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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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든 콜필드는 열여섯 살 난 고등학생이다. 이제 곧 퇴학당할 것이기에 '퇴학 예정 고등학생'이지만 말이다. 홀든 콜필드는 몹시도 지루해 하고 있다. 아니다. 정확히는 외로워하고 있고 슬퍼하고 있다. 이유는 많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 친구들은 하나 같이 영화관으로 몰려가거나 시시하고 '연극같은' 연극에서 받은 얘기들을 나누는데 열중할 뿐이다. 좋은 대학에 가서 돈을 많이 벌게 되기를 꿈꾸는 시시껄렁한 얘기들 말이다. 

 홀든 콜필드가 지루함이나 슬픔 혹은 외로움의 크기를 표현하는 방법은 독특하다. 상황이나 느낌을 무척 과장해서 말하는 거다. 번번히 '목이 부러질 뻔'하거나 몇 번이나 몇 십 번일 것을 수백 수천 배로 부풀리는 식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는 '고통'만큼은 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룸메이트인 스트라드레이터에게 윗입술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그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스스로를 '강인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벨보이에게 배를 얻어 맞았을 때도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싶을 정도의 통증이었음에도 그 이상의 묘사를 하지는 않는 거다. 


 '거침' 혹은 '강인함'을 꿈꾸는 사춘기 특유의 허세인지 아니면 고통 혹은 통증과 마주하기를 꺼려하는 두려움 때문인지 그 근원은 불분명하다. 다만 정말 사랑했던 여동생 앨리가 일찍 죽었던 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볼 뿐이다. 홀든 콜필드는 이야기나눌 사람을 찾아 뉴욕을 헤메고 다닌다. 죽어라 담배를 피워대고, 술을 마시고, 누군가 적당한 사람에게 연락을 시도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거나 만나더라도 여전히 외로움에 시달린다. 홀든 콜필드의 목적은 어떻게 보면 '말을 할 사람을 찾는 것'인 셈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생각해주지 않는다. 저마다의 일로 바쁘고 분주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이 대표적인 성장소설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홀든 콜필드는 여전히 홀든 콜필드고 극적인 화해나, 반전도 없이 그저 '흘러가기 때문'이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자지도 못하고 헤메다닌 덕에 결국 병을 얻었다는 식으로 퇴학 사실에 대한 어떤 처벌이나 곤란 없이 다시 집으로, 가족 안으로 들어갔다는 식의 이야기처럼 읽힌 거다. 하지만 내내 앨리만을 가장 좋아하던 홀든 콜필드가 여동생 피비가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돌림과 동시에 자신이 있을 곳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과정에서 깨닫게 됐다.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단 한 사람, 작고 약한 여자 아이 하나만으로도 사람은 자기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다만 그런 한사람조차 찾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고, 그래서 방황이 그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게 아닌가 한다. 

 모든 숫자와 가능성, 상황과 위험을 과장하기 좋아하는 열여섯 소년 콜필드는 자기 스스로를 잘 안다고 믿는다. 하지만 번번이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행동을 충동적으로 해버리고는 후회하기를 반복한다. 그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앞으로는 반복되지 않을 거라는 장담도 없다. 어쩌면 정신분석을 좀 더 일찍 받아서 치료를 받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부모는 그가 정신분석을 받고 그 치료를 통해 좋아졌다고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를 낫게 하는 건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그 존재의 힘이다. 


 콜든 홀필드의 바람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낭떠러지인 줄도 모르고 달려가는 아이들을 붙들어주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인 거다. 종종 그렇듯 자신이 받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주고 싶어하거나 해주기 마련이다. 홀든 콜필드가 가장 바라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던 거다. 자신을 붙들어줄 사람, 외로움과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존재가 간절했던 거다. 그토록 사랑스럽던 여동생 앨리를 잃은 상처도 아직 다 치유되지 않았었다. 앨리가 죽던 날 차고의 유리창을 주먹으로 부수는 바람에 입은 상처로 주먹을 쥘 수도 없게 된 오른손처럼 겉으로는 나은 것처럼 보여도 이미 엉망으로 망가져 있던 거였다. 키가 크고, 머리가 세었어도 그것으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마음이 자란 다음인 거다. 마음이 어린아이여서는 언제까지고 어른이 될 수 없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마찬가지다. 그런 '행위'가 성장이나 성숙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어떤 의미로 그런 행위에 의존하는 건 불안이나 부족을 드러내는 행동인 거다. 불안하고 초조하기에 의존적인 행동을 더 자주, 더 심하게 하는 것으로 진실을 가리려는 시도를 거듭하는 거다.


