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의 세계
듀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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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정체불명의 배터리가 등장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배터리. 보통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가진 초능력을 끌어내는 촉매인간. 배터리의 등장과 함께 인류는 모두 초능력자가 됐다. 독심술, 마인드 콘트롤, 염동력 등등 발현되는 능력에 맞춰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간다.


영화 평론가이기도한 듀나가 SF 소설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류일줄은 몰랐다. 다소 멜랑콜리한, 로우 텐션의 이야기들이 주류일거라 생각했는데, <민트의 세계>는 나의 편견을 우주 밖으로 쏟아올렸다. 우선 이야기 자체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타이트한 구성은 그렇게 길지 않은 장편 소설을 단단하게 응축시킨다. 책장을 덮고나면 대단히 훌륭한 일품 점심 요리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갑자기 등장한 배터리, 그리고 보통 사람에서 개성을 가진 초능력자로 거듭난 사람들. 이 메타포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본다. 배터리는 고도로 발달된 현대 기술을, 사람들 모두가 초능력자가 된 현상은 그 기술을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현대 기술 문명 사회를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이런 메타포들을 적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주인공 민트가 청소년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가 꾸린 집단이 거대 기업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선 익숙한 억압 구조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뭔가 다른 결이 느껴지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 훨씬 가볍고 이야기의 재미에 집중하는 소설이다.


민트는 왜 목숨을 걸고 전쟁을 벌이는 걸까? 표면적으로 그녀는 거대 기업에(LK) 의해 소모성 자원처럼 다뤄지는 초능력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 수 많은 사건들을 기획하고 실행해온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과 추종자를 데리고 우주로 탈출한다. 거기엔 사람뿐만 아니라 초능력을 지닌 다수의 동물들, 그리고 AI로 만든 인공 정신을 이식한 돼지의 뇌까지 포함된다. 이 장면에서 모세의 Exodus와 노아의 방주가 서로 한발짝씩 엇걸은 장면이 연상되긴 하지만 탑승자들의 면면이 딱히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그녀가 태운 탑승자들은 오덕 중에서도 진짜 오덕들만 찾아보는 일본 애니를 연상시킨다.


민트가 LK로 부터 탈취한 우주선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건조한 광속 우주선이었다. 그들은 그 우주선을 타고 우주 곳곳을 탐험하며 만물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 이 모든 계획은 민트에 의해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 이 모든 계획이 사실은 인공 정신을 이식한 돼지의 뇌가 꾸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극도의 혐오감에 몸서리 친다. LK는 민트에게 묻는다. 우주 개척의 선구자가 돼지의 뇌와 기타 어줍잖은 동물들이라는 것, 그들이 인간의 선두에 서는 걸 받아들일 수 있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 민트는 이름처럼 쿨하게 대답한다. Why not?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런 소설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독특한 소재와 낯설음은 저마다의 상상력 속에서 다채로운 색채와 이미지를 만들어 내겠지만, 그것을 화면에 담는 순간 지네 다리를 단 배추흰나비처럼 끔찍해질 게 뻔하다. 이야기를 구현하기에 현대 영상 기술은 한계가 있고, 듀나의 상상력에 준하는 연출자를 찾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초능력자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민트의 세계>는 강추다. 설령 이런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나른한 오후처럼 꿉꿉한 인생에 청량감을 불어넣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그녀의 이름이 괜히 민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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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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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솔닛의 책들은 하나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 설명한다기보다는  그녀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특정 키워드, 예컨대 페미니즘 같은 키워드를 통해 솔닛을 접한 사람들은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그녀가 비록 '맨스플레인(men + explain)'이라는 단어의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가이긴 하지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독자는 고명하신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로 그녀의 책을 만나는 게 아니라 메가폰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 열변을 토하는 행동가와 보도에 서서 그녀를 쳐다보는 구경꾼의 관계로 만난다. 그녀의 목적은 물론 당신을 그 보도에서 걸어나와 길 한복판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장담컨대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 주제가 정치에서 여성혐오, 기후문제에서 인권 문제로 여기저기 옮겨다니지만, 하나 하나의 꼭지에 담긴 생각들은 모두 반짝이는 보석같다.


누구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꼬치 꼬치 캐묻기를 싫어한다. 사람들은 설명하기 힘든 문제, 설명하기 난처한 문제들에 대해 '원래 그런 거야' 라고 말하고 덮어두기를 좋아한다. 마치 썩어가는 음식물들을 가려둔 것 처럼, 누군가 조금이라도 들추려 들면 정색을 하고 화를 낸다.


