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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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사고에 대한 증언이라는 자체만으로 이 책의 가치는 어느 정도 인정된다. 더구나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는 저자의 말은 강한 경고처럼 우리의 머릿속을 파고 든다. 


그러나 책의 구성과 편집의 문제는 이러한 가치를 상당부분 떨어뜨리고 있다.


이 책은 망자의 땅(I), 조물주(II), 슬픔의 탄식(III)이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각 장의 제목과 그 세부 내용과의 명확한 연계를 찾기가 어렵다. "사람은 악을 통해서만 완벽해지며 솔직한 사랑의 말에 마음을 열 만큼 단순하다"라는 소제목이 망자의 땅이라는 장과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오래 전에 숨어버렸지만 다시 나갈 방법도 만들지 않았다"는 표현은 조물주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글의 구성도 매우 혼란스럽다. 첫 에피소드인 '사람의 외로운 목소리, 하나'는 그나마 읽을만 하다. 이후의 글들은 정말 두서 없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이다. '같이 울고 밥 먹자고 영혼이 하늘에서 부른다'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손님이 오셨네! 좋은 분들이 오셨어! 점을 쳤을 때는 아무런 징조가 없었는데. (...)" 이후에는 맥락없는 대화의 연속이다. "다 살아서 넘기고, 견뎌냈지", "에그, 생각하기도 싫어. 무서워. 우린 쫓겨났어, 군인들이 쫓아냈어.", "비행기, 헬리콥터가 무더기로 있었어.", "영감이 농장모임에서 돌아와서 말했어" (...) 도대체 등장인물이 몇 명이며 누구인지, 이게 인터뷰인지 회상인지 전혀 모르고 읽어나가다가 글이 끝나면 '안나 파블로프나 아르튜센코, 에바 아다모브나 아르튜센토.... 고멜 주 나로블랸스키 지역 벨리 베레크 마을 주민'이라고 표시하고 마는 식이다. 


마지막으로 편집의 오류와 오타도 거슬린다.

이 책은 각 소제목의 글이 끝나면 해당 증언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형식인데, 하나의 글이 끝나고 다음 글이 시작된 중간에 증언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편집의 오류가 있다.

예를 들면 65쪽에서는

'증언하고 싶다. 1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매일 일어나고 있다. 이제 영원히 - 지나이다 예도키모브나 코발렌카 주민'

이라고 써 있어. 이제 영원히? 뭘 어쩌자는 거지? 이게 끝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장을 보니,

문에 기록된 삶이라는 제목의 장은 첫 문장이 '나와 함께 할 것이다.'로 시작한다. 이 무슨...

연결해보면 '산 사람과도 죽은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다'라는 글은 '증언하고 싶다' 앞에서 이미 끝을 맺은 것이다. '내 슬픔이 어떤지 알겠어? 사람들한테 알려줄 때쯤이면 나는 죽고 없을 수도 있어. 땅속에 있겠지. 뿌리 아래...'에서. 그리고 '증언하고 싶다'는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으로 했어야 했다. '증언하고 싶다. 1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매일 일어나고 있다. 이제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이다.'로.

"나한테 도움이 되고 설명르 해준 책은 한 군도 없'엇'어요."와 같은 단순한 오타도 있다. - 159쪽


결론은 그 취지에 비해 내용과 구성면에서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너무 많고, 따라서 체르노빌에 대한 공감을 느끼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첫 번째 핵 수업은 체르노빌이었다. 체르노빌에 대한 경고는 성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체르노빌을 전체주의로 해석했다. 소련의 핵 원자로가 불완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기술적으로 낙후했기 때문이라고, 러시아인의 안일함과 도둑질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했다. 핵의 신화 자체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충격은 빨리 사라졌다. 방사선은 바로 죽이지 않는다. 5년이 지난 후에는 암에 걸려도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러시아 환경단체가 수집한 통계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건 후 150만 명이 사망했다. 이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한다. - 5쪽

그리고 지금, 우리는 두 번째 핵 수업을 받고 있다.
하나도 아닌 11기의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났다.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에도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후쿠시마는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같은 대열에 서게 되었다.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은 똑같이 사람을 죽이는 공범이 되어버렸다. 세계 3대 경제대국이 `평화적 핵` 앞에 무력해졌다. 재난의 반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몇 시간, 아니 몇 분 만에 쓰나미가 도시 전체를 태평양으로 휩쓸고 갔다. 우리가 진보라고 불렀던 곳에는 겨우 잔해만 남았다. 진보라는 신기루의 무덤만... 세계 최고라고 불리는 일본의 원전 보호 체계도 규모 9.0의 강진 앞에서는 아기 옷에 불과했다. 배냇저고리처럼 약했다. - 5쪽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 8쪽