 이 이야기의 다음에 홀든 콜필드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었을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다. 내게는 그저 입버릇 나쁘고 무진장 담배를 피우는데다, 술까지 마셔대는 키가 크고 센 머리가 많은 불량한 고등학생이 그려질 뿐이다. 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훌륭한 호밀밭의 파수꾼이 있다. 작고 어리지만 훌륭한 파수꾼 말이다.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파수꾼이 한 사람씩은 붙어다녔으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외로움과 슬픔이 조금은 덜어질텐데 말이다.

그렇게 슬픔과 외로움이 덜어지면 길가다 코나 입으로 흘러드는 담배연기에 불쾌해 하는 일도 줄어들테고, 술 주정으로 일어나는 불상사도 적어질텐데. 

 우스갯소리다. 그래도, 그런 파수꾼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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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 2 - 7년 후 다시 만난 쉴라와 헤이든, 그리고...
토리 헤이든 지음, 이수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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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는 학업을 마치고 나서 다시 쉴라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쉴라와 헤어진 지 7년이 지난 후 어느날, 쉴라와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재회한 쉴라는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도, 상상하던 모습도 아닌 시시껄렁한 펑크 스타일의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저 한 아이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토리는 자신이 그토록 애썼던 시간이 쉴라의 무엇도 바꾸지 못했음을 알고 실망하게 되고, 자꾸만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니 화가 날 수밖에 없고, 두 사람은 다시 충돌하기 시작한다. 

 쉴라의 아빠는 여전히 알콜중독과 마약중독으로 교도소와 병원을 오갔고, 7 년이라는 시간동안 쉴라는 10곳 정도나 되는 가정을 옮겨다니며 위탁 양육을 받거나 어린이집에서 생활을 했다. 위탁 가정에서 강간을 당하는 일을 겪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늘 이상한 질문을 한다고 외면당한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탓에 하나의 지식을 전달받았을 때 너무 많은 경우를 떠올리게 되어 그 지식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검증하고 확인하려 했기에 선생님들에게도 방해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토리가 재회하던 때의 쉴라의 상황이다. 여섯 살 때 삼촌 제리가 저지른 사건으로 쉴라는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 되어 있었으며 남자에 대한 극도의 경계와 사랑에 대한 불신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신기한 건 그토록 간절히 생각하던 엄마와 동생조차 거의 잊어버렸다는 점이다. 내부의 방어회로의 작동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안타깝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다행스러운 건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도 쉴라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거였다. 마약이나 술에 찌든 생활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저 고독하게 세상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던 거다.


 토리는 이런 쉴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점이 바로 그러한 점이다. 토리는 쉴라가 아직도 여섯 살 때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자신이 지켜주고 보호해줘야 하며 가르치고 고쳐줘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는 거다. 아이의 생각이나, 기억, 성향을 모두 부정하다시피 하는데 그걸 쉴라가 받아들일 리 없다. 

 토리는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주려 하지만 쉴라가 살아온 시간은 그런 모습, 그런 삶이 꿈만 같다고 느끼게 했을 거다. 결국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이 책이 쉴라에게든, 쉴라보다 덜하거나 더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됐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고 불안해 하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쉴라와 토리가 화해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얼핏보면 토리의 시도가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불로 태워 죽일 뻔한 문제아.

 지능이 보통 이상보다 높지만 불완전한 아이.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가 없고 불신으로 가득한 아이.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한 채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려고만 하는 아이.

 폭력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만 자신의 욕구와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아이.

쉴라는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토리는 그런 아이를 '길들였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야생의 여우를 길들인 어린왕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쉴라는 자신을 여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미라고 여긴다고 말한다. 특별하고 싶었던 거였을 거다.

쉴라는 단지 그 특별함을 실감하고 싶었을 뿐이었을 거다. 


 세상의 누구도 자신만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오거나, 자신이 죽겠다는 말에 놀라 전화를 하거나, 화를 내고 투정을 부리고, 심술궂게 굴어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 믿고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간절히 찾던 엄마가 그런 존재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엄마는 찾을 수 없었고, 엄마를 대신해 토리 선생님이 엄마와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리는 그저 '선생님'일 뿐이었다. 쉴라는 어렸을 때도 조금 더 나이들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다. 그래서 시험하고 화를 내고 다시 시험하기를 거듭했던 것이리라.


 이 책의 마지막에 두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쓰여지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한 아이 1>도 그렇다. 제프의 말이 옳다. 토리의 병원 동료였던 제프는 "기억이란 건 언제나 경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일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두 이야기는 토리의 해석을 거친 쉴라의 이야기지 쉴라의 이야기는 될 수 없는 거다. 그렇기에 쉴라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책 속의 자기가 곧 자기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주 외면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쉴라가 과거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또 받아들이고 난 후에 다시 이 책을 보거나, 누군가 이 책의 이야기를 하는 일을 경험한다면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쉴라에게 들이닥쳐서는 쉽게 물러가지 않았던 불행한 삶, 두려웠던 시간이 순간순간 되살아나지는 않을까? 나는 이런 염려를 지울 수가 없다.


