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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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월을 가장 좋아한다. 모기에게 뜯기고 금속성의 매미 울음소리가 톱질해놓은 백야처럼 얇은 여름잠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깊은 하늘과 상큼한 바람이 있는 9월이 오면 차렵이불로 몸을 감고 비로소 잠다운 잠을 잘 수 있다. 고단한 육체와 어지러운 영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는, 잠 다운 잠 말이다. 이렇게 잠을 자고나면 나는 신선한 뽕잎을 먹고 넉 잠자는 누에처럼 고운 실을 뽑을 수 있을 것같은 생각이 근지럽기까지 하다.

내가 깊은 잠에 빠졌던 2002년 9월, 아룬다티 로이는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페에서 “9월이여, 오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그녀는 미국인에게 끔찍한 기념일이 있는 9월에 대해 이야기한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 등이 민간항공기와 폭탄을 이용한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테러조직 알 카에다를 주범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9월은 미국인에게만 끔찍한 것이 아니다. 왜 하필 9월 11일이었을까? 세계의 9월은 시간의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1922년 9월 11일 영국정부는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통치를 발표했다. 1973년 9월 11일 칠레에서는 CIA의 지원 아래 감행된 피노체트 장군이 쿠데타를 통해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켰다. 1990년 9월 11일 조지 부시는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로 결정했음을 선포했다.

아무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의 9월은 그러나 교묘하게 ‘보이지 않는 주먹을 가진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에 의해 주물러졌다. 이 모든 배후에는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번져가고 있는 미국의 세계화의 논리가 작동되고 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전쟁의 핵심 주역은 바로 미국이었다.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의 소설가다. 그녀의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이 미국에서 출판되면서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고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은 그녀에게 소설가라는 이름과 함께 활동가라는 이름 하나를 더 붙여주었다.  소설의 성공으로 1년여간 세계여행에서 돌아온 후 인도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 비판하는 글, 댐건설 문제 등에 근본적인 비판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소설가로서 혹은 활동가로서 요구하는 모든 공적 정보나 공적 설명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것은 인도의 오래된 브라만적 본능 때문이다. 카스트제도로 알려진 이 신분제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 4계급으로 나누어지고, 이 계급에도 들지 못하는 달리트(불가촉천민) 계급이 하나 더 있다. 최상의 지배계급인 브라만은 제사를 지내거나 베다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 베다힌두의 처세훈에는 달리트(불가촉천민)가 경전의 일부라도 엿들었다면 그의 귀에 납을 녹여 부어야한다고 쓰여 있다니 그들의 신분차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 하다. 

인도는 거대 댐 건설국이다. 인도사람들에게 대형 댐은 굶주림과 빈곤으로부터의 탈출구이며 결코 의심해서는 안되는 하나의 신앙이다. 그러나 댐 건설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국제적 부패가 작동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이 미국을 겨냥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인도는 세계의 축도이다. 카스트 시스템 안에서 인도정부를 향한, 또 인도 너머의 미국을 향한 용기 있는 발언들을 공유하기 위해 나는 9월의 달디 단 잠을 헌납해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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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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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미나에서 들었던 한 시인의 말이 기억에 남아있다. 외국의 자연과학 서적에는 다양하게 詩들이 인용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현재의 문단이 사회의 문제들을 빗겨나 있다는 말로 들었다. 곱씹어 보아야할 이 말은 일차적으로 세미나에 참석한 문인들을 겨냥하고 있지만 상대적이기도 하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는 빼어나지만 타학문과 서로 소통하려는 노력의 부재가 원인이기도 할 터이다.

프롤로그에서 경제학자 우석훈은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을 짧지만 강렬한 스냅숏처럼 보여’준 기형도의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직선들의 대한민국』또한 그런 책이 되기를 바란다는 우석훈은 기형도의 ‘짧고 날카롭고 문학적 감수성이 가득한 문장 대신에 나는 수다스러움으로, 관광버스 춤을 추는 여행 가이드의 어수선함으로 지겹게 만들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여두었다.

