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19
박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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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은 시간으로 시를 쓰고 살핌으로 사랑을 하는 시인이다. 책날개에 쓰인 말, "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라는 말은 그의 사랑과 시에 섞일 정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박준은 늘 한발짝 뒤에 떨어져 걷거나 미리 나와 기다리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이가 행여나 잠에서 깰까 조용 조용 책장을 넘기다 깼다는 기침을 느끼는 순간 조용히 책장을 덮고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나는 박준의 시에서 항상 아련하고 왠지 뜻 모를 아픔을 느끼는데 아마도 그것은 그의 시가 늘 과거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더 이상 그 사랑을 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면서도 박준은 펑펑 울거나 주고 받은 크기의 부당함에 억울해하거나 가버린 것에 집착하는 법이 없다. 그는 사라진 것을 조용히 놔둔 채 묵묵히 바라보는 시를 쓴다. 연필이 원고지 위를 구르는 소리라도 들렸다간 기억이 산산히 부서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박준은 한번 뱉은 말은 결코 죽지 않고 어딘가에 모여 쌓인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대상을 직접 찾아가 묻는 대신 말이 쌓인 숲을 찾아간다. 거기서 그는 꽃을 찾듯 흘러간 말들을 기어 올린다. 그렇게 구성된 시간을 박준은 시로 옮겨 쓴다. 그의 말들이 뚜렷한 형체나 색을 보여준다기 보다는 전체가 흐릿하게 채색된 인상으로 남는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는 쓰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읽지 않는 시대에 살아야 하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쓰러진 담장을 매일 아침 다시 쌓아올리는 답답한 사람들이고 파도에 쓸려 바다 밑으로 끊임없이 가라앉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시를 쓰는 사람은, 그 중에서도 서정을 노래하는 사람은 발목에 가장 큰 족쇄를 차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박준의 성공이 놀랍고 또 반갑다. 그의 서정시가 읽지 않는 시대에 새기는 울림은 우리의 쓰기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그동안 우리는 시대의 벽을 뚫을만큼 단단하지 못한 우리의 글에 끊임없이 담금질을 계속해왔던 건 아닐까? 젊은이의 외투를 벗게 한 건 강한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었다는 옛 이야기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고통이 클수록 사람들은 과거에 광택을 더하곤 한다.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더한 밝기에 취해 오늘의 고통을 마취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박준의 시가 성공을 거두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의 과거는 항상 아름다운 배려로 가득하니까. 만화경에 홀린 아이처럼, 우리는 그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 현실에 지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과거의 환상에 주저앉는 것이다.


이 시의 성공이 차갑게 식은 우리의 심장에 다시 불을 붙였기 때문인지, 우리를 돌려세워 오늘의 고통에서 눈을 떼도록 마취시켰기 때문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생각하기에 앞서 나는 그냥 박준의 시가 좋다. 이 시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든, 그것이 작가 스스로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옅은 향만으로도 취해 설레이는 사람처럼, 그의 시를 읽고, 또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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