나는 체르노빌의 증인이다. 무서운 전쟁과 혁명이 20세기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체르노빌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사고가 발생한 지 벌써 20년이나 흘렀지만, 내가 증언하는 것이 과거인지, 또는 미래인지, 나는 아직도 나 자신에게 묻고 있다. 그 사건은 너무나도 쉽게 진부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시사한 공포물이 되어버렸다. 하지마 나는 체르노빌을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체르노빌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선(先)지식이다. 왜냐하면 체르노빌로 인해 사람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던 방식과 갈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시간에 대한 주관을 이야기 속에 담는다. 그런데 체르노빌은 그 자체가 시간의 재앙이었다. 우리 땅에 흩어진 방사성 핵종은 5만, 10만, 20만 년, 아니 그보다도 더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인생의 관점으로 볼 때, 영원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가? 아직은 낯설기만 한 그 악몽의 의미를 이해하고 연구할 능력이 되는가? -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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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의 습격 - 먹거리에 대한 통념을 뒤엎는 놀라운 기록
유진규 지음 / 황금물고기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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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적으로 발로 뛰며 쓴 글을 좋아하는데, 이 책이 그러하다. 이 책을 읽으며, 젊어서는 돈을 벌려고 몸을 혹사시키더니 늙어서는 망가진 몸을 치료하기 위해 돈을 다 쓴다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지금 아프다. 그런데 아프지 않고 건강히 살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서 많은 식이요법과 운동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었던 기존의 상식들(예를 들면, 채식을 해야 건강하다, 동물성 기름은 나쁘다, 지방은 안 좋다, 우유는 불완전식품이다)이 절반의 사실이라면 어떨까. 이런 질문을 품는다면 이내 지금의 상식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라는 반대의 목소리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그 반대의 목소리들이 요구하는 반증을 비교적 쉽고 자세하게 풀어주고 있다.

 

2. 짧고 간결한 문체와 쉽게 풀어 낸 먹이사슬과 영양소들에 대한 정보는 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와 고민에 대해 독자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한다.  

 

3. 계란에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에게 토종닭이 낳은 계란을 먹이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저자의 경험으로 시작되는 이 책의 문제제기는 (나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일 것인가를 조금이라도 고민해본적이 있다면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만 본다면 이미 거대한 산업이 되어 버린 우리 먹거리의 문제점을 옥수수라는 한 종의 곡물로 치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어찌보면 이 옥수수라는 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점의 시작일 수도 있다. 옥수수, 오메가-6, 사료화, 비정상적인 가축의 사육, 동물에 대한 영향, 이것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영향이라는 흐름을 본다면 말이다.

 

4. 그러나 우리 몸에 나쁜 영향을 주는 음식들을 피하기란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모든 먹거리를 유기농이나 천연상태로 구매하기도 어렵다.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 한 사람만 분별있는 소비자로 살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 하나가 아니라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분별있는 소비자가 되어 시장을 변화시키는 수밖에 없다. 소비자의 요구와 선호는 산업의 방향과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유인인 셈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벌레 먹지 않고 매끈한 과일을 선호하였던 소비자들이 건강을 챙기게 되자, 농약과 비료를 기피하는 저농약, 무농약 상품들이 등장하더니 이제 유기농이라는 마크가 달린 상품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리 눈 앞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 소비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품과 제품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필요하다. 적어도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이러한 생산방식이 자연과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에 대한. 이 책은 어느정도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5. 산업화로 인해 다양성을 박탈당한 생태계는 이후 아무리 많은 비용을 들여도 결코 회복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건 기회비용이 될 수 없다.

건강한 먹거리를 찾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르게 사는 것 또한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두 가지가 별개의 문제여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옥수수로 인한 먹이 사슬의 문제는 많은 다른 불행과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한 정치 경제적 문제이다. 세상의 악함 대부분은 악한 의도 때문이라기보다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한다. 옥수수의 문제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 14쪽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금지하는 것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영양 정책이다. 근 10년간 프랑스 의사들은 성인병 환자들에게 버터를 먹지 말라고 했다. 먹는 문제에 관한 한 피에르 베일 박사의 입장은 명쾌했다. `영양 섭취에 있어서는 나쁜 것도 없고 좋은 것도 없다. 모두 균형과 품질의 문제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식습관은 지역 특색과 연관하여 발전해 온 문화이다. 왜 어떤 지역에서는 생선을 많이 먹고, 어떤 지역에서는 육식만 하는지, 왜 어떤 지역에서는 채소를 많이 먹는지, 왜 여기는 쌀이고 저기는 밀인지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먹이사슬과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지역 환경에 적응한 것이고 관계를 형성해 온 것이다. 여기에 나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프랑스 사람들은 버터를 많이 먹었다. 소가 풀을 많이 먹을 때였다. 이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소가 옥수수를 먹을 때 버터를 많이 먹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 39쪽

