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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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는 평범한 농부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농부다운 고집스러움과 체념에 가까운 순응력을 가진 보리같은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그 보리가 뿌려진 대지 같은 사람이었으며, 그 대지에서 스토너는 나고 자랐다. 

 가난한 농부였던 스토너의 부모의 바람은 교육을 통해 더 나은 '농사'를 짓게 되는 거였다. 그래서 아들을 시내의 대학에 보낼 결심을 했고 종자를 뿌리고 추수를 기다리듯 아들의 학업이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스토너의 처음 마음은 부모님의 의지를 이어 농업에 대해 배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나 배움을 계속하는 동안 저절로 자신의 나아갈 길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보리가 뿌려진 땅에서는 보리가 나고, 콩이 뿌려진 땅에서는 콩이 나는 것처럼 당연한 것인 동시에 어느 땅에든 뿌린 적 없는 잡초가 무수히 돋아나는 것과 같은 거였다. 


 스토너의 부모에게 스토너의 결심은 잡초나 다름 없는 의외의, 예상 밖의 결과였겠으나 스토너에게는 자신이 심은 씨앗을 키워나가는 당연한 결과였다는 거다.


스토너는 대학에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는다. 친구들이 전장으로 나갈 때 그는 대학에 머물 것을 결심하고, 제자들이 전장으로 나갈 때도 고요하게 자리를 지킨다. 

 겉으로 드러나는 스토너의 삶은 온통 마침표 뿐이다. 어느 곳에도 느낌표와 물음표가 없는 것만 같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그곳에 머물렀고, 그런 생활을 했으며, 받아들이고 수용하는데 익숙했고, 거절하거나 항의하려는 적극성은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코 소극적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으며, 해야할 말을 했고, 해야 할 것을 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그는 '정직'했다. 

지나치게 정직해서 자신의 갈등과 괴로움을 감추지도 못했고, 열정 또한 숨기지 못했다. 그는 표가 나는 사람이었다. 조용한, 고요한, 보이지 않는 표지를 품은 그런 사람이었다.


 이상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고요해 보이는 바다라고 해도 수면 아래에서 격렬하게 소용돌이 치는 무수한 해류를 품고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너무나 조용히 마음으로 파고 드는 이야기였다. 

 나 역시 농부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스토너 역시 농부의 아들이었다. 농부의 아들이라는 것, 땅을 일구고 그 땅이 내놓는 소출로 삶을 꾸려본 경험이 있다는 것은 한 인간의 내면에 하나의 뚜렷한 성향을 남긴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그것을 '수용'이라고 적으려고 한다. 농부는 자연이 주는 은총을 먹고 산다. 한 계절, 한 달, 한 주, 때로는 단 하루의 한 시간이 한 해의 소출을 결정짓는 게 농부의 삶이다. 어떤 의미에서 농부는 기도와 소망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 어떤 사람보다 육체적인 노동에 익숙한 동시에 영적인 삶을 사는 게 농부의 삶이라는 거다. 

 시기에 맞춰 땅을 일구고, 종자를 뿌리며, 자연이 주는 해와 비와 바람을 읽고, 받고, 넘는다. 인간의 할 도리를 다하고 자연의 은혜를 기다리는 최선의 삶. 그것이 농부의 삶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농부의 삶을 여전히 동경한다. 아마도 그런 동경으로 인해 더 이상하게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스토너는 대학에서 한 해를 보내고 난 후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은 농부의 길이 아닌 학자의 길임을 깨닫는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깨달아졌다는 게 중요하다. 대학에 남기로 한 결정 이후로 몇 번인가의 결정적인 삶의 갈림길에 섰을 때도 스토너는 저절로 자신의 나아갈 길을 깨닫는다. 마치 해가 뜨고 바람이 불며 비가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통이든 기쁨이든 고난이든지를 넘어선다. 

 그러나 그 과정은 그의 이후의 삶에 여실히 새겨진다. 마치 농부의 노력에 따라 작물의 생장이 달라지는 것처럼, 자연의 의지에 따라 그 해의 소출이 결정되는 것처럼 뚜렷이 나타나는 거다. 


