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대량살상수학무기 - 어떻게 빅데이터는 불평등을 확산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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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미래를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래는 데이터다.


최근 수년 사이에 벌어진 급격한 기술 발전은 대부분 데이터를 처리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딥러닝을 이용한 기계학습은 이제 산업 전체로 확산됐다. 예전엔 슈퍼컴퓨터로도 분석이 어려웠던 대규모 데이터들이 PC와 연결된 클라우딩 컴퓨팅으로도 가능한 시대가 됐다. 그동안 발만 동동구르며 데이터를 쌓기만 했던 기업들이 앞다투어 데이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토록 데이터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 증거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는 갈등의 대부분은 사실 한쪽이 틀린 주장을, 다른 쪽이 옳은 주장을 펼치기 때문에 벌어지지 않는다. 첨예한 갈등은 대개 양쪽이 모두 옳은 주장을 펼칠때 폭발한다. 양쪽은 모두 논리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내세우며 자신의 주장을 강화한다. 하지만 논리적인 것이 정말 옳은 것일까? 대한민국의 집값이 오르는 이유는 공급이 부족해서일까 투기를 하기 때문일까? 양쪽 모두 데이터를 근거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할 수 있지만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선 맞는 말이 다른 시기, 다른 지역에선 완전히 틀린 말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이유는 특정 현상이 발생하는데 관여한 변수들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모든 변수들을 수집할 방법도, 분석할 능력도 없다. 바로 여기가, 빅데이터 분석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는 지점이다.


데이터가 사람보다 공정하다는 믿음은 우리 사회에 널린 통용되는 미신이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프로그램은 태어난 곳도, 졸업한 학교도 지인도 없으며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이해관계가 전무하기 때문에 프로그램은 누구보다 공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념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는 프로그램이 인간에 의해 운영된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한다. 여기 10년 동안 한 번도 연체를 해본 적이 없는 직장인이 있다고 해보자. 그러나 이 사람은 그동안 신용카드도, 대출도 써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신용평가 회사에서 평가하는 신용 수준은 5등급으로 다소 낮은 편이다. 프로그램은 신용등급이 낮지만 이 사람의 과거 행적을 볼 때 성실한 채무 변제가 예상되므로 최저 이율을 적용하겠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판단을 그대로 적용할 은행은 장담컨대 단 한군데도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프로그램의 설계자들은 모든 변수에 동일한 중요도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변수의 중요성을 재배열 할 것이며 계속해서 수집되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조정해 나갈 것이다.


프로그램이 설계자들의 개입을 막기 위해 실제 현장에서 최고의 업무 성과를 보여주는 사람들의 업무 방식을 학습하는 경우에도 상황은 동일하다. 업계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편향된 사고를 갖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니 사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설계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실적이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편향된 생각을 학습한 알고리즘이 피드백을 통해 강화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앞서 언급한 직장인에게 은행이 높은 이율로 대출을 해줬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은 그 돈으로 결혼 후 살집을 구매했다. 그런데 잠깐. 은행이 요구한 변동 금리는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하는데 집 값은 제자리라 매달 내야하는 원리금은 조여드는 가시처럼 압박해 온다. 결국 이 사람은 채무를 연체하기 시작한다. 시스템은 이 데이터를 근거로 최초에 높은 이율을 부과한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한다. 애초에 낮은 이율을 부과했다면 이 직장인이 연체할 일은 없었을텐데도 말이다.


이와 비슷한 판단은 금융계를 비롯하여 대학 입학, 회사 취업, 의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크게 세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다. 둘째, 그 피해가 막심하다. 셋째, 사람들이 자신이 왜 그런 평가를 받아야하는지 해답을 요청할 때 철저히 침묵한다(기계학습 특성상 판단의 과정은 블랙박스로 처리된다. 기계는 결론을 내놓을 수는 있지만 그 판단의 근거를 정확하게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 누구도 내부 구조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프로그램들을 일컬어 '대량살상수학무기'라고 부른다.


데이터에 관한한 대한민국은 아직 문턱에 서 있는 수준이다.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자는 알고리즘에 대한 감사를 강화하는 것으로 데이터 사용자들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할까? 데이터는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현재의 기득권자들에게 유리한 해석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사태를 감시해야 하는 사람과 그런 사태를 만들어낸 사람이 동류라는 말이다.


