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학을 앞두고 미국에 대한 우리 학문의 종속성을 분석한 책을 한 권 사서 읽었다. 비록 1만 6천원의 비용을 지출했을 뿐이지만, 책 한 권을 사면서도 나름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이라는 흥미로운 부제 못지 않게, 알라딘 '편집장의 선택', '돌베개'라는 출판사에 대한 신뢰도를 따져 고른 책이었다.
2. 그런데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 책은 한국 지식인의 트랜스내셔널 탄생을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트랜스내셔널 직업 기회들 사이의 역학 관계 속에서 이해한다."라든지 "이 책은 일종의 절충적 질적 종단 연구이며 두 단계의 질적 면접에 기반하고 있다."와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 이해한다"라는 주술관계의 호응을 비롯해서 '트랜스내셔널 ㅇㅇㅇ'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어를 남발하거나 '~적 ~적 ㅇㅇ'이라는 표현들 모두 논문이나 보고서 등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잘못된 문장들이다. (저자 자신이 교수라는 건 알겠지만)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책을 내고자 한다면 이런 문장들은 한 번쯤 충분히 다듬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편집의 문제(혹은 책임)이기도 하다.
3. 이렇게 말하는 나도 보고서와 논문에 잘못된 표현들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지만, 학술논문이든 대중서적이든 글을 쓰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의 글을 퇴고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4. 책을 요약하면, 미국 대학이 갖는 헤게모니에 이끌린 사람들은 국내 대학들이 갖는 불평등과 차별, 비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유학을 결행하고, 미국에서는 주변인과 비영어권자로서의 한계를 인식하다가 학위 취득 후 국내에 돌아와 미국 현지에서의 열악했던 자신의 위치를 지식의 전달자로 '전환'하게 되며, 한국 사회 내 엘리트로서의 이러한 이익을 고수하기 위하여 결국 미국에 대한 학문적 종속에 이바지한다는 것.
5. 무슨 보고서 같은 류의 책을... 힘들게 읽었다.
------ 추가 (위 아킬레우스님의 비평에 대해)
깜짝 놀랐다. 누군가가 내가 쓴 것을 읽고, 그에 대한 평을 해주다니... 처음 겪는 일이어서 다소 놀랍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부끄러우면서 왠지 모르게 즐겁기도 하다. 하지만, 굳이 제목에서부터 내 별명을 밝히면서까지 내 의견에 일일히 토를 달아 반박하면서 이 책의 가치를 설파하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듯 내 의견도 받아들여 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이 책의 가치 여부가 독자들의 논쟁으로 드러나거나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각자가 읽으면서 판단하면 될 일을 (저자의 지인이나 출판사 관계자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시간을 들여 내 짧은 식견을 비판하면서 이 책의 유용성을 설파할 것 까지야...
아무튼 그냥 끄적인, 어찌보면 너무 단순한 낙서 수준의 초라한 글에 이렇게 분석적인 글을 남겨주셔서 이 책에 대한 다른 관점 일부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한 독자로서의 불만은 여전하다. 책을 읽고 느낀 점들은 다 제각각이어서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전공자 수준의 학식을 갖춘 분과 굳이 논쟁할 생각/능력도 없지만 애초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 이상을 과도하게 지적하신 것 같아 약간의 내용을 추가한다. (참고로 나는 사회학적 지식이 거의 없다.)