베르나르 슈미트 박사는 하루 종일 이어진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현대의 영양학은 먹이사슬을 통해 전해지는 영양 요소를 간과하여 결과적으로 커다란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었다.
"요즘 우리는 어떻게 했나요? 소에게 옥수수를 줬죠. 돼지에게 콩 깻묵을 줬어요. 모두 오메게-6 지방산만 풍부한 것들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매우 불균형한 영향 섭취를 하고 있는 겁니다. 즉 동물성 식품을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부적합한 식물성 먹이를 먹은 동물성 제품`을 먹는 게 큰 문제인 겁니다. 동물들에게 올바른 먹이를 먹인다면 동물성 식품을 먹는 건 문제가 안 됩니다. 먹이사슬 안에서 우리에게 좋은 지방을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동물에게 안 좋은 먹이를 주면 당연히 동물들도 안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게 되는 겁니다. 즉, 문제는 동물이냐 식물이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조장하는 먹이사슬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 106쪽

방목되지 않고 한 자리에 서 있는 동물은 에너지를 거의 소비하지 않는다. 사용되지 않은 에너지는 근육 사이의 지방으로 축적된다. 그것이 흔히 우리가 말하는 마블링이 되는 것이다. 마블링은 우리가 60년 전까지는 알지도 못했던 것을 만들어 낸다. A+등급, 꽃등심, 눈꽃등심이다. 풀 먹인 소로는 A+등급의 소고기를 얻을 수 없다. 소고기의 등급은 근내 지방 형성도에 따라 매겨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소고기는 프라임, 초이스, 셀렉트 세 등급으로 나뉜다. 소는 자연적인 상태에서 적당한 양의 풀을 먹이게 되면 셀렉트 상위, 혹은 초이스 하위 등급이 나온다. 더 높은 등급의 고기를 얻으려면 옥수수가 필요하다. 소가 옥수수를 먹어서 지방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풀을 먹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대사작용이 필요하다. 반추위 미생물이 섬유질을 분해하고 이를 흡수하는 과정은 사라지고, 소화 효소로 전분을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해진다. 이것은 소를 돼지로 만드는 일이다. - 119쪽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은 `모든 것을 간단한 기본법칙으로 환원(reduction)할 수 있는 능력이 그 법칙들로부터 시작해서 우주를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라고 꼬집으며 환원주의를 비판했다.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잘게 분해함으로써 기본적인 단순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환원론은 근대과학을 이끌어 온 기본전략이다. 환원주의가 의학과 약학의 눈부신 발전을 이끈 원동력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편 환원주의가 식품산업과 손잡고 음식의 질을 심하게 훼손한 것에 대해서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 151, 152쪽

환원주의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예가 비타민 이야기이다. `비타민은 영양소, 효소, 코엔자임, 항산화물과 미량 미네랄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일련의 과정이다.` 1956년, 자연 비타민 연구계의 선구자였던 로열리 박사는 저서 <비타민이란 무엇인가>에서 비타민을 이렇게 정의했다. 비타민은 하나의 독립된 분자 화합물이 아니라 생물학적 복합물이다. 비타민은 여러 가지 변수에 의존하는 다단계의 생화학적 상호작용이다. 비타민 활동은 그런 환경에서 모든 조건이 맞고 모든 요소들이 존재할 때 일어난다. - 152쪽

유제품의 경우,소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그 내용물은 확연히 달라진다. 유기농 풀을 먹고 자란 건강한 소는 건강한 젖을 만든다. 옥수수를 먹는 소는 위장에 대장균이 생기게 된다. 대장균이 우유와 고기에 들어가지 않도록 가열 살균하고 균질화 공정을 거치게 된다. 살균과 균질화 과정을 거치면 우유에 들어 있는 좋은 박테리아와 효소도 함께 파괴된다. 결과적으로 우유는 필수성분이 결핍된 상태로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이는 젖소가 의도한 내용물이 아니다. 로밀크는 이런 공정을 거치지 않아서 몸에 이로운 효소와 박테리아가 그대로 살아 있는 우유이다. 살아 있는 효소는 우유를 쉽게 소화하도록 돕고 좋은 박테리아는 위장을 튼튼하게 한다. - 167쪽