레베카 솔닛에게 '원래 그런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문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컨대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어져온 수천년 동안 인류 역사에는 부부싸움이 있었을 뿐 '가정 폭력'은 없었다는 사실을 돌아보자. 이게 무슨 말이냐고? 부부싸움은 서로 다른 두 남녀가 같이 살면서 겪는 일상적인 일, 그러니까 개인과 개인, 크게 봐줘야 가정의 문제기 때문에 가정 내에서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가정폭력'은 어떠한가? 그것은 가족 구성원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며, '사회적 문제'이고, 따라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이것이 왜 '이름들의 전쟁'인지 이제 알겠는가?


솔닛이 여기저기 분탕질을 벌이고 돌아다니는 이유는 익숙한 현상을 문제로 명명함으로써, 즉 그들을 그들의 진짜 이름으로 불러줌으로써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려는 것이다. 당연한 것들은 차곡차곡 눌러 내부에 쌓아둘 수 있지만 문제들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표면이 거칠고 여기저기 삐죽 삐죽 튀어나와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린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쩌겠는가? 누군가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을 각오를 하며 이런 일을 벌인다. 그래야 세상은 균형을 맞출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라는 한국어판 제목보다는 <Call them by their true names>라는 원제가 훨씬 마음에 든다. 전쟁을 벌이자는 게 아니다. 그들을, 그저 진짜 이름으로 한번 불러보자는 것이다. 다같이 거리로 나와서. 혹은 공원에 비잉 둘러 앉아서 말이다. 나는 이 제안이 주는 평화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이것은 사사건건 성대결로 번지고 있는 최근의 우악스러운 사태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문제는 당신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다.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건 당신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다같이 모여 그들을, 그들의 진짜 이름으로 한번 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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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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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은 시간으로 시를 쓰고 살핌으로 사랑을 하는 시인이다. 책날개에 쓰인 말, "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라는 말은 그의 사랑과 시에 섞일 정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박준은 늘 한발짝 뒤에 떨어져 걷거나 미리 나와 기다리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이가 행여나 잠에서 깰까 조용 조용 책장을 넘기다 깼다는 기침을 느끼는 순간 조용히 책장을 덮고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나는 박준의 시에서 항상 아련하고 왠지 뜻 모를 아픔을 느끼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의 시가 늘 과거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더 이상 그 사랑을 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서도 박준은 펑펑 울거나 주고 받은 크기의 부당함에 억울해하거나 가버린 것에 집착하는 법이 없다. 그는 사라진 것을 조용히 놔둔 채 묵묵히 바라보는 시를 쓴다. 연필이 원고지 위를 구르는 소리라도 들렸다간 기억이 산산히 부서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박준은 한번 뱉은 말은 결코 죽지 않고 어딘가에 모여 쌓인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대상을 직접 찾아가 묻는 대신 말이 쌓인 숲을 찾아간다. 거기서 그는 꽃을 찾듯 흘러간 말들을 기어 올린다. 그렇게 구성된 시간을 박준은 시로 옮겨 쓴다. 그의 말들이 뚜렷한 형체나 색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전체가 흐릿하게 채색된 인상으로 남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쓰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읽지 않는 시대에 살아야 하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쓰러진 담장을 매일 아침 다시 쌓아올리는 답답한 사람들이고 파도에 쓸려 바다 밑으로 끊임없이 가라앉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시를 쓰는 사람은, 그 중에서도 서정을 노래하는 사람은 발목에 가장 큰 족쇄를 차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박준의 성공이 놀랍고 또 반갑다. 그의 서정시가 읽지 않는 시대에 새기는 울림은 우리의 쓰기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시대의 벽을 뚫을만큼 단단하지 못한 우리의 글에 끊임없이 담금질을 계속해왔던 건 아닐까? 젊은이의 외투를 벗게 한 건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었다는 옛 이야기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고통이 클수록 사람들은 과거에 광택을 더하곤 한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더한 밝기에 취해 오늘의 고통을 마취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박준의 시가 성공을 거두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의 과거는 항상 아름다운 배려로 가득하니까. 만화경에 홀린 아이처럼, 우리는 그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 현실에 지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과거의 환상에 주저앉는 것이다.