 토리 헤이든은 분명 뛰어난 선생님이다. 열정도, 용기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아이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 아이가 보통의 아이와는 다른 특수한 아이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교육을 '가르치거나', '부여하거나', '고치거나', '바로잡는 일'이라고만 생각하는듯 하다. 하지만 진짜 교육은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게 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

 

 자신이 바라는 것, 바라지 않는 것을 찾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이 교육이 아닐까. 

마음을 닦는 일,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마음이 흐려지지 않도록 늘 말끔히 닦아내는 일이 교육이 아닐까 하는 말이다.

 아이들은 점점 더 똑똑해져 간다. 그러면 마음도 점점 더 맑아져 가는 걸까? 아무래도 나는 그걸 확신할 수가 없다. 

아이들 안에서 아이들을 발견해주는 교육이 실현되기는 분명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없다면 아이들은 자기 말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배우게 될까.

 자기가 아닌 것을 깨닫고 알아가면서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걸까? 

아아, 모르겠다. 


이 책은 이렇듯 진짜 교육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해주었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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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 1 - 아동교육 심리학의 영원한 고전 한 아이 1
토리 헤이든 지음, 이희재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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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적은 거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토리 헤이든은 특수아동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토리는 7명의 아이들을 받아 이민자 출신의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전문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안톤을 보조교사로 두고 중학생인 휘트니를 도우미 삼아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학기 초의 혼란이 잠잠해지고 아이들도 학교 생활에 익숙해져갈 무렵 토리는 또 하나의 아이가 그 반에 들어오게 될 거라는 사실을 전달 받는다. 토리는 지금 '다루고'있는 아이들도 힘에 부친다며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담당관인 에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결국 1월 어느날 한 아이를 교실로 데리고 온다. 

 그 한 아이의 이름은 '쉴라'로 최근에 세살 난 아이를 데리고 나가 불을 질러 죽일 뻔 한 이력을 가진 '정신 나간' 아이였다. 쉴라는 이 반에 임시로 맡겨진 것으로 주립병원에 자리가 날 때까지만 머무르기로 한다. 첫날부터 토리와 쉴라는 부딪히기 시작해 충돌은 갈수록 심해져 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토리와 쉴라의 사이가 나아지는 것처럼 보여지고, 쉴라가 실제로는 아이큐가 180이 넘는 천재라는 사실도 밝혀진다. 

 하지만, 쉴라의 뛰어난 지능은 그 아이의 과거와 맞물려 최악의 결과들을 내놓기도 한다. 쉴라는 친엄마가 도로에 버리고 간 아이였다. 그 바람에 다리가 부러져서 흉터가 남았다. 또 쉴라의 아빠는 알콜중독자에 마약중독자이기도 했다. 더 최악인 것은 쉴라의 삼촌인 제리가 여섯 살인 쉴라를 강간하려고 하다 잘 되지 않자 칼로 쉴라의 성기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는 거다. 

 이 만신창이인 아이가 맡겨진 게 토리 헤이든의 반이었다. 도대체 신이 있다면, 이 아이에게 이럴 수 있는 걸까?


 음울한 이야기다. 

 한 아이의 마음이 매 순간 찢어지고 찢기고 갈라지고 부서져 그 통증이 내게 옮아오는 듯했다. 더 놀라운 건 이 아이의 강인함이었다. 아니다. 그것은 강인함이 아니라 무지였는지도 모른다. 쉴라는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인 줄 알았으리라.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고 이상하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엄마가 자신은 버리고 남동생만 데리고 간 것도 자기가 잘못해서라고, 자기가 미워서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세상에 유일한 의지처가 늘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취해 툭하면 자신을 벌주고 때리는 아빠라고 해도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으리라. 

 쉴라는 고작 여섯 살이었다. 그리고 쉴라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죽음을 떠올리기조차 너무 어린 아이에게 부당한 대우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라고 말하는 건 오히려 가혹한 처사다. 설사 떠난다 해도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믿는 아이가 누구와 함께, 누구의 곁에서 행복을 꿈꿀 수 있었겠는가.


 토리 헤이든은 20대 중반 혹은 후반 쯤 된 특수교사다. 학교에서 교수들이 가르치던 전통적 방식을 떠나 아이들에게 몰입해서 사랑과 관심을 주는 것이 치료와 교육에 효과를 더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중산층 출신이라고 스스로 밝히는 사람이며, 채드라는 변호사와 사귀고 있고 특수교사로서 일하는 데에 커다란 만족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이 꼭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자신은 잘 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 이 이야기에는 토리의 남자 친구들 이야기는 나오지만 가족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물론 필요 없었기에 적지 않았을 수 있지만, 쉴라에게 향하는 집착에 가까운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이야기는 쉴라가 토리의 반으로 온 1월부터 학기가 끝나는 6월까지의 5개월 동안에 있던 일들이다. 쉴라는 끊임 없이 반항하고, 일을 꾸미고, 토리를 시험하려 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마음이 열리고 마지막에는 거의 완전히 열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쉴라는 토리가 읽어준 생택쥐 페리의 <어린왕자> 속의 여우와 어린왕자 이야기에 매료된다. 그러면서 '토리 선생님이 자기를 길들'였기에 책임져야 한다고 말한다. 토리 역시 쉴라가 자기를 길들였으니 책임이 있다는 말로 되받는다. 