하지만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복잡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이다. 그 첫걸음은 우리가 앞으로 어떠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이며 그 미래를 만들어낸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관심갖고, 읽고, 보고, 알아가는 것. 이것만 잘해도 미래는 그렇게 실망스럽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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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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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00세가 된 노인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시끌벅적한 모험에 다수 빠져들었고, 그야말로 역사의 주먹질을 온 몸에 두드려 맞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건들은 그 엄청난 위력에도 불구하고 이 노인을 치명적인 상태로까지 빠뜨리진 않았습니다. 대단히 운이 좋았던 걸까요? 위기의 순간마다 노인은 재치와 위트, 삶에 대한 끝없는 낙관으로 고난을 돌파해갔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고보니 노인은 이제 시간조차 파괴할 수 없는 단단한 다이아몬드가 되어 세상에 뿌리를 내리게 됐습니다.


그렇게 100세가 되던 해, 노인은 다시 한번 모험의 문턱에 섰습니다. 바로 등 뒤에선 지역신문까지 대동한 양로원 식구들이 그의 100세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죠.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자신을 보러온 모두를 깜짝 놀래켜주리라 마음먹었고 그 순간 양로원의 창문을 넘어 다시 모험의 땅 위에 두 발을 내려놓습니다. 이렇게 100세 노인 알란 칼손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작가 요나스 요나손은 알란 칼손을 대단히 멍청하지만 동시에 대단히 현명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노인의 바보같은 행동 속에 숨은 삶의 해답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됩니다. 잘 움직이지도 않는 무릎을 달고도 그 대단한 모험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는 노인의 모습에서 독자는 삶의 해답이 고민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노인은 자기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래서 내가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고민하는 대신 그냥 두 다리를 한발씩 삶 속으로 전진 시킵니다. 오직 전진과 전진. 그는 인생과 끝없는 핑퐁을 벌일 뿐입니다. 물론 강력한 드라이브를 맞아 공을 놓칠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우리와 알란 칼손의 인생을 가르는 중요한 지점이 됩니다. 우리가 놓친 공을 생각하며 빼앗긴 1점에 괴로워하는 동안 알란 칼손은 떨어진 공을 주워 들고 자신의 서브를 날립니다. 이 게임은 누가 먼저 100점을 내느냐 하는 게 아닙니다. 삶은 단 한번도 그런식으로 게임을 만든적이 없지만 날아오는 공을 바라본 순간 우리는 그걸 반드시 이겨야 할 대결로 여기고 그 공을 놓쳤을 때, 혹은 그 공에 맞아 시퍼런 멍이 들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한층 더 패배에 가까워졌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이것은 끊임없이 공을 물어오는 개의 놀이와 비슷합니다. 그 게임을 하는 동안 공도, 개도 서로를 이기려 들지 않습니다. 공을 놓친 개는 바닥에 떨어진 공을 찾아 온 공원을 달립니다. 때로는 공이 하수구에 빠지거나 터져버리기도 하죠. 그럴때 개는 시무룩해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시 달려와 새로운 공을 던져달라고 짖습니다. 멍멍!


사람들 눈에는 그게 정말 바보같아 보이지만 뭐 어쩌란 말입니까? 나는 즐거워 죽겠어.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지 못하는 당신들이야 말로 진짜 바보지. 아마도 우리의 댕댕이는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지금 당장 창문을 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듭시다. 미래를 얻기 위해선 시간의 톱니바퀴를 돌려야 하고, 그걸 할 수 있는 건 오직 행동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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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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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소설집 <단 하나의 문장>에는 다양한 소설이 실려있다. '글을 짓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물씬 풍기는 작품들, 그러니까 글쓰기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갖는지, 글쓰기 그 자체란 도대체 무엇인지 밝히려드는 작품이 있는가하면 21세기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여자이자 작가, 그리고 엄마인 '인간 구병모'의 고충과 고민이 담긴 작품도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대개 SF 또는 판타지의 문법으로 진행되며 그 생경함이 이야기에 독특한 결을 만들어낸다. 


구병모의 소설에서 가장 공감이 갔던 건 그녀의 주인공들이 철저히 지키려 한 개인의 공간,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두기였다. 진정성이 난무하는 시대. 뜨겁고 강렬하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 몸을 드러내야만 참된 것이라 인정받는 투명사회에서 적절히 숨기고, 가리고, 거리를 두는 태도는 상당한 오해에 직면할 우려가 있다. 이기주의자. 에고이스트. 혹은 젠체하는 얌생이. 유난떠는 똥재수.


