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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 2 - 7년 후 다시 만난 쉴라와 헤이든, 그리고...
토리 헤이든 지음, 이수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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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는 학업을 마치고 나서 다시 쉴라를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쉴라와 헤어진 지 7년이 지난 후 어느날, 쉴라와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재회한 쉴라는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도, 상상하던 모습도 아닌 시시껄렁한 펑크 스타일의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저 한 아이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토리는 자신이 그토록 애썼던 시간이 쉴라의 무엇도 바꾸지 못했음을 알고 실망하게 되고, 자꾸만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으로 돌아가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니 화가 날 수밖에 없고, 두 사람은 다시 충돌하기 시작한다.
쉴라의 아빠는 여전히 알콜중독과 마약중독으로 교도소와 병원을 오갔고, 7 년이라는 시간동안 쉴라는 10곳 정도나 되는 가정을 옮겨다니며 위탁 양육을 받거나 어린이집에서 생활을 했다. 위탁 가정에서 강간을 당하는 일을 겪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늘 이상한 질문을 한다고 외면당한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탓에 하나의 지식을 전달받았을 때 너무 많은 경우를 떠올리게 되어 그 지식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검증하고 확인하려 했기에 선생님들에게도 방해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토리가 재회하던 때의 쉴라의 상황이다. 여섯 살 때 삼촌 제리가 저지른 사건으로 쉴라는 임신이 불가능한 몸이 되어 있었으며 남자에 대한 극도의 경계와 사랑에 대한 불신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신기한 건 그토록 간절히 생각하던 엄마와 동생조차 거의 잊어버렸다는 점이다. 내부의 방어회로의 작동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안타깝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다행스러운 건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도 쉴라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거였다. 마약이나 술에 찌든 생활에 빠지지도 않았다. 그저 고독하게 세상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던 거다.
토리는 이런 쉴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점이 바로 그러한 점이다. 토리는 쉴라가 아직도 여섯 살 때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자신이 지켜주고 보호해줘야 하며 가르치고 고쳐줘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는 거다. 아이의 생각이나, 기억, 성향을 모두 부정하다시피 하는데 그걸 쉴라가 받아들일 리 없다.
토리는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주려 하지만 쉴라가 살아온 시간은 그런 모습, 그런 삶이 꿈만 같다고 느끼게 했을 거다. 결국은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이 책이 쉴라에게든, 쉴라보다 덜하거나 더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이 됐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고 불안해 하던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쉴라와 토리가 화해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얼핏보면 토리의 시도가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불로 태워 죽일 뻔한 문제아.
지능이 보통 이상보다 높지만 불완전한 아이.
사람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가 없고 불신으로 가득한 아이.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한 채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려고만 하는 아이.
폭력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만 자신의 욕구와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아이.
쉴라는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토리는 그런 아이를 '길들였다'고 할 수 있다.
마치 야생의 여우를 길들인 어린왕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쉴라는 자신을 여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미라고 여긴다고 말한다. 특별하고 싶었던 거였을 거다.
쉴라는 단지 그 특별함을 실감하고 싶었을 뿐이었을 거다.
세상의 누구도 자신만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오거나, 자신이 죽겠다는 말에 놀라 전화를 하거나, 화를 내고 투정을 부리고, 심술궂게 굴어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에는 그런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 믿고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그토록 간절히 찾던 엄마가 그런 존재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엄마는 찾을 수 없었고, 엄마를 대신해 토리 선생님이 엄마와 같은 존재가 되어주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토리는 그저 '선생님'일 뿐이었다. 쉴라는 어렸을 때도 조금 더 나이들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다. 그래서 시험하고 화를 내고 다시 시험하기를 거듭했던 것이리라.
이 책의 마지막에 두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쓰여지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한 아이 1>도 그렇다. 제프의 말이 옳다. 토리의 병원 동료였던 제프는 "기억이란 건 언제나 경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일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두 이야기는 토리의 해석을 거친 쉴라의 이야기지 쉴라의 이야기는 될 수 없는 거다. 그렇기에 쉴라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책 속의 자기가 곧 자기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주 외면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쉴라가 과거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또 받아들이고 난 후에 다시 이 책을 보거나, 누군가 이 책의 이야기를 하는 일을 경험한다면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쉴라에게 들이닥쳐서는 쉽게 물러가지 않았던 불행한 삶, 두려웠던 시간이 순간순간 되살아나지는 않을까? 나는 이런 염려를 지울 수가 없다.
토리 헤이든은 분명 뛰어난 선생님이다. 열정도, 용기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아이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 아이가 보통의 아이와는 다른 특수한 아이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교육을 '가르치거나', '부여하거나', '고치거나', '바로잡는 일'이라고만 생각하는듯 하다. 하지만 진짜 교육은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게 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
자신이 바라는 것, 바라지 않는 것을 찾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이 교육이 아닐까.
마음을 닦는 일,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마음이 흐려지지 않도록 늘 말끔히 닦아내는 일이 교육이 아닐까 하는 말이다.
아이들은 점점 더 똑똑해져 간다. 그러면 마음도 점점 더 맑아져 가는 걸까? 아무래도 나는 그걸 확신할 수가 없다.
아이들 안에서 아이들을 발견해주는 교육이 실현되기는 분명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없다면 아이들은 자기 말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배우게 될까.
자기가 아닌 것을 깨닫고 알아가면서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걸까?
아아, 모르겠다.
이 책은 이렇듯 진짜 교육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해주었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