필자 역시 OP목장의 우유를 마셔본 경험을 잊을 수 없다. 프레스노의 파머스마켓에서 맛보았던 로밀크 한 잔은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음식이 주는 행복감을 진하게 느끼면서 `아, 이것이 공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풀과 동물과 사람의 공생, 음식이란 그런 것이다. 인간은 먹이사슬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먹이사슬 속에서 함께 사는 자이다. 우리가 건강하려면 음식을 만드는 먹이사슬도 건강해야 한다. 행복한 소는 건강한 우유를 만들고 그 우유를 먹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든다. 취재를 마칠 즈음 나는 `우유 속에 오메가-3가 풍부해서 두뇌의 신경전달물질이 잘 작용하므로 행복감을 느낀다`는 의학적 설명보다는 `행복한 소가 만든 우유라서 마시는 사람도 행복감을 느낀다`는 짧은 설명이 더 합당하다고 느꼈다. - 189,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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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받는 지배자 -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김종영 지음 / 돌베개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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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학을 앞두고 미국에 대한 우리 학문의 종속성을 분석한 책을 한 권 사서 읽었다. 비록 1만 6천원의 비용을 지출했을 뿐이지만, 책 한 권을 사면서도 나름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이라는 흥미로운 부제 못지 않게,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 '돌베개'라는 출판사에 대한 신뢰도를 따져 고른 책이었다.

 

2. 그런데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 책은 한국 지식인의 트랜스내셔널 탄생을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트랜스내셔널 직업 기회들 사이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라든지 "이 책은 일종의 절충적 질적 종단 연구이며 두 단계의 질적 면접에 기반하고 있다."와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 이해한다"라는 주술관계의 호응을 비롯해서 '트랜스내셔널 ㅇㅇㅇ'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어를 남발하거나 '~적 ~적 ㅇㅇ'이라는 표현들 모두 논문이나 보고서 등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잘못된 문장들이다. (저자 자신이 교수라는 건 알겠지만)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책을 내고자 한다면 이런 문장들은 한 번쯤 충분히 다듬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편집의 문제(혹은 책임)이기도 하다.
 

3. 이렇게 말하는 나도 보고서와 논문에 잘못된 표현들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지만, 학술논문이든 대중서적이든 글을 쓰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의 글을 퇴고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4. 책을 요약하면, 미국 대학이 갖는 헤게모니에 이끌린 사람들은 국내 대학들이 갖는 불평등과 차별, 비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유학을 결행하고, 미국에서는 주변인과 비영어권자로서의 한계를 인식하다가 학위 취득 후 국내에 돌아와 미국 현지에서의 열악했던 자신의 위치를 지식의 전달자로 '전환'하게 되며, 한국 사회 내 엘리트로서의 이러한 이익을 고수하기 위하여 결국 미국에 대한 학문적 종속에 이바지한다는 것.

 

5. 무슨 보고서 같은 류의 책을... 힘들게 읽었다.

 

 

------ 추가 (위 아킬레우스님의 비평에 대해)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내가 쓴 것을 읽고, 그에 대한 평을 해주다니... 처음 겪는 일이어서 다소 놀랍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부끄러우면서 왠지 모르게 즐겁기도 하다. 하지만, 굳이 제목에서부터 내 별명을 밝히면서까지 내 의견에 일일히 토를 달아 반박하면서 이 책의 가치를 설파하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듯 내 의견도 받아들여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 책의 가치 여부가 독자들의 논쟁으로 드러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각자가 읽으면서 판단하면 될 일을 (저자의 지인이나 출판사 관계자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시간을 들여 내 짧은 식견을 비판하면서 이 책의 유용성을 설파할 것 까지야...

아무튼 그냥 끄적인, 어찌보면 너무 단순한 낙서 수준의 초라한 글에 이렇게 분석적인 글을 남겨주셔서 이 책에 대한 다른 관점 일부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독자로서의 불만은 여전하다. 책을 읽고 느낀 점들은 다 제각각이어서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전공자 수준의 학식을 갖춘 분과 굳이 논쟁할 생각/능력도 없지만 애초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 이상을 과도하게 지적하신 것 같아 약간의 내용을 추가한다. (참고로 나는 사회학적 지식이 거의 없다.)

 

1. 나는 이 책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서 한국의 엘리트들이 미국에서는 열등한 위치였다는 것만을 강조하였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난 위 4. 처럼 말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아킬레우스님이 강조하듯 에필로그에서 제시한 짧지만 강력한 문장 "학문은 더럽다(Academia Immunda)"가 이 책의 '핵심'이라고는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건 이 책의 구성(지배받는 지배자, 글로벌 문화자본의 추구,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의 일상적 체화,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글로컬 학벌 체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중 저자가 어떠한 부분을 많이 할애하였는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에필로그에 있는 이야기를 억지스럽게 숨어 있는 결론으로 이끌어낼 것 까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2. 이 책의 제목만으로도 그 내용이 굉장히 기대되었다.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모순적 표현이 미국 유학 후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아주 적확하게 지칭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장의 앞부분을 제외하면 이 책의 키위드, 즉 이중적 지위에 있는 한국의 엘리트를 지칭하는 용어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다. 정말 좋다고 생각했던 제목과 글의 내용에서 실제 활용되고 있는 용어의 불일치가 일단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위 2. 에서 지적한 것은 사회학적 용어에 대한 낯섦이 아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트랜스내셔널 ㅇㅇㅇ'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어를 남발"하는 것이 읽기 불편했다는 것이다. 즉,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트랜스내셔널 직업 기회와 같은 영어와 한글이 조합된 용어들을 말한다. (사회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이해가 없는 나로써는) 굳이 한글로 번역하기가 곤란한 경우 학술적으로 이렇게 쓰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트랜스내셔널리즘'과 같이 하나의 단어도 아닌 형용사 'transnational'을 왜 '트랜스내셔널'로 표기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인터내셔널과는 달리 아직 적합한 국내 용어를 못찾았기 때문인가?). 용어를 발음 그대로 한글로 치환한 것은 그 용어가 중요하기 때문이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를 몰라서 일수도 있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내가 볼 때는 후자에 속한다.