이 시의 성공이 차갑게 식은 우리의 심장에 다시 불을 붙였기 때문인지, 우리를 돌려세워 오늘의 고통에서 눈을 떼도록 마취시켰기 때문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생각하기에 앞서 나는 그냥 박준의 시가 좋다. 이 시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든, 그것이 작가 스스로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옅은 향만으로도 취해 설레이는 사람처럼, 그의 시를 읽고, 또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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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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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를 읽다보면 신들이 인간 중에서도 최고의 멍청이들을 모아 놓은 집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온갖 지혜와 진리를 획득한 신조차 어이없을 정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데, 솔직히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는지 알 도리가 없다. 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운 건가?


신화는 고대인들의 세계 해석서였다. 해가 뜨고 달 지고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고 강이 범람하고. 그들은 변덕스러운 자연 현상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을 몰아내는 방법으로 놀랍게도 이야기를 선택했다. 태양이 움직이는 것은 그것을 집어 삼키려 달려오는 늑대를 피하기 위해서고 천둥이 치는 것은 천둥의 신이 노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게된 사람들은 더이상 두려워하지 않게됐고 그것을 섬김으로써 다가올 재앙과 화를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것이 바로 신화가 탄생한 이유와 인간이 신을 섬기게 된 유래다.


따라서 신들은 엉망진창일 수 밖에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변화, 단 일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만물의 특성을 신의 속성으로 반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들은 인간과 닮았고 인간의 삶에 깊숙히 들어온다. 나는 언제나 그 시절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정말로 그 시절이 그립다. 세계에 대해 최초로 입을 연 자가 이야기꾼이라는 것도 반갑다. 그래서 나는 항상 신화에 탐닉했다. 인도, 이집트, 수메르, 동이, 그리스, 북유럽 기타 등등. 만물에 깃든 신들의 세계. 모두가 각자의 신을 섬겨도 벌받거나 생존을 위협당하지 않던 세상.


그 중에서 최고는 역시 북유럽 신화였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역시 현대 판타지물의 배경과 가장 흡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북유럽 신화에는 고블린과 드워프를 연상케하는 난쟁이와 다크엘프, 트롤이 등장한다. 스케일 면에선 어떤가? 미드가르드 뱀에 비하면 메두사는 어린 애 장난 같고 미노타우루스는 펜리스의 에피타이저 수준이다. 생활도 훨씬 구체적이다. 토르는 오딘, 로키와 함께 연회장에 모여 매일 맥주를 마신다. 즐기는 고기는 돼지와 염소인데 황당하게도 그 염소가 이끄는 마차를 탄다. RPG 게임의 전설템 같은 도구들도 수두룩하게 나온다. 태양신 프레이에게는 저절로 싸우는 검과 황금갈퀴를 날리는 돼지가 있고 그의 주머니에는 차곡차곡 접어 넣을 수 있는 배 한 척이 들어 있다. 오딘은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 창 궁니르를, 토르는 그 유명한 망치 묠니르를 휘두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나의 마음을 끈 건, 그들에게 라그나로크가 있었다는 것이다.


라그나로크. 신들의 황혼. 인간만큼 어리석고 타락한 신들은 약속의 때에 이르러 서로를 죽이는 대전쟁을 벌인다. 이 날 오딘은 드디어 펜리스에게 먹혀 음흉과 비밀로 가득했던 삶을 마감한다. 항상 말보다 주먹이 빨랐던 폭력범 토르도 미드가르드 뱀이 뿜은 독에 맞아 죽는다. 나는 그 어떤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핏빛 대멸망이 마음에 든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위대한 존재도 결코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하물며 인간은 어떻겠는가? 라그나로크가 벌어진 뒤 펼쳐지는 무의 잿더미는 삶의 끝이지만 동시에 싸움과 증오, 슬픔과 고통의 끝이기도 하다. 피로한 신들은 하늘에 올라 지긋지긋한 영생을 사는 게 아니라 마침내 완전한 무로 돌아간다. 나는 여기서 지극한 안도를 느낀다.


