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구미베어 살인사건 - dcdc 소설집 한국SF작가선 6
dcdc 지음 / 아작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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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베어 살인사건>은 읽는 사람보다는 쓰는 사람이 즐거웠을 책이다. 참신한 소재가 많이 등장하는 소설인데 대부분 작가의 개인 취향에서 비롯된다. 한 마디로 오덕스럽다. 나도 어디가서 오덕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곤하는데 이 오덕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사람들에게 시시콜콜 설명해 주는 걸 광적으로 즐긴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오덕 러시는 상당한 고역이다. 정중하게 대꾸는 해 주지만 어서 빨리 대화가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다. 나 참 그런 것도 모르고 오덕들이란...


나도 어디가서 이런 얘기를 할 때 사람들이 엄청 지루해 하겠구나, 하고 반성을 참 많이 했다. 그동안 써놨던 소설들을 쭉 훑어보며 이 놈은 안 되겠군, 저 놈은 틀렸어 하며 가슴 아픈 정리를 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아니 남들이 뭔 상관이야 나도 그냥 내가 즐거운 소설을 쓸 거야 하는 생각이 들자 다시금 호기가 끓어올랐다. dcdc처럼 장르의 문법을 무차별로 파괴하면서 나만의 왕국을 만들어 가는 거지 뭐. 메이저가 되기엔 애저녁에 글러먹었으니까.


솔직히 소설들은 전부 지루했다. 속된 말로 '신빡'하다고 느껴질 만한 소재도 없었다. 참신하긴 했는데 그냥 특이한 느낌이랄까? 문어 다리를 단 탱크가 딸기 대포를 쏘며 시내를 걸어다닌다면 음, 되게 컬트하네 라고 생각을 할 순 있어도 인식의 전환을 경험할 만큼 충격적이진 않을 것이다. 소설들이 전부 그런 느낌이다. 오타쿠가 평생동안 모아 놓은 컬렉션 서랍. 온갖 잡동사니가 나뒹구는 혼돈의 카오스!


정말 신기하게도 dcdc는 모든 소설의 뒤에 자신의 후기를 남겨놓았다. 이 소설을 왜, 어떻게, 어떤 의도로 쓰게 됐는지를 밝힌다. 나는 이 쪽이 훨씬 재미있었다. 지루한 소설을 꾸역 꾸역 끝내고 나면 차분한 dcdc가 나타나 창작 과정의 소회를 풀어놓는다. 정감이 갔고, 신뢰가 생겼고, 무엇보다 이 사람의 소설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신기하게도 말이지.


dcdc가 향수를 느끼는 거의 모든 것에 나 또한 빚을 지고 있다. 아다치 미츠루의 <러프>라던지, 구자형(<마법소녀 리나>에서 제로스역을 맡은 성우. 나는 <슬레이어즈>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카우보이 비밥! 개인적으로 만난다면 우린 한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오덕은 진짜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항상 자신의 속 안에서 끓어오르는 뭔가를 쏟아내려하지만 쏟아낼 곳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오덕끼리는 강한 유대를 느낀다. 설령 수억 광년 떨어져 있어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나는 이 골방의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싶다.


Dear my friend,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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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애주가의 대모험 - 1년 52주, 전 세계의 모든 술을 마신 한 남자의 지적이고 유쾌한 음주 인문학
제프 시올레티 지음, 정영은 옮김, 정인성 감수 / 더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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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처음으로 꼬냑을 마시고 난 뒤부터다. 카뮤 X.O.를 마셨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있는 술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몇몇 싱글 몰트 위스키와 고가의 사케를 접하면서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몇년 전만해도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요새는 곧잘 하곤 한다.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우리 나라는 '그 녹색병'이 워낙에 유명한 탓에 술자리에서 꼬냑이니, 싱글 몰트니, 준마이니 하는 얘기를 늘어 놓으면 불청객이 되기 십상이다. 유난을 떤다거나 잘난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술은 다 똑같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참이슬 프레시'인지 '처음처럼'인지 묻지도 않고 시키면 화를 낸다. 주정으로 만든 공산품에도 어떤 감미료를 어떻게 배합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데, 자연에서, 매번 다른 재료로, 다양한 방법으로 만들어 내는 술들의 맛이 어디 같을 수 있겠는가?