 

3. 이건 글의 전문성이 아닌 '퇴고'에 관한 생각이었다. 최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나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와 같은 책을 읽으며 우리말로 쓰는 좋은 글은 어떤 것일까에 천착하고 있었던지라, 책을 읽다가도 특히 문체에 관한 부분이 많이 거슬렸다. 그래서 특히 이 글의 문체에 대해 안 좋은 점을 비판한 것이다. 글의 용어나 내용이 전문적인 것과 글을 읽기 어렵게 쓴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킬레우스님이 그렇게 강조하는, 내가 사회학적 기본지식이 없다는 비난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 책의 문체와 강준만, 조한혜정, 엄기호, 오찬호 등의 문체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 서서 얼마나 자신의 글을 다듬었는가 하는 퇴고의 문제이며, 정성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대중서를 (읽기) 어렵게 쓰면 안되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것은 저자의 특성이고, 권리이자, 취향이다. 반대로 조금 더 쉽게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적어도 '나'라는) 독자로서의 특성이고, 권리이자, 취향이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저자라면 이러한 차원에서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논문이나 보고서 등의 다른 학술적 형태로 게재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이나 보고서가 아닌 다른 형식으로 글을 선보였다면, 학계 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출판의 목적, 의도, 기대는 달랐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킬레우스님은 이상한 비유를 들어 나를 비판하고 있는데, 나는 사회학 일반에 관한 대중서적으로 이 책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수학에 관심이 있어서 책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그 제목이 '대학수학'이었다면 나는 그 책을 구입하지도, 그 책이 그래도 읽기 수월할 것이라는 기대도,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에 책에 수식이 많다고 굳이 시간을 내어 비평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제목이 "지배받는 지배자"가 아니라 '한국에서의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위치 경쟁에 대한 분석'이었다면 당연히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비용을 치루고 싶지 않다면 연구서가 아니라 대중교양서적을 읽어야 한다."라고 지적하신 부분을 100%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한 것이다. 다만, (저자와 출판사가 밝히지 않은 관계로) 이것이 그토록 전문적인 '연구서'임을 몰랐을 뿐. 그리고 전문적인 연구서라는 이유로 읽기 어려운 문체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뿐.

 

4. 1.에서 개략적으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5. 지적하신 대로 내게는 "질적 연구와 질적 연구의 글쓰기에 대한 무지"가 있다고 하자. 하지만 나는 그것이 '연구'일지라도 그 분야의 지식인뿐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구서에는 대중서와는 다른 그 나름의 체계와 글쓰기 방법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쓰기 방법이라는 것에 가독성이 좋지 않은 허술한 문체들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나는 신봉한다. 이 책이 쉽게 쓰여지지 않을 것이었다면, 저자가 비판적으로 연구했던 내용, 즉 "한국의 학문세계 또한 불평등하고 구조화/계층화 되어 있다는 점"을 이 책 스스로가 학계 외부로 확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국내적으로 체화하지 못한 채,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운운하는 저자와 아킬레우스님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학술서적은 질적 연구 글쓰기 방법과 형식을 유지해야 하며,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저자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비판하라, 그리고 쉽게 짜집기 한 대중서나 읽으라는 것인가? 만약 그런 의도라면 굳이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면서까지 구구절절 이런 말을 할 필요 없다. 책 표지에 작은 글씨로 '전문서적', '학술총서'라고 표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지배받는 지배자`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계층 이론에서 `지식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지배충은 자본가 계층과 지식인 계층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경제적 영역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층이 문화적 영역을 지배하는 지식인 계층보다 우위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지식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은 지배층에 속하지만 이런 이유로 지배층이면서도 지배를 받는 모순적인 집단이다. - 20쪽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식 생산의 경제적 지위를 뜻하며, 지식인의 계급적 질서에서 중간적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미들맨 소수자가 식민지적, 전근대적 상황에서 출현하듯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 - 24쪽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귀국하거나 미국에 정착한다.트랜스내셔설 이동의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지식인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형, 적용시킨다. 이들의 한국에서의 지식 생산은 일반적으로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보다 독창성, 중요성, 파급력이 떨어지는데, 이는 연구 자원의 부족, 연구 인력의 전문성 부족, 연구 인정 체계의 파편화, 연구 집중 강도의 약화, 연구 문화의 파벌화와 정치화, 한국 학문 공동체의 천민성(pariahhood)으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영문 저널 투고, 국내외 특허 출원, 연구의 글로벌 네트워킹에 참여하여 세계적인 지식 생산에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세계 지식체계의 주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 25쪽