너무 가까운 거리는 항상 나를 질식하게 했다. 나는 '함께'라는 말 속에 내포된 '감내하기'가 싫다. 같이 사는 세상이므로 때때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언젠가는 나도 그와 동일한 일을 저지를 수 있으므로 적당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함께' 안에는 반드시 개인이 또렷이 살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개인에게 서로 겹치지 않는 충분한 공간을 배당해야만 그것이 건강히 유지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현대 도시인의 삶을 비인간적으로 규정하며 자꾸만 그 거리를 없애려드는 일단의 행동들이 당혹스럽다. 우리는 섞이지 않고도 서로를 진정으로 보살필 수 있다. 거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공감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닐까싶다. 가까이 다가가 상처를 까보이고 그걸 만져보지 않으면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관점이 구병모의 세상 살기와 일치하는 거라면, 나는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에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 나는 그녀의 열렬한 팬임을 자청하지 않고도 그 삶에 동의를 보낼 수 있다. 나는 그녀의 소설에 대단한 찬사를 보내지 않고도 그 소설에 지지를 안길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무미건조하게 보일 삶이 나에게는 너무나 평화롭다. 그녀의 소설 속에는 이 평화를 깨려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 그것은 무책임으로, 때로는 배려를 가장한채 등장한다. 함께 살기란 다른 사람의 삶을 기웃대는 걸로 이룰 수 있는게 아니다. 진탕 술을 퍼마신 뒤 속마음을 꺼내보여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내 삶을 단단히 부여잡아 그것이 다른 삶에 스며들지 않도록 할 때, 오직 그럴 때만이 함께 살기는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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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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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를 지구상에서 유일한 생물종으로 정의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실로 눈물이 겨울 정도였다. 그들은 행여나 빼앗길 키워드를 선점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생각하는 사람, 놀이하는 사람, 웃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 호모 어쩌구 저쩌구 기타 등등. 하지만 유발 하라리만큼 충격적인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하라리는,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문명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다른 무엇도 아닌 이야기를 창조하고 믿는 능력이었다고 말한다. 국가, 민족, 화폐, 법인. 이는 모두 허구의 이야기에 불과하며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반만년간 역사를 이어온 단군의 후예라는 사실을 믿으며 태극기 앞에 자긍심을 느끼고,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돈으로(혹은 계좌에 새겨진 몇 자리 숫자로) 실물을 사고 팔고, 세계 곳곳에 자리잡은 우리 기업의 활약상에 자부심을 느낀다.


하라리는 같은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대규모 협력이 가능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문명을 이룩한 원동력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 민족의 이야기가 다른 민족의 이야기보다 중요하다는 편향이 일어났을 때, 그것은 늘 재앙으로 번지곤 했다이와같은 이유로 하라리는, 이야기가 결코 21세기의 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 또한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완전히 규모가 다른 새로운 이야기의 등장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한두개의 국가, 한두개의 민족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바야흐로 전인류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대응이 필요하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인류는 모두 하나'라는 전지구적 이야기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동안 고수해왔던 편협한 민족, 국가 중심의 이야기에서 인류의 이야기로 진화해야 한다. 국가와 민족 이야기는 그 특성상 결국 분열할 수 밖에 없지만 다행히 인류는 단일한 종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과거 호모 사피엔스가 같은 종의 유인원들을 잔인하게 멸종시킨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엔 아직 이르다. 새로운 이야기의 창조자들이 우리 모두를 같은 인류로 인정해줄지는 여전히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자유의 범람이 인류에게 문명 발달의 혜택을 골고루 나눠준 시기는 아주 짧았다. 그것은 치열한 체제 경쟁의 시기에(냉전) 나타난 아주 이례적인 혜택에 불과했다. 하라리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독재의 갈등을 두 가지 윤리 체계의 갈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며 아래와 같이 지적한다.


"이는 사실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두 가지 상이한 시스템 간의 갈등입니다. 민주주의는 정보를 처리하는 힘을 분산시키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반면, 독재는 정보와 권력을 한곳에 집중합니다. 20세기의 기술을 감안할 때 너무 많은 정보와 힘을 한곳에 집중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아무도 모든 정보를 충분히 빨리 처리하고 옳은 결정을 내릴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마지막 문장이다. 20세기에는 범람하는 데이터를 혼자서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기계 학습과 인공지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21세기에는 완전히 다른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독재는 오히려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데이터는 한곳에 모일수록 더 효율적이며 그걸 혼자서 처리할 능력을 갖추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서'라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구글과 아마존, 애플, 바이두, 알리바바의 연합 법인 혹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의 연합국이 정보를 독점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회사나 국가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는 정보를 독점하여 인간을 억압하지만 21세기의 빅브라더는 우리를 억압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 이 사회에서 무관한 존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우리로부터 소비자의 지위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소비가 없는 자본이 가능한가? 섬길 자가 없는 권력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세상은 어떤가? 로봇이 다른 로봇과 주식을 사고 팔고, 채굴 로봇이 전기 회사에 충전료를 지급하고, 전기 회사가 로봇 제조사로부터 시스템을 운영할 기계를 구입하는 세상 말이다. 미래에는 모든 생산활동은 당연하고 심지어 소비활동에서 조차 로봇에게 의존할 수 있다. 여기에 과연 인류의 자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