미술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알테지만 알고 보는 게 모르고 보는 것 보다 훨씬 재밌다. 그림은 그냥 보는대로 느끼는거지 하다가도 도슨트의 흥미로운 이야기에는 절로 귀가 쫑긋해진다. 술도 마찬가지다. 이 술이 어떤 재료를 어떻게 가공해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는지를 알게되면 씁쓸한 알콜이 목구멍을 타고 흐를 때마다 그 과정이 낱낱이 새겨지는 기분이 든다. 맛은 깊어지고, 경험은 풍부해진다.


<애주가의 대모험>은 1년 52주를 한 주씩 나눠 전 세계의 술들을 소개한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술들이 별처럼 쏟아진다. 읽고 있으면 술이라는 건 참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신기하게도 술은 모든 문화 모든 시대에 존재해왔다. 한 마디로 사람이 존재하면 술도 존재했던 것이다. 어쨌든 합법적으로 정신착란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러면 굳이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만들어 마실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역시 술은 음식의 일종이고,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입맛에 맞춰 만들 필요가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술은 취하기 위해서만 마시는 게 아니다. 맛있게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음주의 목적이다.


술도 잘 못 마시는 놈이 무슨 술맛을 논하냐고 하는 사람들에겐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술을 못 마시기 때문에 좋은 술을 알아보는 것이다. 돼지고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무 돼지고기나 먹을 수 있겠는가? 진짜 맛있고 좋은 고기가 아니라면 입도 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이 말해주는 술 이야기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세계의 술에 관심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위스키, 사케, 꼬냑, 와인 등 만드는 방법에서부터 재료, 브랜드, 맛까지 다양한 술들을 깊이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애주가의 대모험>은 세계 투어를 간략하게 정리한 팜플렛 같은 책이다. 깊이보다는 넓게. 전 세계의 술들을 한 눈에 훑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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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 공부 5분만 - 서울대학교 습관 디자인 프로젝트
고대원.성은모 지음 / 빈티지하우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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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이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딱 하나라고 생각한다. 습관을 가졌느냐, 가지지 못했느냐. 나는 근 20년 동안 여러가지 독특한 습관들을 꾸준히 유지해왔는데 그럴때마다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질리지도 않아요? 사람들은 습관을 유지하는 일이 대단히 많은 에너지와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습관은 무의식 중에 발현되는 행위라 그걸 행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리모콘을 누르면 TV가 켜지듯이, 몸 어딘가에서 탁, 하고 불이 들어오는 것이다. 따라서 뭔가를 습관으로 만들면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도 그 일을 수십년 씩 해나갈 수 있다. 글을 쓰고 싶으면 글쓰기 습관을 들이고 살을 빼고 싶으면 운동하는 습관을 들이면 된다.


참 쉽죠?


하지만 해본 사람은 습관을 들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이다. 습관은 비탈 끝에 걸쳐진 바위와 같다. 딱 한번만 굴리면 되는데, 그 한번이 참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을 굴리는 방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를 수년 동안이나 밀어보고는 지쳐 쓰러져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안돼. 포기야. 그 순간 본인의 빈약한 의지에 자책감까지 밀려든다. 하지만 당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위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가? 우리는 왜 항상 실패의 이유를 우리의 내부에서 찾으려 할까? 핵심은 '노오력'이 아닐 수도 있다. <습관 공부 5분만>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


저자는 우리가 습관 형성에 실패하는 이유가 우리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굴리려는 습관이 애초에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만들고 싶은 습관을 정하고, 굴리고, 관리하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안내하지만 핵심은 결국 '최대한 작게 시작' 하라는 것이다. 마치 스노우볼 전략처럼, 비탈 꼭대기에서 주먹만한 눈덩이 하나를 굴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크기가 너무 작아서 과연 이런 게 저 먼 곳의 설산처럼 거대해질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갖는다. 하지만 작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일' 이기에 당신은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 일을 기계적으로 해나갈 수 있다년 뒤 당신은 눈 앞의 설산을 밟고 지나가는 거대한 눈덩이를 목격할 것이다. 와! 저게 뭐지? 카메라를 꺼내 그 장관을 찍으려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뇌가 걸어오는 전화 한 통을 받게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습관 관리 위원회입니다. 몇년 전 당신이 굴린 눈덩이 하나가 위원회의 정식 습관으로 등록되었습니다. 방금 산 하나를 뭉개고 지나갔네요. 보이시죠?"


