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 정조 시대를 읽는 18가지 시선
이덕일 지음 / 고즈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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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을 보고 있으면 노론집단과 혼자 싸우다시피하는 정조의 모습, 사생활은 거의 없는 인간 정조의 모습이 안타깝게 그려지고 있다. 드라마라는 속성상 극적긴장을 위한 장치로 치부해버릴까 하다가도 역사서 속에 나오는 정조의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드라마를 자꾸만 챙겨보면서 연민을 갖게 된다. 

먼저 읽은『사도세자의 고백』에서 이덕일은 편향된 입장을 버리고 당대의 정치적 승자와 패자의 간극을 메우려는 남다른 시도를 해 신뢰감을 주었었다.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역시 다양한 역사 사료들을 토대로 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사료인 『정조실록』을 비롯해 정조 때의 일일 국정기록인 『일성록』, 규장각에서 펴낸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채재공 문집 『번암집』, 서얼로서 규장각 사검서였던 이덕무의 『청장관 전서』, 박제가의 『정유집』, 유득공의 『고운당필기』, 정조시대 천주교 관련 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황사영백서」등 많은 사료들을 참조했다. 이것들은 각각 그것을 집필한 자의 사상과 개인적 입장을 고려할때 일정정도의 문제점을 지닌다. 작가는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정조시대 굵직 굵직한 18가지 사건들을 들어 다양한 시각으로 정조를 조명하고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비명에 간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치고 이복 백부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어야 했다.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흉언을 유포한 노론 벽파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영조의 계획이었다. 이런 정조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를 즉위일성으로 강조하면서 왕좌에 올랐다. 즉위일성은 노론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정조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한 나라의 임금의 길을 택했다. 

1권에서의 대부분은 노론과 정조와의 대립에 할애된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뿐만 아니라 외할아버지까지 노론 일색이었던 외척과의 전쟁, 임금의 침실 지붕위에까지 자객이 드는 상황, 규장각 사검서에 서얼들을 등용하여 노론의 세력을 견제하고 온갖 차별에 대항한 정조의 정치적 역량을 살펴볼 수 있다. 1권의 마지막 장에 할애된 남인과 천주교와의 관계는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어떻게 유입되고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는지 소상하게 살펴볼 수 있게 되어있다.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먼저 파견되어 포교활동이 시작된줄 알았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부를 찾아 영세를 자청한 최초의 인물 '이승훈'이 있다는걸 알았다.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는 신앙과 제사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었다는것, 정조는 천주교를 서양의 선진 학문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부수된 부작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 등은 새로 알게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천주교 박해 역시 남인을 탄압하려는 노론의 정치 술수의 하나였던 걸까? 천주교 문제로 공격받는 남인들을 옹호하기 위해 문체반정을 들고 나온 정조의 다음 이야기들은 2권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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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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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들어 계속 책을 다시 읽어야하는 일이 생긴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경우도 생기고 안보이던 헛점들이 보이기도 한다. 또 분명히 읽은 흔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도대체 몇번을 읽어야 다시 읽지 않아도 되는 걸까? 대체 어떻게 읽었기에 재독인데도 불구하고 처음처럼 느껴지는걸까? 늘 시간에 쫓기면서 '해치워야한다'는 느낌으로 읽은 탓일까? 시간에 쫓기기야하지만 나는 마침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읽는 편이다. 읽다가 의미가 명료하지 않으면 몇번이고 되풀이 읽기도 하고, 사건이 연결고리가 잡히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 읽기도 한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발견되는 오자나 탈자들은 책속에 표시해둘뿐만 아니라 책 맨 뒷쪽에 따로 페이지를 적어놓는것도 잊지 않는다. 나름대로 정독을 했다는 생각인데도 여전히 다시 읽어야하는 문제들이 생겨 이런 저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당면한 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것 같은 기대감이 컸다. 또 바람을 일으키며 책장이 후루룩 넘어가는 표지 디자인이 왠지 마음에 들기도 했다. 아마도 껄끄럽고 더딘 내 독서욕망의 프로이드적 반응이었으리라. 알라딘 적립금을 이용해 주문한 책을 받아들고 우선 나는 책의 크기와 두께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고 두께도 얇았다. 하드커버라는것도 내게는 의외였다.