<북유럽 신화>는 어린애들도 넘어가지 않을 조악한 이야기와 대화로 가득하고 아주 조금 남은 재미마저 번역이 먹어치우지만, 나는 이 책을 두 번이나 읽었다. 이야기는 그런 것이다. 머리를 통째로 꺼내 박박 문질러 닦아도 지워지기는 커녕 점점 넓게 번져나간다. 이것은 평생 조금씩 변하며 머리 속에 고유한 흔적을 남긴다. 이야기가 우리와 평생을 함께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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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투 원 - 스탠퍼드 대학교 스타트업 최고 명강의
피터 틸 & 블레이크 매스터스 지음, 이지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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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팔의 공동 창업자이자 실리콘밸리 최고의 벤처투자가 피터 틸이 이 세상의 기업인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제로에서 하나를 만들라는 것(Zero to One).


지구상의 모든 위대한 기업은 영에서 하나를 만들며 탄생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세상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과 기존의 것을 10배에서 100배 정도 개선하는 것이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를 만들어 말을 밀어냈고 라이트 형제는 하늘을 나는 최초의 인간이 됐다. 에디슨은 캄캄한 밤을 빛으로 바꿨고 벨은 우편보다 수십만배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다.


위대한 기업은 기본적으로 독점 기업일 수 밖에 없다. 다른 기업은 0인데 본인만 1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기업은 자신이 최초로 만들었던 시장에 경쟁자들이 난립하면서 기존의 1을 1.1이나 1.2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순간 평범한 기업으로 전락한다. 이 징후를 확인하는 법은 쉽다. 실리콘밸리의 괴짜 CEO들이 재무에 밝은 관리형 CEO로 바뀌고 청바지에 티셔츠, 슬리퍼를 끌던 엔지니어들이 넥타이를 멘 양복쟁이들로 교체될 때를 보면 된다. 스타트업에 직접 투자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징후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실제 피터 틸은 양복을 입는 스타트업 CEO에게는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에서 하나를 만들어내는 기업의 두번째 공통점은 대부분 카리스마 넘치는 CEO가 회사의 전반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의견을 수렴하고, 조화를 이루고, 이사회와 주주들의 말을 듣고, 온건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 중에 창조와 관련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티브 잡스, 제프 베조스, 엘론 머스크 모두 자타가 공인하는 폭군이며 자신의 엔지니어들을 주 80시간 근무의 지옥 속으로 갈아넣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사람들이다. 위대한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보다 일을 중시하며 자신의 직원들 또한 자신의 삶보다 일을 중요하게 만드는 마력을 발휘한다. 폭군의 군사들은 술탄의 예니체리처럼(직속 경호부대) 집단 최면에 걸린 최정예 수호병들이다.


이 책은 귀담아 들어야 할 경영의 잠언을 수없이 담고 있지만 상당히 편향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독점의 중요성을 강조하느라 다른 사례에 대해선 아예 귀를 닫아 버린다. 예컨대 우버는 왜 리프트가 선점한 시장에 달려들어 세계 1위의 승차공유서비스가 됐을까? 우버는 정말로 리프트보다 10배 혹은 100배 훌륭한 서비스일까? 피터 틸은 또한 MS가 모바일에서의 출혈적 경쟁을 포기하고 클라우드 사업으로 돌아섬으로써 다시 한번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됐다고 주장하는데(얼마전 애플을 밀어내고 시총 1위가 됐지만 다시 아마존에게 뺏겼다) 사실 그들은 경쟁 상대를 애플, 삼성, 구글에서 아마존으로(AWS) 바꾼 것 뿐이다. 사실 독점과 경쟁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 도저히 뗄레야 뗄 수가 없다. 독점은 경쟁이 낳은 결과이지 결코 그 자체가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예전엔 기업이 정부와 유착 관계를 형성해 독점권을 얻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도 다른 기업과의 부패 경쟁을 벌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위대한 기업들 모두 물밑에선 수많은 경쟁자와 싸워왔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경쟁자를 모두 침몰시키고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 단 한척의 배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에서 탄생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경제학자들은 완전경쟁을 가장 이상적인 시장의 상태로 생각하며 21세기의 대다수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독재보다 좋고, 옳은 것이라 믿는다. <Zero to One>은 정치와 경제 두 관점에서 우리가 가진 통념을 배반한다. 사실 이런 생각은 10년도 더 된 '블루오션 전략'이나 지금도 수없이 쏟아지는 실리콘밸리의 전설적 혁신가들 이야기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지만, 피터 틸의 자신감 넘치는 문체와 실제 그가 이룬 수많은 업적들이 오버랩되며 상당히 흥미진진한 전개가 펼쳐진다. 쉽게 말해, 재미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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