이 책은 결코 화려한 성공담을 늘어놓지 않는다. 당신은 '하루에 책 1쪽 읽기', '영어 단어 2개 외우기', '간식 20분 늦게 먹기', 같은 목표를 세우고 그걸 해냈다고 서로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한때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인내와 끈기를 증명해낸 서울대생들이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모든 것을 잘할 것 같은 사람도 실제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고통과 어려움을 느낀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p.25)


저자는 서울대생 1,225명, 1만 시간의 기록을 화려한 언변도, 뜨거운 열변도 없이 한 자, 한 자 써내려 나간다. 그저 몸에 새겨진 시간의 기록들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태도가, 내게는 한복판에 날리는 묵직한 직구처럼 진정성이 느껴졌다.


이 습관 모임은 원래 서울대생만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나 책이 나온 이후로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아 확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모임에 참가하고 싶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래 주소로 연락해 보기 바란다.


홈페이지: 5ivemin.com

인스타그램: 5bunman_go

페이스북: daewon.go.54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sv6LX0EAu6BanTSj0aroqg/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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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의 세계
듀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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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정체불명의 배터리가 등장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배터리. 보통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가진 초능력을 끌어내는 촉매인간. 배터리의 등장과 함께 인류는 모두 초능력자가 됐다. 독심술, 마인드 콘트롤, 염동력 등등 발현되는 능력에 맞춰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간다.


영화 평론가이기도한 듀나가 SF 소설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류일줄은 몰랐다. 다소 멜랑콜리한, 로우 텐션의 이야기들이 주류일거라 생각했는데, <민트의 세계>는 나의 편견을 우주 밖으로 쏟아올렸다. 우선 이야기 자체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타이트한 구성은 그렇게 길지 않은 장편 소설을 단단하게 응축시킨다. 책장을 덮고나면 대단히 훌륭한 일품 점심 요리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갑자기 등장한 배터리, 그리고 보통 사람에서 개성을 가진 초능력자로 거듭난 사람들. 이 메타포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잠시 생각해 본다. 배터리는 고도로 발달된 현대 기술을, 사람들 모두가 초능력자가 된 현상은 그 기술을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있는 현대 기술 문명 사회를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이런 메타포들을 적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주인공 민트가 청소년이라는 점, 그리고 그녀가 꾸린 집단이 거대 기업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선 익숙한 억압 구조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뭔가 다른 결이 느껴지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 훨씬 가볍고 이야기의 재미에 집중하는 소설이다.


민트는 왜 목숨을 걸고 전쟁을 벌이는 걸까? 표면적으로 그녀는 거대 기업에(LK) 의해 소모성 자원처럼 다뤄지는 초능력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 수 많은 사건들을 기획하고 실행해온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과 추종자를 데리고 우주로 탈출한다. 거기엔 사람뿐만 아니라 초능력을 지닌 다수의 동물들, 그리고 AI로 만든 인공 정신을 이식한 돼지의 뇌까지 포함된다. 이 장면에서 모세의 Exodus와 노아의 방주가 서로 한발짝씩 엇걸은 장면이 연상되긴 하지만 탑승자들의 면면이 딱히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그녀가 태운 탑승자들은 오덕 중에서도 진짜 오덕들만 찾아보는 일본 애니를 연상시킨다.