내용은 기초편, 테크닉편, 실천편 등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기초편에서는 양적인 면을 강조하는 속독과 슬로리딩을 비교하면서 독서의 질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매력적인 오독의 권장>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테크닉편에서 꼼꼼이 읽는 방법이 소개된다. '이해율 70%의 덫', '조사, 조동사에 주의하라', '사전찾는 습관을 기른다' 등 소제목들은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할말을 다하고 있다. <동서고금의 텍스트를 읽다>라는 제목을 단 실천편에는 8편의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중의 여섯편은 일본 소설이고 나머지 하나는 카프카의 <다리>, 푸코의 <성의 역사1-앎의 의지>이다. 여덟편중 7편이 소설인 셈이다.  

작가가 소설가라고 한다. 나는 아직 이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의 작품이'미시마 유키오의 재래'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일본 열도를 강타했다는 평가가 있다. 작가의 직업이 소설가인 탓인지 소설을 위주로 책읽기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책을 읽는 방법>이라는 제목 보다는 <소설을 읽는 방법>이라는 쪽이 훨씬 더 책의 내용과 어울릴거라는 생각이 든다. '책'이 '소설'의 대체어는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은 소설을 단지 스토리 전개로 읽기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좀더 깊이있게 읽어내고 싶은 사람에게 유용한 책이 될 것 같다. 또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유명한 작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소설적 전략을 꾀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책 마지막에 실어놓은 푸코의 작품을 읽는 방법은 입문자에게 많은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철학은 그것을 읽는 방법보다도 그 철학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개념에 더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작가가 슬로리딩을 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문하고 책이 배달되어오기까지 기다린 시간에 비한다면 책을 읽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요구되지 않았다.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있었고 특히 '베겨쓰기는 비효율적이다'라든가, '복수의 책을 비교한다' 등은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쉬운점은 그가 실천편에서 예로 든 작품 네개를 먼저 읽어보지 못한 채로 이 책에서 먼저 읽었다는 것이다. 기회가 되는대로 작품을 읽고 다시 볼 것을 다짐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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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0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은 그것을 읽는 방법보다도 그 철학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개념에 더 유의해야 한다" 는 말에 무릎을 탁 치며 공감합니다!

반딧불이 2009-02-1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인홀드님께서도 철학자들의 개념의 골짜기에서 헤매어 보셨군요.~

비로그인 2009-02-1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아직 저의 수준이 일천하여 모르는 것 투성이랍니다;;^^
 
텔레비전을 버려라 - 잃어버린 삶의 복원을 위하여
제리 맨더 지음, 최창섭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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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은 1920년에 발명되었고, 2차대전 이후 실용화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텔레비전의 나이가 88? 텔레비전은 발명이래 진화를 거듭해와서 영상의 시대인 현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것 같다. 이런시대에 '텔레비전을 버려라'는 선정적인 문구를 단 이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제리맨더가 말하는 텔레비전의 폐해는 다양하다. 텔레비젼은 수백만의 가정에 단번에 침투할 수 있다. 이런 매체의 특성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광고이고 이 광고는 곧 독재의 본질과도 연결된다. 또 텔레비전은 인간의 오감 중 특히 시각에 집중한다. 이런 특성은 내용보다 형식에 우선하며 사람의 눈을 화면에 붙잡아두기 위해 갖은 인위적 조작들을 행한다. 

텔레비전이 인위적으로 화면을 조작한다는 것은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지금 당장 텔레비젼을 켜고 아무 프로그램이나 보는 것이다. 텔레비젼의 화면은 수시로 바뀌는데 한 화면의 유지 시간을 재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확인해본 결과 거의 매초 단위로 화면조작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경험이었다. 우리의 눈을 붙잡아두는 것이 이런 화면조작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았다.

화면에 눈이 붙잡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자연과 유리되고 자연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진다.  거꾸로 멀어진 시간만큼 우리의 경험은 텔레비전을 통해 미디어화되고 획일화된다.  끝내 우리는 경험도 텔레비전이나 기타 영상매체를 통해 구매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여 인간을 집안으로 끌어들였고 텔레비젼은 자연과의 빛을 차단하고 인공적인 빛으로 우리와 눈을 맞추고 있다. 