기술이 지배하는 극도로 효율화된 사회에서는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깝게 떨어질 수 있고 여기서 얻은 막대한 이득을 정부가 세금으로 거둬들임으로써 인간은 공짜 복지를 누리는 파라다이스를 꿈꿀 수도 있다. 하지만 지구의 자원이 모두 고갈되거나 혹은 태양이 곧 소멸할 시기에 정부와 기업이 자신의 모든 자원을 안드로메다로 옮길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자원에 '인간'은 포함되지 않는다고 발표하면 어떨까?(시스템의 운영 방식을 결정할 소수의 의사결정권자들은 당연히 예외다)


거대 권력에 착취당하는 사회는 오히려 인간에게 희망적이다. 싸워야 할 명분과 대상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억압을 이겨내고 자유를 쟁취한다는 '꿈'을 꿀 수 있다. 하지만 이 사회와 완전히 무관한 존재로 전락한 인류에게 허락된 꿈은 무엇일까? 정부가 안드로메다로 이주하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 우리는 어떤 명분을 갖고 그 결정에 반대할 수 있을까?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미 로봇과 인공지능이 대체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정부에 세금을 내지도, 외계인의 침략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지도 않는다. 억압보다 무서운건 무용함이다. 미래의 기술은 인간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착취하지 않을 것이다.


결정의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으며 시계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인간에게 아직 미래를 창조할 능력과 감수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면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정신은, 곧 소멸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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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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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문화비평가이자 역사가이며 환경, 반핵, 인권 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의 에세이다. 그녀로 하여금 이 에세이를 쓰게 만든 계기는 아마도 책머리에 등장하는 그녀의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어느날 한 파티에 초대됐다. 장소는 해발 2,743미터에 지어진 튼튼하고 호화로운 별장. 사슴뿔 장식과 수 많은 킬림, 장작 때는 난로까지 갖춰진 우아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파티를 마치고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파티의 주최자가 저자의 일행을 붙잡고 말을 걸기 시작한다. 주최자는 남자였고 그는 솔닛이 두어권의 책을 쓴 작가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솔닛의 일행과 남자는 책에 대해 얘기했다. 솔닛은 자신이 최근에 출간한 <그림자의 강: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기술의 서부시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자 남자가 갑자기 솔닛의 말을 끊더니 그 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나온 아주 중요한 책에 대해 아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솔닛은 남자의 가르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무지한 여성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고, 남자는 거만함과 우쭐함을 곁들인 지루한 장광설을 끝도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솔닛의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입니다."


그는 세네번 이 말을 반복할때까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내 진실을 깨달은 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거기서 얘기를 끝냈냐고? 천만에. 아주 잠깐 할 말을 잃고 멈췄던 그가 다시 그 지루한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마이브리지'에 대한 솔닛의 책을 읽은 적도없으며 그저 뉴욕타임즈에 실린 북리뷰를 읽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레베카 솔닛은 이 경험을 포함한 한편의 에세이를 '톰디스패치(www.tomdispatch.com)'에 게재하고 그 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녀의 글 덕분에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웹사이트가 생겼고 그 유명한 '맨스플레인'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솔닛이 살아온 세계에서 여자라는 사실은 공신력 있는, 믿을만한, 과학적인 의견을 내놓지 못하는 부류로 판단하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여자의 말은 비논리적이고, 감성적이며, 타당하지 못하다. 때로는 은연 중에, 대부분은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이러한 편견은 여자라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전염병처럼 퍼져있다.


솔닛은 결코 상황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담담히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서술해 나간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겐 절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차가운 이성의 냉철함을 가지고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과연 내가 성차별로부터 자유롭다고 확신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성차별은 어제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수천년간 이어져온 문화적 산물이며 그로인해 우리의 행동과 말 한마디 한마디엔 우리도 눈치채지 못하는 편견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차별을 부수려는 싸움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아주 짧은 평화의 시간, 극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남성들이 최근의 현상을 급진적이라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여자들의 목소리를 내는 채널이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20년전만 해도 방송국 한두개만 꽉 잡아두면 그녀들의 목소리를 지울 수 있었다. 남자들은 그 짓을 엄청나게 성공적으로 수행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지금 댐이 터지기 직전의 강밑에 서 있다. 바보짓을 하는 게 소원이라면 그 댐을 당신의 '떡 벌어진 두 어깨'로 막아서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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