1. 나는 이 책을 단편적으로 이해해서 한국의 엘리트들이 미국에서는 열등한 위치였다는 것만을 강조하였다.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난 위 4. 처럼 말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아킬레우스님이 강조하듯 에필로그에서 제시한 짧지만 강력한 문장 "학문은 더럽다(Academia Immunda)"가 이 책의 '핵심'이라고는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건 이 책의 구성(지배받는 지배자, 글로벌 문화자본의 추구,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의 일상적 체화,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글로컬 학벌 체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중 저자가 어떠한 부분을 많이 할애하였는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에필로그에 있는 이야기를 억지스럽게 숨어 있는 결론으로 이끌어낼 것 까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2. 이 책의 제목만으로도 그 내용이 굉장히 기대되었다.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모순적 표현이 미국 유학 후 한국의 엘리트 지식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아주 적확하게 지칭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장의 앞부분을 제외하면 이 책의 키위드, 즉 이중적 지위에 있는 한국의 엘리트를 지칭하는 용어는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다. 정말 좋다고 생각했던 제목과 글의 내용에서 실제 활용되고 있는 용어의 불일치가 일단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위 2. 에서 지적한 것은 사회학적 용어에 대한 낯섦이 아니다.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트랜스내셔널 ㅇㅇㅇ'이라는 정체불명의 조어를 남발"하는 것이 읽기 불편했다는 것이다. 즉,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트랜스내셔널 위치 경쟁, 트랜스내셔널 직업 기회와 같은 영어와 한글이 조합된 용어들을 말한다. (사회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반드시 이렇게 써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런 이해가 없는 나로써는) 굳이 한글로 번역하기가 곤란한 경우 학술적으로 이렇게 쓰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트랜스내셔널리즘'과 같이 하나의 단어도 아닌 형용사 'transnational'을 왜 '트랜스내셔널'로 표기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인터내셔널과는 달리 아직 적합한 국내 용어를 못찾았기 때문인가?). 용어를 발음 그대로 한글로 치환한 것은 그 용어가 중요하기 때문이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 용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를 몰라서 일수도 있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라는 용어는 내가 볼 때는 후자에 속한다.
3. 이건 글의 전문성이 아닌 '퇴고'에 관한 생각이었다. 최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나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와 같은 책을 읽으며 우리말로 쓰는 좋은 글은 어떤 것일까에 천착하고 있었던지라, 책을 읽다가도 특히 문체에 관한 부분이 많이 거슬렸다. 그래서 특히 이 글의 문체에 대해 안 좋은 점을 비판한 것이다. 글의 용어나 내용이 전문적인 것과 글을 읽기 어렵게 쓴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아킬레우스님이 그렇게 강조하는, 내가 사회학적 기본지식이 없다는 비난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 책의 문체와 강준만, 조한혜정, 엄기호, 오찬호 등의 문체가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이건 저자가 독자의 입장에 서서 얼마나 자신의 글을 다듬었는가 하는 퇴고의 문제이며, 정성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대중서를 (읽기) 어렵게 쓰면 안되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것은 저자의 특성이고, 권리이자, 취향이다. 반대로 조금 더 쉽게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적어도 '나'라는) 독자로서의 특성이고, 권리이자, 취향이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저자라면 이러한 차원에서는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논문이나 보고서 등의 다른 학술적 형태로 게재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이나 보고서가 아닌 다른 형식으로 글을 선보였다면, 학계 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출판의 목적, 의도, 기대는 달랐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킬레우스님은 이상한 비유를 들어 나를 비판하고 있는데, 나는 사회학 일반에 관한 대중서적으로 이 책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만약 내가 수학에 관심이 있어서 책을 고른다고 하더라도 그 제목이 '대학수학'이었다면 나는 그 책을 구입하지도, 그 책이 그래도 읽기 수월할 것이라는 기대도,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에 책에 수식이 많다고 굳이 시간을 내어 비평을 쓰지도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제목이 "지배받는 지배자"가 아니라 '한국에서의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위치 경쟁에 대한 분석'이었다면 당연히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비용을 치루고 싶지 않다면 연구서가 아니라 대중교양서적을 읽어야 한다."라고 지적하신 부분을 100%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한 것이다. 다만, (저자와 출판사가 밝히지 않은 관계로) 이것이 그토록 전문적인 '연구서'임을 몰랐을 뿐. 그리고 전문적인 연구서라는 이유로 읽기 어려운 문체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뿐.