 학기가 끝나고도 쉴라는 토리의 반에 남기를 바라지만 학기가 끝나면서 그 반은 해체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토리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더 할 계획도 세워두었다. 처음에 쉴라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를 기만'했다며 소리지르고 화를 낸다. 토리 선생님이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나 다름 없다며 비난하는 거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 두 사람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여섯 살, 고작 여섯 살이다.

여섯 살 난 아이가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말로 설득하거나 이해시킬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규칙을 앞세워 무엇을 하게 만들거나, 체벌로 겁을 주어 하지 못하게 하는 게 효과가 있을까?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보지도 않고, 아이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묻지도 않으면서 아이와의 관계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잠꼬대가 또 있을까?

아이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덩달아 함께 화를 낸다면 그 아이의 마음에 두려움과 공포 외에 무엇이 찾아들겠는가?


 토리 헤이든은 물론 헌신적이고 훌륭한 교사다. 집념도 강하고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도 깊다. 하지만 토리는 위에 늘어놓은 물음들에 얽힌 실수를 거듭하고 반복한다. 


 마시멜로 테스트라는 게 있다. 

아이에게 마시멜로를 주고 이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리고 있으면 더 많은 걸 주겠다고 했을 때 기다린 아이들이 기다리지 않은 아이들보다 성장했을 때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험이다. 하지만 이 실험은 아이의 자기 통제와 인내력을 측정하는 실험에 그치는 게 아니다. 만약 아이가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기다렸음에도 실험 전에 약속한 것을 주지 않았을 때 아이는 오히려 성공에서 멀어졌다고 한다. 아이는 믿고 참고 기다렸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커다란 상처가 된 거다. 

 마시멜로 실험은 신뢰의 실험이다. 아이에게 한 약속은 지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하지만 토리 헤이든은 번번이 선생님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저지른다. 그러면서 '아이가 왜 불안해 하는 지 모르겠다.', '나는 최선을 다하는데 도무지 믿게 만들 수가 없다'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잘못은 쉴라에게 있지 않았다. 마음을 주고 받았으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쉴라가 "나는 길들여 달라고 부탁한 적 없다."거나 "나를 믿으라고 한 적 없다."고 말하는 게 당연하다. 토리는 쉴라에게 충분한 믿음을 줬다고 믿었는지 모르지만 그건 자기만의 착각이었고, 자기 만족에 불과했다. 아이에게는 한 없이 부족했다. 그 마음을 토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마음을 쏟지 않고 규칙 안에서의 교육만을 행한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불러올 지도 모를 행동이라는 거다.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공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순탄한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토리가 그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삶을 살아온 쉴라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는게 오히려 이상하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자연스럽다. 거기에는 화를 낼 여지도, 슬퍼할 이유도 없다. 


 이 책이 여러 나라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하지만 이 책 속 이야기만으로는 무엇 하나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게는 많은 게 불만이었다. 그저 그런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어 나가려고 애쓰는 쉴라의 모습만이 감동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었다. 마음을 줄수록 아픈 상황, 길들여질수록 버려질 미래가 확실해져간다는 사실을 직감했을 이 영특한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황량했을까.

 얼마나 외롭고 슬펐을거며 아프고 두려웠을까. 

"다 괜찮을 거다"라고 아무 것도 모르고 위로하는 사랑하는 선생님을 보며 몇 날 며칠을 울었을까.


 아동교육의 권위자들이 이 책을 극찬했을 광경을 떠올리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난다. 당사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쉴라를 조금이라도 부러워했을까? 쉴라가 토리를 만나 다행이었다고 생각했을까? 

 오래 전 "태양이 없었으면 좋겠어요."라는 내 말에 한 선배는 이렇게 답했다. "이미 늦었어. 태양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잖아."


 토리를 만나기 전의 쉴라는 어둠 속에 있었다. 거기에는 빛도 온기도 없었다. 그렇기에 더럽고 불결했으며 가혹한 생활을 하고 있어도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는 못했으리라. 하지만 토리를 만나는 순간 빛을 알아버렸다. 이후 쉴라의 삶은 밝아졌을 거고, 자기 주변이 더는 가릴 수도 없을만큼 추하고 더럽다는 사실을 매순간 받아들여야만 했으리라.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이런 경험이 어떤 것이었을지 토리 헤이든 선생님이 생각이나 해봤을지 알 수 없다. 쉴라는 집으로 돌아갔고, 토리는 떠났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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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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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생각은 많아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는 아무래도 거북한 게 인지상정이다.