우선 반가웠다. 경제학자의 책에 기형도의 산문집이 등장하고, 이상의 <오감도>가 인용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 음악, 미술 등 각 예술장르가 골고루 언급되고 있다. 그가 얘기하는 ‘수다스러움’을 한 꼭지 옮겨보면 이렇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회의 상상력, 특히 예술적 상상력은 모두 도시 미학의 찬가 안에 갇혀버렸다. 물론 한국은 여전히 높은 도시빈민 비율을 나타내지만, 기이하게도 도시 빈민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문화가 거의 없다. 노동운동에서 소설을 쓰고 싶어 도망쳐 온 공지영은 분당 아파트에 갇혔다. 가장 먼저 생태시학을 주장했던 김지하는 일산의 오피스텔에서 더 이상 상상력을 발동하지 못한다. 1990년대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작가 김영하는 2007년 다시 고시원에 갇혔고, ‘압구정동’에 갇혀 있던 유하 감독은 2006년 여전히 ‘비열한 거리’에 갇혀 있다. 수많은 드라마 PD들은 여의도에서 청담동 사이의 88도로 안에 갇혀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예술혼을 갖추고 싶던 건축가들은 테헤란로에 갇혀 있다. 도시 빈민 미학의 진실성이 은폐되고 각색되는 동안 도시 미학이 만개한 2000년대의 미술계는 삼성그룹의 용인창고에 갇히고, 조각예술은 홍대와 대학로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영화는 강남역 사거리에서 봉인되었고, 음악은 증발되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전국에 모세혈관처럼 흩어진 만홧가게를 통해 꿈틀거리던 만화는 인터넷 한구석에서 숨만 겨우 헐떡거리는 시대가 되었다.

우석훈이 우리사회의 당면문제 즉 청계천, 대운하, 아파트 문화 등을 얘기하는 동안 나는  그의 수다스러움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했다. 동아일보 앞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청계천에 물이 흐르고 물고기를 방류하면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러나 ‘청계천의 구조상 비가 올 때마다 많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은 모른다. 나도 몰랐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청계천을 ‘수도꼭지’ 또는 ‘어항’이라고 부른단다. ‘청계천은 생태복원도 아닐뿐더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도시 조경 사업에 불과하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전문가들의 직무유기 같은 것을 떠올렸다.

포항, 울산, 새만금 사업등 연안지역개발에서 시작된 한국경제는 이제 대운하로 대표되는 내륙개발로 돌아섰다. 대운하 건설에 대한 찬반 양측의 입장과 국토 생태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다채롭게 문제를 검토하는 시각을 갖게 해준다. 낙동강축의 식수문제, 전력생산과 홍수관리의 관점에서 해온 그동안의 물 관리정책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문제 등 전문가적 시각이 필요한 사안을 접해볼 수도 있다.

 

아파트 문화로 대표되는 도시건설의 문제 또한 만만치 않다. 고층 건물의 숲을 통과하면서 변화해가는 사람들의 정서, 아토피로 대표되는 각종질환 등. 건설지상주의가 낳은 폐해들이 속출하고 있다. 우석훈이 드러내는 한국사회의 문제들은 그의 말을 빌리면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우석훈이 누군가의 책임을 묻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 이 많은 문제들은 누구의 책임인가?  특정 정치가도 건축가도 아니다. 그것의 책임은 바로 우리 개개인이 느끼는 미적 감수성에 있다.  바로 우리의 미학이 문제다.

 

『88만원 세대』, 그가 해제를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이어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읽으면서 나는 갑자기 이 여름을 잘 날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80 골골”이라며 나를 위로했던 의사의 말은 아무래도 수정되어야할 것 같다. 첩첩이 쌓여가는 문제들을 접하면서  눅눅한 습기가 온몸을 친친 감아오는 이 여름, 나는 마치 두엄더미 하나를 선물 받은 기분이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수다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오지랖으로 싼 두엄더미. 나는 우석훈이 던져준 두엄더미를 통해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읽는다.