가르침과 배움은 지배-피지배의 관계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하듯이 모든 헤게모니적 관계는 교육적 관계다. 미국은 `가르치는 나라`이고, 한국은 `배우는 나라`다.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또한 제도적 공간인 대학 내에서의 지배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은 위계를 가지며 고로 이 배움의 구조에서 탄생한 지식인들도 계층화되어 있다. 대학은 학문의 성지(temple)인 동시에 일종의 분류 기계(sorting machine) 또는 체(sieve)다. - 27쪽

대학은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학위`라는 특정 상품을 공급한다. 학위는 제도화된 문화자본의 형태로서 지위재(positional goods)다. 지위재의 가치는 대학의 명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명성이 높은 대학일수록 수여되는 학위의 가치가 높다. 어떤 대학이 더 높은 명성을 가지는가? 근대 대학은 `연구 중심 대학의 승리`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새롭고 중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일수록 명성이 높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학자들은 연구 중심 대학에 속한 경우가 많으며, 이는 그 대학 명성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학문과 과학은 글로벌한 활동이며 대학의 명성도 이에 따라 글로벌하게 형성된다. - 28쪽

연구는 커뮤니케이션에 기반한다. 영어는 학문과 연구 영역에서 지배적인 언어다. 한국인에게 영어는 `권력어`이며, 한국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공 계열에서는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으며, 인문사회 계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SCI로 대표되는 `영어 논문`은 학휘 취득 후 교수직과 연구원직에게는 필요불가결한 문화자본이다. 특정 언어자본의 능숙한 구사가 학문적 실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 31쪽

예전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면 요즘은 많은 경우 대학을 졸업해야만 은행에 취직할 수 있다. 따라서 은행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위증을 따려고 대학에 지불하는 등록금은 일종의 상징적 지대다. 이는 직업에 필요한 실질적 기술과 직업에 진입하기 위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상징적 요건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학벌 체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인종주의를 만연시켜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을 낳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언론과 SNS에서 회자되었던 부산의 한 초등학생의 <여덟 살의 꿈>이란 동시는 한국 사회가 지불하는 상징적 지대가 얼마나 큰지를 잘 대변한다. "나는 사립초등학교를 나와서 /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 민사고를 나와서 / 하버드대를 갈 거다 / 그래 그래서 나는 / 내가 하고 싶은 / 정말로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 40, 41쪽

무엇보다 한국 대학은 학벌 차별, 성 차별로 가득하며, 유교적 질서에 복종해야 하는 비합리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즉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 유학 동기는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 간의 지위 간극뿐만 아니라 `윤리적 간극`(ethicdal gap) 때문에 발생하며,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천민성과 억압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방적 기능을 가진다. 동시에 미국 유학은 코즈모폴리턴 생활방식의 추구와 연관된다. 영어, 전문 지식, 서구적 삶은 한국의 `답답한` 삶과 대비되어 자유로움과 실력을 동시에 부여해줄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따라서 미국 유학은 글로벌 대학 체제 속에서 지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계급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삶과 도덕성을 갈구하는 문화적 욕망이자 전략이기도 하다. - 60쪽

"한계를 인정하고 핸디캡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미국 학생들과 교수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의 위치를 숙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은 이들의 교육적 궤적에서 아주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초기에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열등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지만 글로벌 교육체제에서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 지어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한다. 여기서 타협이란 미국 원어민처럼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학점을 잘 받고 무사히 수업 과정을 마치며 수업시간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로 기대 수준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 93쪽

한국의 엘리트 학생이라는 지위와 정체성은 미국 유학 과정에서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수업 시간, 조교 생활, 연구 활동에서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 되며 자신의 장애와 능력의 한계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탈구화(dislocated), 방향감각 상실(disoriented), 뿌리 뽑힘(uprooted)을 경험하게 된다. 영어는 완전 정복이 불가능하며 미국 학생과 동일한 선산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과 자기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유학생들은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며, 미국 대학원 또는 미국 사회에서 완전한 사회적, 문화적 멤버십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국에서의 엘리트 학생의 위치와 미국에서의 열등한 학생의 위치 사이에서의 트랜스내셔널 긴장은 유랑(유학)과 정착이라는 대립의 공간에서 발생한다. 미국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필사의 노력은 심리적, 육체적 고난으로 이어지며, 수업과 연구에서 동등한 참여와 멤버십은 좌절된다. - 116, 117쪽