 스토너의 삶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 자연스러움, 그 격렬함과 고통스러움이 내 것이었으면하고 바랐다. 

스토너는 결코 소심하거나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그의 삶에 머뭇거림이 없었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될 거다. 행복한 삶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삶이어도 괜찮다고 느낄만한 삶이었다는 거다. 


 <스토너>를 읽으며 두 번쯤 숨을 몰아쉬며 나를 돌아봐야 했던 경험을 했다. 

한 번은 스토너의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농부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스토너의 죽음도 닮아있으며, 나의 아버지나 나의 죽음 역시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당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 번은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 한다'고 깨닫게 된 순간이 있었다. 어디쯤을 읽던 중이었는지는 잊어버렸지만 그때의 기분만큼은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다. 

 낯익은 나와 낯선 나를 동시에 마주한 느낌이었다. 

 '혼자인 나'와 '그리워하는 나'는 이질적인 존재인 동시에 언제나 나였던 존재였다. 


스토너는 꿈꾸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나 꿈을 꾸고 있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언뜻 그의 삶에 격렬함이 없어 보이는 이유 역시 그것이 꿈같기 때문일거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단조롭고 절제된 삶, 지루하고 따분할 것 같은 삶, 고요하고 침잠해있을 것 같은 그의 삶이 그토록 격렬했다는 것을 누가 알아줄 수 있을까?

 식물은 바람이 불때나 흔들리고, 비가 올 때나 춤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생물보다 격렬한 생명활동을 하는 존재다. 동물보다 수십, 수백 배 빨리 자라고, 자기만의 영역을 가지며, 어느 시기에든 자기만의 결실을 세상에 내놓는다. 


 스토너는 식물같은 삶을 살았다. 내가 바라는 삶과 닮은 그런 삶을.

드러나지 않는 격렬함을 양분으로 삼아 내면의 기관을 쉴새 없이 돌려 나아가는,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자연을 닮은 공장같은 삶을 살았다. 이야기 속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삶을 동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에게는 그를 알아주는 '존재'가 있었고, 그를 빛나게 하는 '몰입할 수 있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과 인생을 바칠만한 일을 가진 그의 삶을 동경하지 않는다면, 달리 어떤 삶을 동경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 읽고 났을 때, 조금은 어리둥절해졌었다.

언제나 한결같은 횡설수설에 혼란을 더한 이유 역시 그 어리둥절함이 지금까지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왜 그토록 매력적이었는지, 매료시키고 몰입시켰는지 사실 그 까닭은 분명하지 않다. 

 앞서 뭐라고 적었든 그저 그의 삶이 타인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는 것 밖에는 달리 깨달아지는 바가 없다. 


 고요하지만 누구보다 격렬한 삶을 살았던 한 인간의 초상.

대지에 뿌리내린 한 해 살이 식물처럼 격렬한 열정으로 삶을 소모하는 한 인간의 표상.

그 자연스러움과 미련함과 고집스러움과 무의미함이 몹시도 애처로워 잊히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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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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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쪽 

 이때 우리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뭔가 새로운 극장으로 이끌리듯 자신도 한 단계 높은 곳에서 살아가는 정신이 되어 사이드와 함께 있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한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책을 읽는 행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끊임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비단 과거와 현재뿐만이 아니다. 작가와 독자 역시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끊임 없이 대화를 나누게 되고,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게 된다. '새로운 극장으로 이끌리듯'하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오에 겐자부로는 책을 읽는 과정을 통해 저자가 생각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독자에게 전해져야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마치 독자가 작가가 된 것처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어야 한다는 거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해져 독자에게 이르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책을 읽는 행위라 생각한다는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되어야한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채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읽는 과정에서 자신을 더 뚜렷하고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저자의 의도를 알아챈다는 것이 반드시 동의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책 속에서, 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 진정한 읽는 행위 아닐까.

  71쪽

 블레이크의 시를 읽을 때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번역서를 옆에 두고 시 원문을 꾸준히 반복해서 읽어야 했는데, 이렇게 시집을 읽으며 연구서 한 권을 곁들여 읽는 것은 블레이크를 읽는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제 경우에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데, 3년 정도 읽으면 정말 마음에 드는 연구서 한 권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후 제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은 책은 헌책방에 되팔고요.