 

어차피 나도 우석훈처럼 가늘고 오래 살아야한다면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에 대해, 그리고 그 대상에 보내는 열광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생태미학에는 예술가들의 몫이 할당되어있다. 이 시대에 예술 그것도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대체 무엇인가?  경제학자의 글에 문학이 언급되고 시가 인용된다고 좋아라하던 마음은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깔려 죽어버렸다. 그렇지만 그가 던져준 두엄더미는 꼬물거리는 무수한 생명체의 보고라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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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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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일 개성에 다녀왔다. 나는 아무런 기대도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날은 비가 내렸고, 내 몸 상태는 날씨만큼이나 꾸물꾸물 했다. 현대아산의 직원들이 안내를 맡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개성관광객들의 연령층이 높은 탓인지 출입국관리소의 분위기는 시외버스터미널 같았다. 북측 안내원 두명의 안내를 받으며 개성공단을 지나 나무 없는 산들을 구비돌아 송악산에 다다랐다. 박연폭포, 관음사를 비와 땀으로 돌아내려와서야 내 몸은 정상모드로 돌아왔다.

오가며 접한 북한 주민이나 안내원, 군인들의 모습이 아직 내 맘속에 남아있다. 그들은 모두 까무잡잡한 피부에 여위고 왜소했지만 표정은 송악산에 흐르던 개울물만큼이나 맑았다. 특히 군인들은 나이가 무척 어려보였고 상대적으로 큰 모자탓에 장난감 병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북한은 초등학교과정이 4년이고 중학교과정이 6년이라고 했다. 그리곤 바로 군대에 가거나 전문대 혹은 대학으로 진학을 하는 모양이었다. 중학교를 마치고 바로 군대를 갔다면 그들의 나이는 17,8세 일것이다.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북한에는 괴물의 형상을 한 빨갱이가 산다는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다. 이런 내가 북한에서 보고 느낀 것은 어느 오지 마을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만나고 온 것같은 편안함과 따뜻함을 그들은 전해주었다. 비록 하루일정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북측 안내원들과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돌아와 이 책을 찾아 읽게까지 되었다. 핵 폐기문제,탈북자 문제, 자주통일, 옥수수 5만톤지원에 대한 거부 등 많은 사안들이 있었지만 도대체 사람이 그것도 두어시간이면 다다를 곳에 사는 사람들이 굶어죽는다는 것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해야만했기 때문이다.
 