어디까지나 우리에게는 '삶이 전부'이고, '죽음은 전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 거다. 

저자 역시 죽음보다 먼저, 그리고 더 많이 '더 나은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인간답게 살기를 원한다. 이러한 바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지속되는 변하지 않는다. 대체로 변덕스럽기 마련인 사람의 바람이 한결 같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크고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게 된다.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큰 마음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은 드러내지 않는 이 암묵적인 바람은 바로 인간답게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젊음을 깎아 노년의 창고를 채우는 궁극적인 이유는 젊음이 지나간 후의 삶도 만족스러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거다. 

우리는 죽음에 '이어간다'는 표현을 달지 않는다. 이어갈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삶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 거다. 

이 책에 담긴 메시지가 온통 삶을 향하는 그 이유 말이다.





 이 책은 모두 8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5장은 질병과 장애에 시달리는 노년의 삶의 희극과 비극을 담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엇갈린 삶 가운데 가장 소중했을 시간들에 대한 기록들이 왜 우리가 '좋은 삶'을 희망해야 하는지, 약해질대로 약해진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더 좋은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 삶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거다.

 나머지 3장은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과정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의 아버지가 보냈던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통해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시켜주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돈이 많고,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죽음을 이기지는 못한다는 사실도 말이다. 피해갈 수 없다면 부딪혀야 하고, 부딪혀 부술 수 없다면 넘어서야만 한다.  

 죽음에 극복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만 적어도 죽음이 가져다 주는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감정만은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넘어서게 해주는 건 더 좋은 삶에 대한 희망이다. 더 좋다는 말도 어울리지 않을 지 모른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의식을 잃거나, 혼미한 상태로 무균 상태의 병실에서 무수한 선과 호스를 달고, 단지 삶을 연장시키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삶보다는 더 좋은 삶이 있다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나에게도 할머니가 계신다. 할머니는 70년 넘게 왕성한 활동을 하며, 부지런하고 또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분이다. 6년 전 할머니는 욕실에서 넘어지셨다. 왜 넘어졌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결과는 무척 좋지 못했다. 뇌에 출혈이 있었고, 오른쪽 반신은 차디차게 변해서 전혀 쓰지 못하게 됐으며, 말조차 할 수 없게 됐다. 

 병원 생활이 시작됐고, 찾아갈 때면 늘 답답한듯 가슴을 치며 눈물지으셨다. 애처로움, 안타까움을 넘어 그건 너무나 비참하고 가혹해 보였다. 할머니는 퇴원해서 집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치료와 투약이 이유였지만 결국 저마다의 사정으로 할머니의 병원 생활이 시작된 거다. 이제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는 여전히 병원 생활을 하고 계신다. 몇 번인가 병원을 옮겼고, 처음과 달리 음식을 거부하거나 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속 마음이 어떤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책 속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 같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할머니에게 일어난 일은 나이를 떠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안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사람이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_119쪽」


 이 느낌에 조금이라도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노인들이 갇힌 거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 생활의 명목은 '안전'과 '보호'다. 하지만 누구를 무엇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아는 건 아무도 없다. 당사자조차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생각해 본 일조차 없는 일이 허다하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분명하다. 


 삶이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노화와 질병의 위협 속에서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지, 그 순간이 온다면 어떤 삶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정해둬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수술을 하고, 장치를 달고, 진정한 의미의 삶은 누리지도 못한 채 병원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야만 하는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는 것 혹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 삶과의 분리를 의미한다는 생각은 대부분 받아들일 거다. 그렇다면 '삶'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봐야만 한다. 단지 숨을 쉬고, 심장이 뛰는 상태를 두고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게 맞다. 하지만 삶이 단지 생물학적으로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멀게는 뉴스, 영화, 드라마에서 가깝게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수술과 항암 치료가 삶을 어떻게 망치는지 익히 보고 들어왔을 거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막상 자기의 일이 되었을 때 그런 일은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일인 것마냥 당황하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는 거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두려움이 오래 지속되고 당황과 두려움 속에서 삶의 다음 단계를 선택했을 때의 위험은 어쩌면 치명적일 수 있다.


 저자는 의사다.

저자의 아버지도 의사였다. 