텔레비전은 매체의 특성상 정적인 것보다는  동적인 것이, 사랑보다는 폭력이, 식물보다는 동물이, 살아있는 것보다는 죽은것이 더 더울리는 속성을 지녔다고 한다. 따라서 요가보다는 권투경기가, 온화함이나 따스한 마음보다는 분노와 폭력이, 움질일 수 없는 식물보다는 크고 거친 동물이, 살아 움직이는 인간보다는 죽어있는 시체가 더 텔레비전을 보고있는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된다.

이런 매체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관계자들은 이런 것을 역이용하기도 한다. 섹스, 스포츠와 더불어 스크린이 우민화정책의 하나로 꼽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텔레비전이 어떤 좋지않은 영향을 미치는지 제리맨더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 참조한다. 메이저급 광고회사의 사장이었던 그의 이력탓인지 특히 광고가 주는 폐해의 부분이 설득력을 지닌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인위적인 빛의 폐해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조합하지만 그에 대한 연구의 부족으로 충분한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텔레비전, 핸드폰, 컴퓨터, 플레이스테이션 등을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공공의 적으로 규정했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것들을 안쓰는 불편함을 어떻게 감수해야하나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선다. 이런 내 마음을 그는 이미 짐작이라도 한듯이 "그렇지만 텔레비젼을 제거하기 위한 첫걸음은 텔레비전을 제거할 수 없다는 생각을 마음으로부터 버리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의 용기있는 까발림과 정성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개면서 뉴스를 들어야할 것같다. 또 일주일에 두번 방송하는 사극 한편쯤은 보아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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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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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의 만화 『십팔사략』이후에 역사서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만화책을 역사책 운운하면 역사학자들의 노여움을 살지 모르겠다. 만화라고 했지만 이 책을 그냥 만화라고 부르는 것은 고우영에 대한 또 십팔사략에 대한 모독이다. 학습만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교과서적인 냄새가 나고 그 내용이나 그림이 너무 애로틱하고 적나라하다.

사마천의 '사기'를 필두로 중국 각 시대의 정사로 꼽히는 18가지의 역사서를 간추렸다는 이 만화책을 중국의 어떤 연표보다도 나는 요긴하게 쓰고 있다. 방대한 중국사를 개괄하는데도 좋고, 시대별로 되어있어서 필요한 부분만 빼어보기도 좋다. 또 흔히 쓰이는 사자성어들에 대한 유래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많이 된다. 명절에 제사를 끝내고 나면 온 집안의 사내들이 한권씩 붙잡고 몸을 포갠 채 읽고 있는 모습은 가히 볼만하다. 다들 빌려달라고들 하지만 가보를 빌려주는 사람 봤냐고 이책만은 집에 올때만 보라고 할만큼 아끼기도 하는 책이다.