4. 1.에서 개략적으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5. 지적하신 대로 내게는 "질적 연구와 질적 연구의 글쓰기에 대한 무지"가 있다고 하자. 하지만 나는 그것이 '연구'일지라도 그 분야의 지식인뿐 아니라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구서에는 대중서와는 다른 그 나름의 체계와 글쓰기 방법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글쓰기 방법이라는 것에 가독성이 좋지 않은 허술한 문체들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나는 신봉한다. 이 책이 쉽게 쓰여지지 않을 것이었다면, 저자가 비판적으로 연구했던 내용, 즉 "한국의 학문세계 또한 불평등하고 구조화/계층화 되어 있다는 점"을 이 책 스스로가 학계 외부로 확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국내적으로 체화하지 못한 채,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을 운운하는 저자와 아킬레우스님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학술서적은 질적 연구 글쓰기 방법과 형식을 유지해야 하며,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저자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를 비판하라, 그리고 쉽게 짜집기 한 대중서나 읽으라는 것인가? 만약 그런 의도라면 굳이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면서까지 구구절절 이런 말을 할 필요 없다. 책 표지에 작은 글씨로 '전문서적', '학술총서'라고 표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지배받는 지배자`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계층 이론에서 `지식인`을 일컫는 말이다. 그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지배충은 자본가 계층과 지식인 계층으로 양분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경제적 영역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층이 문화적 영역을 지배하는 지식인 계층보다 우위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지식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지식인은 지배층에 속하지만 이런 이유로 지배층이면서도 지배를 받는 모순적인 집단이다. - 20쪽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식 생산의 경제적 지위를 뜻하며, 지식인의 계급적 질서에서 중간적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미들맨 소수자가 식민지적, 전근대적 상황에서 출현하듯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 - 24쪽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귀국하거나 미국에 정착한다.트랜스내셔설 이동의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지식인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형, 적용시킨다. 이들의 한국에서의 지식 생산은 일반적으로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보다 독창성, 중요성, 파급력이 떨어지는데, 이는 연구 자원의 부족, 연구 인력의 전문성 부족, 연구 인정 체계의 파편화, 연구 집중 강도의 약화, 연구 문화의 파벌화와 정치화, 한국 학문 공동체의 천민성(pariahhood)으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영문 저널 투고, 국내외 특허 출원, 연구의 글로벌 네트워킹에 참여하여 세계적인 지식 생산에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세계 지식체계의 주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 25쪽
가르침과 배움은 지배-피지배의 관계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하듯이 모든 헤게모니적 관계는 교육적 관계다. 미국은 `가르치는 나라`이고, 한국은 `배우는 나라`다.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또한 제도적 공간인 대학 내에서의 지배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은 위계를 가지며 고로 이 배움의 구조에서 탄생한 지식인들도 계층화되어 있다. 대학은 학문의 성지(temple)인 동시에 일종의 분류 기계(sorting machine) 또는 체(sieve)다. - 27쪽
대학은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학위`라는 특정 상품을 공급한다. 학위는 제도화된 문화자본의 형태로서 지위재(positional goods)다. 지위재의 가치는 대학의 명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명성이 높은 대학일수록 수여되는 학위의 가치가 높다. 어떤 대학이 더 높은 명성을 가지는가? 근대 대학은 `연구 중심 대학의 승리`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새롭고 중요한 지식을 생산하는 대학일수록 명성이 높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학자들은 연구 중심 대학에 속한 경우가 많으며, 이는 그 대학 명성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 학문과 과학은 글로벌한 활동이며 대학의 명성도 이에 따라 글로벌하게 형성된다. - 28쪽
연구는 커뮤니케이션에 기반한다. 영어는 학문과 연구 영역에서 지배적인 언어다. 한국인에게 영어는 `권력어`이며, 한국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공 계열에서는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으며, 인문사회 계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SCI로 대표되는 `영어 논문`은 학휘 취득 후 교수직과 연구원직에게는 필요불가결한 문화자본이다. 특정 언어자본의 능숙한 구사가 학문적 실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 31쪽