유학생들은 그들이 밟는 트랜스내셔널 궤적 때문에 `탈구 속에서의 희망과 가능성`이라는 이방인성을 지닌다. 즉 트랜스내셔널 이방인으로서 미국 유학생은 한편으로는 `똥밭`을 구르지만, 이는 자신의 미래에 `거름`이 되는 가치 있는 장소라는 이중성을 띤다. 미국 대학의 교수진이 전수하는 학문자본의 양과 질, 미국 대학 인프라의 탁월함, 대가라는 학문권력과의 만남, 우수한 연구 네트워크, 미국 학문 활동의 에토스와 규범은 한국 대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귀중한 `거름`이다. 이것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미국 대학은 학문을 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미국 대학의 학문적 규범은 누구나 따라야 할 준거가 된다. - 118쪽

학문은 감정적 작업이다. 감정적 투신 없이는 탁월한 작업이 나올 수 없다. 학문적 열정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 랜들 콜린스는 성공적인 학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학문자본과 학문에 대한 열정(emotional energy)이다. 양질의 학문자본은 탁월한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아야 한다. 훌륭한 선생을 찾기 위해 한국의 인재들은 미국 유학을 간다. (...) 탁월한 선생 또는 대가와의 접촉은 학문자본의 전수뿐만 아니라 학문적 열정의 고양과 연결된다. 따라서 학문적 열정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지속성 안에서만 유지된다. 즉 짧고 단기적인 만남보다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계속해서 고양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집합 흥분`(collective efervescence)이 없는 `탁월한` 학문 공동체는 존재하기 어렵다. 곧 공부는 사회적인 것이다. - 195, 196쪽

"공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교수를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학문의 왕, 철학의 어원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다. - 197쪽

학문은 더럽다(아카데미아 임문다 Academia Immunda). 정치가 그러하듯이. 학문 지배의 글로벌 구조에서 열등한 위치에 있는 한국 지식인은 이 궁극적인 리얼리티에 직면하게 된다. 피라미드 구조인 학문의 세계에서 극히 소수만이 그 정점에 오를 수 있다. 민주적 이념을 가진 학문의 세계가 결과적으로는 가장 불평등한 세계인 것이다. 제아무리 진리와 초월을 꿈꿀지라도 학문은 어디까지나 `세계-내-학문`이다. 지식인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사회적 인정을 갈구한다. 이들에게 학문적 배척은 곧 지옥이며 존재 이유의 상실이다. 그러나 이 지옥은 대다수의 한국 지식인들이 처절하게 경험하는 현실이다. 거들떠보지 않는 학벌, 인용되지 않는 논문, 인정해주지 않는 동료들, 그리고 수여되지 않는 사회적 지위.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지식인들은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지만 학문자본이 미천한 지식인은 언제나 손쉬운 먹잇감이다. 이는 곧 지식인은 지식인에 대한 신이자, 지식인에 대한 늑대이기 때문이다. - 296쪽

학문의 제도적 담지자인 대학은 진리의 전당일 뿐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계다. 학벌 인종주의로 물든 한국 사회에서 한국 엘리트들에게 최고의 지적 등급을 부여하는 곳은 미국 대학이다. 한국 대학과 비교도 되지 않을 재정, 수많은 유수의 교수진, 우수한 연구 시설,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조직과 문화 등등 압도적인 비교 우위가 한국 지식인이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종속되는 이유다. 이 트랜스내셔널 간극과 대학의 글로벌 불평등이 미국 유학 션상의 원인이다. 이것이 문제시되는 것은 교육을 통한 불평등이 한 국가를 넘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지식인의 사회적 특권은 학문적, 사회적 폐쇄 속에서 작동하며, 이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을 막고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 296쪽

헤게모니 이론을 정치인류학적 관점에서 세련화시킨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의 논변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약자의 무기(Weapons of the Weak)라는 책에서 피지배층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토지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아니 그것은 그들 머릿속에서는 상상 밖의 일이다. 이들은 현재의 계급질서를 무너뜨릴 혁명보다는 일상적인 저항을 통해 자신들의 조건을 조금씩 낫게 만들려고 한다. 한국지식인들에게 한국 대학과 학계에서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전복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the unthinkable)일 것이다. 그들은 스콧이 묘사하는 약자들처럼 대학에서 좀 더 좋은 자리를 얻고, 강의 시수를 줄이고, 연구 시간을 늘리고, 학계와 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좋은 논문을 쓰고, 만약 기회가 온다면 정계와 같이 더 큰 사회에 나가 기여하고픈 욕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297쪽

