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8쪽

 전공 교재는 나이 들어 쇠약해지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해 주는 것이 없었다. 그 과정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사람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었다. 학생들, 그리고 교수들이 알고 있던 교육의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지 꺼져 가는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데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전공 교재뿐 아니라 거의 어디에서도 나이들어 쇠약해진 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나이는 들었지만 활기차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어디에나 있다. 사람인 이상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는 걸 알지만 그 죽음이 찾아든 그 순간 이전까지는 죽음을 외면하는 게 최선이라고 하는 생각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살고자 하는 게 사람인 거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 하기를 미루기만 한 탓에 길지 않은 마지막이 더 짧아지거나 아예 사라진 것처럼 잃어버리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가족,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게 불가능한 상태(병원의 침대에 몸에 온갖 관과 바늘을 꽂고 인공호흡기의 도움을 받으며 누워있으니)로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게 정말 이상적인 결말인 걸까? 

 이 책의 우리나라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지만 실제로 이야기하는 건 죽음이 임박한 사실을 알고난 후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역시 '그래도 삶'이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18쪽

 그때는 내가 그들을 죽였다고 느꼈다. 나는 실패한 것이다.

 물론 죽음은 실패가 아니다.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는지는 모르지만,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 진실을 추상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 진실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뿐 아니라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 내가 책임져야 할 이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저자는 외과 의사다. 무수한 죽음을 목격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손으로 살려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될 여지가 큰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의사에게조차 죽음의 자연스러움은 추상적인 형태로 이해될 뿐 구체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거라고 한다. 특히 그 죽음이 찾아들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죽음과 그들을 같은 위치에 두고 생각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마는 거다. 

 '죽음은 실패다'는 생각은 의사에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나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암과의, 사고의 상처와의, 죽음과의 싸움에 실패해 이제 죽음에 의해 희생될 희생자의 자리에 스스로를 가져다 놓고 슬퍼하는 거다.

 20쪽

 우리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의학, 기술, 그리고 낯선 사람들의 손에 우리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단지 '수명'을 연장하는 일, 호흡을 하고, 심장이 뛰는 상태가 성공인지 아니면 진정한 성공이 달리 있는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의 문제에 달려있다고 한다. 가장 중요시하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성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공허하다. 

 20쪽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치료를 받으며 점점 저물어 가는 삶의 마지막 나날들을 모두 써 버리게 만드는 것이다. 많은 환자들이 요양원이나 중환자실같이 고립되고 격리된 곳에서 치료를 받는다. 삶에서 가장 중요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채 엄격히 통제되고 몰개성화된 일상을 견뎌 내면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말 흔한 풍경일 거다. '깨어날 지조차 불분명한, 수술의 결과 '정말 삶이 연장되는지'조차 모호하며, 그렇게 연장된 삶 동안 어떤 삶을 살 수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뇌와 육체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치료'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요양원에서의 삶 또한 만족스럽다고 보기 어렵다. 삶이 자유라면 그 자유를 잃은 삶은 이미 삶이 아니지 않은가.

 43쪽

 인류 역사상 나이 드는 일이 이보다 더 나은 시대는 없었다. 세대 간 힘의 균형이 재편되긴 했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았다. 노인들은 자신이 누렸던 통제력과 지위를 일부 나눠 주었지만 완전히 잃은 게 아니었다. 현대화가 강등시킨 것은 노인들의 지위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였다.


 현대화와 함께 사람들의 기대 수명과 평균 수명이 크게 올라갔다. 이런 경향에 따라 나이들어서도 할 수 있는 것과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늘리는 일에 많은 노력과 수고가 들어갔다. 물론, 이러한 노력과 수고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앞으로는 더 필요해지게 될테니 말이다. 현대화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간주되는 가족의 해체는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켰다. 노인과 가족은 분리되었다. 때로는 누가 사는지, 혹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옆집의 사람들이나 다름 없는 상태에 머물기도 한다. 일 년에 몇 번 씩 찾아다니다 죽음이 임박해서야 후회하는 일(동시에 안도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거다. 가족의 의미는 끊임 없이 변해왔지만 지금처럼 급격하고 또 극심하게 가족의 개념이 흐릿해진 동시에 그 지위가 강등된 시기가 있었을까 하게 된다. 

 44쪽

 이런 삶의 방식에는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다. 독립적인 자아에 대한 숭배가 삶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온다는 현실 말이다. 언젠가는 심각한 질병이나 노환이 덮쳐 오게 될 것이다. 해가 지는 것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독립이라면, 그걸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음을 생각하기엔 이르다고들 하지만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나를 잃는다는 건 자유와 자아를 잃는다는 이야기이며, 자유에는 신체적인 자유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사고와 의식의 자유가 포함된다. 