만화책은 아니지만 이덕일의 책들도 재미있게 읽었다. MBC 드라마 '이산'을 보면서 함께 읽어두고 싶어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2권과 함께 구입을 했다. 암기과목에 젬병인 나는 늘 역사과목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곤 했다. 고려와 조선의 토지제도도 그렇고 벼슬이름 역시 내게는 외계인의 언어처럼 낯설기만 했던 것 같다. 당쟁이니 파벌이니 하는 것 역시 손사래를 치며 외면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시험에서 놓여난 다음에는 좀 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소화되지 않는 음식마냥 역사는 내게 더부룩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가끔 역사드라마를 보면 저 내용들이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답답한 적이 더러 있었다. 최근 드라마 "이산"을 재미있게 보면서도 마찬가지여서 이참에 아예 드라마를 핑계삼아 역사공부도 좀 해두자는 심정으로 이런 저런 자료들을 찾다가 마침 이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상당한 견해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까지 내가 배워온 역사는 늘 지배자의 기록이었고, 일명 '바보사'로 통칭되는 『바로 보는 우리역사』씨리즈가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한동안 인기몰이를 하기도 했었다. 기록하는 사람이 지배자이거나 민중이거나 편파적이기는 매한가지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중도의 입장을 견지하는 역사서들이 새롭게 출간되는 모양이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당시의 정사인 『 영조실록』과 사도세자의 아내이고 드라마 주인공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양팔저울로 삼고 있다. 사도세자의 아내이면서도 남편을 정신병자로 몰아간 여인의 기록인『한중록』과 문무의 양면을 고루 갖춘 어쩌면 성군의 자질을 지녔을지도 모를 세자의 모습을 기록한 『영조실록』의 간극. 저자 이덕일은 이 간극을 메우는데 골몰하고 있다. 519년간 (1392-1910) 이어온 조선왕조에서 83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50년이 넘는 가장 긴 기간동안 왕좌를 지켰던 영조라는 한 인간의 양면적인 모습, 여름날 뒤주에 갇혀 8일동안 물한모금 마시지 못한채 노론의 제물로 받쳐진 사도세자. 오직 자신의 권력만을 지키기 위해 정의도 도의도 인륜도 무시했던 노론.소론 인사들. 그런 당파싸움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몸을 사려야했던 여인들의 모습이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작가는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의 원한을 푸는 일을 자신의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세번의 커다란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멀쩡한 자신의 믿어지지 않는 행운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소설가가 아닌 역사학자의 글을 읽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다만 아쉽다면, 물론 이 책의 취지와는 다른내용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정조 시대의 긍정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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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귀향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7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최병근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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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20세기 후반에서야 발견되어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글은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느낌이 정확하게 명명이 안되지만 그 원인의 상당부분이 그의 이력과 관련있는 것 같아 책날개에 있는 작가의 소개글을 옮겨 놓는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러시아의 남부 도시 보로네쥐에서 철도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남매중 장남이었던 그는 보험회사 사환, 열차 기관사 보조원 등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집안의 생계를 도와야하는 힘겨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듬해 보로네쥐 공과대학에 입학한 플라토노프는 전기, 기계 등 다양한 공학이론을 공부하며 지역 신문사 기자로도 활동한다. 이 시기에 그는 철학 에세이 『전화』, 시집 『푸른 심연』, 단편소설 『태양의 후예들』등을 발표하며 문필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이어 첫 작품집 『예피판의 수문들』을 비롯해 이듬해에는 『비밀스러운 사람들』등을 포함한 세 권의 작품집을 출간하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간다. 길게는 193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전기작품들을 통해 이미 플라토노프는 혁명의 시기에 성장한 '노동하는 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그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정립한다. 또한 『붉은 처녀지』,『신세계』,『10월』등 중앙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작가로서 입지도 공고히 한다. 그러다 1931년 그해에 발표한, 농촌집단화의 실상을 풍자한 중편 『저장용으로 : 빈농의 기록』에 대해 스탈린이 부농의 시각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평가함으로써 플라토노프는 작품 활동에 치명적이 타격을 입게 된다.

전쟁이 끝나 모스크바로 돌아온 플라노토프는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풀려난 아들을 간호하던 중 폐렴이 전염돼 1951년 사망한다. 플라토노프의 주요 작품들은 대부분 사후에 출간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예피판의 수문들』, 『그라도프 시』, 『포투탄 강』,『잔』, 『공사 기초용 구덩이』, 『행복한 모스크바』, 『체벤구르』등이 있다.

 

『귀향』에 실려있는 5편의 단편은 모두 '기차'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기차로 시작해 기차로 끝나는 『귀향』은 잘 짜여진 구도를 갖추고 있고 『기관사 말제프 』역시 실명한 기관사의 이야기를 다루며 어떤 형식으로든 모든 작품에 기차가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이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것 같다. 아버지가 철도 기술자였고 자신 역시 열차 기관사 보조원을 지낸 경력이 작품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 플라토노프는 18살이었고, 이때 그는 공과대학에서 공학이론을 공부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했다. 스탈린의 시기는 러시아에 문학이 없던 시기였다. 플라토노프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쓰여졌다. 그에게는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작품평이 붙어있는데 어느 시대를 불구하고 '서민'이란 항상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아닌가. 같은 '서민'을 다루더라도 고골이 환상성을 가미하여 관료체제를 비판하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의 실제적 삶보다는 영혼의 문제에 더 관심을 두었다면, 플라토노프는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그의 문장에는 화려한 수식이나 미문이 없다. 그의 주인공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지도 않았다. 러시아의 작은 마을에서 정치적 변혁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언어로 펼쳐지고 있다.

플라타노프의 이야기들은 조금은 교양있고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정도의 교양을 지닌 옆집 살던 아줌마를 우연히 만나 동네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잔잔함이 전편에 녹아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책을 놓지 않게 만드는 묘한 힘을 지녔다. 이것은 문체의 유려함이나 극적 사건보다는 삶에 대한 진솔함이 그대로 묻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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