예전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면 요즘은 많은 경우 대학을 졸업해야만 은행에 취직할 수 있다. 따라서 은행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학위증을 따려고 대학에 지불하는 등록금은 일종의 상징적 지대다. 이는 직업에 필요한 실질적 기술과 직업에 진입하기 위해 사회에서 요구하는 상징적 요건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한국의 학벌 체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인종주의를 만연시켜 사회적 부정의와 불평등을 낳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언론과 SNS에서 회자되었던 부산의 한 초등학생의 <여덟 살의 꿈>이란 동시는 한국 사회가 지불하는 상징적 지대가 얼마나 큰지를 잘 대변한다. "나는 사립초등학교를 나와서 /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 민사고를 나와서 / 하버드대를 갈 거다 / 그래 그래서 나는 / 내가 하고 싶은 / 정말로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 40, 41쪽
무엇보다 한국 대학은 학벌 차별, 성 차별로 가득하며, 유교적 질서에 복종해야 하는 비합리적인 공간으로 인식된다. 즉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미국 유학 동기는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 간의 지위 간극뿐만 아니라 `윤리적 간극`(ethicdal gap) 때문에 발생하며, 유학생들에게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천민성과 억압에서 탈출할 수 있는 해방적 기능을 가진다. 동시에 미국 유학은 코즈모폴리턴 생활방식의 추구와 연관된다. 영어, 전문 지식, 서구적 삶은 한국의 `답답한` 삶과 대비되어 자유로움과 실력을 동시에 부여해줄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따라서 미국 유학은 글로벌 대학 체제 속에서 지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계급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특정한 삶과 도덕성을 갈구하는 문화적 욕망이자 전략이기도 하다. - 60쪽
"한계를 인정하고 핸디캡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미국 학생들과 교수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의 위치를 숙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의 형성은 이들의 교육적 궤적에서 아주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초기에는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열등함을 받아들이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지만 글로벌 교육체제에서 극복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 지어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현실과 타협한다. 여기서 타협이란 미국 원어민처럼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학점을 잘 받고 무사히 수업 과정을 마치며 수업시간에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정도로 기대 수준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 93쪽
한국의 엘리트 학생이라는 지위와 정체성은 미국 유학 과정에서 드라마틱하게 바뀐다. 수업 시간, 조교 생활, 연구 활동에서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 되며 자신의 장애와 능력의 한계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탈구화(dislocated), 방향감각 상실(disoriented), 뿌리 뽑힘(uprooted)을 경험하게 된다. 영어는 완전 정복이 불가능하며 미국 학생과 동일한 선산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패배의식과 자기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유학생들은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며, 미국 대학원 또는 미국 사회에서 완전한 사회적, 문화적 멤버십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국에서의 엘리트 학생의 위치와 미국에서의 열등한 학생의 위치 사이에서의 트랜스내셔널 긴장은 유랑(유학)과 정착이라는 대립의 공간에서 발생한다. 미국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필사의 노력은 심리적, 육체적 고난으로 이어지며, 수업과 연구에서 동등한 참여와 멤버십은 좌절된다. - 116, 117쪽
유학생들은 그들이 밟는 트랜스내셔널 궤적 때문에 `탈구 속에서의 희망과 가능성`이라는 이방인성을 지닌다. 즉 트랜스내셔널 이방인으로서 미국 유학생은 한편으로는 `똥밭`을 구르지만, 이는 자신의 미래에 `거름`이 되는 가치 있는 장소라는 이중성을 띤다. 미국 대학의 교수진이 전수하는 학문자본의 양과 질, 미국 대학 인프라의 탁월함, 대가라는 학문권력과의 만남, 우수한 연구 네트워크, 미국 학문 활동의 에토스와 규범은 한국 대학이 제공하지 못하는 귀중한 `거름`이다. 이것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미국 대학은 학문을 하는 이상적인 장소로 인식되고, 미국 대학의 학문적 규범은 누구나 따라야 할 준거가 된다. - 118쪽
학문은 감정적 작업이다. 감정적 투신 없이는 탁월한 작업이 나올 수 없다. 학문적 열정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다. 랜들 콜린스는 성공적인 학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학문자본과 학문에 대한 열정(emotional energy)이다. 양질의 학문자본은 탁월한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아야 한다. 훌륭한 선생을 찾기 위해 한국의 인재들은 미국 유학을 간다. (...) 탁월한 선생 또는 대가와의 접촉은 학문자본의 전수뿐만 아니라 학문적 열정의 고양과 연결된다. 따라서 학문적 열정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지속성 안에서만 유지된다. 즉 짧고 단기적인 만남보다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계속해서 고양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집합 흥분`(collective efervescence)이 없는 `탁월한` 학문 공동체는 존재하기 어렵다. 곧 공부는 사회적인 것이다. - 195, 196쪽