 


 몇 권인가 번역서와 원서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도전해보려고 펭귄클래식판 원서와 번역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기도 했다. 그러나 올려두기만했지 아직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 내게 오에 겐자부로의 말은 큰 범주에서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는 내가 고른 방법이 영 틀렸거나 무리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의 책을 3년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인내심과 꾸준함이 없는 지금의 자세로 진정한 읽기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하는 거였다. 욕심이 많은 것이든 오만한 것이든 다시 읽기, 의미를 찾아 읽기를 거듭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어학적 능력의 향상을 떠나서 작가의 의도와 전하고자 하는 의미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결정적인 이점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는 건 좀 더 생각해보고 하련다. 그냥 욕심이지만 아직은 욕심을 다 내려놓을 수가 없으니.

  82쪽

 이렇듯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완전히 다른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ief'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운이 남는 읽기를 위해서는 책 속의 표현이든 단어든지를 음미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종종 하는 말이지만 글자를 읽고 줄거리를 기억하는 것 정도는 거의 누구나 할 수 있다. 일곱 살 아이도 일흔 살 노인도 특정한 사정이 있지 않다면 가능하다는 거다. 하지만 여운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과정이 아니다. 단어나 문장을 되새겨보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오에 겐자부로는 '문체'를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쓴다고 한다. 어떤 말인지는 알겠지만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작품을 통해 소설가를 드러내는 게 문체라는 것인데, 아마도 두 가지 의미일 거다. 하나는 앞서 말한 '선율'로써의 문체고, 다른 하나는 뒤에 말한 '자세'로써의 문체가 될 거라는 거다. 단순히 생각하면 우리가 책을 읽는 과정을 통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정보를 통해 알게 되고, 동시에 그 인물이나 정보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의식이나 성향 역시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 두 가지가 어우러져 '문체'가 되는 거라고 일단 해석해 본다. 

  110쪽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시를 쭉 읽어오면서, 제 인생의 문제,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이어져 온 중요한 문제를 소설로 쓰고 마무리 지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소설을 쓰면서 문제점을 해결해왔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 책 속에서 오에 겐자부로가 언급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오에 겐자부로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윌리엄 블레이크를 읽다가 소설을 착안해 그 소설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한다. 소설은 읽는 사람의 삶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실제로는 작가 자신이야말로 가장 간절한 문제, 가장 절실한 것들을 작품을 통해 실현시키고 있는데 말이다. 소설이 사람의 삶에 마치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사실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소설을 통해 느낀 것, 그리고 남겨진 여운들, 그 모든 것을 되새기고 기억하는 일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아닐까. 책은 힘이 세다. 다만 모두가 그 힘을 담아 쓰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그 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 뿐이다.

  153쪽

 여러분 중에 지금 학교를 다니거나 졸업 후 계속해서 고전 연구를 하는 분들은 특별한 경우겠지만, 보통의 독서인으로 살아갈 경우엔 그다지 많은 고전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생에 걸쳐 읽고자 하는 고전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오에 겐자부로가 거듭 말하는 '고전'은 흔히 생각하는 '고전문학'이라는 의미보다 '불멸하는 가치'를 지닌 작품들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다. 고전이었다가 잊혀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여러 세대에 걸쳐 읽어도 좋을 그런 작품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두는 게 좋다는 거다. 이 말은 어떻게보면 지극히 당연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젊은 사람들은 바쁘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는 알 수 없지만 결론적으로 바쁘다. 나이들어서는 귀찮음이 는다. 결국 젊어서는 바빠서 나이들어서는 귀찮아서 책을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한다.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젊은 시절에 평생 읽을거리를 발견해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진짜 '평생에 걸쳐 읽을 고전'을 발견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것도 있지만 그것들은 또 실현해 나가야할테니.

  224쪽

 그는 지식인의 역할이 사회 속에서 어떤 특권도 지니지 않는 아마추어로서 권력을 비판하는 움직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지식인의 표상》을 읽어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요.