장 지글러는 유엔 인권위원회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하면서 세계 각지의 굶주리는 사람들을 접해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세계지도를 책의 앞부분에 펼쳐놓고 바라보면 기아의 문제로 언급되는 나라들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집중되어있다. 북반구의 부의 축적과 남반구의 아사자의 수는 반비례하고 있는 셈이다. 60억의 세계인구가 생산하는 식량은 120억 인구가 먹고도 남을 양만큼인데도 하루에 10만명이상이 굶어죽고 있다. 그것도 대부분이 어린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곡물사료가 주어지는 시스템이 갖추어진 '피드 롯'에서 미국의 소들이 먹어치우는 곡물이 연간 50만톤에 달하는데 8억 5000만의 인간이 심각한 기아상태이거나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린다.(1999년 한해 통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 대한 장 지글러의 대답은 다양하다. 자연도태설이라는 사이비 신화를 신봉하는 자들, 자연재해, 정치부패, 시장가격 조작, 전쟁, 신식민지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은 단지 그것하나만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맞물려 있다. 따라서 한가지 처방책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배후에는 아귀들린 자본시장의 욕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칠레 대통령 아옌데와 스위스의 다국적 기업 네슬레와의 관계가 그렇고, 부르키나파소의 상카라와 프랑스의 일부세력과의 경우도 그렇다.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시족도 마찬가지다. 북한도 예외는 아니다. 100년만의 대홍수라는 1995년의 재해로 인한 논과 관개시설의 파괴, 연이은 가뭄 등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강제집단화정책으로 몰락해버린 농목축업, 지배층의 독식등 다양한 이유를 들고 있다. 나는 제3자의 이런 객관적 보고앞에서 몹시 마음이 불편하다. 북한에 지원하던 원조를 갑자기 끊어버린 소련의 행각 등 아마도 이 책에 서술되지 않은 또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푸른 비닐장화를 신고 개성시내를 걸어가던 아이의 가느다란 팔과 다리가 떠오른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유난히 덜 젖은 북측안내원에게 비결이 뭐냐고 묻던 내게 자기는 몸이 가늘어서 빗줄기사이로 마구 지나다닌다던 농담이 새삼스레 아프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거나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옛말은 그르지 않다. 책을 읽은 것이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이 되어버렸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데 나는 민들레 홀씨만큼의 역할도 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나는 또 밥상머리에 앉아 모래알을 씹을 것이고 밥과 국을 남기는 가족들한테 신경질만 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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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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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미루어두었던 김훈의 『칼의 노래』를 해치우듯 읽었다. 이상하게 나는 김훈의 글은 비껴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비껴가려고 했던 것 같다.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 당선작의 제목을 보게 되었다. “아름답고 끔찍한 예언-김훈론”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김훈에 대한 수식어를 똑같이 사용하는 그의 글이 궁금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김훈의 묘사는 끔찍하고도 아름다웠다. 그의 글은 너무 아름다워서 끔찍했고 혹은 너무 끔찍해서 아름다웠다. 그런 그의 글은 대상을 낱낱이 분해하고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는 느낌을 주었다. 아마도 나는 이런 느낌들을 경험하고 싶지 않아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칼의 노래』도 이런 느낌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이 정제된 단문으로 일관하는 그의 글은 잘 벼린 단도 같다. 그가 이순신을 위해 포획한 모든 언어들은 이순신의 칼처럼 날이 섰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칼에 베일 것만 같아 긴장했어야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중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 기초하고 있다. 이순신을 1인칭 화자로 내세운 이 소설은 소설 같지 않고 소설의 형식을 빌린 전기 같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대립항들이 이것이 김훈의 소설임을 증명해준다.  삶과 죽음, 공격과 수비, 이동과 정지, 집중과 분산, 개인과 전체 등은 김훈의 글쓰기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극과 극의 극명한 대립이 난중일기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감각적인 특히 후각에 대한 끔직한 묘사 역시 김훈의 글쓰기 특징이다. 『화장』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에게서 풍겨오는 냄새에 대한 그의 끔찍한 묘사를 접한 바 있다. 『칼의 노래』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모든 냄새를 비린내로 환원시킨다. 어린 아들 ‘면’에게서 나는 젖 냄새, 안개의 냄새, 바다의 냄새, 피 냄새, 심지어 보리 삶는 냄새에서 마저도 그는 비린내를 맡는다. 난 중에 두어 번 품게 되는 여자에게서조차 ‘오랫동안 뒷물하지 않은 더러운 여자의 날비린내’를 맡고, ‘다리 사이에서 지독한 젓국냄새’를 맡는다. 이런 냄새에 대한 천착들은 이것이 이순신의 전기가 아니라 김훈의 소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임진왜란은 1592년 시작되어 1598년까지 7년을 끌었으나 이 책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임진년이 아닌 끝나기 직전의 정유년과 무술년을 다루고 있다.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수군은 강화도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육군 역시 적군의 뒤만 따를 뿐 싸움다운 싸움 한번 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자한테 바칠 죽은 시체의 머리 챙기기에만 급급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인해 회군을 결정한 왜는 명나라 지원군들과 책략을 꾸민다. 전쟁은 끝나고 적은 돌아가지만 이순신에게 적의 철수는 삶의 무의미로 남는다. 이순신이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의 무의미함이다. 전장에서의 그의 죽음이 무의미하지 않으려면 적의 적으로써 자신의 죽음을 완성하는 길 뿐이다. 이순신의 남도에서의 삶은 죽음으로써 삶을 완성하려는 여정이었고 김훈의 언어와 더불어 끔찍하고 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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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이정우 지음 / 산해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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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강단 밖의 철학자가 쓴 철학 에세이다. 그는 대학교수라는 안정이 보장된 직업을 박차고 나와 <철학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그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몇몇 철학자들과 다양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철학아카데미>에서 그의 강의목록을 찾아볼 수가 없어 아쉽다-. 그가 강단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문제들은 그의 다른 책『삶․죽음․운명』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도 직접적인 발언을 한다. “우리의 철학계를 주도하고 있는 50대 이상의 기성학자들에게서는 어떤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은 고루할 뿐만 아니라 교활하기까지 하다”고.