 단순히 '죽음'이 곧바로 찾아온다면 사실 걱정할 것이 없다. 마음껏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다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맞이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이 단순하지 않은 것처럼 죽음 역시 단순하지 않다. 죽음에도 '과정'이 있고 그 과정 가운데는 '독립의 상실'도 들어 있다는 거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다. 오래 전 친구와 나눈 이야기,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는 결과를 택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스운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과정을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아직 준비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거다. 아직 젊다는 걸로 독립이 불가능해지는 시기에 대한 생각을 미루고 있다는 이야기다.

 73쪽

 몸의 쇠락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루하루 지내면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대로 적응해 가며 산다. 그러다가 뭔가 일이 벌어지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늙어 있었다는 것과 같은 일은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다. 불편함과 예전같지 않음은 느끼지만 적응하는 존재이기에 그런 상태에도 적응하게 된다. 그렇기에 당장은 큰 불편이나 이상이 생겼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는 거다. 그러다 어떤 결정적인 계기로 '쇠락'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거다. "내가 이렇게 약해졌다니!"하는 식으로 말이다.

 94쪽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잃는다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저자는 굳이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나이를 떠나 명백히 죽음에 이르는 길에 서 있다고 느끼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일 거다. 정말 슬픈 건 "나이 든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는 것"이라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거다. 죽음 뒤에 또다른 삶이 있다고 믿는다 해도, 죽음이 '모든 것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두 가지만 잃는다면 그렇게 두려움이 크지는 않을 거다.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기에 두려워지는 거다.

 116쪽

 병원들은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로비를 벌였고, 의회는 1954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환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별도의 시설을 지을 자금을 제공하도록 했다. 바로 이것이 현대 요양원의 시초였다. 노령에 접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병실을 비우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nursing home', 즉 요양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요양원'이라는 이름의 시초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 단지 '나이든 것 뿐'인 환자들이 병원에 이익이 되지 않기에 병실을 비우기 위해 고안된 시설이 요양원이라는 것은 현대 사회가 노인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지금은 어떤 분야에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나 '노인 모시기'가 상품으로 나오는 일도 있지만 말이다. 요양원의 생활은 정신이 맑을수록, 신체의 부자유가 클수록 괴로울 것만 같다. 

 119쪽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 주면 입고, 먹으라고 하면 먹었다. 또한 직원들이 정해 주는 아무하고나 같은 방을 써야 했다. 할머니의 생각과 관계 없이 선택된 룸메이트들이 여러 명 거쳐 갔다. 모두 인지 능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조용했고,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우스개로 스스로 돈을 지불하면서 감금 생활을 계속할 리 있겠는가하고 물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면서도, 잃어버린 신체의 자유와 함께 정신의 자유까지 박탈당하는 일을 경험한다. 책 속의 할머니가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감금됐다고 느끼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흔히 "이것이 최선이다"고 하는 결론에서 선택되는 이 결과는 사실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누구보다도 그 안에서 감금됐다고 느낄 그 사람이 느낄 불행이 그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사실의 근거가 된다.

 155쪽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가설이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은 내 손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낼 일이 없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즐거움을 기꺼이 뒤로 미룬다.


 우리는 행복조차 유예한다. 그 이유는 지금은 더 나중의 행복을 위해 '준비'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괴롭고 힘겨워도 그것은 미래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에 현재의 불행은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견뎌내지 못하는 건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당장 내일, 아니 이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게 삶이다. "이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준비해야 한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준비에 너무 많은 걸 쏟아붓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애초에 '무엇을 위한 준비'인지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말이다.

 157쪽

 연구 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명의 덧없음을 두드러지게 느낄 때"면 삶의 목표와 동기가 완전히 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관점인 것이다.


 흔히 나이는 사고의 척도로 여겨진다. '젊은 사람이' 혹은 '나이들었으니' 하는 식의 이야기가 무척 흔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거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이가 아니라 관점이다. 무엇에 더 큰 가치와 삶의 비중을 부여할 것인지를 정하는 건 관점이라는 이야기다.

 172쪽

 우리 할아버지처럼 기댈 수 있는 대가족이 함께 지내면서 그가 선택한 방식으로 살 수 있게 지속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부재한 경우, 우리 사회의 노인들은 통제와 감독이 계속되는 시설에 갇혀 사는 수밖에 없다.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의학적으로 고안된 답이고, 안전하도록 설계된 삶이지만, 당사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도 없는 텅 빈 삶이다.