 

 

'그'는 에드워드 사이드를 가리킨다.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이름이 이제는 낯설지 않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과 저작은 오에 겐자부로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아마도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이름은 전설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을 떠나 여기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아마추어로서 권력을 비판하는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정치는 프로인 정치가들만의 영역이라고 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정치가들이라는 건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다. "너희는 모른다."가 그들이 표방하는 이념이다. 지식인은 많이 배우고 아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정치의 프로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비판하거나 잘못이나 오류를 지적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것이 아마추어로서의 권력 비판 아닐까. 프로는 오히려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지식인들이 흔히 맹점이라 부르는 것이 정치에도 있는 거다. 지식인의 역할은 단순히 책상에 앉아 존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의 역할이 단순히 국회에 모여 다툼만 거듭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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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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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읽는가가 삶을 결정한다."

 읽어야 하는 이유를 단순하면서 극단적으로 적어봤다. 

 만약 읽기가 삶을 결정한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읽는다'는 것이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에 공감한다면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을 거다. 이미 '읽기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읽기는 '왜'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된다. 다음 문제들로는 '무엇을'과 '어떻게'가 따라오는 거다. 

이 책 <읽는 인간>은 오에 겐자부로가 무엇을 어떻게 읽었는지가 담겨있다. 

'왜 읽어야 하는가?'하는 물음은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큰 의미가 없어 보였는데, 읽기가 곧 숨쉬기나 다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왜 읽어야 하는지는 알겠지만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들을 위해 이 책을 쓴 건지도 모를 일이다.


 앞서 적은 '무엇을 읽는가가 삶을 결정한다'는 말 속의 읽는 '무엇'은 단순히 어떤 책을 읽는가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세상의 온갖 사연, 사건, 사고, 일상 속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사람을 읽을 수도 있고, 날씨와 같은 자연 현상도 읽을거리 가운데 하나다. 

 간단히 말하면 '읽는다'는 말은 세상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 태도가 자발적이든 타율적이든 누구나 저마다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니 나름대로는 세상을 사는 모두가 '읽는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두가 읽는 인간이다'라는 결론이 나왔으니 더 이야기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오에 겐자부로는 단순히 '읽는 것'에 대해서 필요하다거나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기가 읽는 방식을 보여주지만 그 방법이 최선이고 최고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읽기의 과정과 그 다음에 대한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에게는 뇌에 손상을 입어 지적인 장애를 갖게된 아이가 있다. 자신들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은 무척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힘든 일이다. 오에 겐자부로 역시 힘든 시간들을 보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가 이 힘든 문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도움, 혹은 실마리를 얻은 것은 의사의 처방도 경험자의 조언도 아닌 책 읽기였다고 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책을 읽었고, 그 속에서 자기 작품을 착안했고, 그 이야기를 통해 아이와의 갈등과 괴로움을 풀어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오에 겐자부로의 읽기는 끈기와 인내는 물론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도 작가이면서 그렇게 끊임 없이 책을 읽고 거듭 읽어왔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오에 겐자부로에게도 다독의 기간이 분명 있었을테지만 이 책 속에서는 많이 읽기보다는 깊고 넓게 읽기를 이야기한다. 한 권의 책을 깊이 읽다보면 그 한 권의 책이 담고 있는 넓은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는 거다. 처음에는 한 권의 책을 다음에는 한 페이지를 다음에는 한 문단을 다음에는 한 문장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단어의 의미를 하는 식으로 점점 좁아지고 작아지지만 이해와 공감은 풍부해지는 경험이 깊고 넓게 읽기에 담겨 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책 한 권을 읽는데 1년이나 3년쯤 쏟아붓는 것이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방식이다. 


 나부터도 이 방법은 너무 멀고, 지루해 보여서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기에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또 다른 방식에는 깊이 공감했다.

또 다른 방식이란 평생 읽을 고전을 발견해서 그것을 거듭해서 읽어나가는 거다. 오에 겐자부로는 평생 읽을 고전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두는 게 좋다고 하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고전이란 시기와 때를 달리해서 감흥이나 깨닫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유 가운데 하나일 거다. 그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태도, 생각의 변화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자기 스스로가 작가가 된 것처럼 작가의 의도를 함께 읽어야 한다고 한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 발견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타인의 의도나 해석과는 별개로 가장 나다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책 읽기의 의미가 아닐까. 