그가 ‘살아있는 사유’를 위해 선택한 길은 허름하고 거칠었다. 그러나 ‘권력’보다 ‘매력’을 선택한 그에게 나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의 독자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접하면 그것이 번역본이든 그의 저작이든 무조건 사는, 하지만 읽지는 않는 아니 읽지 못하는 사이비 독자를 즐거이 나는 사칭하고 있다. 이쯤에서 내가 갖고 있는 그의 책을 한번쯤 점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삶․죽음․운명』,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 『인간의 얼굴』, 『시물라크르의 시대』, 『주체』, 『들뢰즈와 가타리』, 『사건의 철학』, 『의미의 논리』,『탐독』. 새삼스럽게 책꽂이를 훑다보니 나는 참 무식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식한 사람에게 ‘용감’이라는 단어는 필수적으로 따라붙지 않던가? 나는 거기다 나오는 대로 족족 사들이는 부지런함에다 무조건 산다는 소신까지 보태었다. 이건 ‘폐인’도 아니고 ‘매니아’도 아니다. 이런 맹목적인  집착 혹은 읽겠다는 의지만 앞서는 이 중증의 증세를 뭐라고 불러야하나? 혹시라도 이글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나에게 독창적인 이름 하나 지어주면 좋겠다.

어쨌거나 나의 이정우에 대한 이런 맹목적인 집착에는 나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다. 우선 그의 언어들이 너무나 정밀하다는 것이다. 특히 철학적 개념어에 대한 엄밀함은 사전보다도 낫다. 그의 철학적 사유가 부유하는 사유가 아니라 현실에 확고하게 발을 딛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내게는 신뢰와 안정감을 준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밑에  보따리 싸들고 들어가 빨래도 해주고 공부도 하고  어깨라도 주물러 주고 싶은 심정이다.

정밀한 언어를 통한 그의 메시지는 내게는 상당히 무겁다. 그런데도 그의 강의를 듣고 있거나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많이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 같은 충만함으로 나는 뿌듯하다. 그러나 그런 충만함은 잠시일 뿐 희한하게도 책을 덮고 나면 그에 대한 막연한 존경과 동경만이 달무리처럼 책 주변을 감싸고 있다. 아마도 철학자인 그가 무반성적인 나의 의식에 놓은 침에 취한 탓일 게다.  침을 맞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침에 취해 침 몸살을 앓고 나면 몸이 거뜬하고 사물이 새롭게 보인다. 그는 나의 의식에 몇 개의 침을 놓아 주었다. 과학기술과 자본, 미디어가 만드는 욕망의 삼각관계에 대한 침, 억눌리고 배제당하는 타자를 위해 비판이 견지해야 하는 침. 특히 과학과 시에 대한 큰 침을. 과학/기술은 환원, 격자화, 예측, 석화 등으로, 시는 탈주, 가로지르기, 탈은폐, 액화 등으로 범주화시킨 그의 큰 침은 커다란 통증을 몰고 왔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크게 침 몸살을 앓는 일이다. 그리고 의식의 건강을 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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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이 책 상당히 재미있고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2009-02-0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의 '과학기술과 시' 부분은 혼란스러울 때마다 지금도 한번씩 들여다본답니다. 독서경험을 공유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비로그인 2009-02-04 03:26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갑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이정우 저자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이 생겨, 민음사에서 출간된 미셀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단번에 구입한 적도 있습니다(번역자가 이정우 씨라는 것 하나만으로!).그런데 미셀 푸코는 아직 저한텐 히말라야 산맥 처럼 오르기 힘든 산과도 같은 존재라는걸 통렬히 깨닫고는, 도중에 읽기를 포기하고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는 상태이지요;;

반딧불이 2009-02-0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장에 고이 모셔져 있는 상태"도 공유하게 되는군요. 더욱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