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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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로 한국 문학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김언수의 단편집 <잽>이다. 김언수의 소설로는 <설계자들>이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사실 <뜨거운 피>를 이 작가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설계자들>은 좋게 말하면 탈한국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작위적이다. 소지섭 주연의 영화 <회사원>을 봤다면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반면 <뜨거운 피>는 그야말로 뜨거운 리얼리즘이 감정 밑바닥에 착 가라앉아 부글부글 끓는 소설이다. 끝이 가까워질 수록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잽>은 이 두 개의 소설들을 다양하게 나눠 담는다. <뜨거운 피>같은 소설이 있는가 하면 <설계자들>같은 것도 있다. 단편이라 스케일을 기대할 순 없지만 분위기는 충분히 전달된다. 책장을 건너뛰며 원하는 대로 골라 읽어도 된다. 편식은 나쁜거지만.


<잽> 중에 최고의 소설은 <잽>이었고 거리는 역시 <뜨거운 피>와 가깝다. 이 소설은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로 꿈을 강요하던 시절의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 그는 어느날 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탄성을 지르고 만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불려나와 부당한 처벌을 받는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한 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 주인공은 처벌을 납득할 수 없었고 반성문 쓰기를 거부한다. 대신 졸업할 때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테니스장과 그 옆 화장실을 청소하라는 노역을 받는다. 이에 분노하던 주인공은 우연히 광고 포스터를 보고 '권투'를 시작한다. 잽!


김언수 소설에는 성공한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고 희망은 커녕 전구 불빛 만큼의 밝음도 없다. 완전히 깜깜한 지옥도라기보다는 칙칙한 회색 빛에 짓눌린 느낌이다. 차라리 세상이 끝나면 좋으련만 지긋지긋한 일상이 이유도없이 반복되는 갑갑한 기분. 아무도 출구를 찾지 못하고, 아무도 반복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눅눅한 공기를 가르며 잽 한 방이 날아온다. 이건 극복에 대한 희망도, 의지도 아니다. 오히려 뭐랄까, 일종의 수긍 같은 게 아닌가 싶다.


패배가 인생의 본질이라면, 우리의 구질구질한 인생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게 된다. 질줄 알면서도 링에 오르는 이유? 중요한 건 이기고 지는 게 아니다. 지는 건 정해져있으니까. 중요한 건 눈 앞에 놓인 목표를 하나씩 달성해 가는 것이다. 결국 질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풋워크가 가벼워졌다. 통통, 발 끝이 링 위에 닿는 소리가 상쾌하게 들린다. '어깨에 힘을 빼고,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훔쳐오듯', 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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