 이 책 속에는 "나는 이렇게 읽었다"와 "그리고 이렇게 썼다"는 이야기가 거듭해서 나온다. 오에 겐자부로는 읽기를 통해 쓰고, 쓰기를 통해 다시 읽게 되는 과정을 거듭하고 있었다. 읽기와 쓰기는 별개로 나누어진 것도, 구분해야 하는 것도 아닌 셈이다. 

 종종 인문학이니 철학이니 하는 책들은 '너무 어렵다'고들 말하지만 그것은 꼭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나 철학 모두 '인간'에서 시작한 것들이기에 '나'에서 시작해서 읽어나가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용어나 표현은 누구에게나 어렵다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철학을 읽고 인문학을 읽는 이유가 그것을 공부하거나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조금은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철학이나 인문학, 고전들을 읽고 그 안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만 소화하면 충분하다. 딱딱해보이는 문장이 너무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지금까지 읽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면 위안이 될 거다. 매일 곱고 부드러운 흰 쌀 밥만 먹던 사람이 갑자기 현미밥을 먹으면 입안이 거칠고, 맛도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될 거다. 하지만 현미에 든 섬유질 덕분에 잘 씹어서 삼키기만 하면 소화가 더 잘 될 뿐 아니라 그 안에 더 풍부한 영양을 담고 있으니 더 오래 음미하고 씹으면 될 뿐이라는 걸 곧 알게 될 거다. 

 오에 겐자부로는 '평생 읽을 고전'을 발견하라고 했다. 얼른 씹어서 삼킬 수 있는 부드럽고 달콤한 것들은 평생 먹기에는 너무 쉽게 질려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읽으면 읽을수록 더 다양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 읽기를 추구해야 하는 거다. 


 노벨문학상이나 탄 사람의 글 가운데 처음으로 읽은 것이 '읽는 것'에 대해 적은 책이라는 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은 지금까지 하나도 읽지 않았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에 읽기의 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오에 겐자부로의 읽기뿐 아니라 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적지 않게 담겨 있다. 왜 쓰게 됐는지, 어떻게 쓰게 됐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책은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을 보는 하나의 태도를 갖게 만들어 준다. 그 태도는 물론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낯섦을 덜어주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는 도우미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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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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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 '아름답다'고 일컬어진다. 그 아름다움의 근원에 있는 "가치란 '정답'이 있다는 것이다"는 말을 들어본 것 같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수학적으로 완벽하다고 일컬어지는 비율로 지어진 건물들은 많은 이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며 실제로 그런 '완벽한' 건물들은 수명조차 길어보인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의 건축물이 이치에 따르고 조화를 이루며 균형을 이루는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까지 갖출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수학적으로 완전'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용의자 X의 헌신>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모르는 이, 혹은 책을 좀처럼 가까이 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가볍게 권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읽히고, 지나치게 잔인하지 않으며, 수수께끼같은 트릭들이 겉으로 드러나서 의혹을 부추기는 일도 없지만 분명 반드시 풀어야 하는 근본적인 장치가 있기에 마지막까지 긴장을 완전히 풀 수 없게 한다. 

 이런 책들의 감상은 길어도 소용이 없으니 아주 간단히 적기로 한다. 

 본문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이다. 

