이 불편함을 자극하는 끈질김이 있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불편했다. 그러나 중간에 읽기를 그쳤다가 다시 읽기 시작한 뒤로는 내리 읽어 내려갔을 만큼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무엇에든 의존하고, 의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성격 탓에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불편했다. 그 어떤 외적인 요인도 일탈이나 방황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또다시 불편했다. 이 아이들, 이 아이의 삶이 제목처럼 최선의 삶이라면. 그런 삶 외에는 도무지 선택할 수 없었다면, 그런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떠올려보려 했을 때도 몹시 불편했다. 불편함을 피해 페이지를 넘기면 또 다른 불편함이 기다리는 그런 이야기. 어쩌면 최악의 삶을 담고 있는 것만 같은 이야기는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나의 시선을 놓아주었다. 솔직히 다 읽고 난 후에도 그저 불편함 외에는 무슨 이야기였는지, 뭘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잘 완성되었다는 생각은 확신처럼 떠올랐다. 불편한 데다, 재밌는 구석이라고는 없고, 공감하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의 무엇이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했을까? 아마 앞으로도 오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을 것만 같다.
최선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을 보면,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존경스럽기만 하다. 어떻게 최선의 삶을 꿈꾸고 그릴 수 있을까? 그저 막연히 상상할 뿐이다.
누구를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하는 기분을 모르겠다. 어떻게 그런 원망이 생겨날 수 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운이 좋아서일 수도 있고, 수동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그런 환경에 익숙하게 노출되어 무감각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건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그리고 굳이 이해해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불편했고, 또 이런 밋밋한 감상으로 밖에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게 지금의 상태라고 받아들이면 그만인 거다.
누군가 내게 "그 책 어땠어?"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거나, 함께 죽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이 있다면 꼭 읽어봐"라고 말이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거나 함께 죽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사림이 없다면 읽어봐도 되고 안 읽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
동류는 동류를 알아본다고 한다. 아니다. 동류는 동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거다. 자기 안의 해소되지 않은, 사라질 것 같지 않은 환상과도 같은 괴로움과 자주 마주친다면 그 환상, 시원하게 지워버리는 게 최선이 아닐까?
우스운 건 그토록 불편했던 소설이 마지막 장을 덮고 한 동안을 보낸 후 감상을 적는 지금에는 조금은 아련하고 애틋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정말, 최선이란 게 뭔지. 우습기만 하다. 이유모를 웃음만 난다.
뭐, 그런 작품이다. 무슨 말을 더 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