"공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교수를 한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학문의 왕, 철학의 어원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다. - 197쪽
학문은 더럽다(아카데미아 임문다 Academia Immunda). 정치가 그러하듯이. 학문 지배의 글로벌 구조에서 열등한 위치에 있는 한국 지식인은 이 궁극적인 리얼리티에 직면하게 된다. 피라미드 구조인 학문의 세계에서 극히 소수만이 그 정점에 오를 수 있다. 민주적 이념을 가진 학문의 세계가 결과적으로는 가장 불평등한 세계인 것이다. 제아무리 진리와 초월을 꿈꿀지라도 학문은 어디까지나 `세계-내-학문`이다. 지식인은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고 사회적 인정을 갈구한다. 이들에게 학문적 배척은 곧 지옥이며 존재 이유의 상실이다. 그러나 이 지옥은 대다수의 한국 지식인들이 처절하게 경험하는 현실이다. 거들떠보지 않는 학벌, 인용되지 않는 논문, 인정해주지 않는 동료들, 그리고 수여되지 않는 사회적 지위.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지식인들은 경외와 숭배의 대상이지만 학문자본이 미천한 지식인은 언제나 손쉬운 먹잇감이다. 이는 곧 지식인은 지식인에 대한 신이자, 지식인에 대한 늑대이기 때문이다. - 296쪽
학문의 제도적 담지자인 대학은 진리의 전당일 뿐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의 등급을 분류하는 기계다. 학벌 인종주의로 물든 한국 사회에서 한국 엘리트들에게 최고의 지적 등급을 부여하는 곳은 미국 대학이다. 한국 대학과 비교도 되지 않을 재정, 수많은 유수의 교수진, 우수한 연구 시설, 학문에 집중할 수 있는 조직과 문화 등등 압도적인 비교 우위가 한국 지식인이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종속되는 이유다. 이 트랜스내셔널 간극과 대학의 글로벌 불평등이 미국 유학 션상의 원인이다. 이것이 문제시되는 것은 교육을 통한 불평등이 한 국가를 넘어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 지식인의 사회적 특권은 학문적, 사회적 폐쇄 속에서 작동하며, 이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경쟁을 막고 특정 집단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 296쪽
헤게모니 이론을 정치인류학적 관점에서 세련화시킨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의 논변은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약자의 무기(Weapons of the Weak)라는 책에서 피지배층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토지개혁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아니 그것은 그들 머릿속에서는 상상 밖의 일이다. 이들은 현재의 계급질서를 무너뜨릴 혁명보다는 일상적인 저항을 통해 자신들의 조건을 조금씩 낫게 만들려고 한다. 한국지식인들에게 한국 대학과 학계에서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전복시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the unthinkable)일 것이다. 그들은 스콧이 묘사하는 약자들처럼 대학에서 좀 더 좋은 자리를 얻고, 강의 시수를 줄이고, 연구 시간을 늘리고, 학계와 전문가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좋은 논문을 쓰고, 만약 기회가 온다면 정계와 같이 더 큰 사회에 나가 기여하고픈 욕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297쪽
무엇보다 미국 유학파가 이 헤게모니에 도전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들은 미국 대학의 글로벌 헤게모니에 지배받는 자이지만 한국 대학과 사회에서는 지배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약자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트랜스내셔널 위치성`(transnational positionality)을 사회적 지위 향상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들은 외국인 대학원생이라는 학문적 약자에서 출발하여 한국과 미국의 지식 엘리트로의 전환이라는 트랜스내셔널 궤적을 가진다. 국내 학위 소지자들이 이따금 담론적으로 이 헤게모니에 도전하지만,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온 적은 없다. 무엇보다 이들은 한국 대학의 개혁을 기획할 조직적 연대도 치밀한 전략도 없다. - 297쪽
무엇보다 한국 대학과 학계의 천민성은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에 철저하게 종속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한국 지식인 집단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 민주화와 근대화를 거세게 요구해왔지만 정작 본인들은 비민주적이고 전근대적인 가장 모순된 집단을 이루고 있다. 학벌 인종주의, 남성 우월주의, 폐쇄적 학벌주의, 유교적 위계질서, 검증되지 않는 전문가, 상징 폭력(symbolic violence)이 난무하는 학계... 이는 베버가 말한 비합리적 천민주의의 대학버전이다. 이 점에서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의 변혁을 이끌어내는 해방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즉 미국 대학의 근대성은 한국 대학의 전근대성을 타파하는 문화적 전범이며, 몇몇 미국 유학파들은 이를 한국 대학에 설파하는 개혁가들이 된다. -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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