「"정말 깨끗하고 아름다운 눈을 한 모녀였다. 그때까지 그는 어떤 아름다움에도 눈을 빼앗기거나 감동한 적이 없었다. 예술의 의미도 몰랐다. 그러나 그 순간, 모든 것을 이해했다. 수학의 문제가 풀려서 느끼는 아름다움과 본질적으로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시가미는 한 때 천재라 일컬어지던 인물이지만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노릇을 하며 자신만의 수학문제를 푸는 일에 삶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다. 그에게는 다른 아름다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이유란, 수학 문제가 풀리는 순간에 느끼는 아름다움만한 것을 사람과 세상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발견한다. 수학 문제가 풀리는 순간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 사람 속에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아름다움이 용의자 X를 만들어낸다.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 수학자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를 알아주는 이에게 모든 것을 다 한다."가 한 때의 좌우명이었다. 그만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전부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 그랬기에 이시가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시가미는 결코 '희생'을 하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헌신'하는 것이다. 그 차이는 하나의 방정식 속에서 미지수 X와 Y를 구분해서 풀어야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희생은 버린다는 의미가 더 강해보인다. 하지만 헌신은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는 느낌,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을 준다. 결과적으로 희생과 헌신 모두 당사자의 모든 것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겠지만 분명히 다른 건 다른거다.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는 거의 마지막까지 행복했을 거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기필코 지켜내고자 하는 것을 위해 자신이 가진 능력, 수단, 시간 등 모든 것을 쏟아부어 목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 부러움을 느꼈다. 지켜내고자 하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것조차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 전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부터 쉽지 않다. 어떤 타협이나 설득 없이 그는 아름다움을 느꼈고, 발견했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행위에는 결과가 있기 마련이고, 그 결과에는 책임이 따르는 거다. 

 우리들 모두의 삶에는 하나의 물음표 혹은 X라는 미지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깨닫고 풀기 위해 골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경쓰거나 마음 쓰는 일 없이 덮어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X라는 미지수가 풀리는 순간은 분명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이다. 한 번은 혹은 한 번 더, 도전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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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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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아이부터 여든 노인까지 누구나 살면서 여러 번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들에 이름을 붙이면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 될 거다. 그 순간은 어떤 때는 스스로도 확실히 인식할 것이고 많은 순간에는 모르고 지나갈 것이지만 한 사람의 삶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올 거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고 해서 그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닐 거다. 오히려 하나의 계기,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변화의 시작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리라. 

 사람의 삶에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얽혀 있는 모든 것들에도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 있는 게 자연스럽다. 이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음악사에서의 전복과 반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음악에 거의 무지한 나에게도 이 책은 커다란 전복과 반전을 경험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하는 또 하나의 여지를 발견했다는 의미다. 흑인과 백인, 주류와 비주류, 천재와 노력가, 의혹과 사실을 오가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저절로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이나 주석에 적힌 노래나 영상을 발견한 것은 둘째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음악이 나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 책 속에 담긴 내용을 모두 잊어버리더라도 이 책은 여전히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을 거다. 어떤 의미로, 음악이 비로소 내게 왔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다루고 있는 음악 이야기는 음악의 역사와 무수한 예술가들을 생각해보면 아주아주 작고 또 적다. 하지만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 주안점을 둔다. 거기다 '강헌이 주목한'이니 저자가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만 추려서 적어도 그 가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저자의 입담도 입담이지만, 그 뒤의 숨겨진(아마도 나와 같이 음악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미스터리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본문은 재즈에서 시작해서 로큰롤까지 살펴 본 후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트로트와 엔카에 얽힌 낡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짚어두고 넘어가야할 지점을 찍는다. 그리고 다시 모차르트와 베토벤으로 넘어갔다가 다시금 지금의 우리 음악의 뿌리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 근대와 현대 음악 이야기를 들려준다. 

 

 재즈의 탄생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의 삶의 고단함과 고난, 슬픔을 상징하는 '필드홀러'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음악에서(솔직히 우리 음악이 있기는 있는건지 더 알 수 없게 됐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시대가 지니는 의미를 살피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 음악의 뿌리는 거의 와해되고 해체되어 망실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왜색과 외색이 너무 짙어 다시 '우리의 소리'가 재생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나부터도 잘 알지 못하고 있고 거의 관심도 없는 상태니 더 보탤 말은 없지만 자본과 시장에 휩쓸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동적인 모습이 좋게 생각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이 책은 직접 읽어보면서 저자가 말하는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와 맥락을 살펴보지 않는다면 그 가치를 제대로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구구절절 내용을 적는 것도 소모적이기는 마찬가지인데다 책을 읽은 이마다 받아들임과 해석이 달라질 건데 어찌 저자의 의도를 바로 알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음악을 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언제나 직접 들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책 역시 음악을 듣듯 직접 읽어나가면 좋을 책이다. 전복과 반전은 그 순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어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순간이 또 다른 순간으로 이어지며 삶을 더 풍부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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