하지만 그들 역시 환자에게 선고하는 일에는 익숙했을지 몰라도 선고를 받는 일에는 놀라고 당황해했으며 두려워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것, 그것이 죽음의 근원적 속성이기에 두려워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저자가 의사라는 사실을 거듭 적은 이유는 저자가 의학과 의술에 의지해서 삶을 지속시키는 일에 커다란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수술과 화학치료, 약물치료가 최선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연구에서 오히려 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게 밝혀졌고, 그렇기에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다. 의학적 치료가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저자가 환자에 대한 치료와 의학적 시도를 완전히 포기하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을만큼의, 지나치지 않은 의학적 치료와 함께 호스피스 케어와 가족의 관심과 같은 의학 외적인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런 말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잠꼬대처럼 들릴 지 모른다. 

"그럴 수 있다면 벌써 그렇게 하고 있겠지!"하고 꼬집어 말할 지 모른다. 

나부터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기에 더더욱 뜬금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학적인 시술과 치료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마지막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죽음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찾아드는 것이기에 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지는 거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오직 삶이다. 어떤 삶을 원하는지, 여건과 상황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좋은 삶을 구해아 한다는 것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인 셈이다.


 언제 죽음이 나를 찾을지, 혹은 어느 때 소중한 사람들에게 죽음이 들이닥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생각하려고 애쓸 거다. 무엇이 나의 소중한 사람을 위한 일인지, 그 소중한 사람이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했는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지 함께 찾아내기 위해 노력할 거다. 

 

 이 책은 죽음이 개인의 일이지만, 동시에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다시 깨닫게 했다. 삶은 소중하다. 그 소중한 삶을 위해 죽음을 기억하고, 현재의 삶을 즐기는 것만이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의 의무가 아닐까.


아모르 파티

Amor Fati

우리에게 반드시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카르페 디엠

Carpe Diem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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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8쪽

 전공 교재는 나이 들어 쇠약해지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는 것이 없었다. 그 과정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었다. 학생들, 그리고 교수들이 알고 있던 교육의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지 꺼져 가는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전공 교재뿐 아니라 거의 어디에서도 나이들어 쇠약해진 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나이는 들었지만 활기차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어디에나 있다. 사람인 이상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는 걸 알지만 그 죽음이 찾아든 그 순간 이전까지는 죽음을 외면하는 게 최선이라고 하는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살고자 하는 게 사람인 거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 하기를 미루기만 한 탓에 길지 않은 마지막이 더 짧아지거나 아예 사라진 것처럼 잃어버리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가족,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게 불가능한 상태(병원의 침대에 몸에 온갖 관과 바늘을 꽂고 인공호흡기의 도움을 받으며 누워있으니)로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게 정말 이상적인 결말인 걸까? 

 이 책의 우리나라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지만 실제로 이야기하는 건 죽음이 임박한 사실을 알고난 후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역시 '그래도 삶'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18쪽

 그때는 내가 그들을 죽였다고 느꼈다. 나는 실패한 것이다.

 물론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는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 진실을 추상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 내가 책임져야 할 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자는 외과 의사다. 무수한 죽음을 목격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손으로 살려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될 여지가 큰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의사에게조차 죽음의 자연스러움은 추상적인 형태로 이해될 뿐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거라고 한다. 특히 그 죽음이 찾아들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죽음과 그들을 같은 위치에 두고 생각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마는 거다. 

 '죽음은 실패다'는 생각은 의사에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나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암과의, 사고의 상처와의, 죽음과의 싸움에 실패해 이제 죽음에 의해 희생될 희생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가져다 놓고 슬퍼하는 거다.

 20쪽

 우리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의학, 기술,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손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단지 '수명'을 연장하는 일, 호흡을 하고, 심장이 뛰는 상태가 성공인지 아니면 진정한 성공이 달리 있는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의 문제에 달려있다고 한다. 가장 중요시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성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공허하다. 

 20쪽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모두 써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많은 환자들이 요양원이나 중환자실같이 고립되고 격리된 곳에서 치료를 받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엄격히 통제되고 몰개성화된 일상을 견뎌 내면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말 흔한 풍경일 거다. '깨어날 지조차 불분명한, 수술의 결과 '정말 삶이 연장되는지'조차 모호하며, 그렇게 연장된 삶 동안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뇌와 육체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치료'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요양원에서의 삶 또한 만족스럽다고 보기 어렵다. 삶이 자유라면 그 자유를 잃은 삶은 이미 삶이 아니지 않은가.

 43쪽

 인류 역사상 나이 드는 일이 이보다 더 나은 시대는 없었다. 세대 간 힘의 균형이 재편되긴 했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았다. 노인들은 자신이 누렸던 통제력과 지위를 일부 나눠 주었지만 완전히 잃은 게 아니었다. 현대화가 강등시킨 것은 노인들의 지위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였다.