 이런 상태를 비유하자면 무인도에 홀로 던져지면서 완벽한 식사와 잠자리와 함께 부루마블 게임이 제공된 것에 가깝지 않을까. 얼핏 보면 완벽하다. 먹을 것도 얼마든지 있고, 잠자리도 최고의 시설을 갖추었다. 그러나 부루마블은 혼자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그는 그저 '혼자'인 거다. 

 '당사자를 위한' 선택이 시설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당사자를 돌봐야 할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라는 걸 안다. 돈을 낸다는 사실을 위안 삼아 시설에 버려둔 소중했던 존재를 잊고 지내려 하는 삶 역시 시설 속의 당사자들만큼이나 텅 빈 삶을 사는 셈 아닌가.

 198쪽

 죽음을 의미 없는 것으로 느끼지 않게 할 유일한 길은 자신을 가족, 공동체, 사회 등 더 큰 무언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저 공포로 다가올 뿐이다. 그러나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는 믿음이 있다면, 죽음이 단지 끔찍한 공포로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의미의 부여는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게 아니며 부여된 의미가 옳은지 그른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의미의 부여가 '필요하다'는 것만은 안다. 죽음이 가져올 허무함, 의미 없음을 대체할 의미를 발견하는 건 죽음을 향해 가는 동안에는 큰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남는 사람들에게도 그 의미가 전해질 지도 모른다. 설사 그 의미가 그 사람이 죽은 후에 완전히 사라져 없어진다 해도 그 때는 그것에 공포를 느낄 사람이 없기에 의미는 그 역할을 충분히 달성한 셈이 된다.

 218쪽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는 데 따른 투쟁은 곧 자신의 삶을 본래의 모습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과거의 나와 현재 유지하고 싶은 나와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릴 만큼 너무 쇠약해지거나, 너무 소진되거나, 너무 종속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다. 질병과 노화만으로도 이 투쟁은 충분히 힘겹다. 우리가 의지하는 전문가들과 시설들이 이 투쟁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환자를 위한 일', 혹은 '당사자를 위한 일'이라는 미명 하에 취해지는 조치들이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게 될 때가 있다. 단지 그들의 번거로움과 최대한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당사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환자'가 된 그들은 이끌려 다니는 수가 많다. 그렇게 이끌려 다니는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고 압박해오는 질병과 나이듦 뿐 아니라 전문가와 시설과도 투쟁해야 할테니 무엇이 누구를 위한 일이라는 말인가.

 228쪽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지요. 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유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최선의 보험이 아닌가.

 248쪽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의료 행위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시간을 좀 더 벌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


 호스피스 케어가 모든 치료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술과 집중적인 치료보다 더 수명을 늘리는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효과의 근원은 '현재의 삶을 누리는 일'이었을 거다. 수술과 약물 치료로 인해 세상, 소중한 사람들과 단절된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348쪽

 나는 아버지가 일어서는 걸 도와 드렸다. 아버지는 내 팔을 붙잡고 걷기 시작했다. 지난 반년 동안 걸어 다닌 거라고는 거실을 가로지를 때뿐이었다. 그 이상 걷는 걸 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천천히 농구 코트를 지나서 콘트리트 계단 20개를 올라가 관중석에 마련된 가족석에 앉았다. 그 광경은 나를 완전히 압도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전혀 다른 방식의 케어 ― 그리고 전혀 다른 방식의 의학 ― 덕분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어려운 대화가 이뤄 낸 일이었다.


 저자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저자도 의사다. 하지만 아버지가 암에 걸렸고 머지 않아 전신이 마비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 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을 들여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다음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선택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해 당사자와 가족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렸던 거다. 저자의 아버지에게는 수술이라는 선택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수술을 유예한다. 그리고 '치료될 가능성'보다 현재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도록 했다. 저자는 전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의학을 발견한다. '어려운 대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355쪽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갖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진실에 직면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문제는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운 때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끝이 있음을 받아들이더라도 어디가 끝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 수 없게 되는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어떤 행동 혹은 선택을 취하는 게 그렇게 현명한 선택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리기 위해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누리기 위한 선택이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 하는 거다. 두려움은 때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은 뒷걸음질치는 결과를 만든다. 두려움은 무엇도, 누구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373쪽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결론이다. 이 책의 제목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면서도 계속해서 삶, 더 나은 삶, 최선의 삶을 이야기하던 이유가 잘 담긴 결론이기도 하다. 좋은 죽음은 있을 수 없다. 그 죽음이 아무리 편안한 단계를 지나온 것처럼 보이더라도 어디에도 '편안한' 죽음은 없다. 결국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더 좋은 삶을 위해서라는 거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Fati)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카르페디엠(Carpediem), 죽음을 알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를 좋은 삶으로 이끄는 최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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