민트가 LK로 부터 탈취한 우주선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건조한 광속 우주선이었다. 그들은 그 우주선을 타고 우주 곳곳을 탐험하며 만물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 이 모든 계획은 민트에 의해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들은 마지막 순간 이 모든 계획이 사실은 인공 정신을 이식한 돼지의 뇌가 꾸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극도의 혐오감에 몸서리 친다. LK는 민트에게 묻는다. 우주 개척의 선구자가 돼지의 뇌와 기타 어줍잖은 동물들이라는 것, 그들이 인간의 선두에 서는 걸 받아들일 수 있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녀, 민트는 이름처럼 쿨하게 대답한다. Why not?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런 소설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독특한 소재와 낯설음은 저마다의 상상력 속에서 다채로운 색채와 이미지를 만들어 내겠지만, 그것을 화면에 담는 순간 지네 다리를 단 배추흰나비처럼 끔찍해질 게 뻔하다. 이야기를 구현하기에 현대 영상 기술은 한계가 있고, 듀나의 상상력에 준하는 연출자를 찾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초능력자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민트의 세계>는 강추다. 설령 이런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나른한 오후처럼 꿉꿉한 인생에 청량감을 불어넣고 싶은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한다. 그녀의 이름이 괜히 민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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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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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솔닛의 책들은 하나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 설명한다기보다는  그녀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사유를 엿볼 수 있는 에세이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특정 키워드, 예컨대 페미니즘 같은 키워드를 통해 솔닛을 접한 사람들은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그녀가 비록 '맨스플레인(men + explain)'이라는 단어의 탄생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작가이긴 하지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페미니스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독자는 고명하신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로 그녀의 책을 만나는 게 아니라 메가폰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가 열변을 토하는 행동가와 보도에 서서 그녀를 쳐다보는 구경꾼의 관계로 만난다. 그녀의 목적은 물론 당신을 그 보도에서 걸어나와 길 한복판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장담컨대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 주제가 정치에서 여성혐오, 기후문제에서 인권 문제로 여기저기 옮겨다니지만, 하나 하나의 꼭지에 담긴 생각들은 모두 반짝이는 보석같다.


누구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꼬치 꼬치 캐묻기를 싫어한다. 사람들은 설명하기 힘든 문제, 설명하기 난처한 문제들에 대해 '원래 그런 거야' 라고 말하고 덮어두기를 좋아한다. 마치 썩어가는 음식물들을 가려둔 것 처럼, 누군가 조금이라도 들추려 들면 정색을 하고 화를 낸다.


레베카 솔닛에게 '원래 그런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문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예컨대 결혼이라는 제도가 이어져온 수천년 동안 인류 역사에는 부부싸움이 있었을 뿐 '가정 폭력'은 없었다는 사실을 돌아보자. 이게 무슨 말이냐고? 부부싸움은 서로 다른 두 남녀가 같이 살면서 겪는 일상적인 일, 그러니까 개인과 개인, 크게 봐줘야 가정의 문제기 때문에 가정 내에서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가정폭력'은 어떠한가? 그것은 가족 구성원들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며, '사회적 문제'이고, 따라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된다. 이것이 왜 '이름들의 전쟁'인지 이제 알겠는가?


솔닛이 여기저기 분탕질을 벌이고 돌아다니는 이유는 익숙한 현상을 문제로 명명함으로써, 즉 그들을 그들의 진짜 이름으로 불러줌으로써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려는 것이다. 당연한 것들은 차곡차곡 눌러 내부에 쌓아둘 수 있지만 문제들은 그럴 수 없다. 그것은 표면이 거칠고 여기저기 삐죽 삐죽 튀어나와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린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쩌겠는가? 누군가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을 각오를 하며 이런 일을 벌인다. 그래야 세상은 균형을 맞출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라는 한국어판 제목보다는 <Call them by their true names>라는 원제가 훨씬 마음에 든다. 전쟁을 벌이자는 게 아니다. 그들을, 그저 진짜 이름으로 한번 불러보자는 것이다. 다같이 거리로 나와서. 혹은 공원에 비잉 둘러 앉아서 말이다. 나는 이 제안이 주는 평화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이것은 사사건건 성대결로 번지고 있는 최근의 우악스러운 사태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문제는 당신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다.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는 건 당신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다같이 모여 그들을, 그들의 진짜 이름으로 한번 불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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