 현대화와 함께 사람들의 기대 수명과 평균 수명이 크게 올라갔다. 이런 경향에 따라 나이들어서도 할 수 있는 것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늘리는 일에 많은 노력과 수고가 들어갔다. 물론, 이러한 노력과 수고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는 더 필요해지게 될테니 말이다. 현대화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간주되는 가족의 해체는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켰다. 노인과 가족은 분리되었다. 때로는 누가 사는지, 혹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옆집의 사람들이나 다름 없는 상태에 머물기도 한다. 일 년에 몇 번 씩 찾아다니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후회하는 일(동시에 안도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거다. 가족의 의미는 끊임 없이 변해왔지만 지금처럼 급격하고 또 극심하게 가족의 개념이 흐릿해진 동시에 그 지위가 강등된 시기가 있었을까 하게 된다. 

 44쪽

 이런 삶의 방식에는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숭배가 삶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온다는 현실 말이다. 언젠가는 심각한 질병이나 노환이 덮쳐 오게 될 것이다. 해가 지는 것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을 생각하기엔 이르다고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나를 잃는다는 건 자유와 자아를 잃는다는 이야기이며, 자유에는 신체적인 자유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사고와 의식의 자유가 포함된다. 

 단순히 '죽음'이 곧바로 찾아온다면 사실 걱정할 것이 없다. 마음껏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맞이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이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죽음 역시 단순하지 않다. 죽음에도 '과정'이 있고 그 과정 가운데는 '독립의 상실'도 들어 있다는 거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오래 전 친구와 나눈 이야기,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결과를 택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스운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과정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아직 준비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다. 아직 젊다는 걸로 독립이 불가능해지는 시기에 대한 생각을 미루고 있다는 이야기다.

 73쪽

 몸의 쇠락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루하루 지내면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대로 적응해 가며 산다. 그러다가 뭔가 일이 벌어지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늙어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일은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불편함과 예전같지 않음은 느끼지만 적응하는 존재이기에 그런 상태에도 적응하게 된다. 그렇기에 당장은 큰 불편이나 이상이 생겼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는 거다. 그러다 어떤 결정적인 계기로 '쇠락'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거다. "내가 이렇게 약해졌다니!"하는 식으로 말이다.

 94쪽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잃는다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저자는 굳이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나이를 떠나 명백히 죽음에 이르는 길에 서 있다고 느끼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일 거다. 정말 슬픈 건 "나이 든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거다. 죽음 뒤에 또다른 삶이 있다고 믿는다 해도, 죽음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두 가지만 잃는다면 그렇게 두려움이 크지는 않을 거다.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기에 두려워지는 거다.

 116쪽

 병원들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로비를 벌였고, 의회는 1954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별도의 시설을 지을 자금을 제공하도록 했다. 바로 이것이 현대 요양원의 시초였다. 노령에 접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병실을 비우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nursing home', 즉 요양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요양원'이라는 이름의 시초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단지 '나이든 것 뿐'인 환자들이 병원에 이익이 되지 않기에 병실을 비우기 위해 고안된 시설이 요양원이라는 것은 현대 사회가 노인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지금은 어떤 분야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 '노인 모시기'가 상품으로 나오는 일도 있지만 말이다. 요양원의 생활은 정신이 맑을수록, 신체의 부자유가 클수록 괴로울 것만 같다. 

 119쪽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 주면 입고, 먹으라고 하면 먹었다. 또한 직원들이 정해 주는 아무하고나 같은 방을 써야 했다. 할머니의 생각과 관계 없이 선택된 룸메이트들이 여러 명 거쳐 갔다. 모두 인지 능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조용했고,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우스개로 스스로 돈을 지불하면서 감금 생활을 계속할 리 있겠는가하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면서도, 잃어버린 신체의 자유와 함께 정신의 자유까지 박탈당하는 일을 경험한다. 책 속의 할머니가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감금됐다고 느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흔히 "이것이 최선이다"고 하는 결론에서 선택되는 이 결과는 사실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누구보다도 그 안에서 감금됐다고 느낄 그 사람이 느낄 불행이 그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의 근거가 된다.

 155쪽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가설이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은 내 손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낼 일이 없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즐거움을 기꺼이 뒤로 미룬다.


 우리는 행복조차 유예한다. 그 이유는 지금은 더 나중의 행복을 위해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괴롭고 힘겨워도 그것은 미래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에 현재의 불행은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견뎌내지 못하는 건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당장 내일, 아니 이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게 삶이다. "이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준비해야 한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준비에 너무 많은 걸 쏟아붓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애초에 '무엇을 위한 준비'인지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말이다.

 157쪽

 연구 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명의 덧없음을 두드러지게 느낄 때"면 삶의 목표와 동기가 완전히 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관점인 것이다.


 흔히 나이는 사고의 척도로 여겨진다. '젊은 사람이' 혹은 '나이들었으니' 하는 식의 이야기가 무척 흔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거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이가 아니라 관점이다. 무엇에 더 큰 가치와 삶의 비중을 부여할 것인지를 정하는 건 관점이라는 이야기다.

