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50쪽 

 이때 우리는 단순히 책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뭔가 새로운 극장으로 이끌리듯 자신도 한 단계 높은 곳에서 살아가는 정신이 되어 사이드와 함께 있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한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책을 읽는 행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끊임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은 비단 과거와 현재뿐만이 아니다. 작가와 독자 역시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끊임 없이 대화를 나누게 되고,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게 된다. '새로운 극장으로 이끌리듯'하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오에 겐자부로는 책을 읽는 과정을 통해 저자가 생각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독자에게 전해져야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마치 독자가 작가가 된 것처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어야 한다는 거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전해져 독자에게 이르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책을 읽는 행위라 생각한다는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되어야한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채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읽는 과정에서 자신을 더 뚜렷하고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저자의 의도를 알아챈다는 것이 반드시 동의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책 속에서, 작가의 이야기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 진정한 읽는 행위 아닐까.

  71쪽

 블레이크의 시를 읽을 때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번역서를 옆에 두고 시 원문을 꾸준히 반복해서 읽어야 했는데, 이렇게 시집을 읽으며 연구서 한 권을 곁들여 읽는 것은 블레이크를 읽는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제 경우에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데, 3년 정도 읽으면 정말 마음에 드는 연구서 한 권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후 제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은 책은 헌책방에 되팔고요.

 


 몇 권인가 번역서와 원서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도전해보려고 펭귄클래식판 원서와 번역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기도 했다. 그러나 올려두기만했지 아직 한 페이지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 내게 오에 겐자부로의 말은 큰 범주에서 두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하나는 내가 고른 방법이 영 틀렸거나 무리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한 사람의 책을 3년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인내심과 꾸준함이 없는 지금의 자세로 진정한 읽기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하는 거였다. 욕심이 많은 것이든 오만한 것이든 다시 읽기, 의미를 찾아 읽기를 거듭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어학적 능력의 향상을 떠나서 작가의 의도와 전하고자 하는 의미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결정적인 이점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는 건 좀 더 생각해보고 하련다. 그냥 욕심이지만 아직은 욕심을 다 내려놓을 수가 없으니.

  82쪽

 이렇듯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완전히 다른 행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ief'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운이 남는 읽기를 위해서는 책 속의 표현이든 단어든지를 음미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종종 하는 말이지만 글자를 읽고 줄거리를 기억하는 것 정도는 거의 누구나 할 수 있다. 일곱 살 아이도 일흔 살 노인도 특정한 사정이 있지 않다면 가능하다는 거다. 하지만 여운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과정이 아니다. 단어나 문장을 되새겨보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오에 겐자부로는 '문체'를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쓴다고 한다. 어떤 말인지는 알겠지만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작품을 통해 소설가를 드러내는 게 문체라는 것인데, 아마도 두 가지 의미일 거다. 하나는 앞서 말한 '선율'로써의 문체고, 다른 하나는 뒤에 말한 '자세'로써의 문체가 될 거라는 거다. 단순히 생각하면 우리가 책을 읽는 과정을 통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정보를 통해 알게 되고, 동시에 그 인물이나 정보를 통해 드러나는 작가의 의식이나 성향 역시 느낄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 두 가지가 어우러져 '문체'가 되는 거라고 일단 해석해 본다. 

  110쪽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시를 쭉 읽어오면서, 제 인생의 문제, 그것도 몇 년 동안이나 이어져 온 중요한 문제를 소설로 쓰고 마무리 지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소설을 쓰면서 문제점을 해결해왔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 책 속에서 오에 겐자부로가 언급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오에 겐자부로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윌리엄 블레이크를 읽다가 소설을 착안해 그 소설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한다. 소설은 읽는 사람의 삶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실제로는 작가 자신이야말로 가장 간절한 문제, 가장 절실한 것들을 작품을 통해 실현시키고 있는데 말이다. 소설이 사람의 삶에 마치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사실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소설을 통해 느낀 것, 그리고 남겨진 여운들, 그 모든 것을 되새기고 기억하는 일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 아닐까. 책은 힘이 세다. 다만 모두가 그 힘을 담아 쓰는 것이 아니고, 모두가 그 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 뿐이다.

  153쪽

 여러분 중에 지금 학교를 다니거나 졸업 후 계속해서 고전 연구를 하는 분들은 특별한 경우겠지만, 보통의 독서인으로 살아갈 경우엔 그다지 많은 고전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생에 걸쳐 읽고자 하는 고전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오에 겐자부로가 거듭 말하는 '고전'은 흔히 생각하는 '고전문학'이라는 의미보다 '불멸하는 가치'를 지닌 작품들이라고 생각해야 할 거다. 고전이었다가 잊혀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여러 세대에 걸쳐 읽어도 좋을 그런 작품을 젊은 시절에 발견해두는 게 좋다는 거다. 이 말은 어떻게보면 지극히 당연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젊은 사람들은 바쁘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는 알 수 없지만 결론적으로 바쁘다. 나이들어서는 귀찮음이 는다. 결국 젊어서는 바빠서 나이들어서는 귀찮아서 책을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한다.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젊은 시절에 평생 읽을거리를 발견해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진짜 '평생에 걸쳐 읽을 고전'을 발견하자는 것이었다. 다른 것도 있지만 그것들은 또 실현해 나가야할테니.

  224쪽

 그는 지식인의 역할이 사회 속에서 어떤 특권도 지니지 않는 아마추어로서 권력을 비판하는 움직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지식인의 표상》을 읽어본 분들은 잘 아시겠지요.

 

 

'그'는 에드워드 사이드를 가리킨다.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이름이 이제는 낯설지 않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과 저작은 오에 겐자부로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모양이다. 아마도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에드워드 사이드라는 이름은 전설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을 떠나 여기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아마추어로서 권력을 비판하는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정치는 프로인 정치가들만의 영역이라고 한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정치가들이라는 건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다. "너희는 모른다."가 그들이 표방하는 이념이다. 지식인은 많이 배우고 아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정치의 프로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비판하거나 잘못이나 오류를 지적하지 못할 것도 없다. 이것이 아마추어로서의 권력 비판 아닐까. 프로는 오히려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지식인들이 흔히 맹점이라 부르는 것이 정치에도 있는 거다. 지식인의 역할은 단순히 책상에 앉아 존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의 역할이 단순히 국회에 모여 다툼만 거듭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