무엇보다 미국 유학파가 이 헤게모니에 도전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들은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지배받는 자이지만 한국 대학과 사회에서는 지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약자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트랜스내셔널 위치성`(transnational positionality)을 사회적 지위 향상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들은 외국인 대학원생이라는 학문적 약자에서 출발하여 한국과 미국의 지식 엘리트로의 전환이라는 트랜스내셔널 궤적을 가진다. 국내 학위 소지자들이 이따금 담론적으로 이 헤게모니에 도전하지만,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온 적은 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한국 대학의 개혁을 기획할 조직적 연대도 치밀한 전략도 없다. - 297쪽

무엇보다 한국 대학과 학계의 천민성은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에 철저하게 종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 지식인 집단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 민주화와 근대화를 거세게 요구해왔지만 정작 본인들은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가장 모순된 집단을 이루고 있다. 학벌 인종주의, 남성 우월주의, 폐쇄적 학벌주의, 유교적 위계질서, 검증되지 않는 전문가, 상징 폭력(symbolic violence)이 난무하는 학계... 이는 베버가 말한 비합리적 천민주의의 대학버전이다. 이 점에서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변혁을 이끌어내는 해방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즉 미국 대학의 근대성은 한국 대학의 전근대성을 타파하는 문화적 전범이며, 몇몇 미국 유학파들은 이를 한국 대학에 설파하는 개혁가들이 된다. -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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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브랜드를 알면 자동차가 보인다 - 살림지식총서 447 살림지식총서 447
김흥식 지음 / 살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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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BMW 760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같이, 상식 차원에서 자동차 브랜드를 한번 쭉 훑어보고, 그 브랜드와 앰블렘을 서로 매치 시키는 수준을 원한다면 확실히 도움이 된다.

반면, 시리즈의 특성상 한정된 지면에 자동차 브랜드를 최대한 많이 담으려 한 저자의 노력은 알겠으나, 자동차 브랜드의 배치가 너무 나열식이고 내용 또한 해당 자동차 탄생의 간략한 배경 수준이어서 다소 아쉽다.

독일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표방하는 BMW는 그 이미지에 맞게 모델명에 있어서도 확실한 숫자 표기를 이용한다. 세단은 `1-3-5-7 시리즈` 등 우선 차체 크기에 따라 숫자로 분류한 후 마지막 두 자리에는 배기량을 표기한다. 예를 들어 BMW 최상위 럭셔리 대형 세단인 BMW 760 Li는 7시리즈의 모델이며 배기량 6,000cc를 의미한다. 끝의 `L`은 `롱바디(Lond body)`를 의미하며 `i`는 가솔린 엔진이 장착됐음을 나타낸다. 또 Z4의 경우 `Z`은 2인승을 의미하는 독일어의 약자이며, X5에서 `X`는 4륜구동을 의미한다. M3, M5의 `M`은 Motorsports의 약자로 고성능 스포츠 세단을 의미한다. -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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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1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1
은지성 지음 / 황소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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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즈음 책의 제목인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이 말을 들을 때면, 나는 그 원작자인 폴 발레리가 아닌 스콧 니어링을 떠올리게 된다. 그야말로 생각하는 대로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소신' 따위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세상을 생각하는 대로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새삼 확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큰 일이야 물론이고, 너무나도 사소한 일까지도 끊임없이 남과 세상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이 문구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온라인 메신저 프로필로 10년 넘게 이것을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머리말을 통하여 "인간의 일생은 그 인간이 생각한 대로 된다"라고 하면서, 역경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만의 롤 모델을 삼을 사람을 만나 그들의 삶을 따라가 볼 것을,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스스로를 바꿀 것을,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을 권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과 사례, 그를 통한 교훈은 좋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이 문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과 저자가 생각하는 것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듯 하다. 다수의 자기계발서와 유사하게 꿈을 실현하기 위해 포기하지 말고 행동하여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교훈을 주고자 하면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제목은 어색하다. 제목이 이끄는 대로의 지침을 주기 위해서는 사는 대로 생각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생각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꿈과 성공을 향한 확실한 길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 살기 위해 과감하게 그 길을 포기했던 사람이나,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꿈과 성공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결국 성공한, 그리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성공에 대한 일화를 통하여 독자들의 변화를 권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괴테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신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러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 27, 28쪽

"상황이 나빠지고 진정으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바로 더욱 더 추진력을 발휘해야 할 순간이다. 게임이란 역경이 닥치기 전에는 시작되지 않는 법이다. 나는 안 되는구나 생각되어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 지금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라.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은 자기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삶이다." - 168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고통까지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 209쪽

사무엘 스마일스는 이렇게 말했다.
"고정관념과 같은 자신의 관점이나 생각을 바꾸면 점차적으로 자신의 운명도 바뀌어간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을 바꾸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을 바꾸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을 바꾸면 운명이 바뀐다."
세상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신의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변하면 그때부터 세상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꿔라. 다른 각도에서 보고 생각하는 유연성을 갖추어라. - 218,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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