 172쪽

 우리 할아버지처럼 기댈 수 있는 대가족이 함께 지내면서 그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 수 있게 지속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부재한 경우,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통제와 감독이 계속되는 시설에 갇혀 사는 수밖에 없다.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의학적으로 고안된 답이고, 안전하도록 설계된 삶이지만, 당사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도 없는 텅 빈 삶이다.


 이런 상태를 비유하자면 무인도에 홀로 던져지면서 완벽한 식사와 잠자리와 함께 부루마블 게임이 제공된 것에 가깝지 않을까. 얼핏 보면 완벽하다. 먹을 것도 얼마든지 있고, 잠자리도 최고의 시설을 갖추었다. 그러나 부루마블은 혼자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그는 그저 '혼자'인 거다. 

 '당사자를 위한' 선택이 시설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당사자를 돌봐야 할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라는 걸 안다. 돈을 낸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시설에 버려둔 소중했던 존재를 잊고 지내려 하는 삶 역시 시설 속의 당사자들만큼이나 텅 빈 삶을 사는 셈 아닌가.

 198쪽

 죽음을 의미 없는 것으로 느끼지 않게 할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가족, 공동체, 사회 등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저 공포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나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믿음이 있다면, 죽음이 단지 끔찍한 공포로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의미의 부여는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게 아니며 부여된 의미가 옳은지 그른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의미의 부여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안다. 죽음이 가져올 허무함, 의미 없음을 대체할 의미를 발견하는 건 죽음을 향해 가는 동안에는 큰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남는 사람들에게도 그 의미가 전해질 지도 모른다. 설사 그 의미가 그 사람이 죽은 후에 완전히 사라져 없어진다 해도 그 때는 그것에 공포를 느낄 사람이 없기에 의미는 그 역할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 된다.

 218쪽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데 따른 투쟁은 곧 자신의 삶을 본래의 모습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과거의 나와 현재 유지하고 싶은 나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릴 만큼 너무 쇠약해지거나, 너무 소진되거나, 너무 종속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다. 질병과 노화만으로도 이 투쟁은 충분히 힘겹다. 우리가 의지하는 전문가들과 시설들이 이 투쟁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환자를 위한 일', 혹은 '당사자를 위한 일'이라는 미명 하에 취해지는 조치들이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단지 그들의 번거로움과 최대한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당사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환자'가 된 그들은 이끌려 다니는 수가 많다. 그렇게 이끌려 다니는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고 압박해오는 질병과 나이듦 뿐 아니라 전문가와 시설과도 투쟁해야 할테니 무엇이 누구를 위한 일이라는 말인가.

 228쪽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지요. 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최선의 보험이 아닌가.

 248쪽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의료 행위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시간을 좀 더 벌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호스피스 케어가 모든 치료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술과 집중적인 치료보다 더 수명을 늘리는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효과의 근원은 '현재의 삶을 누리는 일'이었을 거다. 수술과 약물 치료로 인해 세상, 소중한 사람들과 단절된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348쪽

 나는 아버지가 일어서는 걸 도와 드렸다. 아버지는 내 팔을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지난 반년 동안 걸어 다닌 거라고는 거실을 가로지를 때뿐이었다. 그 이상 걷는 걸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천천히 농구 코트를 지나서 콘트리트 계단 20개를 올라가 관중석에 마련된 가족석에 앉았다. 그 광경은 나를 완전히 압도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전혀 다른 방식의 케어 ― 그리고 전혀 다른 방식의 의학 ― 덕분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어려운 대화가 이뤄 낸 일이었다.


 저자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저자도 의사다. 하지만 아버지가 암에 걸렸고 머지 않아 전신이 마비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 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들여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다음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선택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 당사자와 가족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렸던 거다. 저자의 아버지에게는 수술이라는 선택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수술을 유예한다. 그리고 '치료될 가능성'보다 현재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도록 했다. 저자는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의학을 발견한다. '어려운 대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355쪽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갖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진실에 직면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문제는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운 때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끝이 있음을 받아들이더라도 어디가 끝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어떤 행동 혹은 선택을 취하는 게 그렇게 현명한 선택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리기 위해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누리기 위한 선택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거다. 두려움은 때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은 뒷걸음질치는 결과를 만든다. 두려움은 무엇도, 누구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373쪽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결론이다. 이 책의 제목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면서도 계속해서 삶, 더 나은 삶, 최선의 삶을 이야기하던 이유가 잘 담긴 결론이기도 하다. 좋은 죽음은 있을 수 없다. 그 죽음이 아무리 편안한 단계를 지나온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디에도 '편안한' 죽음은 없다. 결국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더 좋은 삶을 위해서라는 거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Fati)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카르페디엠(Carpediem), 죽음을 알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를 좋은 삶으로 이끄는 최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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